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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리포트] 병자호란과 최명길 주화론의 재조명 

“명(明)을 위해 조선이 망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한명기 명지대 인문대학 사학과 교수
조선의 생존과 조선 백성의 보전을 우선적으로 고려했던 냉철한 현실인식… 책임감과 희생정신 바탕으로 대안까지 제시했던 보기 드문 외교전략가

▎남한산성 동문과 이어진 성곽. 병자호란 초기 최명길은 청군 진영으로 찾아가 담판을 벌이며 시간을 끌어 조정의 남한산성 피란을 가능하게 했다.
적국을 제어하기 위해 권모(權謀)를 써서 화를 늦춰야 한다는 최명길의 주화론. 그는 ‘천하의 성쇠는 무상하며 오랑캐도 왕업(王業)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호언장담만으로 청의 기세를 꺾고 전쟁과 멸망을 막을 수 있겠는가? 스스로를 ‘가난한 선비의 아내’이자 ‘약소국의 신하’로 비유한 최명길의 놀라운 용기와 책임감의 진면목.

1636년(인조 14) 음력 12월 9일,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넌 청군 기마대는 질풍같이 남하하기 시작했다. 병자호란의 시작이었다. 철기(鐵騎)라 불렸던 청군 기마대의 돌격은 거침이 없었다. 의주를 떠나 서울의 양철평(良鐵坪: 은평구 녹번동 부근)에 도달한 날이 12월 14일. 거의 600㎞에 이르는 의주~서울의 거리를 불과 닷새 만에 주파했다.


▎연대, 작가 미상의 최명길 초상. 후손들은 이 초상의 진위 여부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고 있다. / 사진제공·한명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조선 조정은 대로에서는 청군 기마대에 맞서기가 어렵다고 여겨 병사들과 백성들을 청군 진격로 주변의 산성으로 들여보내 방어하려고 시도했다. 이른바 청야견벽(淸野堅壁) 작전이었다. 또 인조와 조정 신료들은 서울을 떠나 강화도로 들어가 항전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조선의 계획과 구상은 개전 직후부터 수포로 돌아갔다. 청군이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빠른 속도로 남하했던 데다, 도원수(都元帥) 김자점(金自點) 등 조선군 지휘관들의 과오 때문이었다. 당시 황주의 정방산성(正方山城)을 지키던 김자점은 12월 6일부터 청군의 침략을 알리는 봉화가 잇따라 올랐음에도 그 사실을 조정에 제때 보고하지 않은 결정적인 잘못을 저지른다.

인조와 신료들은 12월 14일 오전에야 강화도로 가기 위해 창경궁을 나섰다. 하지만 일행이 겨우 숭례문 부근에 도착했을 때 비보가 날아들었다. 김포 나루가 끊겼다는 소식이었다. 당시 서울에서 강화도로 가려면 양화진 등지에서 배를 타고 김포까지 간 뒤, 강화도로 들어가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었다. 하지만 한겨울을 맞아 한강이 얼어붙은 상황에서 김포까지는 육로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김포 나루가 청군에 의해 차단되었던 것이다.

강화도로 가는 길이 막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조정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청군 기마대가 달려올 경우, 강화도로 들어가기는커녕 서울 한복판에서 국왕이 청군에게 포로로 붙잡힐 수도 있는 아찔한 상황이 빚어졌다.

‘책임감의 화신’이었던 최명길


▎서울시 송파동에 있는 청 태종의 송덕비.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항복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청 태종이 세운 비석이다. / 사진·중앙포토
위기의 순간 이조판서 최명길(崔鳴吉, 1586∼1647)이 나섰다. 최명길은 인조에게 자신이 청군 진영으로 찾아가 담판을 벌이며 시간을 끌어보겠다고 건의한다. 이윽고 최명길은 무악재 방면의 청군 진영으로 향한다. 당시는 분명 전시(戰時)였다. 만일 청군 지휘부가 최명길이 고의적으로 자신들의 전진을 늦추려 한다고 판단할 경우, 최명길은 죽음을 당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최명길은 적진으로 들어가 시간을 버는 데 성공했고, 인조와 조정 신료들은 남한산성으로 들어 갈 수 있었다.

한국인들은 병자호란을 이야기할 때 최명길과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을 같이 떠올린다. 최명길은 ‘현실을 고려하여 청과 화친함으로써 훗날을 기약하자’고 했던 주화파(主和派)로, 김상헌은 ‘의리와 명분을 위해 청에 저항하자’고 했던 척화파(斥和派)로 기억되었다. 그런데 병자호란 이후 두 사람에 대한 평가는 사뭇 달랐다. 여전히 화이론(華夷論)을 바탕으로 청을 ‘오랑캐’라고 치부하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 김상헌이 ‘나라의 진정한 어른(蓍龜)’이자 ‘대로(大老)’로서 추앙받았다. 반면 최명길은 ‘소인배’, ‘간신’, 심지어 남송(南宋) 시대 금(金)과의 화친을 주도하여 ‘매국노’로 매도 되었던 진회(秦檜)에 비견되기도 했다.

하지만 병자호란을 전후한 시기 최명길의 행적을 면밀히 살펴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우선 절체절명의 순간 ‘목숨을 걸고’ 주군에게 피난 시간을 벌어주었던 것만으로도 최명길은 ‘책임감의 화신’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그가 씻기 어려운 오명과 불명예를 무릅쓰면서 이후에도 주화의 길을 걸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거기에는 17세기 초반 조선이 직면했던 안팎의 위기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최명길의 의지가 자리잡고 있었다.

필자는 이러한 측면에 주목하면서 병자호란 무렵 최명길이 보였던 행적을 검토하고자 한다. 당시 청이 제국으로 떠오르면서 조선을 압박했던 양상, 그 와중에 전쟁을 막기 위해 최명길이 제시했던 대책의 실상, 나아가 병자호란을 맞아 최명길이 취했던 대외 정책을 살펴 그 역사적 의미를 반추해 보려고 한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전통적으로 여진족을 ‘오랑캐(夷狄)’로 간주했다. ‘오랑캐’는 사람이 아닌 ‘짐승’에 가까운 존재였다. 그런데 16세기 말부터 만주에서는 누르하치가 이끄는 건주여진(建州女眞)이 굴기하고 있었다. 애초 명의 지배를 받던 그들은, 명이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한눈을 파는 사이에 본격적으로 세력을 키워 1616년(광해군 8) 무렵엔 후금(後金)이라는 독립 국가를 세운다.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쇠퇴하는 제국’ 명과 ‘떠오르는 강국’ 후금 사이에 끼여 곤혹스러운 처지로 내몰린다. 명이 조선을 활용하여 후금을 견제하려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을 노골적으로 펼쳤기 때문이다. 이 같은 곤경을 맞아 광해군(재위 1608∼1623)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절묘하게 양단을 걸치며 위태롭게 평화를 유지한다. 하지만 내정에서 실정이 누적되면서 광해군은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쫓겨난다. 최명길은 인조반정을 기획하고 주도했던 핵심적인 공신(功臣)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반정’이라는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등장했던 인조 정권은 집권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해 친명(親明)의 기치를 선명히 했다. 왜냐하면 명은 여전히 조선의 ‘상국(上國)’이자 조선 국왕을 책봉(冊封)하는 권한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조 정권이 친명으로 기울어지면서 조선과 후금의 관계는 경색되었다. 더욱이 당시 평안도 철산(鐵山)과 가도(椵島)에는 모문룡(毛文龍)이 설치한 명의 군사기지가 있었던 데다 조선이 모문룡을 지원하면서 후금의 불만은 날로 커져갔다. 급기야 1627년(인조 5), 후금의 새로운 칸(汗)이 된 홍타이지는 모문룡을 제거하기 위해 조선을 침략한다. 정묘호란이 일어난 것이다.

정묘호란 당시 조선군은 후금군을 당해낼 수 없었다. 일찍이 1624년 이괄(李适)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군사력이 크게 약화되었던 데다 모문룡을 지원하느라 과중한 비용이 지출되어 재정 상태가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모문룡 지원에 소요되는 비용은 때로 국가 재정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강화도로 피신했던 인조와 조정은 후금과 화약(和約)을 맺는다. 후금군이 철수하는 대가로 그들이 요구하는 양곡과 각종 물자를 세폐(歲幣)로 제공하기로 약속했다. 나아가 조선이 ‘아우’가 되어 후금을 ‘형’으로 대접하겠다는 약조도 맺었다.

최명길은 후금과 화약을 맺는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목전의 화(禍)를 피하기 위해 부득이하게 오랑캐와 화친한다’고 강조했지만 조야의 반응은 싸늘했다. ‘짐승같은 오랑캐에게 나라를 바친 자’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준열한 척화론… 나사 풀린 방어 체계


▎병자호란 당시의 모습을 그린 JTBC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의 한 장면. 인조가 말도 타지 못한 채 항복 장소인 삼전도로 향하는 모습을 그렸다. / 사진·중앙포토
정묘호란 이후 조선은 ‘임금의 나라’ 명과 ‘형의 나라’ 후금 사이에서 살얼음판을 걷게 된다. 이후 후금의 국력은 일취월장했고 명과의 전쟁에서 연전연승했다. 급기야 1635년(인조 13) 12월 28일, 후금의 신료들은 홍타이지 칸을 황제로 추대한다. 고무된 홍타이지는 ‘아우국’ 조선도 자신을 황제로 추대하는 데 동참하기를 기대한다. 이에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대(馬夫大) 두 사신을 조선에 보낸다.

1636년 2월, 용골대와 마부대가 조선에 들어왔다. 사신단에는 몽골 왕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몽골 왕자들도 홍타이지를 황제로 추대하려 한다”는 사실을 조선에 강조하려는 목적이었다. 이들이 입국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조선 조야는 격앙되었다. 사헌부 장령(掌令) 홍익한(洪翼漢)은 ‘정묘호란 이후 취했던 유화책 때문에 오랑캐가 황제를 칭하는 참람한 사태가 빚어졌다’며 용골대 등의 목을 베어 명으로 보내 대의를 밝히되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목을 베어 오랑캐에게 사과하라고 일갈했다. 홍문관 신료들도 ‘나라가 망하더라도 엄준한 말로 오랑캐를 배척하여 반역의 단서를 끊으라’고 요구했다. 그들은 몽골 왕자들을 ‘명을 배신한 반역자’로 규정하여 당장 구금하라고 촉구했다.

조선 조정이 몽골 왕자들이 인조에게 올리는 서신 접수를 거부하는 등 냉대하자 용골대 일행은 당황했다. 그들은 ‘홍타이지가 명과 전쟁을 할 때마다 이겼다’는 사실, ‘후금에서 벼슬하는 만몽한(滿蒙漢) 출신 신료들이 모두 한마음으로 홍타이지를 황제로 추대하려 한다’는 사실 등을 강조했다. 몽골 왕자들은 “홍타이지가 황제가 되면 아우국 조선도 기뻐할 것으로 여겼는데 거절하는 까닭이 무엇이냐?”며 거들었다.

용골대와 마부대 일행은 2월 26일, 조선 조정의 냉랭하고 험악한 분위기에 놀라 궁궐을 박차고 나간다. 사신 일행이 도성을 빠져나갈 때 구경꾼들이 길을 메웠다. 일부는 그들에게 욕설을 퍼붓고 깨진 기와 조각과 돌을 던지기도 했다.

용골대 일행이 가버리자 조선 조정이 공포에 휩싸인다. 청과의 관계가 사실상 파탄으로 끝나 ‘청이 곧 쳐들어올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일부 신료는 ‘빨리 강화도로 들어가 방어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할 정도였다. 3월 1일, 인조는 팔도의 신민들에게 유시문(諭示文)을 내린다.

지레 흥분하지 말고 현실 직시하라


▎중국 심양 고궁의 모습. 병자호란 당시 여성들을 포함한 수많은 조선 포로가 심양으로 연행됐다. 최명길은 이들의 송환을 위해서도 몸을 아끼지 않았다. / 사진·중앙포토
“정묘년 난리 때는 부득이하여 저 오랑캐와 임시로 화친을 허락했다. 그런데 저들의 욕구는 날로 커져 이제 우리 군신을 차마 들을 수 없는 말로 협박하고 있다. 이에 강약(强弱)과 존망(存亡)을 돌아보지 않고 그들과의 관계를 끊으려 하니 모든 사서(士庶)들은 힘을 합쳐 난국을 헤쳐 나가자!”

대의명분을 위해 망하는 것도 감수하면서 청과 관계를 끊고 맞서겠다는 의지가 결연했다. 그런데 3월 7일, 그야말로 ‘대형사고’가 터졌다. ‘청과의 관계를 단절하겠다’는 방침을 알리고, ‘곧 청군의 침략이 시작될 것이니 방어 준비에 만전을 기하라’는 인조의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평안감영으로 내려가던 금군(禁軍) 전령이 용골대 일행에게 붙잡혔던 것이다. 달아나던 용골대 일행은 뜻밖의 소득을 얻게 된다. 금군 전령이 지녔던 인조의 명령서를 입수하여 조선의 ‘본심’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은 당시 조선이 안고 있던 문제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청과 일전을 불사하겠다’는 기개는 높았지만 서울에서 변방으로 이어지는 통신과 방어체계는 극히 허술하다는 실상이 드러났다. 중대한 내용을 담은 국왕의 명령서를 자국 영토 안에서, 그것도 허겁지겁 도망치고 있던 적국 사신에게 빼앗긴 것은 어떤 변명으로도 용납될 수 없었다. 나아가 곧 일어날 병자호란이 얼마나 참혹한 모습으로 펼쳐질 것인지를 예시하는 전조이기도 했다.

용골대 일행이 입국했을 때 최명길은 침착했다. 그는 먼저 후금이 ‘황제국’으로 자처하게 된 배경을 분석했다. 그들이 명에 대해 군사적 우위를 확보하고 몽골까지 복속시킨 사실을 주목했다. 1635년 무렵 청은 거의 자유자재로 장성(長城) 안팎을 넘나들며 명의 내지를 공격하여 사람과 물자를 약탈하고 있었다. 명은 산해관(山海關)과 북경의 황성(皇城)을 잇는 심장부를 방어하기에도 급급했다. 최명길은, 명을 유린할 만큼 힘이 커져 자신감이 넘쳤던 후금이 칭제하는 것은 아무도 말릴 수 없다고 보았다.

최명길은 용골대 일행을 상대할 때 사안에 따라 분리하여 대응하라고 촉구했다. 정식 사신인 용골대와 마부대, 그리고 홍타이지의 국서에 대해서는 기존의 관례대로 대응하되, 이치에 어긋나는 말은 거부하자고 했다. 동행한 몽골 왕자들은, 박대는 하지 않되 접견은 거부하자고 했다. ‘오랑캐’가 칭제했다는 사실에 격앙되어 흥분만 할 것이 아니라 일단 정묘호란 이후 유지해온 ‘형제국’의 예로써 그들을 대하자는 입장이었다.

한편 1636년 4월 11일, 홍타이지는 심양에서 제위에 오르고 국호를 대청(大淸)이라 선포했다. 당시 즉위식장에는 조선 사신 나덕헌(羅德憲)과 이확(李廓)도 있었다. 그런데 식이 거행되는 내내 두 사람은 홍타이지에게 절을 올리지 않았다. 조선은 청의 ‘아우’이지 ‘신하’가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 주변의 청인들이 달려들어 구타했지만 두 사람은 요지부동이었다.

신료들이 나덕헌 등을 죽여야 한다고 아우성치자 홍타이지는 ‘사신을 죽이는 것은 맹약을 어기는 명분을 제공하는 짓’이라며 거부했다. 그는 나덕헌 등에게 들려 보낸 국서에서 ‘조선이 후금을 원수라고 한 이상 전쟁을 통해 강약과 승부를 겨루겠다’, ‘조선이 만일 죄를 뉘우치면 자제들을 볼모로 보내되 거부할 경우 쳐들어갈 것’이라고 공언했다. 심지어 출병 날짜까지 명시했다. 사실상의 선전포고였다.

이제 청의 침략이 기정사실이 되었지만 조선 조정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같은 해 8월, 인조가 청의 동향을 탐지하기 위해 사신을 보내자고 주문하자 척화신들이 들고일어났다. 대사간 윤황(尹煌)은 “다시 화친하려면 표문(表文)을 올리고 칭신(稱臣)할 수밖에 없다”며 방어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강조했다. 대다수 신료도 윤황에게 동조하자 인조는 “저들로부터 신첩(臣妾)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없는데 우리가 지레 먼저 표문과 칭신을 운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질타한다. 인조는 척화신들의 주장에 공감했지만, 후금과 완전히 절교하는 것에는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최명길은 8월 27일 ‘병법은 권모술수를 피하지 않는 법’이라며 역관이라도 심양에 보내 청의 동향을 탐지하자고 촉구했다. 그러자 척화신들은 ‘지금은 대의를 밝혀야 할 때’라며 최명길을 성토했다. 변변한 방어 대책이 없는 상태에서 “사신도 안 되고 역관도 보내지 말라”는 주장이었다. 최명길은 척화신들을 질타하면서 다음과 같은 방략을 제시했다.

“대개 도에는 경(經)과 권(權)이 있고, 일에는 경중(輕重)이 있습니다. 의리도 시세(時勢)에 따르니, 오늘날의 시세는 강성한 군사력도 없고 또 임진왜란 때처럼 믿을 만한 명군도 없습니다. 의리로 말하면 애초 오랑캐에 대해 아들과 신하로 칭하는 모욕이 없었고 또 조상 때부터 잊기 어려운 원수도 아니니 (…) 오랑캐가 정묘년의 맹약을 어기고 예의에 어긋난 것으로 핍박한다면 결코 따를 수 없지만, 이제 그렇지 않고 이웃나라의 예법을 그대로 쓰는 만큼 저들이 호칭을 참칭(僭稱)하고 안 하고는 우리가 물어야 할 바가 아니니 어찌 예의로써 오랑캐를 꾸짖을 수 있겠습니까? (…) 국력은 고갈되었는데 오랑캐 군사는 여전히 강하니, 우선 정묘년의 맹약을 지켜 수년 동안 화를 누그러뜨리되 인정(仁政)을 베풀어 인심을 수습하고 국방을 강화하여 저들의 틈을 엿본다면 나라를 위한 계책으로 이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싸우려면 국경에서 제대로 싸우자”


▎인조의 항복 장면을 묘사한 삼전도비 옆 부조물. 인조는 소현세자와 신료들을 이끌고 청태종 홍타이지에게 삼배구고두례를 행했다. / 사진·중앙포토
그랬다. 당시 청이 칭제하긴 했지만 곧바로 조선에 자신들을 ‘황제’로 섬기라고 강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위에서 인조가 ‘저들로부터 신첩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없는데 우리가 먼저 표문과 칭신을 운운하는 것은 문제’라고 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용골대 등이 입국한 직후, 척화신들은 ‘홍타이지가 칭제했다’는 사실 자체에 흥분하여 정묘 화약을 비롯한 기존의 관계를 무조건 파기하자고 했다. 최명길은 ‘흥분하여 무조건 절화(絶和)할 것이 아니라 기존에 맺은 형제관계를 유지하려고 최대한 노력하여 전쟁을 피해 보자’고 주장했던 것이다.

위기를 맞아 적국을 제어하기 위해 권모(權謀)를 써서 화를 늦춰야 한다는 최명길의 주장에는 독특한 세계 인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천하의 성쇠는 무상하며 오랑캐도 왕업(王業)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조선이 ‘오랑캐’로 매도하는 청 또한 황제가 될 수 있는 것이 시세(時勢)라고 본 것이다. 따라서 호언장담만으로는 청의 기세를 꺾을 수 없고 전쟁과 멸망을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오랑캐가 왕업을 일으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척화신들의 인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주장이었다. 오랫동안 양명학(陽明學)을 공부했던 최명길의 현실과 세계 인식은 여타 신료와는 사뭇 달랐던 것이다.

하지만 척화신들은 ‘오랑캐에게 사람을 보내는 것은 명을 배반하고 백성들을 기만하는 행위’라고 성토했다. 또 ‘오랑캐를 배척하고 중국을 높이는 것이 국시(國是)’인데 과거 광해군이 역관을 왕래시키며 후금을 포용하려 했기에 인조반정이 일어났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말하자면 “명나라를 위해 조선이 망하는 것도 감수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인조는 난감해질 수밖에 없었다. “광해군이 명을 배신했기 때문에 쫓아낸다”는 명분을 내세워 집권했던 자신의 ‘과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청에 사절을 보내는 문제를 놓고 조정의 논의가 갈라지고, 인조까지 동요하는 와중에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고 있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직전, 최명길은 청과 정묘년에 맺은 약조를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되 청이 정묘화약의 내용을 넘어서는 요구를 할 경우 싸울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체찰사(體察使)와 원수(元帥)는 모두 평안도에 본부를 설치하고 병사(兵使)들 또한 의주로 들어가 전진이 있을 뿐 후퇴는 없게 해야 합니다. 또 심양에 국서를 보내 군신의 대의와 사신을 보내지 않은 이유를 말하되, 한편으로는 오랑캐의 정세를 살피고 한편으로는 저들의 답변을 보아 만일 다른 마음이 없이 형제의 예를 그대로 지키면 우선 이전의 약속을 지키고 안으로 정사를 닦아 후일을 도모하되 (…)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의주를 굳게 지켜 성을 등지고 한번 싸워 국경에서 안위를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비록 만전의 계책은 아닐지라도 속수무책으로 망하기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오히려 낫지 않겠습니까?”

“항복은 치욕이 아니라 용기 있는 결단”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소재 최명길 신도비. 숙종 28년(1702)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 사진·중앙포토
청과 싸우려면 의주의 압록강변에서 결전을 벌이자고 주장하는 내용이다. 당시 인조와 대다수 신료는 청이 침략할 경우, 강화도로 들어가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최명길은 그것의 부당성을 지적한 것이다. 강화도로 갈 경우, 조정의 안전은 확보될지 모르지만 서울 이북 백성들의 안위는 방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오랑캐와 척화하고 싸우려는 것이 진심이라면 국경으로 나아가 결전하자!” 이것은 전략가로서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주장이다. 국경에서 싸울 경우, 설사 패하더라도―청군이 서울 부근까지 내려오는 상황과는 달리―국경 부근에서의 전황에 따라 강화 조건을 조율할 수 있을 것이다. 청군이 깊숙이 남하하지 않을 경우 병자호란이 낳은 최대의 비극이었던 피로인(被擄人)의 숫자 또한 대폭 줄어들었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인조는 ‘국경에서 결전을 벌이자’는 최명길의 공세적인 방어 주장을 거부한다. 전쟁이 임박했음에도 ‘말의 성찬’만 벌이고 있던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최명길의 대책은 폐기되고 만다. 전진하여 국경에서 결전하자는 주장에는 두려움 때문에 반대하고, 사신을 다시 보내 적정을 탐지하자는 주장에는 명에 대한 의리를 내세워 반대하는 와중에 청군의 철기는 거침없이 달려오고 있었다.

대책 없이 맞이한 병자호란의 전개 양상은 참담했다. 인조와 조정이 들어갔던 남한산성은 ‘춥고 배고픈’ 곳이었다. 병력은 1만여 명에 불과했고, 비축된 군량은 겨우 한 달 반 정도를 버틸 수 있는 분량이었다. 산성의 병사들은 고작 빈 쌀가마니 한 장을 걸치고 혹독한 추위와 사투를 벌여야 했다. 청군은 산성의 안팎을 봉쇄하고 외부의 근왕병이 접근하는 것을 차단했다. 고립된 성안에서는 절망감이 번져갔다.

포위된 와중에도 신료들은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척화신들은 여전히 “명을 위해, 대의명분을 위해 군신 상하가 장렬히 옥쇄하여 후세에 의로운 이름을 남기자”고 했다. 최명길은 인조에게 “조선의 임금이 명을 위해 나라를 망하게 할 수는 없다”며 백성과 종사(宗社)를 위해 은인자중하라고 촉구했다.

최명길은 무시로 청군 진영을 왕래하며 강화를 주도했고, 끝내는 성하(城下)의 맹(盟)을 이끌어냈다. 그 과정에서 홍타이지를 ‘황제 폐하’라고 칭하는 국서를 썼다. 척화신들은 최명길을 ‘진회’라고 매도하며 목을 치라고 성토했다.

인조는 1637년 1월 30일 삼전도(三田渡: 잠실 석촌호수 부근)에서 홍타이지에게 무릎을 꿇는다. 세 번 큰절을 올리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적인 항복이었다. 일단 전쟁은 끝났지만 백성들의 고통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청군은 전쟁 기간 동안 10만 명 이상의 조선 백성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철수하면서 이들 피로인을 심양으로 연행했다. 엄중한 감시 속에 수백㎞를 걸어야 했던 피로인들은 도중에 굶어 죽고, 얼어 죽고, 맞아 죽었다. 여성 피로인들의 고통은 더 심했고, 수많은 ‘화냥년’이 속출했다.

전쟁 직후 영의정에 임명된 최명길은 전후 복구와 대청 교섭이라는 두 과업을 사실상 전담했다. 그는 먼저 인조를 다독였다. “전하께서 굴욕을 참아 종사가 유지되었으니 항복은 치욕이 아니라 용기 있는 결단”이라고 위로했다. 이어 피로인들을 속환(贖還)하기 위해 청과 교섭하고, 돌아온 ‘화냥년’들을 보호하고 감싸주기 위해 노심초사했다. 명을 치는데 필요한 병력을 보내라고 강요했던 청을 설득하기 위해 심양으로 달려갔던 사람도 최명길이었다.

전쟁 이후 불거진 안팎의 온갖 난제를 도맡았던 최명길은 스스로를 ‘가난한 선비의 아내’이자 ‘약소국의 신하’로 비유했다. “가난한 선비의 아내와 약소국의 신하는 집안을 보전하고 나라를 살리는 것 이외의 일은 돌아볼 겨를이 없다.” 병자호란 직후 조선을 이끌었던 최명길의 신념이었다.

최명길 외교 리더십이 재평가되어야 하는 이유

병자호란은 17세기 초 기존의 패권국 명과 신흥 강국 청의 대결 여파, 이른바 명청교체(明淸交替)의 불똥이 한반도로 튀면서 일어났던 사건이다. 당시 조선이 처해 있던 상황은 엄혹했다. 7년 동안 한반도를 할퀴었던 임진왜란의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한 채 명과 청의 대결 속으로 다시 휘말렸기 때문이다. 청의 도전에 밀리던 명은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운 ‘은혜’를 내세워 조선에 자신을 편들어 청과 맞서라고 요구했다. 명에 도전했던 청은 조선에 최소한 중립을 지키라고 채근했다. 조선은 ‘샌드위치’의 처지로 내몰렸다.

조선은 과연 어떻게 했어야 할까? ‘목숨을 걸고 항전하여 오랑캐에게 치욕을 겪지 말자’고 외쳤던 척화파가 옳은가? 아니면 ‘역량이 부족한 냉엄한 현실을 바로 보자’고 주장했던 주화파가 옳은가? 그런데 분명한 것이 하나 있었다. 조선은 명과 청을 움직일 지렛대나, 청의 침략을 감당할 역량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미 병자호란 이전부터 신료들 내부에서 조선을 일러 ‘군사가 없는 나라(無兵之國)’, ‘골병든 나라(空虛之國)’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였다.

강국 사이에 끼인 채 자위 능력이 없는 약소국은 외교와 내정 양면에서 전략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했어야 한다. 하지만 인조는 물론, 척화파나 주화파 모두 그렇지 못했다. 유사시 서울을 버리고 강화도로 들어가 항전한다는 계획이 고작이었다. 정작 청군의 침략이 시작되었을 때는 그나마 강화도로 들어가지도 못했다.

‘명을 위해, 대의를 위해 나라가 망하더라도 오랑캐와 타협할 수는 없다’는 명분론이 대세인 현실을 거스르며, 조선의 생존과 조선 백성들의 보전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던 인물이 바로 최명길이다. 그는 명뿐 아니라 조선과 청 또한 엄연히 독립적인 역사적 실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명을 위해 조선이 망하는 것을 감수할 수 없다”는 그에게 극단적인 비난과 매도가 쏟아졌다. 하지만 그는 목숨을 걸고 적진으로 나아가 인조에게 피난할 시간을 벌어주었고, 청의 ‘칭제’에 흥분할 것이 아니라 적정을 탐지하여 현상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자고 강조했고, 최악의 경우 국경에서 결전하여 피해를 최소화하자는 대안을 제시했다. 항복 이후에는 상처받은 나라 안팎을 다독이기 위해 노심초사했다. 요컨대 최명길은 냉철한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책임감과 희생정신, 그리고 대안까지 제시했던 보기 드문 전략가였다.

기존의 패권국이 쇠퇴하고 새로운 강국이 떠올라 그에 도전하는 사태가 빚어질 때 한반도는 어김없이 위기를 맞았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청일전쟁 등이 그 실례이다. 이런 역사를 반추하면 강대국들에게 일방적으로 휘둘리지 않을 정도의 역량을 키우는 것이 절실하다. 그러려면 냉철한 현실인식, 민완한 외교 능력, 사회를 통합할 수 있는 포용의 리더십이 절실하다. 밖에서는 신흥 강국 중국이 떠올라 패권국 미국에게 도전하고 안에서는 갈등과 분열이 심화되고 있는 오늘, 최명길과 같은 리더가 새삼 그립다.

한명기 - 서울대 인문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국사학과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명지대 인문대학 사학과 교수로 있다. 지은 책으로는 <임진왜란과 한중관계>(1999), <광해군>(2000), <병자호란>(2013) 등 다수가 있다. 동아시아사 속에서의 한국사 위상 정립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첫 저서 <임진왜란과 한중관계>로 2000년 제25회 월봉저작상을 받았다.

201601호 (2015.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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