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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영의 종교 이야기(16)] ‘티베트의 부처’ 밀라레파 

“자신의 생각 좇아 다니면 막대기 찾는 개가 된다 

김환영 중앙일보 논설위원 kim.whanyung@joongang.co.kr
당숙 일가 등 몰살시킨 뒤 죄 뉘우치고 수행에 정진…종교들의 ‘울림’, “종파·교리 다르다고 반대하지 않아”

▎밀라레파는 히말라야 동굴 등지에서 풀로 연명하며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티베트의 짐꾼들이 생필품을 잔뜩 진 채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가고 있다.
대체적으로 민족종교와 달리, 그리스도교·이슬람·불교같은 보편종교는 민족국가를 초월한다.(물론 민족종교에도 세계적 보편성이 내재돼 있다. 종교의 역사가 증언하고 있는 것처럼, 민족종교도 세계종교로 발돋움할 수가 있다.)

하지만 세계는 민족국가로 쪼개져 있다. 보편종교들은 ‘민족국가로 구성된 세계’라는 틀 안에서 서로 경쟁해야 한다. 예컨대 한국 불교는 일본 불교, 중국 불교, 베트남 불교, 태국 불교, 스리랑카 불교, 티베트 불교와 ‘세계 종교시장’에서 서로 경쟁하는 관계라고 볼 수 있다.

경쟁이 나쁜 것은 아니다. 각 나라 불교가 다른 나라 불교와 경쟁하는 가운데 글로벌 불교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 현재 불교는 통계를 내는 관점에 따라 다르지만 신앙인의 수가 최대 16억 명에 른다. 모든 종교 중 세계 1, 2위를 다툰다. 낮춰 잡아 5억 명 정도라고 해도 세계 5대 종교에 너끈히 들어간다.

관점이나 평가 기준에 따라 역시 다르겠지만, 동아시아 불교의 챔피언은 한·중·일 불교가 아니라 티베트 불교다. 예컨대 ‘구글 검색’ 기준으로 그렇다. 특히 티베트 불교는 불교에 관심이 많은 미국과 유럽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다. 티베트 불교의 3대 셀링포인트(selling point)는 달라이라마, <티베트 사자의 서>, 밀라레파다.

단 한번의 일생에서 득도한 ‘제2의 싯다르타’


▎밀라레파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흑마술을 배운 뒤 당숙의 집을 무너뜨려 일가족을 몰살시켰다. 그러나 잘못을 뉘우치고 오랫동안 수행한 끝에 도를 깨우쳤다고 한다
밀라레파(1028~1111 혹은 1040~1123 혹은 1052~1135)는 누구인가? 밀라레파는 ‘무명 옷을 입은 밀라’라는 뜻이다. 밀라레파는 티베트 불교 수행자 중에 가장 유명한 인물이다. 티베트 불교인들은 3·4대 종파를 초월해 밀라레파를 존경한다. 그는 ‘완전히 깨달은 자’다. ‘티베트의 부처’, ‘제2의 부처’라고도 불린다. 통상적으로 부처가 되려면 윤회를 거듭하며 정진(精進)해야 한다. 밀라레파는 단 한번의 일생에서 득도했다.

밀라레파의 인생을 재구성한 것은 1488년에 출간된 <밀라레파의 인생(Life of Milarepa)>이다. 세계문학 고전 반열에 든 책이다. ‘자서전 형식을 빌려 쓴 전기’인 이 책에 따라 밀라레파의 득도기를 재구성하면 이렇다.

밀라레파는 부잣집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적 이름인 두파가는 ‘듣기 좋은’이라는 뜻이다. 일곱 살이었을 때 아버지가 별세하는 바람에 재산을 악독한 당숙·당고모에게 빼앗겼다. 어머니는 복수를 위해 돈을 마련해 밀라레파를 흑마술을 가르치는 스승에게 보냈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수행을 중시한다. 알몸의 한 남성이 눈을 감은 채 기도에 정진하고 있다.
밀라레파는 흑마술로 거대한 전갈로 하여금 지붕이 무너지게 해 35명의 사람을 몰살시켰다. 참극의 현장은 당숙 맏아들의 결혼을 앞둔 잔칫집이었다. 얄궂게도 당숙·당고모는 살아남았다.(둘을 살려둔 것은 일종의 ‘문학적’ 장치다. 훗날 밀라레파는 당숙·당고모와 화해한다.) 복수는 복수를 부른다. 마을 사람들이 복수하려고 하자 밀라레파는 우박폭풍을 불러 마을 사람들의 한 해 농사를 망쳐버린다.

양심의 가책을 느낀 밀라레파는 세상을 버리고 수행자의 길로 접어든다. 스승인 마르파(1012~1097)는 그를 괴롭힌다. 마르파는 수많은 경전을 인도에서 가져와 티베트어로 옮긴 번역가로 유명하다.

밀라레파는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 자살해버릴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스승이 그를 단련시킨 것은 밀라레파의 악업을 씻어내기 위해서였다. 스승의 지시에 따라 밀라레파는 맨손으로 탑을 쌓고 허물기를 반복한다. 때가 되자 스승은 밀라레파에게 명상법을 비롯해 득도의 방법론을 전수한다. 밀라레파가 쌓았다는 탑은 아직도 남아 있다.

밀라레파는 토굴로 들어가 12년 동안 피골이 상접한 상태에서 수행에 매진한다. 그가 명상 수행한 토굴은 스무 개다. 오늘날에도 그의 제자들의 제자들이 토굴 속에서 정진하고 있다. 쐐기풀로 만든 죽만 먹다 보니 온몸이 파랗게 된다. 득도한 그는 하늘을 날 수 있게 된다. 우주의 모든 곳을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다. 축지법을 썼다. 밀라레파는 남녀차별을 하지 않았다. 수많은 남성·여성 제자에게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가르쳤다.

밀라레파는 그를 시기하는 승려에게 독살당했다. 84세에 생을 마감했다. 성불한 그는 죽지 않을 수도 있었으나 죽음의 길을 선택했다. 그는 시인이었다. 제자들이 쉽게 깨칠 수 있도록 게송(偈頌)을 지었다. 깔끔하고 아름다운 게송들이다. 그의 게송을 모은 게 <십만송(十萬頌)>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목소리가 좋았고 노래를 잘 불렀다.

양심에 가책 느껴 불도(佛道)에 입문


▎티베트 불교 승려들이 주요 종파인 황모파의 중심 사찰인 간다인 사원에서 불화(佛畵) 공개 행사를 열고 있다.
우리는 밀라레파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밀라레파는 비교종교학의 지평을 넓히는 백미 사례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스승과 제자’의 중요성이다. 어른은 자식을 키움으로써 더 큰어른이 된다.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다. ‘자식이 없으면 어른이 될 수 없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또 자식을 키운 후에도 애어른으로 남는 경우도 있다.) 마찬가지로 스승은 제자를 키움으로써 더 큰 스승이 된다. 티베트 불교는 ‘스승-제자’ 관계를 중시한다.

밀라레파의 수행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석가모니라기보다는 오히려 직접적인 스승인 마르파였다. 상대적으로 계보(系譜·lineage)를 중시하는 종교와 그렇지 않은 종교가 있다. 그리스도교 중에서는 가톨릭이나 정교회가 계보를 중시한다. 모든 사제는 궁극적으로 예수의 제자들의 제자들의 제자들이라는 것이다. 티베트 불교 또한 선불교와 마찬가지로 사제지간의 협업을 통한 진리의 길을 중시했다. 밀라레파가 좋은 예다. 그는 자신의 스승이 부처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예수의 제자들은 수천 명에 달했겠지만, 핵심 제자는 12명이었다. 예수는 신(神) 그 자신이나 신의 아들이기 전에 스승이었다. 예수는 제자들의 절대적인 믿음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예수의 제자들에게 예수가 신이었다면, 밀라레파에게 스승 마르파는 ‘살아 있는 부처’였다. 티베트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관통하는 공통분모는 ‘스승’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 확신, 신뢰다.


▎티베트 라마교의 사원인 부다라궁(布達拉宮) 앞에서 오체투지 (五體投地)에 열중하는 순례자들. 양 무릎과 팔꿈치, 이마 등 몸의 다섯 부분을 땅에 닿게 하는 오체투지는 고행(苦行)의 채찍질이자 자신을 낮춤으로써 상대방에게 존경을 표하는 예법이다
밀라레파와 싯다르타 부처를 비교해도 흥미로운 점이 드러난다. 싯다르타는 ‘금수저’ 출신이다. 그는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나 최고의 교육이 헛되다는 것을 깨달았다. 반면 밀라레파는 요즘으로 치면 중산층, ‘은수저’ 출신이다. 아버지가 돌아간 후에는 ‘흙수저’ 신세로 살았다. 그럼에도 그는 세속 세상이 전혀 즐겁지 않았다.

엄청난 부나 권력을 향유한 사람들이 인생에 대한 회의, 허탈감 속에서 영적인 세계를 희구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부귀영화와는 거리가 먼 밀라레파가 불도(佛道)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뭘까.

‘죄’의 문제였다. 그는 자신이 이번 생에서 지은 죄업 때문에 지옥에 떨어지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그에게는 구원이 필요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불교와 선과 악, 구원이 중심 테마인 그리스도교 사이의 다리가 될 수 있는 인물이다.

“명예·권위만 위해 승복 입은 자들은 반대”


▎2. <밀라레파의 일생> 한글판 표지. / 3. <밀라레파의 일생> 영문판 표지.
티베트의 요기(수행자) 밀라레파는 또한 평범한 사람도 때가 차고 동기가 생기면 정진을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예시한다. 어머니의 평가에 따르면 그는 지극히 평범했다. 밀라레파의 어머니는 아들을 이렇게 평가했다. “내 아들은 공부를 특별히 좋아하지도 않고 참을성도 그리 강하지 못하다.”

우리나라 불자들 또한 밀라레파에게서 신선한 시각을 선사받을 것이다. <티벳의 위대한 요기 밀라레파>의 한글판에 14대 달라이 라마는 다음과 같은 추천사를 보냈다. “티베트에 보급된 불교는 소승과 대승, 그리고 대승의 밀교부에 해당하는 금강승을 모두 포함한다. 이들 모두가 불법의 각기 다른 면모이며 모순이나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다.”

밀라레파는 현대의 종교 상황에도 울림을 주는 인물이다. 한번은 그와 어린 시절에 약혼했던 제세라는 이름의 여성이 찾아와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수행법도 다른 모든 종교인들의 그것과 반대되나요?”

밀라레파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반대하는 것은 명예나 권위만을 위해 승복을 입은 자들, 재산과 명성을 노리고 겨우 경전 한두 권을 암송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자들, 당파심을 갖고 자기 종파의 승리와 다른 종파의 패망을 위해 노력하는 자들이오. 그렇지만 진지한 수행자들이 있으니, 비록 종파나 교리는 서로 달라도 그들이 방금 말한 사람들이 아니라면 목적에 큰 차이가 있을 수 없고, 그래서 나는 그들 중의 어느 누구에게도 반대하지 않소.”

티베트 불교와 한국 불교는 서로 벤치마킹 대상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이 크다. 참고로 티베트 불교를 라마교(lama敎)라고 부르면 안 된다. 비하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슬람교를 마호메트교(Mahomet敎)라고 불러서는 안 되는 이유와 비슷하다.

죽음을 준비하는, 산 자를 위한 책 - 14세기에 재발견된 티베트 경전 <티베트 사자의 서>


▎14세기에 재발견된 티베트 경전 <티베트 사자의 서>.
<티베트 사자(死者)의 서(書)>는 14세기에 재발견된 8 세기 티베트 경전이다. <밀라레파의 일생>과 보완관계인 책이다. 메시지를 요약한다면 이렇다. 사람은 죽은 다음에도 몸과 마음이 분리된 새로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성불(成佛)할 수도 있고, 신들이 사는 낙원 같은 곳에 갈 수도 있고,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도 있다. 죽은 다음에 어리바리 방황하면 축생(畜生)이나 더 곤란한 모습으로 다음 세상에 태어날 수도 있다.

‘좋은 곳’으로 가는 길을 제시하는 게 <티베트 사자의 서>다. 죽을 무렵, 죽는 순간, 죽은 다음에 스스로 읽고 또 남들이 대신 읽어 주는 경전이다. 생사일여(生死一如)다. 생과 사가 다름없다. 하나다. 죽음의 고통이 사라져야 삶의 고통도 사라진다. <사자>는 생사의 고통을 없애는 유용한 스킬(skill)을 제시한다.

저자는 아미타불의 화신으로 여겨지는 파드마삼바바(Padmasambhava·蓮華生上師)다. 8세기 사람이다. 인도 출신인 그는 부탄과 티베트에 불교를 전파했다. 전설에 따르면 이 책을 비롯한 문서들을 티베트 곳곳에 숨겼다. 아직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14세기에 세상에 다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상당수 티베트학 학자들이 후대의 위작이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달라이 라마는 이 책 영문판의 서문을 써서 공인했다.

20세기에는 서양으로 전파됐다. 원제는 <중간 상태에서 청문(聽聞)으로 얻는 해탈(바르도 퇴돌·Bardo Thodol·The Great Liberation by Hearing ni ht e nI termediate States)>이다. <이집트 사자의 서>에 맞춰 <티베트 사자의 서>라는 제목이 붙었고 이 제목으로 굳어졌다. 정작 티베트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책이다. 오히려 서양에서 불교 입문서로 유명해졌다. 1927년 옥스퍼드대 출판부에서 첫 영역본이 나오자마자 서구 사회에서 고전이 됐다.

스위스 정신의학자 카를 구스타프 융(1875~1961)은 이 책이 “인간 심리를 다룬 책”이라며 찬사를 보냈다. 또 ‘동양의 단테 <신곡>’이라고도 불린다. 임사체험(臨死, Near Death Experience)에서 말하는 것과 일치하는 내용도 많기 때문에 주목받는다.

죽음의 공포를 없애는 책이다. 다음 같은 메시지를 통해서다. 죽음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슬픈 것도 기쁜 것도 아니다. 죽음은 삶과 또 다른 삶 사이의 중간 과정일 뿐이다. 죽음은 존재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의 시작이다. 죽은 사람은 몸이 없기 때문에 그 누구도 위해(危害)를 가할 수 없다.

사후에 몸과 분리된 의식은 기분 좋은 이미지와 무서운 이미지를 연달아 보게 된다. 모두 자신의 의식 작용이 만들어내는 ‘생생한 꿈’이다. 삶이 여정이라면, 삶과 삶 사이의 죽음도 여정이라는 게 이 책의 메시지다. 죽음은 ‘마지막 기회’가 아니라 오히려 ‘최고의 기회’다.

몸과 마음이 분리된 사후에는 해탈이 더 쉽다. 어느 곳이건 마음대로 갈 수 있다. 해탈이 최고의 목표지만, 해탈에 실패할 경우에는 환생을 해야 한다. 신성한 존재들이 사는 곳에서 태어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의 세계관은 불법(佛法)이 전해지고 실천되고 있는 곳에서 태어나는 것을 선호한다.

‘흰색 빛’은 신들이 사는 곳의 통로다. 인간 세상에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파란 빛’을 따라가야 한다. ‘파란 빛’을 따라가면 모든 중생이 성불하기 전까지는, 성불을 미루겠다는 ‘고집불통의 위대한 인간들’이 가는 우리 세상으로 다시 올 수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어떤 환생이냐는 산 자와 죽은 자 간의 협업(collaboration)이 얼마나 잘되느냐에 달렸다. 우선 산 자는 울고불고 소란을 피우거나 지나친 슬픔에 빠지면 안 된다. 모든 종류의 경계인(境界人)은 힘들다. 그렇지 않아도 새로운 상황에 빠져 혼란스러운 망자라는 경계인을 더욱 어렵고 힘들게 만들면 안 된다. 산 자들이 할 일은 그저 이 책을 열심히 독경하는 것이다.

<티베트 사자의 서>는 죽은 자를 위한 책이기 이전에 산 사람들, 살아 있을 때를 위한 책이다. ‘생자(生者)의 서’이기도 하다. 유가족에게 위로를 준다. 모든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언젠가 맞이할 죽음을 준비하게 해주는 책이다.

밀라레파의 말말말

• 내 종교는 나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것이다.
• 나는 아무것도 필요 없고, 아무것도 구하지 않고,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 가장 낮은 곳을 차지하면, 가장 높은 곳에 도달할 것이다.
• 인생은 짧고 언제 죽을지는 알 수 없으니 수행에 매진하라. 목숨까지 내놓을 각오로 최선을 다해 악을 피하고 공덕을 쌓으라.
• 소금물을 마시면 갈증이 더 심해지듯이, 갈애(渴愛)를 채우면 갈애가 더 커질 뿐이다.
• 자신의 생각을 좇아 다니는 것은 주인이 던진 막대기를 찾으러 가는 개가 되는 것이다. 개가 되지 말고 사자가 돼라. 사자의 시선은 막대기가 아니라 막대기를 던진 주인을 향한다.
• 사랑과 자비를 명상하는 게 오랜 습관이 되다 보니, 나는 나와 다른 사람 사이의 모든 차이를 잊어버렸다.
• 천천히 서두르면 곧 목적지에 도달한다.

김환영 - 중앙일보 논설위원. 외교부 명예 정책자문위원. 단국대 인재 아카데미(초빙교수), 한경대 영어과(겸임교수), 서강대 국제대학원(연구교수)에서 강의했음. 서울대 외교학과 학사, 스탠퍼드대 중남미학 석사, 스탠퍼드대 정치학 박사. 쓴 책으로 <마음고전> <세계사의 오리진을 만나다> <세상이 주목한 책과 저자> 등이 있다.

201709호 (2017.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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