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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드 인터뷰] 한완상 3·1 운동 및 임정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장 

“증오의 감옥에서 탈출할 열쇠 일본이 갖고 있어” 

글 허인회 월간중앙 기자 heo.inhoe@joongang.co.kr / 사진 김경빈 기자 kgboy@joongang.co.kr / 녹취 정리 신재현 인턴기자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의 패러다임 시프트 기억해야”
“트럼프 노벨상 수상하면 재선에 도움… 올 가을 前 종전선언 기대”


▎한완상 위원장은 “3·1운동은 지역과 계급·종교·성별을 초월한 민족적 항거였다”고 말한다. / 사진:김경빈 기자
3월 13일, 정부서울청사에서 만난 한완상(83)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위원장은 고단한 기색이 역력했다. 전날 열린 고(故) 문동환 목사의 영결식 조사(弔詞)를 작성하고 참석하느라 정신이 없었다는 것이다.

인터뷰를 위해 자리에 앉자 한 위원장의 눈빛은 달라졌다. 1936년생임이 믿기지 않게 목소리에는 힘이 실렸고 답변에는 머뭇거림이 없었다. 역사적 사건을 나열할 때는 마치 책을 보고 읽는 것처럼 거침이 없었다. 한 위원장은 인터뷰에 앞서 질의서 요지를 요청했다.

인터뷰를 위해 사전에 건넨 질문지에 자신의 생각을 적은 답변이 빼곡했기 때문이다. 한 위원장은 “질문이 너무 많아요. 답변 고민하느라 애 먹었어”라고 농담을 건넸다. 그러나 한반도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해 풀어내기 시작하자 진보계의 어른다운 관록이 묻어났다. 3월 13일 정부서울청사 내 집무실에서 만난 한 위원장은 깨알 같은 글씨로 빽빽하게 적은 답안지를 손에 쥐고 인터뷰에 응했다. 평생을 학자로 살아온 그의 또다른 면모를 보는 듯했다.

“유관순의 평화 DNA, 촛불시위 때 목격해”


▎‘ 대한독립 그날이 오면’ 전시 개막식에 참석해 3· 1 독립선언서를 관람하고 있는 한완상 위원장(맨 오른쪽). / 사진:연합뉴스
3·1운동 100주년이 지났다. 한 세기를 관통하는 메시지를 찾자면.

“1차 세계대전의 잔혹성을 경험한 서방세계는 전쟁 재발을 막기 위해 1919년 뜻을 모았고, 그 결과물이 파리강화회의다. 비슷한 시점, 우리는 일본 헌병의 잔인한 총칼 앞에서 비폭력 방식으로 인류 보편적 가치인 자유·독립·정의를 외치며 만세운동을 펼쳤다. 우리는 이미 평화의 가치를 알고 실천하고 있었다.

3·1운동은 지역과 계급·종교·성별을 초월한 민족적 항거였다. 17세 소녀였던 유관순이 총칼 앞에서 돌 한번 던졌다는 이야기가 없다. 그런 유관순이 서대문 형무소에서 고문 당해 죽은 후 나온 사인(死因)은 방광파열이었다. 일본 제국주의가 소녀에게 얼마나 못된 짓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래도 소녀와 여성들은 평화적으로 만세 운동을 이어갔다.

평화적 시위의 감동은 전국적으로 퍼져갈 수 있었던 계기였다. 영남과 호남 구분이 없었고 평양도 마찬가지였다. 머슴과 기생도 참여했다. 공감대가 형성되니 자발적으로 움직임이 터져 나왔다.

3·1운동의 가치는 해외까지 퍼져나갔다. 3·1독립선언서를 보면 중국 백성들이 일본 제국주의를 두려워한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동양의 평화를 위해서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것을 읽은 북경대 학생들이 ‘오체투지(五體投地)로 자기들의 부끄러움을 반성해야 한다’는 얘기를 할 정도였다. 두 달 후, 중국에서는 5·4 반제국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최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중국 공산당의 세 가지 업적을 선정했다. 그 가운데 3·1운동의 영향을 받은 ‘5·4 운동’이 그 업적에 끼친 영향을 언급했다. 인도의 시인 타고르가 우리나라를 예찬해 지은 ‘동방의 등불’은 1929년 타고르가 동아일보에 기고한 시(詩)다. 타고르와 간디의 교우관계를 보면, 간디가 간접적으로 3·1운동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방세계까지 3·1운동 얘기가 퍼졌다던데.

“1919년 파리강화회의가 열리자 독립을 원하는 세계 약소국 인사들이 파리로 모여들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우사 김규식 선생이 갔다. 당시 파리경시청이 가장 주목했던 청년은 베트남에서 온 29살 호치민이었다. 당시 호치민은 ‘식민지 국가로서 우리도 참여할 수 있게 해달라’는 수준의 요구를 프랑스에 전하기 위해 파리에 와 있는 상태였다. 김규식 선생은 이런 호치민에게 ‘강대국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투쟁해야 한다. 투쟁으로 가장 강력한 것은 비폭력 평화투쟁’이라고 깨우쳤다고 한다. 이 같은 내용은 당시 파리 경찰 당국 정보보고에도 나와 있다. 3·1운동은 자국에서 민주주의를 적용하면서 대외정책에 있어서는 무자비한 식민주의 폭력정치와 강압정치를 하고 있던 제국주의에 대한 경고이기도 했다.”

전 세계로 퍼진 3·1운동의 가치가 우리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는 견해도 있다.

“일제 치하 36년은 말과 글을 뺏겼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1945년 8월 이후가 문제다. 74년이 지난 지금 이 나라를 상당기간 이끌었던 지배층의 성격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친일 반공세력이다. 이들이 어떻게 3·1운동의 정신을 전파할 수 있겠나. 특히 이승만 정권에서는 친일 관료들을 많이 활용했다. 이를 두고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비판했다. 이들을 억압하는 구실로 꺼낸 수단이 색깔론이다. 친일 비판세력을 빨갱이로 몰아버리는 것이었다. 이는 최근까지 이어졌다. 박근혜 정부 시절 3·1운동 정신을 조직적으로 통제하고 건국절 주장에 힘을 실어줬다. 국정교과서를 부활시키려고도 했다. 이런 사실을 보면 국내외의 울림이 있던 3·1운동이 왜 이렇게까지 우리에게 잊히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만들어진 것도 그 연장선인가?

“3·1운동 이후 98년 만에 일어난 사건이 광화문 촛불시민명예혁명이다. 명예가 들어가는 이유는 폭력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촛불혁명 당시 현장에 나가 한 장면을 보게 됐다. 몇 사람의 남자들이 차벽으로 올라가 청와대로 진격하자고 얘기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처음에는 어린 소녀들이 내려오라고 외쳤다. 그럼에도 내려오지 않자 더 많은 젊은 여성들이 ‘비폭력, 비폭력, 비폭력’을 외쳤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98년 전 유관순의 DNA가 소리를 지르는 구나’하는 느낌을 받았다. 3·1운동의 가르침을 교육받지 못했지만 비폭력 평화정신이 우리 민족의 DNA 속에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는 촛불시위 초기였기에 유혈 사태로 번지지 않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이 컸다. 그러나 6개월간의 시위에서 단 한 건의 폭력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 이것을 DNA라 말하지 않으면 어떻게 설명이 가능하겠는가.

‘백의민족’(白衣民族)은 우리 민족의 별명이다. 평화의 DNA를 표현한 색깔이 흰색이다. 우리는 한 번도 다른 나라를 무력 침공한 역사가 없다. 수천 년 역사 속에 내재돼 있던 민족적 평화 DNA가 3·1운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98년 후에 촛불명예혁명이 일어났다. 이를 제대로 파악한 분이 문재인 대통령이다. 취임 이후 때마침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니 그 정신을 환기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3·1운동이 국내외적으로 울림이 컸다는 역사적 사실을 알리며 자랑스러운 미래의 대한민국을 만들자는 취지에서 위원회가 출범하게 됐다.”

“브란트 수준 사과 요구했더니 日 묵묵부답”


▎한완상 위원장에 따르면 우리 민족의 평화 DNA는 비폭력평화운동인 3·1 운동을 일으켰다. 이것은 광화문 촛불집회로 이어졌다. / 사진:연합뉴스
3·1운동과 광화문 촛불시위를 연결시키는 것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저절로 연결되는 것이다. 3·1운동이 촛불시민명예혁명과 이어진다는 것을 비판하는 사람은 평화 DNA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자신들이 친일반공세력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부정하고 싶은 것이다. 평생 교육에 종사해온 사람으로서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다는 생각에 내 세대가 잘못했다는 반성도 한다. 냉전시대 문화를 강요했던 정치세력에 대해서도 원망스럽다.”

한 위원장은 한 달 전 일본 외무성 고위 관계자를 만난 얘기를 꺼냈다. 문 정부가 미래지향적인 한일 관계로 가려는 것인지, 3·1 운동을 부각시켜 한일 관계를 어렵게 하려는 것인지, 파악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그 자리에서 한 위원장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일본을 미워하는 것은 사실이다. 미워하면 할수록 증오라는 감옥에 스스로를 가두는 느낌이다. 고통스럽다. 하지만 열쇠는 나에겐 없다. 당신들이 갖고 있다. 우리는 피해자고 가해자만이 열쇠를 갖고 있다. 제발 감옥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 이 말을 들은 관계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고 한다.

일본 측 관계자가 더는 말이 없었나?

“열쇠를 어떻게 하면 되냐고 묻더라. 기일이 있을 때마다 무릎 꿇고 진심으로 사과한 독일의 빌리 브란트 수상처럼 해달라고 했다. 일본은 왜 그렇게 못하냐고 되묻자 ‘고노 요헤이 전 관방장관,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 같은 사람이 있다’고 말하더라. 두 사람은 연립정부에서 힘도 영향력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아베 총리 같이 힘 있는 가해자가 사죄를 해야 용서도 무게감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브란트 수준의 진정한 사과도 재차 요구했다. 그럼 나도 증오의 감옥에서 나와 자유롭게 일본을 이해하겠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답을 안 하더라.”

많은 이들이 한(恨)의 감옥에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 위원장도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에 연루돼 모진 고문을 받지 않았나?

“내가 적십자 총재를 맡았을 때, 사무총장이 ‘전두환씨와 화해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건의했었다. 내가 이렇게 답했다. ‘내가 전두환씨를 용서할 힘이 어디 있나. 불행한 사건에서 억울하게 피해자가 된 사람만이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는 도덕적 힘이 있다. 물론 나도 피해자다. 그러나 맞아 죽거나 총 맞아 죽은 가족을 여전히 떠나 보내지 못하는 광주시민들이 많다. 그 사람들을 대신해 내가 전두환을 용서할 권리나 자격이 있을까. 난 없다’라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광주시민들이 갇혀있는 한(恨)의 감옥 열쇠는 전두환, 한 사람만 갖고 있다.”

임시정부 수립일이 4월 11일이다. 역사적 의미는?

“1919년 당시 망명정부의 국체(國體)를 대한민국이라고 선언한 것은 세계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서양까지 넓혀 봐도 임시정부보다 먼저 헌법 제1조에 민주공화국이라고 내세운 나라는 없다. 바이마르 공화국이 우리보다 조금 늦게 민주공화제를 지향한다고 했다. 우국지사들은 국토를 빼앗기고 나라에서 쫓겨나 남의 나라에서 망명임시정부를 세웠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나라를 되찾자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 국체를 바꾼 결정은 혁명적 패러다임 시프트(Paradigm Shift)다. 이 점은 앞으로 100년이 지나도 기억해야 한다.”

‘제국’에서 ‘민국’으로 패러다임 시프트 기억해야


▎지난해 9월 평양정상회담 당시 한완상 위원장(맨 오른쪽)이 문재인 대통령 내외와 함께 평양 옥류관에서 오찬을 마치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조선이라는 왕정체제에서 민주공화정 체제로 바로 넘어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김규식 선생을 비롯해 임시정부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당시 세계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특히 서양의 이중적인 측면, 자국에서는 민주공화제를 실시하면서 대외적으로는 잔인하게 식민 착취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넘어서자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임시정부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생각이 깨어있었다는 방증이다. 독립을 위해 노력하면서 세상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는 늘 문을 열어놓고 있었던 셈이다.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역사를 다시 공부하면서 족탈불급(足脫不及)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능력, 역량 등이 모자라 맨발로 뛰어도 따라가지 못한다는 뜻이다. 100년 전 조상들의 아름다운 투쟁과 헌신의 모습을 현재의 우리가 족탈불급하고 있다. 그나마 기념사업추진위원회로 인해 이만큼 알린 것에 감사하게 생각한다.”

일부 보수 진영 측에서 건국절을 주장하고 있는데.

“대한민국 국가 정체성의 기본은 1948년 8월 15일 이승만의 단독정부수립에 있다. 역사적으로도 단독정부의 수립이지, 대한민국의 건국절은 아니다.

국가의 3요소는 영토·국민·주권이다. 당시는 우리는 국토를 강탈당하고 주권은 박탈당했다. 주권을 행사할 국민은 일본 식민지의 신민이 됐다. 건국절 주장 세력은 1919년 상해임시정부가 이 세 가지 조건이 없었다는 논리를 펼친다. 이는 우리나라를 강탈한 일본 제국주의 논리를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태도다.

그들은 형식적 국가 3요소를 운운하며 상해임시정부는 정부가 아니라고 말한다. 상해임시정부를 반드시 망명임시정부라고 말해야 하는 이유다. 망명애국자들은 고향에서 살 수 없으니 쫓겨난 사람들이다. 억울하게 빼앗긴 것을 찾고자 고육지책으로 해외에서 활동한 사람의 노고를 무시하고 있다. 이게 말이 되나.”

태극기부대도 우리나라 국민이다.

“맞다.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사람까지 안고 가야 한다는 것이 민주주의를 하면서 치러야 할 대가다. 그것이 진짜 민주주의다. 그들이 스스로를 부끄러워 할 수 있는 분위기를 지도층이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게 내가 늘 말하는 선제적 사랑(Preemptive Love)이다. 민주주의의 대가란 이런 것이다. 그것이 괴롭다고 해서 발로 차버리면 역사는 뒤로 퇴보하는 악순환을 겪게 된다. 원수사랑을 선제적으로 실천해야 하는데, 그렇다고 원수사랑을 원수의 악 구조를 수용한다는 것은 아니다.

지금 우리 정치 지형을 보면 악순환을 통해서 다시 옛날로 돌아가고픈 사람들이 있다. 회귀하는 것에 일말의 부끄러움도 없다. 우리 시대의 난제이자 민주주의의 도전 과제(Challenge)다. 이 또한 넘어서야 한다. 폭력으로 되돌아가는 순간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인류의 모든 폭력혁명의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폭력혁명에는 반드시 또 다른 폭력혁명이 뒤따른다. 어떤 경우에도 폭력은 고려사항이 아니다.”

한 위원장은 문민정부 초대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을 지냈다. 햇볕정책의 화두를 처음 꺼낸 인사로도 유명하다. 그는 김영삼 정부부터 문재인 정부에 이르기까지 대북 문제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해 온 몇 안 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2차 북미회담이 결렬됐다. 향후 북미관계는 어떻게 될 것이라 보는가?

“정치인 트럼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재선이다. 가장 코너에 몰려있는 부분은 도덕성이다. 민주당의 끊임없는 공격 소재다. 도덕성 논란의 굴레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려면 노벨평화상 수상이 도움이 될 수 있다. 간단히 얘기하면 ‘노벨상을 받은 오바마도 대북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는데 나는 비핵화에 성공하고 노벨상도 받았다’고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야만 오바마의 대북정책이었던 ‘전략적 인내’가 참담하게 실패했다는 것을 부각시킬 수 있다. 노벨상을 받을 수 있는 시기는 올해뿐이다. 북·미 관계의 진전을 기대할 수 있는 부분이다.”

아직 노벨상을 받을 만한 뚜렷한 업적은 보이지 않는다.

“새 시대(Epoch-making)를 여는 요소는 대북제재 해제가 아니다. 종전선언이다. 종전선언은 냉전의 종말과 새로운 시대로 넘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1989년 부시 미국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의 몰타회담은 효과가 크지 않았다. 한반도 냉전 체제는 변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북·미간 종전선언은 몰타회담과는 차원이 다르다. 종전선언과 함께 상호연락소 설치, 평화협정 등 진전된 결과도 예상할 수 있다. 돈 한 푼 들이지 않으면서 세계사에 족적을 남기는 것, 사업가 트럼프에게는 노벨상의 구미가 당길 것이다.”

2차 북·미 회담이 틀어진 상황에서 가능할까?

“판이 엎어진 게 아니지 않나. 하노이 회담이 무산되고 나서 김정은 위원장은 북한에 돌아간 뒤 계속 경제 시찰 행보를 보이고 있다. 현명한 대응이다. 경제 발전에 분명한 뜻이 있음을 트럼프에게 보여주려는 것이다. 아마 트럼프는 이를 예의주시하고 있을 것이다. 낙관적일 수 있겠지만 올 가을 전에 종전선언을 발표하고 대북제재 가운데 일부를 해제한다면 평화협정으로 가는 로드맵에도 북미가 합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상당한 성공이다. 클린턴과 오바마의 민주당에서는 한 번도 도전하지 못한 단계에 트럼프와 공화당이 도달하는 것이다.”

“적대적 공생 관계 다시 보게 돼 고맙고 슬퍼”


▎한국 국민들은 일본 정부의 대처에 따라 정서가 바뀔 수 있다. 3월 1일 저녁 일본 도쿄에서 열린 ‘3·1 독립운동 100주년 캠페인’. / 사진:연합뉴스
한 위원장은 2017년 5월 9일 밤 문재인 당시 대통령 후보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음날부터 바로 대통령이 되기 때문에 자유롭게 연락을 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통화에서 한 위원장은 문 대통령에게 새 나라, 새 체제, 새 역사를 이끌어달라고 주문했다.

고공행진을 벌이던 대통령 지지율은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지 만 2년이 되어가는 시점에서 40%대에 답보상태다. 국정수행 부정평가가 긍정평가보다 높은 여론조사도 나오고 있다. 한 위원장은 이를 어떻게 바라볼까.

최근 나경원 한국당 원내대표가 ‘김정은 수석 대변인’ 발언을 놓고 정치권이 시끄럽다.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을 나와 법학을 공부하고 판사까지 한 정치인이 어떻게 그렇게 우아하지 못한 이야기를 거칠게 내뱉는지…. 유관순 열사가 17살에 죽으면서 남긴 말이 있다. ‘내가 조국을 위해 바칠 목숨이 하나라는 것이 안타깝다.’ 정치인이라면 100년 전 조상들이 했던 비폭력평화헌신 정신의 1만 분의 1이라도 따라갔으면 한다.”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으로 감옥에 갇혔던 한완상 위원장은 그곳에서 희망의 힘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 사진:김경빈 기자
나 원내대표 발언의 의도는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평화가 오는 것이 두려운 건가. 나 원내대표 발언을 듣고 비참하게 다시 확인한 진리가 있다. 남북 간의 갈등과 긴장 속에 정치적 이득 보는 세력이 지난 70년 동안 대한민국을 지배해 왔다는 진리다. 남북 간 적대적 공생관계의 비극적인 민낯을 드러내 준 것에 대해 경의를 표하며 한편으로 고맙고,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슬프다.”

대통령 지지율이 하락세다. 사람들의 불만이 많아지고 있다는 의미다.

“문 정부를 비판하는 세력을 분리해서 봐야 한다. 기본적으로 촛불혁명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문 정부가 지향하는 방향이 틀렸다고 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다만 신자유주의가 잉태하고 성장시킨 구조적 불평등에 대해 정책적 처방이 미흡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반면 극우세력들은 원천적으로 문재인 정부를 싫어한다. 그래서 좌파 빨갱이라고 비판한다. 제1야당에서도 그렇게 말한다. 그래도 문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가운데 제일 참을성 있고 점잖다. 그래서 존경심을 갖고 있다. 경제적 불평등 해소에 서툴고 미흡한 점을 보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은 경제 성과가 필요한 것 아닌가?

“딱 떨어지는 해답은 없다. 김대중 정부 시절 부총리 겸 교육 인적자원부 장관을 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김 대통령은 자신이 합법화시킨 전교조에서 자신을 신자유주의 대통령이라고 비판하는 것에 대해 늘 억울하게 생각했다. 대통령이란 자리가 그런 것이다. 문 대통령은 남북간 평화 무드가 진전되면 이를 기초로 한 남북경제공동체가 이뤄지고 경제 문제를 해결할 여력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평화가 곧 경제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평화의 경제적 가치를 소홀히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아쉬운 점이다.”

한 위원장은 자신의 회고록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에서 이렇게 밝혔다. ‘사자는 정글의 제왕이다. 모든 동물, 특히 채식 동물은 을이 되어 갑의 먹거리가 되면서 피 흘리며 죽어야 한다. 육식동물 갑과 채식동물 을 간에는 구조적, 운명적으로 먹고 먹히는 처절한 관계가 일상화된다 두 집단 간에는 소통과 평화가 들어설 수 없다. 바로 약육강식의 비극적 현실이다.’

갑을 관계의 폐해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현재 국가, 시장, 시민사회에는 갑을이 존재한다. 어떤 영역에서의 갑이든 을을 대할 때 음식으로 보면 안 된다. 자신을 배 불리는데 활용하는 수단으로 삼으면 안 된다는 뜻이다. 갑과 을은 항상 소통해야 한다. 역지사지(易地思之)에서 출발해 역지감지(易地感之), 역지식지(易地食之)로 진행돼야 한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상대방과 같은 감정을 느끼고, 나아가 상대방과 같은 것을 먹으며 체질까지 바꾸는 소통이 곧 완벽한 평화다. 생존에 필요한 것을 함께 나눠야 비로소 공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은 특별히 문 대통령에게 당선된 날 얘기했다.”

한 위원장은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남산 지하실과 서대문 구치소에서 모진 고초를 겪었다. 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죄수들과 교도관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감옥에서도 자유롭게 소리 지르고 교도관을 꾸짖기도 하고 웃기도 했다. 어떤 죄수는 소풍 온 것처럼 신나 보인다고 할 정도였다. 그때 그는 깨달았다고 한다. 객관적으로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자신도 모르는 희망의 힘이 감옥 안에서 그를 지탱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굴곡의 한국현대사를 온 몸으로 견뎌낸 한 위원장은 여전히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그가 쓴 문동환 목사 조사의 한 대목이다.

“강대국들의 갑질로 우리 민족과 민중의 트라우마가 켜켜이 쌓여 있는 분단된 조국 한반도에서 마침내 저희들의 종말론적 꿈이 아름답고 우람한 새 현실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팔순을 넘긴 그가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는 근원적 저력은 새 시대의 희망이 보여서가 아닐까.

201904호 (2019.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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