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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이슈]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 10주기,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 

음악 통해 사회적 메시지 실천한 박애주의자 

이규탁 한국조지메이슨대 교수, 음악평론가 funky829@naver.com
흑인음악이 정당한 대접받고, 힙합과 R&B가 전성기 맞는 길 터
한국 대중음악과 대중문화는 물론, K팝에도 지대한 영향


▎마이클 잭슨이 1996년 6월 내한공연에서 특유의 다이내믹하고 화려한 춤을 선보이고 있다.
1. ‘Gone Too Soon’ [마이클 잭슨의 8번째 정규 앨범 'Dangerous'(1991)의 수록곡 제목]: 마이클 잭슨의 상징성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에서 ‘팝의 황제(King of Pop)’라는 영광스러운 별칭으로 불렸던 마이클 잭슨(1958~2009)이 세상을 떠난 지도 어느덧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개인적으로 필자에게 마이클의 죽음은 2003년 전해졌던, 홍콩 영화배우 겸 가수였던 장국영(張國營, 1956~2003)의 사망 소식과 더불어 해외 유명 스타의 사망 소식 중 가장 충격적인 일로 남아 있다.

1980~90년대 한국 대중에게 이들은 단순한 해외 인기 스타가 아니었다. 이들은 그 시기를 대표하는 ‘시대의 아이콘’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죽음은 필자를 포함한 한국 대중에게 ‘한 시대의 종언(終焉)’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장국영이 한류 이전 1980~90년대에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을 휩쓸었던 홍콩 대중문화의 열풍을 상징하는 존재였다면, 마이클 잭슨은 이 시기 본격적으로 글로벌 대중문화의 흐름에 동참하게 되며 빠르게 변하는 세상을 온몸으로 겪었던 한국 사람들이 만났던 새로운 세상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이들이 세상을 떠난 지 제법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이름이 꾸준히 회자되는 이유다. 특히 마이클은 1980~90년대에 걸쳐 국내 대중음악과 대중문화계 전반에 끼친 영향력이 굉장히 컸으며, 그 영향력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Childhood’ [마이클 잭슨의 9번째 정규 앨범 'History'(1995)의 수록곡 제목]: 마이클의 초기 경력


▎1984년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자리를 함께한 마이클 잭슨과 배우 브룩 실즈.
마이클 잭슨은 친형제 4명과 함께했던 가족 밴드 ‘잭슨 5(The Jackson 5)’의 다섯 명 중 막내로 1969년 정식으로 음악계에 데뷔했다. 당시 마이클 잭슨은 11세에 불과했음에도 대부분의 수록곡에서 형들을 제치고 리드 보컬로 노래를 담당하며 ‘될성부른 떡잎’으로서 재능을 보였다.

아직 변성기도 다다르지 않았던 맑고 고운 마이클 잭슨의 목소리는 다양한 인종·성별·연령대의 청중에게 모두 호소력을 지녔다. 여기에 귀여운 그의 외모와 인상적인 무대 퍼포먼스가 더해지며 어린 마이클은 단숨에 당대의 인기스타가 됐다. 잭슨 5는 ‘I Want You Back’, ‘ABC’, ‘The Love You Save’, ‘I’ll Be There’ 등을 잇달아 히트시키며 돌풍을 일으켰으며, 그들의 열성팬을 일컫는 ‘잭슨마니아(Jacksonmania)’라는 신조어까지 낳았다.

흑인음악 진입로 열어젖힌 개척자

잭슨 5의 성공은 물론 마이클을 비롯한 형제들의 뛰어난 음악적 재능 덕분이었지만, 소속 음반사였던 모타운 레코드사의 역할 또한 컸다. 1960~70년대 미국 대중음악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음반사 중 하나였던 흑인음악 전문 레이블 모타운은 현 K팝 시스템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음악 제작과 유통, 가수 이미지의 철저한 관리 및 시스템화’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회사다.

이러한 시스템 하에서 모타운은 흑인음악 레이블(label)이면서도 흑인음악 색채를 강조하기보다는 대중적인 멜로디와 편곡, 가창 스타일을 중시하며 음악시장의 주 소비자층인 백인들도 포섭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으며 모타운은 템프테이션스, 다이애나 로스, 슈프림스, 마빈 게이, 스티비 원더 등 당대 최고 인기 가수들을 배출할 수 있었는데 마이클과 잭슨 5 역시 모타운의 시스템과 음악적 방향성에 힘입어 스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비록 이후 자기 주도하에 곡을 만들고자 한 마이클과 여전히 그를 관리시스템 하에 두려고 한 모타운이 갈등을 빚었다. 결국 마이클은 모타운과 결별하고 에픽 레코드사로 이적하고 그곳에서 솔로 가수로서 전성기를 열게 되지만, 모타운 시스템 하에서 마이클이 배운 것들은 이후 그의 커리어에도 방향성을 제시하게 된다. 최고 작곡가들과의 적극적인 협업 그리고 인종·성별·연령을 가리지 않는 범대중적인 음악 만들기라는 일관된 기조가 그것이다.

3. ‘Heal the World’ [마이클의 마지막 정규 앨범 'Invincible'(2001)의 수록곡 제목]: 마이클 잭슨의 영향력


▎2009년 6월 마이클 잭슨의 사망 소식을 듣고 거리로 몰려나온 미국인들.
이미 모타운에서 4장의 솔로 앨범을 발매했던 마이클은 1975년 에픽 레코드로 둥지를 옮긴 후, 21세가 되던 1979년 다섯 번째 솔로 앨범 [Off the Wall]을 발표한다.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마이클의 음악 세계를 선보인 이 앨범은 미국에서만 800만 장 이상 판매되며 마이클이 성공적인 솔로 가수로 자리 잡는 원동력이 됐다.

이후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라는 타이틀을 얻으며 기네스북에 등재된 [Thriller](1982), 빌보드 싱글 차트 1위곡을 5곡이나 배출한 또 하나의 빅히트 앨범 [Bad](1987), 전 세계적으로 약 32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린 것으로 집계된 [Dangerous](1991) 등의 작품을 잇달아 발매하며 그는 명실공히 ‘팝의 황제’가 됐다. 통계에 따르면 마이클의 앨범들은 전 세계적으로 지금까지 약 3억5000만 장 이상 판매된 것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단순히 상업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뒀기 때문에 그가 팝의 황제로 불리는 것은 아니다. ‘로큰롤의 황제(King of Rock and Roll)’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엘비스 프레슬리가 그랬던 것처럼 마이클이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음악계와 대중문화 전반에 끼친 커다란 영향력이 그를 팝의 황제로 만든 것이다.

마이클이 끼친 영향력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그가 대중음악 장르 사이에 존재하던 인종적인 편견과 차별의 장벽을 허물었다는 점이다. 모타운과 소속 가수들의 노력을 통해 1960년대부터 주류 백인 계층이 지배하던 미국 음악산업에 흑인음악이 진입할 수 있는 길이 열렸고, 1970년대로 들어오며 펑크·소울 등의 흑인음악 장르들이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으며 흑인음악에 대한 차별은 많이 옅어졌다.

세계 평화와 인류애 실천에도 앞장

그러나 여전히 흑인음악은 실제 인기와 영향력만큼의 대접을 받지 못했다. 가령 1960년대를 풍미한 로큰롤이나 1970년대의 대표 음악인 디스코 모두 흑인음악으로부터 기원했으나 이들의 음악을 나중에 따라 한 백인 가수들이 이를 자신들의 장르로 만들었다. 이는 미국 음악산업의 주 수용자층이 백인 중산층이라는 점, 더불어 당시 음악산업을 좌지우지하던 음반사 역시 대부분 백인들이 경영하고 있었다는 점 때문에 벌어진 현상이었다.

수용자와 음반사 모두 흑인음악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흑인 가수가 아닌 ‘백인들이 부르는 흑인음악’을 더욱 선호하였으며, 이에 많은 흑인 가수들이 “백인들이 우리의 음악을 도용(盜用)해 원작자인 우리를 정당하게 대우하지 않고 성공의 열매를 가로채고 있다”며 분노를 표하기도 했다.

이러한 ‘푸대접’은 특히 음반 판매와 라디오 방송에서 여실히 드러났는데, 70년대까지만 해도 대중적으로 높은 인기를 누렸던 흑인 가수들조차 그들의 인기도가 음반 판매 실적과 라디오 방송 횟수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했다. 이는 곧 해당 수치들을 순위 산정의 주요 기준으로 삼는 빌보드 차트 성적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으며, 그 결과 흑인 가수들은 실제 영향력만큼의 보상을 받지 못하곤 했다.

그러나 [Off the Wall] 앨범을 시작으로 마이클이 천문학적인 앨범 판매고를 올리면서 상황은 크게 변했다. R&B와 소울·디스코 등 흑인음악을 바탕으로 백인들도 좋아할 수 있는 팝의 감각을 더하고, 거기에 앨범 녹음에 흑백을 가리지 않고 최고의 인기 뮤지션들을 초빙함으로써 최신 트렌드를 적극적으로 반영한 마이클의 음악은 흑인음악으로서 앨범 차트와 라디오 방송을 모두 정복한 선구자적인 존재가 됐다.

이후 80년대에 프린스, 라이오넬 리치 등의 가수가 마이클의 뒤를 이어 주류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두며 흑인음악인과 그들의 음악은 비교적 정당한 대접을 받게 됐고, 이는 90년대 이후 힙합과 R&B가 음악적·상업적 전성기를 맞게 되는 기반이 됐다. 현재 빌보드 차트를 지배하고 있는 수많은 흑인 음악 앨범·노래들에게 길을 열어준 이가 바로 마이클인 것이다.

또한 마이클은 음악을 통해 사회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자신의 문화적·사회적 영향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그것을 실천에 옮긴 흔치 않은 음악인이었다. 마이클은 1985년 불안정한 정치 상황과 가뭄으로 인해 사상 초유의 기근에 직면한 에티오피아 사람들을 돕고자 프로젝트 그룹 ‘USA for Africa’를 주도했다. 이들이 발표한 싱글 ‘We Are the World’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에티오피아의 참혹한 현실을 알리는 메시지임과 동시에 세계 대중이 그들에게 실제로 큰 도움을 줄 수 있게 한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이후에도 마이클 잭슨은 ‘Man in the Mirror’, ‘Heal the World’, ‘Earth Song’ 등의 곡을 자신의 앨범에 꾸준히 수록하며 세계 평화와 보편적 인류애에 관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이 메시지가 사람들의 실천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앞장서서 최선을 다했다.

박남정·양현석·박진영 등 당대 최고 춤꾼들의 롤모델

이와 같은 마이클의 활동은 음악산업 내부의 인종적인 장벽을 무너뜨린 그의 음악적 행보와도 맞닿아 있다. 마이클은 음악을 통해 인종·민족 간의 갈등, 국가 간의 증오와 전쟁, 혐오 등을 넘어 진정한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이상을 꿈꿨고, 실제로 그의 음악을 좋아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공통점을 찾고 소통할 수 있었다.

“내 음악을 좋아한다면 당신이 흑인이든 백인이든 상관 없다”고 담백하게 이야기하는 마이클의 히트곡 ‘Black or White’는 그의 음악의 지향점과 실제로 이뤄낸 성취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곡이라고 할 수 있다.

4. ‘Dancing Machine’ (잭슨 5의 9번째 스튜디오 앨범 제목이자 동명의 싱글): 댄스음악의 전령사 마이클 잭슨


▎마이클 잭슨이 1988년 미국 현지에서 한복을 입고 카메라 앞에 섰다.
마이클은 새롭고 세련된 음악을 통해 글로벌 음악 산업의 판도를 바꿔놓은 존재였다. 그리고 그가 제시한 새로운 흐름은 우리나라 대중음악·문화 전반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그때까지는 크게 대중적이지 않았던 ‘댄스음악’이라는 장르가 국내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된 계기가 바로 마이클의 음악이었다는 점이다.

1970년대 후반까지 댄스음악이라고 하는 장르가 국내에 아예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우선 과거 ‘고고장’이나 ‘나이트클럽’ 등지에서 밴드들이 연주했던 음악은 사람들을 춤추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일종의 댄스음악이었다. 더불어 70년대 중·후반 전 세계에 열풍을 불러온 디스코 음악은 국내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많은 대중음악 전문가들이 ‘가요 최초의 본격적인 댄스음악’으로 일컫는 혜은이의 히트곡 ‘제3한강교’가 바로 1979년에 등장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독립된 장르로서의 댄스음악이 국내 음악계에 본격적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1980년대 중·후반 박남정·김완선·소방차 등이 대중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면서부터다. 이들이 발라드와 트로트·록·포크처럼 기존에 대중에게 사랑받았던 장르가 아닌, 춤추기 좋은 비트를 가진 음악에 맞춰 화려한 춤을 담은 무대 퍼포먼스를 선보이면서 비로소 ‘댄스곡’, ‘댄스음악’, ‘댄스가수’ 등의 용어가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당시로서는 신선하고 새로운 음악인 동시에 글로벌한 감성의 세련된 음악이기도 했던 댄스음악은 단숨에 국내 음악팬들, 특히 당시 경제 발전과 가계 소득 증대를 기반으로 대중음악계의 새로운 수용자 층으로 떠오른 10대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이들에게 댄스음악은 전후(戰後) 기성세대와는 달리 산업화·도시화 속에 태어나고 성장한 자신들의 문화적 취향과 그들의 취향을 차별화하는 요소였으며, 댄스음악·가수에 열광하는 자신들에게 뜨악한 시선을 보내던 그들에 대한 일종의 저항 문화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들 초기 댄스 가수들의 음악과 춤에 마이클은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일례로 80년대 댄스 가수의 대표 격인 박남정의 별명은 ‘한국의 마이클 잭슨’이었으며, 실제로 박남정은 마이클의 열성팬으로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수차례 밝힌 바 있다. 뿐만 아니라 현진영·이주노·양현석·구준엽·강원래·박진영 등 박남정 이후 80년대 말~90년대 초반에 걸쳐 잇달아 등장한 유명한 ‘춤꾼’들은 대부분 마이클 잭슨을 자신의 롤모델로 삼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30년 지났음에도 여전히 뛰어난 영상미 과시

인터넷과 유튜브를 통해 최신 트렌드를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즐길 수 있는 지금과는 달리, 당시는 글로벌 트렌드가 짧게는 1~2년에서 길게는 3년 이상의 시차를 두고 국내에 알려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와중에도 이들은 정보를 최대한 빨리 얻고자 당시 우리보다 문화산업이 좀 더 글로벌화돼 있던 일본·홍콩 등지를 직접 방문하거나 해당 지역의 지인들을 통해 최신 정보를 얻곤 했다. 그리고 그들이 구하고자 했던 최신 정보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마이클의 새로운 음악과 뮤직비디오, 그가 선보였던 독특하고 화려한 춤이었다.

이들 ‘춤꾼’들은 90년대 초·중반을 거치며 가수로 데뷔해 국내 음악계에 큰 족적을 남겼다. 서태지와 아이들과 듀스로 대표되는 당시의 ‘신세대 댄스가요’ 열풍은 단숨에 10대들을 사로잡았고, 이 10대들이 성인으로 성장한 90년대 후반부터 가수·작곡가 등으로 음악 경력을 시작하면서 한국 대중음악계가 커다란 변화를 맞았기 때문이다.

‘한류’라는 이름으로 해외 시장 진입에 성공한 K팝의 번성이 바로 그것이다. K팝이 여전히 댄스음악 중심이며 이들을 육성하고 관리하는 박진영·양현석 등이 마이클의 춤과 음악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이들임을 감안해 보면, 현재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K팝도 마이클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하겠다.

5. ‘You Rock My World’ [마이클의 마지막 정규 앨범 'Invincible'(2001)의 수록곡 제목: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으로의 전환


▎‘잭슨 5’의 데뷔 초기 모습. 가운데가 마이클 잭슨이다.
마이클이 국내외 대중음악·문화에 끼친 또 다른 중대한 영향은 음악의 시각화(視覺化) 경향이다. 1981년 개국한 미국의 음악 전문 케이블TV 채널 MTV는 음반과 공연 외에는 오로지 청취자들의 신청 혹은 DJ나 PD가 직접 선곡한 음악을 트는 방식으로 배급되던 음악 상품에 ‘뮤직비디오’라고 하는 또 하나의 유통 방식을 더했다.

MTV가 개국하기 2년 전 이미 영국의 인기 록밴드 버글스가 ‘Video Killed the Radio Star’라는 상징적인 제목의 싱글을 발매하며 음악산업의 변화 양상을 예언하기도 했지만, 실제로 뮤직비디오만을 전문적으로 방송하는 MTV의 등장은 음악산업의 판도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시각 매체와 결합한 음악은 뮤직비디오를 스토리텔링에 적극 활용하는 등 대중예술로서의 표현 범위를 더욱 확장했으며, 뮤직비디오는 음악과 결합된 상품인 동시에 음악과는 별개의 대중문화 양식으로 취급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향은 MTV가 더 이상 뮤직비디오 전문 채널이 아닌 현재에도 여전하다. 과거 MTV가 담당하던 역할은 유튜브로 넘어갔으며, 더불어 스마트폰의 대중화로 인해 뮤직비디오의 영향력은 한층 강화됐다.

MTV의 개국 1년 후에 발매된, 마이클의 앨범 중 가장 유명한 작품 ‘Thriller’는 초창기 미디어 시장 진입에 다소 어려움을 겪던 MTV가 확고하게 자리 잡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Beat It’과 ‘Billy Jean’의 뮤직비디오는 노래는 물론 그것과 결합된 춤과 패션을 전 세계로 빠르게 전파했고, 무려 13분에 걸친 대작 ‘Thriller’ 뮤직비디오는 1980년대를 대표하는 작품이자 뮤직비디오 시대의 도래를 알렸다.

특히 ‘Thriller’의 경우 유명 영화감독 존 랜디스가 감독을 맡아 한 편의 단편영화 같은 뮤직비디오를 만들었으며, 당시로서는 엄청난 제작비인 80만 달러가 투입되는 등 이전의 뮤직비디오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제작·유통된 혁명적인 작품이었다.

마이클의 춤이 끼친 영향만큼이나 그의 뮤직비디오가 한국에 끼친 영향도 지대했다. MTV를 비롯한 음악 전문 케이블 채널이 없던 당시 한국의 음악 전문 케이블 채널들은 케이블 TV 서비스가 개시된 1995년에서야 개국했다.

이러한 영상들을 접하기가 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여기에 영향을 받았다. 당시 다수의 10대들이 비디오재생기(VCR)를 갖춘 친구 집에 삼삼오오 모여 정식으로 해외에서 가져온, 혹은 불법 복제한 해적판 마이클 뮤직비디오 모음집 비디오테이프를 함께 감상하곤 했다. ‘Thriller’ 외에도 한 편의 짧은 뮤지컬 같은 ‘The Way You Make Me Feel’, 공개된 지 30년이 넘은 지금 봐도 여전히 훌륭한 영상미를 보여주는 ‘Smooth Criminal’ 뮤직비디오 등이 당시 비디오테이프에 주로 담겨 있던 곡들이었다.

음악 통해 전 세계인이 하나될 수 있다고 믿었던 ‘몽상가’

이를 통해 ‘음악은 청각예술’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한국 대중들, 특히 젊은 수용자들은 현대 대중음악에서 시각 이미지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뮤직비디오를 통해 가수를 브랜딩(branding)하는 마이클의 전략은 이후 국내 음악계 뮤직비디오 형식에 큰 영향을 끼쳤다.

가령 화사하고 발랄한 분위기의 춤과 패션을 잘 담아내어 이후 K팝 걸그룹 뮤직비디오의 전형을 제시한 S.E.S.의 ‘I’m Your Girl’(1997), 스토리텔링을 담아내며 뮤직비디오를 독자적인 콘텐트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조성모의 ‘To Heaven’(1998) 등이 대표적 예다. 더불어 싸이의 글로벌 히트곡 ‘강남스타일’ 역시 독특한 뮤직비디오가 전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며 유명해질 수 있었는데, 이렇게 음악을 시각 이미지와 적극적으로 결합하는 방식은 댄스음악과 더불어 K팝이 마이클로부터 받은 중요한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6. ‘Love Never Felt So Good’ [마이클 잭슨의 사후 발매된 미발표곡 모음집 'Xscape'(2014) 수록곡 제목]: 그를 그리워하며

마이클이 세상을 떠난 이후 많은 가수들이 그가 차지하고 있던 ‘팝의 황제’ 지위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마이클이 기존에 녹음한 음원(音源)에 자신의 목소리를 결합해 듀엣곡을 만들어 발매하기도 했던 2000년대의 대표 남성 솔로 가수 저스틴 팀버레이크, 미국 10대들의 아이콘이었던 저스틴 비버, 빌보드 차트를 정복하고 그래미상을 휩쓸며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브루노 마스 등이 그들이다.

그러나 이들 중 누구도 마이클이 생전에 가졌던 만큼의 인기와 글로벌한 영향력을 얻지는 못하고 있다. 그것은 이들의 음악이 좋지 않거나 이들이 마이클보다 춤과 노래를 잘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변화된 음악산업과 미디어 환경으로 인해 더 이상 ‘제2의 마이클 잭슨’이 나올 수 없게 됐다고 보는 것이 맞다.

라디오와 TV, 음반뿐만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미디어를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음악 콘텐트를 소비하는 지금은 마이클의 시대에 비해 시장과 취향이 훨씬 다변화했다. 따라서 ‘전 세계 모두가 알고 좋아하는’ 가수의 등장 가능성 자체가 사라졌다. 또한 음악산업이 앨범이 아닌 싱글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히트곡과 가수의 수명이 점점 짧아지고 있는 것 역시 마이클 같은 가수가 다시 나올 수 없는 환경을 조성했다.

때문에 마이클은 1980~90년대의 아이콘 같은 존재이자 이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좋았던 시절’을 상징하는 아련한 그리움과 같은 존재로 우리 곁에 남았다. ‘음악을 통해 전 세계인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요즘은 다소 몽상(夢想)처럼 느껴지기까지 하는 꿈을 진지하게 믿고 실천했던, 그리고 현재 전 세계인이 즐기는 음악이 된 한국 대중음악이 동경하고 배우기 위해 노력했던 그의 빈자리가 여전히 크게 느껴지는 이유다.

201905호 (2019.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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