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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스토리 | 단독 인터뷰] “수요집회 끝내자” 이용수 할머니 6시간 심경 고백 

“김학순이 시작한 일 내가 끝낸다… 다음 세대 교육이 마지막 소명” 

■ “정대협은 고쳐서 못 쓴다… 증오만 부추기는 운동 방식 바뀌어야”
■ “수요집회 나와봐야 배울 것 하나 없어… 한마디를 해도 옳게 가르쳐야”
■ 민주당 소속 정치인에게서 ‘윤미향 잘 봐 달라’ 회유성 연락
■ 5월 13일 입장문 발표 뒤에도 “화해 안 한다, 할 수 없다” 수차례 강조


▎이용수 할머니가 5월 13일 대구의 숙소에서 월간중앙과 인터뷰하고 있다. 할머니는 윤미향 당선인에 대해 “지금이라도 이실직고하는 게 옳은 거지, 양심도 없다”고 비판했다.
5월 13일 자정이 조금 지났을 때. 전화기 너머 들려오는 이용수 할머니 지인의 목소리는 다소 들뜨고 급해 보였다. 그는 “할머니 계신 곳을 전해 들었다”고 했다. 이 할머니는 5월 7일 대구시 남구의 한 찻집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이하 정의연)와 윤미향 전 정의연 이사장(더불어시민당 비례대표 당선인)의 운동 방향을 비판한 뒤 연락이 끊긴 상태였다. 기자회견에서 할머니가 제기한 문제제기는 결코 가볍게 볼 문제가 아니었다. 즉시 진실공방이 벌어졌다. 월간중앙은 이 할머니로부터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으려고 행방을 수소문하던 참이었다.

13일 새벽 5시경 서울역에서 동대구역으로 향하는 KTX 첫차를 무작정 탔다. 전날 늦은 밤에 보낸 찾아뵙겠다는 문자 메시지에 대한 답을 아직 듣지 못했지만, 직접 부딪히는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크지 않았다. 익명의 활동가는 “(정의연 기자회견 전날인 5월 10일) 윤 당선인도 경남 밀양시로 내려가 할머니를 만나려 했지만, 결국 못 만난 것으로 안다”고 했다. 윤 당선인은 기자회견 다음 날인 어버이날에도 “찾아뵙겠다. 저희는 대립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라며 뵙기를 청했지만, 답을 듣지 못한 채 발길을 돌렸다고 한다.

5월 7일 기자회견의 파장은 컸다. 정의연 측은 ‘기억의 문제’를 들어 사태를 진화하려 했다. 한경희 정의연 사무총장은 이 할머니의 기자회견에 대해 “서운한 것도 있고 오해도 있고 기억이 왜곡되는 것도 있었을 것”이라며 “일종의 해프닝”이라고 치부했다. 윤 당선인이 소속된 더불어시민당의 우희종 대표 역시 “할머니 주변에 계신 분에 의해 조금 기억이 왜곡된 것 같다”고 했다. 보수 진영은 할머니의 주장을 인용해 갖가지 추측성 보도를 쏟아냈다. 진실을 가리고 논쟁을 정리하려면 이 할머니의 추가 증언이 반드시 필요했다.

6시간의 구술, 80년 전 일도 또렷이 기억


▎이용수 할머니는 ‘언론을 피해 잠적한 것 아니냐’는 세간의 추측에 “잠적한 적 없고 부끄러운 것도 없다”고 일축했다.
오전 6시 열차가 대전역을 막 지날 때쯤 할머니로부터 “찾아와도 좋다”는 연락이 왔다. 동대구역에 내려 딸기와 멜론 등 싱싱한 과일을 사서 일러준 숙소로 향했다. 머리부터 옷차림까지 흐트러진 곳 없이 반듯했다. 할머니는 “일찍 일어나 머리를 다듬었다”고 했다.

이 할머니는 언론을 피해 잠적한 것 아니냐는 세간의 추측을 불쾌해했다. “(언론 보도를) 보니 잘못된 게 많더라. 난 잠적한 적 없다. 내가 뭐가 부끄러워서 숨나. 나는 부정이 없기 때문에 당당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 할머니는 “목소리를 낼지 말지를 두고 그동안 마음고생이 컸던 탓에 이곳저곳 절을 다니며 마음을 다스렸을 뿐”이라고 했다. 윤 당선인에 대해서는 “지금이라도 이실직고하는 게 옳은 거지, 양심도 없다”고 했다.

오전 9시 30분에 시작한 인터뷰는 점식식사와 차담을 곁들여 오후 3시 무렵까지 이어졌다. 인터뷰라기보다 할머니의 구술을 기록하는 것에 가까웠다. 아흔둘 고령인데도 여섯 시간 가까이 이어진 대화에 지쳐 보이는 기색이 없었다. 위안부 피해자 인권 활동과 한·일 위안부 합의 당시 상황은 물론이고 열세 살 적 일까지 또렷하게 기억했다. 모국으로 돌아온 뒤 함께 지내던 1968년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일, 1992년 넷째 동생이 마찬가지 사고로 먼저 떠난 일을 떠올릴 땐 슬픔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연세가 실감 나지 않을 정도로 단장을 잘하셨다.

“데모(수요집회)하러 갈 때 전날에 머리를 염색하곤 했다. 내가 연약하게 보이면 쟤네(일본)가 더 무시하니까. 당당하려고 무척 노력한다. 그런데 코로나 때문에 두 달 들어앉았더니 폭삭 늙은 것 같다.”

인터뷰에 앞서 호칭부터 정해야 할 것 같다. ‘할머니·어머니·선생님’ 세 가지 중 어떤 게 마음에 드시나?

“어머니가 좋을 것 같다(웃음).”(※타 보도와 호칭을 통일하기 위해 본 기사에는 ‘할머니’로 기재했다.)

그동안 참았다 기자회견을 한 것인가?

“참았다기보다, 30년을 꾸준히 (위안부 피해자 인권운동을)해왔다. 윤미향이 열심히 했다. 열심히 한 것은 안다.”

그런데 윤 당선인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나?

“보니까 잘못한 게 많더라. 내가 몰랐던 것도. (윤 당선인이) 위인이 되려면 지금이라도 이실직고하는 게 옳다. 자꾸 변명하면 (거짓이) 나타난다. 대통령이 직위를 준다든지, 국회의원직을 준다고 해도 본인이 ‘이 문제(위안부 문제)를 해결해야 하니까’ (하고 거절했어야지), 그게 아니라 사리사욕을 챙기려고 다 미뤄놓고.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이건 아니다.”

윤 당선인이 사리사욕을 채웠다는 건 외부에서 받은 돈을 개인적으로 유용했다는 의미인가?

“나는 그런 것에 대해선 생각해본 적 없다.”

그러면 어떤 문제를 제기하고 싶었나?

“왜 위안부 문제를 마음대로 팔아먹나. 이건 명예훼손도 되고 이용한 것도 된다. 피해자를 위해 데모를 시작했는데, 피해자를 위해 한 게 거의 없다. 사리사욕을 챙겼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왜 거기(시민단체가 운영하는 위안부 피해자 거주 시설) 모신 할머니만 피해자냐? 전국의 할머니를 위하고 도우라고 주는 건데 어째서 거기 있는 할머니만 피해자라고 하나. 이것 한 가지만 해도 (문제가) 충분하다.”

“회견 날 아침에 미리 와 달라 했지만…”


▎2007년 2월 15일 미국 하원 외교위가 일본군 ‘위안부’로 강제 동원됐던 할머니들을 출석시킨 가운데 개최한 사상 첫 청문회에서 김군자(2017년 작고), 이용수, 네덜란드인 얀 러프 오헤른 할머니(왼쪽부터) 등 3명이 손을 잡고 증언을 기다리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위안부 합의 사실은 언제 알았나?

“(2015년 12월) 28일에 텔레비전을 보고 알았다. 외교부도 그렇지, 피해자들을 위해 (합의)했다면 피해자한테 알렸어야 한다. 그런데 나만 싹 속였다. (나에게는)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합의가 알려진 뒤에야 편지를 써서 보냈다.”

위안부 합의에 따라 일본이 낸 10억 엔으로 세운 화해·치유재단에서 주는 지원금을 정대협이 받지 못하게 했다는 주장이 있다.

“나눔의집에 갔는데 어떤 할머니가 이리 와보라며 ‘나는 암이 퍼져 있으니 이 돈 받아서 아들 줄래’라고 했다. 분명히 받는다고 했다.”

정대협은 국민 모금으로 모은 돈으로 화해·치유재단의 지원금을 받지 않은 분들께 1억원씩 드렸다고 해명했다.

“나는 그거 받았다. 하지만 (할머니들이) 정신없고 치매 앓고 할 적에 옆에 보호자가 있는데 보호자한테 주고 그냥 간 경우도 있었다.”

왜 이제야 문제를 제기한 건가?

“피해자가 원하지 않는 건 안 해야 할 것 아니냐. 내 생각엔 역사관을 넓혀서 교육관을 만들어 올바르게 가르치는 게 중요하다. 한마디를 하더라도 옳게 가르치는 게 중요하다. (수요집회) 나와봐야 배우는 거 하나도 없다. 사죄하라, 배상하라 하는데 뭣 때문에 하는지 알면서 하는 소리겠나.”

활동해오면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던 때가 언제인가?

“처음에는 ‘저 사람 (활동하기) 참 힘들겠다’는 생각에 어떤 일이 있어도 이해하려고 했다. 그렇게 참다가 제가 참 힘드니까 고치려고 해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러다 나이 구십이 넘었다. 이제는 더 활동할 수도 없을 것 같아서 사실대로 밝혀야겠다고 결심했다.”

기자회견 전 윤 당선인이나 정대협과 이야기를 해보지 않았나?

“어제(5월 12일) 보니까 새로 이사장이 된 사람(※이나영 신임 정의연 이사장)이 사죄 비슷하게 하더라고. 아무리 그래도, 윤미향이 대통령이 되든 뭘 하든 난 모른다. 난 다만 (탁자를 탁탁 치며) 윤미향이랑 같이 위안부 문제 해결하려고 한 그것밖에 모른다. 원래 3월 31일에 기자회견을 하기로 하고 그 전날 내가 (윤미향에게) 전화를 했다. ‘기자 한 사람 데리고 31일 아침에 와라. 와서 이야기를 하자’(고 말했다.) 그런데 30일 저녁에 (전화가 와서) ‘기자회견 하세요’ 그러더라. 그랬는데 31일 한경희 (정의연) 사무총장이 전화했다. ‘지금 기자회견 하러 나가시느냐’고 묻는 거다. 내가 ‘기자회견 하러 나가든지 말든지 당신이 뭔데, 난 당신한테 이야기한 게 없는데 왜 당신이 알려고 하느냐. 그리고 내가 분명히 이야기한다. 내가 멈추지, 안 하진 않는다’고 말했다. (국회의원 선거 때까지 멈춘다는 뜻인가?) 맞다. 분명히 이야기했다. (그래서) 선거 지나고 이야기했다. 단 한 번 이야기한 것 그대로지, 난 두 번 다시 다른 말 안 했다.”

정대협 관계자 외에 전화 온 사람은 없었나?

“이번 4월 총선 전에 민주당 소속의 이름 있는 정치인들 몇몇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윤미향 후보 잘 봐 달라는 건가?) 맞다. 윤미향이 그랬겠지. 그동안에(이번 선거에서) 비례대표에도 문제가 있었지 않나. 그런데 변호사 출신 여당 당선인도 가끔 전화해온다. 아까도 전화 와서 ‘할머니 응원한다’고 말했다.”

악몽으로 남은 위안소의 트라우마


▎2018년 8월 15일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수요집회에서 이용수 할머니가 발언을 마친 뒤 윤미향 당시 정의연 이사장의 부축을 받아 무대를 내려가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정대협이 피해자 지원 활동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소홀했나?

“2007년 원투원 결의안(※2007년 7월 30일 미 하원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된 위안부 결의안 121호. 2017년에 나온 영화 [아이 캔 스피크]의 소재로 쓰이기도 했다.) 때도 정대협은 없었다. “이렇게 (한국 안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국제적으로 알려진 일인데 어떻게 중간에 내팽개치고 갈 수 있느냐.”

이에 대해 정의연 측은 당시 이 할머니 등의 증언활동을 지원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당시 미국 현지에서 한 달간 이 할머니의 체류비 일체를 지원하며 증언활동을 도왔던 재미교포 단체인 가주한미포럼(현재 배상과 교육을 위한 위안부 행동)의 김현정 대표는 할머니의 기억을 뒷받침했다. 김 대표는 “정대협에서 할머니를 수행할 스태프 1명을 보냈으나 2주가량 있다가 개인적 사유로 귀국했다. 그 뒤로는 지원이 없었다”고 말했다.

윤 당선인과 언제 처음 만났나?

“1992년 6월 26일 나도 위안부 피해자라는 걸 알리려고 대구의 [한국일보] 사무실에 찾았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피해자라고 말하는 게 부끄러워서 ‘내 친구 이용수가 (위안부 피해자인데) 나보고 가서 이야기하라고 해서 왔다’고 관계자한테 말했다. 그랬더니 (정대협에) 전화로 연결해줬는데, 그때 전화를 받은 사람이 윤미향이었다.”

위안부 피해자라고 고백하기가 힘들었나?

“몇 번이나 근처에서 서성이다가 못 올라갔다. 다 나를 쳐다보는 것 같고, 잡으러 올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얼굴에 열이 오르더라. (위안부로 있던 시절 일본군이 다른 사람을) 고문할 적에 냈던 소리가 지금까지도 머릿속에서 울린다.”

위안소에 잡혀 있을 때 기억이 여전히 선한가보다.

“끌려갔을 적에 바닷가에 내려서 삼각형 모양 집에 들어가니 한쪽에 예쁜 언니들이 기모노를 입고 앉아 있더라. 어느 날 언니 하나가 ‘너(이용수 할머니)는 너무 어리다’고 해서 감춰줬는데 일본 군인이 ‘조센징 내놓으라’고 언니를 마구 때렸다. (언니는) 얼굴에서 검은 게 푹 나왔는데도 천으로 얼굴을 감싸고(버티더라). (결국 군인이 나를 부르는데) 내가 무서워서 쭈뼛대니까 머리채를 잡아서 끌고 갔다. 그리곤 어디 방문을 열고 들어가서 날 확 민다. 그리고 군홧발로 허리를 차는데 간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또 앉혀서 허벅지를 칼로 베는데 피도 안 나게 허옇게 갈라지고. ‘나 잘못한 거 없어요’ 빌었다.”

그렇게 아픈 기억을 갖고도 왜 신고를 주저했나?

“1946년에 대만 (수용소를) 나와서 배 타고 부산으로 왔다. 바다 방향으로 확성기를 설치해서 ‘일본에 끌려갔던 사람와서 이야기하라’고 해도 ‘나는 저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김학순이 증언을 할 때도 ‘나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알고 지내던 경찰관이 ‘누님도 (신고)하라’고 말해도 나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1940년대 강제징용부터 해방정국까지를 다룬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가 할 때도 그게 내 이야기란 걸 몰랐다.”

'선데이서울'에서 본 바닷가 초가집


▎지난 3월 26일 당시 국회 더불어민주당 대표회의실을 방문한 더불어시민당의 윤미향 비례대표 후보가 간담회에 앞서 인사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대만에서 돌아온 뒤 같이 지낸 가족은 없었나?

“나보다 여섯 살 어린 넷째 동생,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한번은 동생이 저한테 ‘누님은 시집가면 될 걸, (왜 안가고) 호적을 내 밑으로 두느냐’고 했다[※당시 민법상 호주(戶主)제는 부계 혈통을 바탕으로 했다. 호주제는 2018년 1월부로 폐지됐다]. 내가 (서러운 마음에) ‘어머니만 아니었으면 마후라 메고 죽었다’고 그랬다. 그랬더니 어머니가 ‘아니다, 아니다’ 하면서 ‘(친구 집에서) 한숨 자고 오라’고 달랬다. (그래서 친구한테 갔다가) 집으로 왔더니 조카가 ‘고모요, 할머니 지금 병원에 계세요’라고 하는 거다. 도립병원 응급실에 가니 어머니가 숨을 거두고 있었다. 자전거 뒷자리에 타고 가다가 겨울철 마른바닥에 떨어져 뇌진탕이 오셨단다.”

심정이 참담했겠다.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고(눈물). 내가 그렇게 (위안부로) 갔다 와도 어머니가 있으니까 의지하고 살았는데. 어머니랑 같이 살 땐, 모시고 어디든 가고 싶었다. 우연히 잡지 [선데이서울]을 보니 한 부부가 짚단을 가지고 바닷가에 집을 지어놓은 사진이 있었다. 그게 참 부러워서 (지인한테) 빌린 돈으로 울산 바닷가에 작은 땅을 사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어머니를 보내고 나니 내가 갈 곳이 없더라. ‘그냥 죽어볼까’ 생각도 했다. 그때(1968년) 내 나이 마흔 살, 어머니는 일흔네 살이셨다.”

다시 시간을 돌리자면, 1992년에 결국 신고를 결행했다.

“‘내일은 ([한국일보] 사무실로) 올라가야지’ 매일 각오만 했다. 그런데 6월 초 어느 날 새벽 4시에 전화가 왔다. ‘넷째 동생이 교통사고가 나서 응급실에 있어.’ 응급실에 가서 동생 머리를 만져보니까 꿀렁꿀렁(부분 함몰)한다. 아직 의식이 있어서 내가 ‘동생아, 동(洞)에서 내가 일본 끌려갔던 거라고 하더라. 그러니 신고하라고 하더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동생이 ‘누님 이야기하이소, 하이소, 하이소….’ 그렇게 세 번 이야기하고 하늘로 갔다. 너무너무 서럽고…(눈물). ‘네 호적 밑에 있는 게 그렇게 불편했는데, 내가 미리 몰랐다’고 통곡을 했다. 그리고 동생 장례를 치르고 나니 담이 생기더라. 그래서 결심을 한 거다.”

이후 어떻게 됐나?

“윤미향과 통화하고 (사흘 뒤인) 1992년 6월 29일에 서울에 올라갔다. 가보니 (위안부 피해자 가운데 한 명인) 문옥주라고 있더라. 장구를 잘 쳤다.(※故 문옥주 할머니. 1924년 대구에서 태어나 1936년 일본 헌병대에 의해 만주와 미얀마로 끌려가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했다. 1996년 대구동산병원에서 별세했다.) (문옥주 할머니가) ‘언니야, 너도 그랬나, 나도 그랬다’고 하면서 끌어안고 울던 게 어제 같은데….”

다음 세대에는 운동 변해야 문제 해결돼


▎지난해 8월 14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 기념식이 열린 서울 남산 옛 조선신궁터 앞에서 이용수 할머니가 한 참석자와 포옹하고 있다. / 사진:뉴시스
위안부 피해자를 ‘성노예’라고 표현한 걸 불쾌해했다고 들었다.

“위안부라는 명칭은 바꾸면 안 된다. 성노예라고 하는데, 너무 더럽고 속상하다. 윤미향한테 이야기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해야 미국이 무서워한다’고(하더라). 그래서 내가 ‘그런 말 말아라. 나는 너무 부끄럽다. 내가 왜 성노예냐’(고 했다).”(※정의연의 정식 명칭에 ‘일본군 성노예 문제 해결을 위한’이라는 표현이 들어가 있다.)

이 할머니와 가까운 익명의 관계자는 “할머니는 정대협이 1993년 출간한 증언집에 대해서도 탐탁지 않아 한다”고 귀띔했다. 정대협은 1993년 2월 위안부 피해자 19명의 증언을 모은 책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1]을 출간했다. 이 책에는 이 할머니의 증언(‘원통해서 못살겠다, 내 청춘을 돌려다오’)도 실려 있다.

1993년 증언집의 문제가 뭔가?

“그 책을 6500원씩 주고 팔아먹더라. (그땐) 증언집이 뭔지도 몰랐다.”

앞서 이 할머니는 2015년 6월 24일 시사주간지 [미래한국]과의 인터뷰에서 “증언을 들으려면 따로 조용한 곳에서 정식으로 해야지 식사하면서 ‘할머니 어디 갔다 왔어요?’라고 질문하고 대답한 게 대부분”이라며 “정대협 담당자들이 본인한테 확인도 안 하고 증언집을 내놨다. 그러니 사실과 다른 부분이 많다”고 말한 바 있다.

일각에선 ‘개인적 감정’ 혹은 ‘제3자의 이간질’ 때문에 기자회견에 나섰다고 말한다.

“개인적인 원망이나 분함은 없다. 내 잇속을 채우려는 게 아니라 다음 세대는 다른 방식의 운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나선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이(위안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수요집회를 그만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유는 뭔가.

“학생들이 추우나 더우나 와서 앉아 있고, 저금통 털어서 가져오고 한 돈을 의심 없이 받더라. 난 그 학생들이 참 안타까웠다. 돈을 받으면 더 보태 점심이라도 먹여서 보내든지. 할머니들이 안타까워서 오는 학생들에게 옳은 역사 공부를 가르쳐야 하는데, (정대협은) 자기들 (단체) 운영하느라 바쁘다. 이제 학생들이 올바른 역사를 배워야 하는데 말이다. 대한민국 학생들이 대한민국 주인이다. 일본 학생들과 교류하면서 봐야 무엇이 맞는지, 잘못인지 알게 되리라 생각한다.”

교육이 꼭 필요하다고 느꼈던 계기가 있었나?

“아베 총리가 ‘한국이 거짓말한다’고 하니까 (일본에서 온)학생들이 정말 그런 줄 알더라. 이웃 나라니까 사이좋게 지내면서 올바른 역사를 알려준다면 자연히 깨닫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식으로 (위안부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이 할머니는 위안부 운동 방식에 관해 오래전부터 일관되게 주장해왔다. 과거 [미래한국]과 인터뷰에서 이 할머니는 “내 소원은 이웃 나라인 한국과 일본이 원수지지 않는 것”이라며 “나는 일본 학교에 가서도 학생들에게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고 했다. 또 “정대협의 수요집회는 무엇을 위해 하는지 모르겠다. 처음도 없고 끝도 없이 무조건 ‘사죄하라’, ‘배상하라’면서 집회 횟수만 채우면 된다는 식이다”라며 수요집회 방식에 부정적 의견을 내비치기도 했다.

“기자회견, 1년을 혼자 고민하고 결정”


▎5월 13일 대구의 한 한식당에서 이용수 할머니가 점심 식사를 마친 뒤 월간중앙과의 인터뷰를 이어가고 있다.
수요집회에 정말 안 나갈 건가?

“너무 기력이 없다. 이제 나가봐야 나밖에 없다. 피해자가 없는 데모(집회)를 왜 하나. 피해자가 있으니까 학생들이 오는 건데, 난 그 학생들 더 고생시키기 싫다. 없는 돈 받아다가 차곡차곡 쓰는 것 싫다.”

할머니의 기자회견이 외부에서 개입한 것 아니냐는 의혹도 나온다.

“1년을 혼자 고민하고 결정한 거다. 내가 그 사람(※최용상 가자!평화인권당 대표)을 이용한 건 기자를 소개해 달라고 한 것뿐이지 다른 건 없다(※윤 당선인과 더불어시민당은 최 대표가 비례대표 공천에서 떨어진 데 불만을 품고 이 할머니가 기자회견을 하도록 유도했다고 주장했다). 난 누구한테도 의논한 일이 없다. 최봉태(변호사)는 (5월 7일) 기자회견 이후에는 만난 적도 없다. 그 사람이 언론 인터뷰에서 내가 정부의 무책임한 태도 때문에 기자회견을 했다고 하는데, 그것도 그 사람 의견일 뿐이다.”

2011년 헌법재판소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정부가 노력하지 않는 부작위 상황은 위헌이라고 결정했는데, 당시 소송을 제기한 당사자가 이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자들이고 최봉태 변호사는 소송 대리인으로 참여했다. 최 변호사는 이 할머니의 기자회견 뒤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이 할머니가 위안부 청구권에 무심한 정부에 분노한 것’ 등의 의견을 냈다.

지금 솔직한 심경은 어떤가?

“‘내가 너무 오래 살았나’ 그런 생각이 들다가도 김학순(※1991년 위안부 피해 사실을 최초로 공개 증언한 피해 할머니. 97년에 작고했다.)이 시작했지만 이용수가 마무리 지어야 한다고 결심하니 마음이 나아졌다.”

“정대협(정의연)은 고쳐서 못 쓴다”

운동을 마무리 짓겠다는 건 무슨 뜻인가?

“운동을 끝내자는 게 아니다. 아베 총리의 악행을 보고도 일본에 면죄부를 줄 순 없다. 아베 총리는 항상 거짓말을 한다. 다만 운동하는 방법을 바꿔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야 우리 다음 세대가 일본에 당당하게 목소리를 낼 수 있다. 또 그렇게 해야 먼저 하늘로 간 할머니들한테 당당하게 ‘내 할 일 마쳤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할머니는 월간중앙과 인터뷰 도중 수행인을 통해 ‘5월 7일 기자회견 이후 관련 논란에 대한 입장문’(이하 입장문)을 다른 언론사에 배포하기 전 기자에게 보여줬다. 입장문에는 “정의연 성과에 대한 폄훼와 소모적인 논쟁은 지양돼야 한다”, “지난 30여 년간 진실을 밝히기 위한 투쟁 과정에서 나타났던 사업 방식의 오류나 잘못을 극복하기 위한 과정이 필요하다”는 당부가 담겼다.

입장문에 이어 13일 월간중앙과 이 할머니의 인터뷰 일부가 [중앙일보]를 통해 보도되자 정의연은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동지로 30년 세월을 같이 보냈던 윤미향 전 대표가 곁에 있지 않은 상황에 대한 서운함과 상실감, 문제 해결을 위해 더 열심히 노력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한다”고 짧은 입장을 내놨다.

월간중앙은 이 할머니의 진심이 왜곡되지 않도록 여러 차례 ‘정대협(정의연)이나 윤미향 당선인과 만나 오해를 풀 생각은 없느냐’고 물었다. 이때마다 이 할머니의 답변은 한결같았다.

“화해는 안 한다. 화해는 할 수 없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다시 한번 ‘정대협(정의연)을 고쳐 쓸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비록 다투더라도 지난 30여 년간 진실을 밝히기 위한 투쟁을 함께해온 동지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할머니는 잘라 말했다.

“정대협(정의연)은 고쳐서 못 쓴다. 해체해야 한다. 자기 욕심 차리는 그런 사람들한테는 맡길 수 없다.”

- 대구=글·사진 문상덕 월간중앙 기자 mun.sangdeok@joongang.co.kr / 녹취 정리 심민규 인턴기자

202006호 (2020.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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