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북한.국제

Home>월간중앙>정치.사회.북한.국제

[전문가 진단] 보수 진영 필패(必敗) 구도 탈출법 

‘한국판 제3의 길’, 진보 우파로 거듭나라! 

■ 참회 없이 무능·오만·분열… 해체 수준의 ‘그라운드 제로’에서 시작해야
■ 중도강화·세대교체·도덕성 회복 없이는 ‘민주당 집권 30년’ 현실화
■ 보수 재건의 마지막 기회… 진보 살린 盧처럼 ‘보수의 노무현’ 나올 수 있나


▎4월 15일, 21대 총선 참패 출구 조사 결과가 나온 뒤의 미래통합당-미래한국당 개표상황실 모습.
4·15 총선에서 보수 정당이 궤멸적 참패를 당했다. 민주당 계열 정당이 총선에서 과반을 넘어 이처럼 압승(180석)을 한 것은 우리 정치사에서 처음이다. ‘수퍼 여당’이 된 민주당은 중앙정부·지방정부·국회까지 독차지하면서 개헌 빼고는 다 할 수 있게 됐다.

이번 총선 결과가 주는 함의는 그동안 한국 사회를 지배했던 주류 세력인 보수 산업화 세력이 진보 민주화 세력으로 교체될 수 있다는 것이다. 민주당은 1987년 민주화 이후 전국 규모 선거에서 네 번 연속 승리한 최초의 정당이 됐다. 그렇다면 문재인 정부 3년 동안 경제 침체, 조국 사태로 인한 도덕성 붕괴, 청와대의 울산 선거 개입 의혹, 남북 관계 교착과 외교 고립 등 정권 심판 요인들이 차고 넘쳤는데도 보수는 왜 참패했는가.

통합당은 단적으로 코로나19에, 전략에, 막말에 졌다. 더구나 유권자 지형 변화는 결정적인 변수가 됐다. 총선의 본질은 정권을 심판하는 것이다. 그런데 코로나19 사태로 극도의 불안과 공포를 느낀 유권자들이 국난 극복을 위해 정부 실정에도 불구하고 견제보다는 안정을 택했다. 이런 조짐은 총선을 앞두고 대통령 국정운영 지지도가 고공 행진하면서 예상됐다. 한국갤럽의 올 2월 4주째 문 대통령 국정 수행 긍정 평가는 42%, 부정 평가는 51%였다. 그런데 3월 2주째 긍정 49%, 부정 45%로 골든크로스가 발생했다. 그 이후 문 대통령 지지도는 꾸준히 상승했다. 급기야 총선 직전인 4월 셋째 주(13~14일) 조사에서 문 대통령 직무 수행에 대해 긍정 평가(59%)가 부정 평가(33%)를 압도했다. 긍정 평가자에게 그 이유를 물은 결과, 가장 많은 54%가 ‘코로나19 대처’라고 응답했다. 코로나19 관련 응답은 10주째 긍정 평가 이유 1순위다. 여기엔 코로나19가 팬데믹 단계에 이르자 오히려 한국 정부가 ‘방역 모범 국가’로 평가받으면서 반전이 이뤄졌다.

변하는 민심 모르고 코로나19 사태 쟁점화시켜


▎4월 5일, 황교안 당시 미래통합당 총괄선대위원장(오른쪽)이 ‘우한코로나19’ 긴급재난지원금 관련 대국민 브리핑에서 ‘전 국민 50만원 지급’을 제안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중도층의 대통령 직무 수행 긍정평가가 55%인 반면 부정 평가는 34%였다. 결과적으로 ‘현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여당 후보가 많이 당선돼야 한다’는 지원론이 49%, ‘현 정부를 견제하기 위해 야당 후보가 많이 당선돼야 한다’(39%)는 견제론보다 높게 나타났다. 연령별로 보면 ‘여당 승리(정부 지원론)’가 30~50대에서 60% 안팎, 60대 이상에서는 ‘야당 승리(정부 견제론)’ 의견이 54%, 20대에서는 양론이 각각 40% 내외로 비슷하게 맞섰다. 2월과 3월에는 지원·견제 응답이 팽팽하게 갈렸으나 총선 직전 다시 간격이 벌어졌다.

분명 코로나19 사태는 정부심판론이 먹혀들기 어려운 구조를 만든 것 외에 유권자 후보 선택 기준도 바꿨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올 4월 4~5일에 벌인 제2차 유권자 의식조사에서 후보 선택 고려사항으로 ‘소속 정당’이 31.1%로 가장 높았다. 4년 전과 비교해 12.2%p 높았다. 코로나19 사태로 후보와 공약 등 기존 선거의 관심사들이 모두 묻혀버리고 접촉이 최대한 억제되는 ‘비대면 선거’가 전개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앞선 갤럽 조사에서 민주당 지지도는 41%로 통합당(25%)을 압도했다. 당연히 집권당에게 유리한 환경이 만들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통합당의 가장 치명적인 실수는 코로나19 민심이 완전히 변하고 있는데 코로나19 사태를 쟁점화한 것이다. 스토크스(stokes)는 선거 이슈 유형을 크게 합의 쟁점(valence issue)과 대립 쟁점(position issue)으로 구분한다. 합의 쟁점은 긍정적 또는 부정적인 어느 한편으로 평가되는 조건으로서 유권자의 거의 모두가 이 쟁점에 있어서 동일한 선호를 갖는다. 이 쟁점은 특정 정당 및 후보자의 능력이나 이미지와 밀접히 관련되는 논쟁의 대상이 된다. 지역주의 타파, 정치 개혁 등이 이에 해당된다.

반면, 대립 쟁점은 유권자의 선호가 찬성과 반대로 나눠지는 입장이다. 무상 급식 등 복지 이슈가 전형적인 사례다. 그런데 코로나19 사태와 같은 국난 위기 때 야당은 위기를 쟁점화하는 것이 아니라 초기부터 정부에 협력하는 입장을 취해 국민의 불안과 불만을 해소시켰어야 했다. 정부가 ‘소득 하위 70%에 100만원 지급’ 방침을 밝혔을 때 통합당은 “현금 살포”라고 공격하지 말고 전략적으로 이를 전격 수용하는 포용적 자세를 취했어야 했다. 나중에 ‘전 국민 50만원 지급’ 제시는 통합당이 오히려 코로나19 사태를 선거에 이용하려고 한다는 역풍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코로나19 선거 국면에서 통합당은 민주당에게 이슈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겼다. 여기에 선거 막판에 터진 김대호·차명진 통합당 후보의 막말 파문은 불난 곳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됐다. 통상 선거 당락은 20%를 차지하고 있는 중도층 유권자가 결정한다. 그런데 이들은 정치인들의 의사표출 방식, 즉 태도에 큰 관심을 갖는데 여기서 막말은 문제가 된다.

통합당은 그동안 한국 선거를 지배했던 ‘2040세대 vs 5060세대’ 유권자 지형 구도가 ‘2050세대 vs 60 이상 세대’로 전환되는 것을 감지하지 못했다. 총선 당일 실시된 지상파 3사 출구 조사에 따르면, 유권자 수가 가장 많았던 50대(19.7%)는 한때 보수표로 분류되었지만 이번엔 60대보다는 40대에 더 가깝고, 20대와 가장 유사했다. 지역구 선거에서 50대의 지지는 민주당 49.1%, 통합당 41.9%였다. 2012년 12월 대선 당시 출구 조사와 비교해보면 큰 변화다. 당시 50대는 투표율이 82%였고, 박근혜 후보 지지 62.5%, 문재인 후보 37.4%였다. 약 8년 만의 이런 변화는 50대가 진보 성향이 강한 86운동권 세대로 전환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분명, 코로나19 사태는 통합당 참패의 촉발 요인이었다.

왜곡된 현실 인식 속 시대정신 놓쳤다


▎미래통합당 울산 후보들이 21대 총선 출정식에서 큰절하며 한 표를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다중 복합적 기저 요인 때문에 폭망했다는 것이 더 설득력 있다. 한국 보수는 무능하고 오만하며 분열됐기 때문에 졌다. 왜곡된 현실 인식 속에 갇혀 시대 변화를 읽는 능력이 부족했다. 여전히 사회의 주류라는 허황된 생각 속에서 과거 국정 농단과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에 대해 참회하지 않았다. 보수 몰락의 책임이 있는 박 전 대통령은 지금까지 진정한 사과가 없었고, 친박의 폐족 선언도 없었다. 반대로 고질적인 계파주의에 빠진 채 대안 없는 투쟁과 품격 없는 행동으로 비호감의 퇴행적 수구 집단으로 변질됐다.

시대정신이란 ‘한 시대에 지배적인 지적·정치적·사회적 동향을 나타내는 정신적 경향’이다. 현재가 우리 사회가 처한 상황을 진단하고 미래 방향을 전망하는 가치의 집약이다. 그런데 통합당은 시대정신에 입각한 혁신과 변화를 이뤄내지 못했다. 한국 보수는 그동안 지역주의, 박정희 시대에 대한 향수, 진보 세력에 대한 중도층의 실망으로 인한 반사이익에 의존해왔었다. 그런데 박근혜 실패 이후 산업화의 기적을 만든 박정희 패러다임은 더는 유효하지 않다.

그렇다면 보수는 어떻게 재건돼야 하나. 기존의 보수 우파에서 ‘진보 우파’라는 제3의 길로 가야 한다. 시장 경제와 자유민주주의라는 정통 보수의 가치로는 부족하다. 시대가 빠르게 변하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큰 진보 성향의 30~40대 젊은 세대를 포용하기 위해 관성에 갇힌 생각에서 벗어나 변화가 필요하다. 중도를 선점하기 위한 대전환에 나서야 한다. 이 대목에서 영국 노동당을 배울 필요가 있다.

1979년 마거릿 대처가 이끄는 영국 보수당에게 정권을 뺏긴 영국 노동당은 1994년 당권을 장악한 토니 블레어가 ‘새 노동당(New Labor)’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당을 완전히 개조했다. 노동당의 핵심 가치이며 상징이던 당헌 4조 ‘생산수단의 공동 소유’를 폐지하면서 기든스 교수가 주창한 ‘제3의 길(The Third Way)’을 받아들였다. 노동당이 핵심 지지 세력인 노조의 거센 반발을 무릅쓰고 과감하게 중도로 우클릭한 것이 주효했다. 한국 보수는 중도를 향해 좌클릭해야 한다.

여기서 유념해야 할 사항은 ‘중도 강화’가 보수 포기를 의미하는 건 아니다. 보수든 진보든 자신들의 외연을 확대하려면 자신들과 경쟁하는 정당이 선점하고 있는 이슈에 대한 과감한 도전을 내포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통합당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발상의 전환이다. 중도 강화를 위한 창조적 파괴를 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보수가 강조하는 가치는 효율성·자율·성장·체제·안보·경쟁이다. 반면, 진보가 강조하는 가치는 평등·투명·분배·민족·통일·포용이다. 통합당이 중도 강화를 위해 필요한 창조적 파괴는 바로 진보의 핵심 가치를 보수의 시각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가령, 시장경제 논리를 앞세워 무조건 재벌을 옹호하는 자세에서 벗어나 대기업의 사회적 책임성을 강조하고 기업 운영이 유리알처럼 투명하게 이뤄질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이제 ‘압축 성장’ ‘시장 경제’ ‘반공 보수’를 뛰어넘는 ‘균형 성장’ ‘약자 배려’ ‘평화 보수’로 변해야 한다.

서민과 사회적 약자를 위한 포용적 보수의 길을 걷지 못하면 보수당은 다음 선거에서도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2006년 스웨덴 총선에선 중도 우익 4개 정당으로 구성된 보수연합이 승리했다. 당시 출구 조사에서 유권자의 정당선택에서 가장 중요한 정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56%가 ‘고용문제’라고 답했다. 당시 승리의 주역이었던 보수당은 사민당의 전유물로 여겼던 고용 문제를 이슈화했다. 보수당이 내건 선거 슬로건은 “진짜 노동자를 위한 정당은 보수당”이었다. 그동안 노동자 이익을 대변하는 사민당은 경제를 망쳐 노동자를 어렵게 했지만, 보수당이 경제를 살리고 고용을 늘려 오히려 노동자의 삶을 바꿀 수 있다는 논리를 펼친 것이다.

서민·약자 끌어안고 참회·반성 통해 도덕성 회복해야


▎노동당에게 정권을 뺏긴 보수당의 중진 원로 정치인들은 30대인 데이비드 캐머런을 영입하며 스스로 세대교체를 이뤄냈다.
대선 패배 후 1995년 정계에 복귀한 김대중 총재가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면서 ‘서민과 중산층을 위한 정당’을 표방해 마치 진보 좌파 정당만이 서민을 대변하는 정당으로 인식됐다. 1977년, 박정희 전 대통령은 온갖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민을 위한 획기적인 복지 정책으로 전 국민 의료보험제를 채택했다. 영국 보수당은 부자 감세가 아니라 서민 감세 정책을 펼쳤다. 서민은 더는 진보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제 통합당은 서민의 편에 서서 진정 서민을 위한 정당으로 변해야 한다.

한국 보수는 그동안 부패와 냉전, 반공 이미지 속에서도 진보 세력의 무능과 오만으로 일시적으로 반사 이익을 얻었지만, 이제는 어렵다. 이제 진정 필요한 것은 남을 탓하기보다는 부패·인권탄압·정경유착 등 과거 잘못에 대해 끊임없이 참회하고 반성해야 한다. 이런 참회를 통해 도덕적 고지를 확보할 수 있고, 비로소 보수의 상징인 자유주의를 논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될 것이다. 보수가 부패한 적폐 청산의 대상이고 능력마저 없다고 국민에게 인식되었기 때문에 어둠 속으로 치닫게 된 것이다.

조국 사태 이후 진보 진영의 최대 아킬레스건은 도덕성 붕괴다. 우리 사회에 도덕적 해이와 거짓과 위선이 양산되고 있다. 보수는 진보와 치열한 도덕성 경쟁을 통해 국민의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미국 하버드대 마이클 샌델 교수의 지적처럼 도덕성이 살아야 정의도 살 수 있고, 무너진 원칙도 다시 바로 세울 수 있다. 이것이 보수가 ‘도덕’이라는 문제에 관심을 갖고 치열한 논쟁을 벌여야 하는 이유다.

1997년 토니 블레어에게 정권을 빼앗긴 영국 보수당은 2005년 정권교체를 위해 38세인 데이비드 캐머런을 당수로 추대했다. 그는 취임 일성으로 ‘책임지는 기업’을 내세웠다. 보수라고 과거처럼 무조건 대기업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질 때만 보호해준다고 선언했다. 그 후 캐머런은 2010년 보수당을 총선 승리로 이끌면서 43세 젊은 나이에 총리직에 올랐다. 주목해야 할 것은 당시 캐머런을 영입한 사람들이 보수당의 중진 원로 정치인들이었다. 2006년 스웨덴 총선에서 승리한 만년 야당 보수당은 2003년 당시 38세인 젊은 프레데릭 라인펠트를 새로운 당수로 내세웠다. 메트릭스리서치 조사에서도 74%가 미래통합당이 변화하려면 ‘30~40대 세대교체로 당의 중심인물을 바꿔야 한다’고 응답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야당이 세대교체를 해야 한다’는 응답은 통합당을 지지했던 투표자(76%)가 민주당을 지지했던 투표자(72%)보다 더 높았다.

4·15 총선 이틀 전에 실시한 한국갤럽 조사(4월 13~14일) 결과, ‘투표를 통해 우리나라 정치를 바꿀 수 있다’는 견해에 71%가 동의했다. ‘그렇지 않다’는 21%로 나타났다. 그런데 2015년 10월 동일 질문에는 ‘바꿀 수 있다’ 52%, ‘그렇지 않다’ 40%였고, 2017년 5월 대통령 선거 직전에는 각각 68%, 22%로 바뀌었다. 2016년 촛불 집회 이후 국민의 투표 효능감이 증대하고 있다. 이번 총선에서 사전 투표율이 26.6%였고, 총 투표율이 66.2%로 크게 상승한 것은 이런 투표 효능감 증대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확실한 3040으로의 세대교체를 통한 젊은 보수화


▎21대 총선 당시 김종인 미래통합당 선대위원장(왼쪽 둘째)이 회의 도중 미래통합당 심재철 공동선대위원장의 발언을 듣고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젊은 층이 투표 영향력을 더 높이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꿀 수 있다’는 응답이 진보 성향이 강한 30·40대에서는 각각 81%와 79%인 반면, 보수 성향이 강한 60대 이상은 56%에 불과했다. 지지 정당별로 보면 민주당 지지층의 80%가 ‘투표로 정치를 바꿀 수 있다’고 응답해 통합당 지지층(66%)이나 무당층(61%)보다 투표 효능감이 높았다. 이런 조사 결과가 주는 함의는 보수가 30~40대 젊은 세대의 지지를 확보하지 못하면 다음 선거에서도 패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보수가 세대교체를 통해 이들 젊은 세대와 정서적 일체감을 강화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보수 재건은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만약 이번 기회도 날려버리면 보수의 미래는 결코 없다. 정당 재편성이 일어나 ‘민주당 집권 30년’이 현실화될 수도 있다.

향후 한국 보수의 최대 과제는 어떻게 다시 국정을 이끌어갈 수 있는 정치 세력으로 거듭나고 이를 국민에게 인정받느냐는 것이다. 실낱같은 희망은 있다. 민주당이 전례 없는 압승을 했지만, 민주당과 통합당의 지역구 득표율은 각각 49.9%(1434만 표) 대 41.5%(1191만 표)로 차이는 8.4%p(약 243만 표)였다. 비례대표 정당 득표율도 더불어시민당(33.4%)과 미래한국당(33.8%) 간에 거의 차이가 없었다. 메트릭스리서치 조사에서 여당이 압승을 거둔 이유로 ‘통합당이 잘못해서’(61%)가 ‘민주당이 잘해서’(22%)보다 세 배가량 많았다. 여당이 압승을 거둔 이유가 추진해온 주요 정책들에 대한 긍정 평가 때문이 아니라 반사이익을 얻었다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제임스 데이비스(James C Davis)가 제시한 J-커브 이론을 적용하면, 코로나19 사태 해결에 대한 기대와 국민이 체감하는 성취 간에 인내할 수 없는 격차가 커지면 민심이 폭발할 수 있다. 매트릭스리서치 조사 결과, 현 정부의 핵심 경제 정책인 ‘소득주도성장’에 대해 ‘앞으로 기조를 유지해야 한다’(30%)보다 ‘변화가 필요하다’(63%)는 의견이 두 배가량 많았다. 탈원전 정책에 대해서도 ‘변화가 필요하다’(59%)는 응답자 비율이 ‘기조를 유지해야 한다’(33%)에 비해 훨씬 높았다. 민주당이 승리에 도취해 정책 기조를 바꾸지 않고 ‘협치와 포용’보다 극단과 배제의 정치에 몰입해 갈등과 분열을 일으키면 승자의 저주가 될 수 있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분열될 수도 있다.

더구나 이념적 운동장은 아직 진보로 기울어져 있지 않다. 2017년 대선, 방송 3사 출구 조사를 보면, 진보 27.7%, 중도 38.4%, 보수 27.1%였다. 2018년 지방선거 방송 3사 출구 조사에서는 진보 29.2%, 중도 39.8%, 보수 24.9%였다. 2017년 대선 때와 비교해 진보는 1.5%p 상승한 반면, 보수는 2.2%p 하락했다. 중도는 1.4%p 상승하는 데 그쳤다. 메트릭스리서치의 2020년 총선 사후 결과, 진보 27.9%, 중도 37.2%, 보수 25.8%로 2018년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 결국 진보가 많아졌기 때문이 아니라 중도가 진보의 손을 들어주면서 민주당이 승리한 것이다. 따라서 보수가 중도의 지지를 회복하면 재건될 수 있다. 특히 과거 보수색이 강했던 성향에서 최근 ‘스윙 보터’로 변화한 ‘50대 중도층’이 관건이다.

총선 패배 이후 당 재건 방안을 찾던 통합당의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구상이 일단 제동이 걸렸다. 혁신적인 변화 없이는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 ‘선 비대위 구성, 후 전당대회 방식’으론 현재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 통합당은 해체하는 수준의 ‘그라운드 제로’에서 새로 시작해 크게 변해야 한다. 그것이 유일한 생존 방식이다.

과거와 같이 투쟁을 통한 정권 교체 방식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이런 정치 실험은 이번 총선에서 참패로 귀결됐기 때문이다. 보수의 미래는 국민이 보수에 대한 관심과 참여를 확대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홍준표·안철수·유승민·원희룡·오세훈·김태호 등 누구나 대선 후보 경선에 참여할 수 있는 오픈 플랫폼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여기에 김종인 비대위원장이 말한 ‘70년대생 40대 경제통’ 또는 ‘830세대’(1980년대생, 30대, 2000학번)도 참여해 경쟁하게 하면 큰 반응을 일으킬 것이다.

통합당 새 비대위 체제의 핵심 과제는 진보 세력과 대항할 수 있는 모든 정치인이 한 울타리에서 치열하게 경쟁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일이다. 대선 1년 전인 내년 3월부터 이들이 전국을 돌며 토론회를 통해 자신의 철학과 비전을 제시하면서 국민의 관심을 끌어 올릴 수 있는 ‘완전 국민참여경선제’를 위한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인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한다면 누구나 대선 후보 경선에 참여해 투표하는 미국식 오픈 프라이머리가 될 수 있다. 미국은 이런 경선 방식을 통해 무명의 카터·클린턴·오바마가 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됐고, 결국 대선에서 승리했다. 2002년 대선 당시 지지율 4%에 불과했던 노무현 후보의 ‘노풍(盧風)’이 가능했던 것도 16개 시·도를 돌며 실시한 국민참여경선제였다.

참회 없는 혁신은 허구, 대안 없는 투쟁은 공허


▎200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광주 국민참여경선에서 1위 득표를 차지한 노무현 후보와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모임)’ 회원들이 승리의 V자를 펴 보이며 환호하고 있다.
보수 세력이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고 정권 교체를 이룩하기 위해선 2022년 대선에 맞춰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길게 호흡해야 한다. 통상 한 정치 지도자가 돌풍을 일으킬 때 ‘3A 법칙’이 작용된다. 첫째는 ‘관심(Attention)’ 단계다. 시대 변화를 정확하게 읽고 국민이 공감하는 이슈를 제기하면 관심을 끌 수 있다.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은 민주화 투쟁, 지역주의 청산, 특권과 차별 철폐 등을 내걸고 투쟁하면서 온 국민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둘째는 ‘매력(Attraction)’ 단계다. 선동적인 말과 행동, 신선함 등으로 일시적인 관심을 끌 수는 있지만, 매력이 없으면 오래가지 못한다. 지도자가 강한 도덕성, 예리한 역사의식, 저항하기 어려운 설득력, 누구나 희구하는 미래의 비전, 그리고 심금을 울리는 상징성, 자기희생 등을 갖추어야만 매력이 샘물처럼 솟아날 수 있다. 셋째는 ‘호감(Affection)’ 단계다. 국민이 지도자와 정서적 일체감을 형성하면서 호감을 갖게 되면 강력한 지지를 보내게 된다.

향후 보수를 이끌어갈 기수가 하루아침에 하늘에서 떨어질 수는 없다. 보수의 새 기수는 ‘3A 법칙’에 맞춰 혜성처럼 등장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수는 축적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습관적으로 살아왔던 삶에 대해 변화를 주는 것이 철학이다. 단언컨대, 보수 변화의 시작은 철학이 돼야 한다. 향후 보수는 ‘철학이 있는 보수’ ‘실력 있는 보수’로 거듭나야 한다. 단언컨대 참회 없는 혁신은 허구고, 대안 없는 투쟁은 공허하다.

보수가 진보를 이길 수 있는 힘은 ‘경쟁과 창의’라는 보수의 가치에서 나올 수 있다. 한국 보수가 무한 경쟁의 글로벌시대에 4차 산업혁명을 슬기롭게 헤쳐나갈 수 있는 비전과 전략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미래가 보인다. 한국 보수는 진정으로 국민이 행복해질 수 있는 비전과 정책을 찾아야 한다. 성장과 분배의 절묘한 균형 속에서 사회적 양극화를 해소하고 누구나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국가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해야 한다. 보수가 인정하든 하지 않든 오늘날 진보 시대의 동력은 ‘바보 노무현’이다. 진보 세력들은 노무현의 비극적 죽음과 노무현 정신이 진보를 살렸다고 생각한다. 보수에게 묻고 싶다. 향후 누가 ‘보수의 노무현’이 될 수 있을까? 과연 ‘보수의 노무현’은 탄생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이 보수의 미래에 대한 해답이 될지 모른다.

- 김형준 명지대 교양대학(정치학) 교수

202006호 (2020.05.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