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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착취재] 검찰 특수부 선배들이 말하는 한동훈 

“신념 안 맞으면 부서장과도 선 긋는 나르시시스트” 

안덕관 월간중앙 기자
“출세 조건인 처가 배경과 능력 다 갖춘 후배… 누구 라인 따른 적 없다”
“시련 감수하는 신념가적 기질… ‘尹 아바타’ 별칭에 자존심 상했을 것”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1월 22일 오전 국회로 출근하고 있다. 대통령실은 전날 한 위원장에게 사퇴하라는 요구를 전달했다. / 사진:연합뉴스
대법원과 대검찰청, 서울중앙지법, 서울중앙지검이 몰려 있는 법조타운 일번지인 서울 서초동에서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여전히 법조인들의 술자리에서 빠지지 않는 단골 이야깃거리다. 그가 서초동을 떠난 지 여러 해가 지났지만, ‘검사 한동훈’에 대한 법조인들의 기억은 마치 무용담처럼 서초동을 떠돈다. 세간에는 서울법대를 나온 천재, 조선제일검, ‘윤석열 사단’의 핵심 멤버 등으로 그를 평가한다. 한 위원장이 윤석열 정권의 최고 실세가 될 수 있었던 배경으로 꼽는 요소들이다.

하지만 한 위원장이 ‘김건희 리스크’를 두고 윤 대통령과 각을 세우는 모습은 당초 윤 대통령과의 끈끈한 인연을 출세가도의 동력으로 꼽았던 이런 해석에 의문을 던진다. 의리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다던 윤석열 사단 멤버의 행동으로 보기에 이해되지 않는 점들이 곳곳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이런 궁금증을 풀 곳은 역시 한 위원장의 20년 검사 행적이 새겨져 있는 서초동뿐이다. 검사 시절 한동훈을 가까이서 지켜봤던 선배 검사들의 기억을 빌려 다시 완성한 퍼즐의 한동훈은 ‘라인 잘 탄 엘리트 검사’가 아니라 신념가적 기질이 다분한 ‘나르시시스트’에 가까웠다.

취재에 응한 검사 출신 법조인들은 한 위원장이 법무부 장관과 여당 대표직에 오른 것이 윤석열 사단의 핵심이었기 때문이라는 데 대체로 이견이 없었다. 이른바 ‘소통령’으로 불리며 윤석열 정권의 실세로 자리매김한 배경에는 윤 대통령의 전폭적인 신뢰가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난 1월 19일 그가 대통령의 역린(逆鱗)을 건드리면서 두 사람의 관계에는 뚜렷한 균열이 생겼다. 김건희 여사의 ‘명품백 수수’ 논란에 대해 김 여사를 마리 앙투아네트에 견줘 직격한 김경율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을 한 위원장이 두둔하면서부터다. 한 위원장은 명품백 수수 논란에 대해 “국민 눈높이에서 생각할 문제”라고 했다.

대통령실은 한 위원장을 불러 사퇴를 요구했다. 대통령실이 여당 대표의 거취 문제를 구체적으로 거명한 것은 ‘당정 분리’ 원칙에 정면 위배되는 중대한 사건이다. 윤 대통령의 분노가 얼마나 컸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실제로 윤 대통령은 사석에서 “눈에 넣어도 안 아플 후배에게 뒤통수를 맞았다”고 섭섭한 감정을 토로했다고 한다. 결국 한 위원장이 충남 서천시장에서 윤 대통령에게 90도로 인사한 뒤 기차를 같이 타고 귀경하는 브로맨스를 연출해 그 이상의 파국은 막았지만, 이는 임시 봉합일 뿐 두 사람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서초동에서 만난 한 법조인은 이 사건이 ‘윤석열의 사람’이란 프레임에 가려져 있던 한 위원장의 진면목을 보여준 사례라고 했다. 한 전직 특수부 검사는 “한동훈은 대단히 독립적인 인물이었다. 누구 ‘라인’을 타서 위로 올라가려고 애쓴 적도 없다. 평검사 때부터 본인의 이념과 가치관에 반대된다면 설령 부서장이라 할지라도 인간적인 관계에는 선을 그었다”고 말했다. 이는 한 위원장 스스로 밝힌 자신의 성격을 뒷받침한다. 한 위원장은 2월 7일에 열린 관훈 토론회에서 “공적 업무를 하는 데 있어서 사적 영역이 관여되는 걸 대단히 싫어한다”고 밝힌 바 있다. 윤 대통령과 절대적인 주종 관계가 아님을 시사한 것이지만, 평소 조직 생활에 대한 그의 철학이 묻어나는 발언이다.

검사장 장인 둔 혼맥 파워로 관심 받아

한 위원장에게 붙는 ‘서울법대 출신 엘리트’라는 꼬리표도 세간에선 대단한 스펙으로 인식하지만, 정작 검찰 내부에서 학연은 특별한 경쟁력이 아니라고 했다. 서울법대 출신 검사가 수두룩한 조직에서 학연으로 출세한다는 건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부장검사를 지낸 한 변호사는 “지연과 혼맥이 거미줄처럼 얽힌 검찰 족보에서 학연으로는 이름 한 줄 올리기 어렵다”고 말했다.

“한동훈이 엘리트 코스를 밟은 것은 물론 개인의 능력이 뛰어나서다. 그렇다고 그가 족보 없는 동기들과 같은 선상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다. 당시 검찰 수뇌부도 한동훈의 장인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직 특수부 검사의 회고다.

알려져 있다시피 한 위원장의 장인은 진형구 전 대전고검 검사장이다. 기자들과 모인 자리에서 조폐공사 파업 유도 발언으로 1999년 검사복을 벗었지만, 검찰 내에서 ‘천재’로 손꼽히며 후배들로부터 신망이 상당했다. 특수부 전성시대가 열리기 전인 1980~1990년대 검찰 내 주류인 공안통이었다. 한 전직 부장검사는 진 전 검사장에 대해 “선후배들에게 처신을 굉장히 잘한 분으로 기억한다”고 했다.

한 위원장이 검찰에 ‘입봉’한 2001년은 그의 장인이 검찰에서 나간 지 불과 2년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다. 한 위원장은 연수원 성적도 좋아 첫 임지를 서울지검(현 서울중앙지검)으로 발령받았다. 똑똑한 데다 외모도 준수한 ‘진 검사장 사위’는 당연히 선배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당시 한 위원장을 눈여겨본 인사는 최재경 전 검사장으로 전해진다. 최 전 검사장은 대검 중앙수사부장에까지 오른 특별수사의 실력자다. 윤석열 사단 이전에 최재경 사단이 있었다. TK(대구·경북) 출신인 최 전 검사장은 지역 인맥으로 연결된 2000년대 초 검찰 내 최고 실세인 정상명 전 검찰총장의 총애를 받으며 떠오르는 실력자였다. 검사장 출신 장인의 영향력이 없었다면 한 위원장이 실세 라인의 관심을 받기 어려웠을 거다.

한 위원장이 검사 생활을 시작한 서울지검 형사 9부 부장은 훗날 대검 중수부장을 지낸 이인규 전 검사장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로 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지만 당시로선 기업범죄 수사의 실력자로 꼽혔다. 이인규 부장 밑에서 한 위원장은 2003년 ‘SK그룹 부당내부거래 사건’ 압수수색 과정에서 수사팀이 가장 필요로 했던 ‘최태원 보고문건’을 확보하는 등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뒀다. 이후 한 위원장은 이 전 검사장과 함께 ‘2002년 한나라당 불법 대선자금 전달사건’의 수사팀에 편성됐다. 한 위원장을 아꼈다던 이 전 검사장은 “논리적이며 사안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 탁월했다”고 자신의 회고록에서 기술한 바 있다.

하지만 한 위원장이 업무 관계 이상으로 이 전 검사장에게 잘 보이려 했다는 얘기는 없다. 그만한 실력자라면 주변에 친분을 과시할 만도 한데, 한 위원장은 전혀 그런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고 한다. “한동훈이 이인규 선배를 인간적으로 좋아하거나 그의 라인을 타려는 인상은 전혀 없었다”고 한 법조인은 전했다. 공사가 뚜렷한 한 위원장의 스타일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달리 말하면 실세 선배와의 인연을 과시해 출세의 기회로 삼는 여타 검사들과 달리 그의 처지가 ‘줄’을 타야 할 만큼 절박한 건 아니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우병우에 의한 처음이자 마지막 좌천


▎2019년 대검 반부패·강력부장 시절의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 사진:연합뉴스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듯 한 위원장은 출세 코스를 밟아나갔다. 서울지검 이후 대검 중수부 검찰연구관으로 발령돼 ‘현대차 비자금 수사’와 ‘외환은행 론스타 부실 매각 사건’을 수사했다. 2007년 부산지검 특수부 수석 검사로 재직하며 부산의 건설업자 김상진의 재개발 비리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전군표 당시 국세청장을 구속시켜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 과정에서 정상명 총장을 독대해 직(職)을 걸고 구속 수사를 설득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2009년에는 이명박 정부의 청와대 민정수석실에서 일하다가 법무부 검찰국 검찰과 검사로 영전한다. 검찰국 근무는 모두가 선망하지만 한 기수에서 불과 몇 명만 갈 수 있는 자리다.

검사의 수사력은 재력과 비례한다는 속설이 있다. 검사에게 지급되는 특수활동비, 특정업무경비 등으로는 부서원을 관리하며 수사를 이끌어가는 데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부족한 경비는 개인적으로 채우는 수밖에 없다. 출세의 발판이 되는 조직 내 인망을 얻기 위해서도 재력은 필수다. 2000년대까지만 해도 특수부 검사가 되면 가장 먼저 할 일은 은행에서 2000만원짜리 마이너스 통장부터 만드는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고 한다. 일부는 재력가 집안과 혼맥을 맺거나 기업과 건설사를 스폰서로 두기도 한다.

재력가와 혼맥을 맺은 대표적인 검사로는 우병우 전 민정수석이 꼽힌다. 우 전 수석의 장인 이상달(2008년 작고) 전 정강중기 회장은 건설과 골프장 등 각종 사업으로 막대한 부를 쌓아온 인물로 알려져 있다. 2014년 우 전 수석이 대통령비서실 민정비서관으로 들어오면서 공개한 가족 재산은 423억여원이었다.

실력과 처가의 재력을 동시에 갖추고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우 전 수석이 마찬가지로 실력과 처가의 배경을 갖춘 한 위원장을 좌천시킨 것은 아이러니하다. 2015년 2월 우병우 당시 민정수석은 상반기 검찰 인사에서 한 위원장을 신설 부서인 서울중앙지검 공정거래조세조사부 초대 부장으로 발령했다. 이후 한 전 위원장이 SK건설과 신세계, 동부그룹 등 여러 기업의 각종 비리 혐의를 성공적으로 수사하면서 사후에 희석된 감이 있지만 검사들은 좌천성 인사로 해석했다. 당시 한 위원장의 이력이나 실력 등을 봤을 때 서울중앙지검 특수부장이 자연스러웠다는 거다.

“서울중앙지검의 부장은 검사 인생에서 단 한 번밖에 못 한다. 누구나 선호도가 있겠지만 통상 특수부장에 붙기를 바라고, 그다음이 금융조사부장이다. 특수부 검사로 승승장구하던 한동훈으로서는 당연히 특수부장을 원했을 것이다.” 특수부장을 지냈던 법조인의 말이다. 또 다른 법조인은 “공정거래 조세조사부는 공정거래위원회와 국세청에서 고발한 사건을 맡는 곳”이라며 “무게감에 있어서 특수부에 비할 바는 못 된다”고 했다.

“총선 이후 내 인생 꼬일 것”… 대선 염두?

2016년 12월은 한동훈의 인생에서 결정적인 터닝포인트였다. 국정농단 사태가 터지면서 당시 특수부 올드보이들이 물러나고, 검찰 실세인 우병우 민정수석이 권력을 내려놓았다. 그 대신 국정원 댓글공작 사건을 맡았다가 정권의 눈 밖에 났던 윤석열 대통령이 국정농단 사건 수사팀장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우 전 수석과 별다른 인연이 없었던 한 위원장은 윤 대통령의 러브콜로 특검 수사팀에 합류하며 스타검사 반열에 올랐다.

일각에서는 2003년 ‘한나라당 불법 대선자금 전달사건’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두 사람의 관계를 연결 짓기도 한다. 하지만 검사 출신 변호사는 “2003년에 한동훈은 ‘2학년’(2년 검찰 인사 주기로 학년을 구분)밖에 안 된 새내기였다. 둘의 기수 차이가 상당한데 그때 근무 연을 부각하는 건 너무 오버하는 것”이라고 했다.

2019년 9월 문재인 정부의 실권자 조국 전 법무부 장관에 대한 사정 수사 결단을 내리면서 거취를 위협받은 윤 대통령과 운명을 함께한 한 위원장의 결단도 윤 대통령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라기보다 자기 신념을 지키기 위한 선택으로 보는 게 합리적이라고 법조인들은 입을 모은다. 검사 출신의 한 중견 법조인은 “한 위원장이 이른바 정권의 ‘사냥개’가 됐다면 그 후에 벌어진 네 번의 좌천을 피하고 새로운 실세가 될 수도 있었겠지만, 부당한 권력의 압력에 타협하지 않는 신념을 택함으로써 윤 대통령과의 의리도 지키고 후일을 도모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검찰을 떠난 직후 윤석열 정부의 탄생과 최연소 법무부 장관, 여당 대표직에 오르며 단시간에 스타 정치인으로 떠오른 것은 그의 이런 신념가적 기질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란 설명이다.

또 다른 부장검사 출신 변호사는 “누구보다 자아가 강한 그에게 쏟아진 ‘윤석열 아바타’, ‘호위무사’와 같은 별칭은 명예가 아니라 자존심을 건드리는 불편한 호칭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막중한 정치적 책임과 부담이 따르는 여당 비대위원장직을 맡은 뒤로는 수직적인 용산과의 관계 설정도 상당한 고민거리였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 김 여사의 명품백 논란이 불거졌고, 한 위원장의 행동은 신념을 따랐던 과거 행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더구나 대통령실이 사전 교감 없이 친윤(親尹)계 대표주자인 이철규 의원을 통해 국민의힘 공천관리위원장을 내정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것도 그가 김 여사 리스크를 거론하며 용산과 대척점에 서게 된 배경으로 알려졌다.

한 위원장은 1월 7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총선 결과가 만족할 만한 수준이 되고 기회가 되면 차기 대선에 나설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에 “4월 10일(총선) 이후 내 인생이 꼬일 것 같다”고 말했다. 대선 출마를 염두에 둔 발언으로 읽혔다. 여당 대표로서 신념은 지켰지만, 선거 이후 용산으로부터 불어닥칠 삭풍이 만만치 않으리란 걸 그도 느끼고 새삼 의지를 다졌던 것이 아닐까.

- 안덕관 월간중앙 기자 ahn.deokkwan@joongang.co.kr

202403호 (2024.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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