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드 투 그레이트(Bad to Great)? 별 볼일 없던 기업이 (좋은 기업을 건너뛰어) 위대한 기업으로?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아시아의 평범한 OEM 부품 업체였던 삼성전자가 20년 만에 어떻게 글로벌 일류 기업이 됐을까?
▎지난 9월 6일 독일에서 열린 ‘세계가전박람회(IFA) 2013’에서 삼성전자는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TV를 선보였다. 삼성전자는 삼성웨이를 실천해 남보다 먼저 신제품을 출시하는 기회선점 경영을 이어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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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는 20세기 신흥국이 배출한 거의 유일한 글로벌 일류 기업이다. 삼성의 성공요인을 분석해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첫 한국 학자 논문으로 실은 송재용·이경묵 서울대 경영대 교수는 삼성식 경영을 ‘삼성 웨이(Samsung Way)’라고 명명했다. 삼성 웨이가 오늘날 삼성전자의 성공을 견인했다는 것이다.삼성 웨이의 근간으로 이들은 삼성의 세 가지 패러독스 경영 방식을 꼽는다. 삼성은 대규모 조직이면서도 스피디하고, 다각화·수직화돼 있으면서도 동시에 전문화돼 있고, 일본식 경영과 미국식 경영의 요소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독보적인 기업이라는 것이다. 패러독스 경영이라고 부르는 건 삼성전자가 일견 양립이 불가능해 보이는 요소들을 동시에 추구해 장기간에 걸쳐 높은 성과를 냈기 때문이다.차별화와 낮은 원가, 창조적 혁신과 효율성, 글로벌 통합과 현지화, 규모의 경제와 빠른 속도 같은 것이다. 이렇게 서로 모순되는 전략은 오너의 의지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실행에 옮기기 어렵다. 이건희 회장은 이런 전략에 대해 명확한 인식이 있었다. 1994년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너 짜이퉁』에 기고한 그의 글.‘오늘날 일류 기업은 모범적 경영법이 존재한다는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을 털어버리고 상황에 따라 자신만의 독특한 경영 스타일을 채택한다. 일본식·미국식 또는 유럽식으로 경영 스타일을 구분하는 건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다. 모든 기업이 제각기 고유한 경영 스타일을 갖게 될 미래의 경영이란 전통적인 경영학에 대한 반란을 의미한다.’이렇듯 복수의 경쟁 우위를 동시에 추구한 결과 삼성전자의 메모리 반도체 부문은 경쟁사보다 먼저 원가가 훨씬 낮은 신제품을 출시했다. 속도와 비용우위라는 두 토끼를 잡은 것이다. 고객별로 맞춤화된 솔루션을 제공해 차별화에도 성공했다. 그 결과 93년 이래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20년 이상 1등을 고수하고 있고 경쟁사와의 시장점유율 격차는 더욱 커졌다. 휴대전화의 경우 삼성전자 제품의 디자인 주기는 3~6개월로 노키아(12~18개월)의 4분의 1 내지 3분의 1 수준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나?송재용·이경묵 교수는 삼성전자가 초일류기업으로 부상하는 데 작용한 핵심 역량으로 세 가지를 꼽는다. 스피드 창출 역량, 복합화를 통한 시너지 창출 역량, 진화적 혁신 역량이다. 스피드 창출 역량이란 신제품의 개발부터 출시까지 신속하게 의사결정을 하고 이를 실행에 옮기는 역량이다. 그 효과는 기회의 선점이다. 이 회장은 신경영 선언 당시 타이밍과 스피드가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이렇게 말했다.“창조적 발상이 결집된 상품과 서비스를 남보다 먼저 시장에 내놓는 기회선점적 경영을 하지 않고서는 생존이 불가능하다. 꼭 할 일이라면 빨리 뛰어들어 기회를 선점하거나 최소한 기회손실을 방지해야 한다.”
▎삼성전자의 LCD 생산라인. LCD 후발 주자였던 삼성전자는 1997년 13.3인치 제품 개발로 일본을 제치고 주도권을 잡았다. 신속한 투자 의사결정이 빛을 본 사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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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속한 투자 의사결정이 빛을 본 사례로 메모리 반도체말고도 액정화면(LCD) 사업이 있다. LCD 후발 주자로 고전하던 삼성전자에 1997년 기회가 왔다. 초박막 액정화면(TFT-LCD) 시장의 불황이 지속되자 12.1인치 제품에 주력하던 샤프 등 일본 업체들이 차세대 생산라인 투자에 소극적으로 변했다.반면 삼성은 13.3인치 이상의 차세대 제품에 과감하게 투자했다. 그 후 13.3인치 제품은 사실상 시장의 표준으로 자리 잡았고 삼성은 LCD 시장에서 주도권을 쥐게 됐다. 신종균 삼성전자 IM부문장(사장)은 “삼성전자는 1등이 되겠다는 열정을 갖고 있고 방향만 정해지면 그것을 스피드 있게 실행하는 힘이 누구보다 뛰어나다”고 말했다.장세진 카이스트 교수는 자신의 저서 『삼성과 소니』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삼성의 부상과 소니의 부진은 전략의 차이로 설명할 수 없다. 전략보다는 내부의 조직 프로세스와 경영진의 리더십 차이가 두 기업의 운명을 결정했다.’실행력을 중시하는 삼성의 조직문화와 이 회장의 카리스마적인 오너 리더십이 만나 상승작용을 일으켜 발군의 성과를 창출했다는 것이다. 인시아드 경영대학원의 이브도즈 교수는 기업 간에 다른 역량이 서로 비슷하다면 속도감 있는 경영과 조직을 일사불란하게 한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 힘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런 집단적 몰입을 끌어내는 조직문화가 기업 경영의 핵심 요소라고 지적한다.‘한 방향’은 1997년 삼성 신경영실천위원회가 펴낸 『삼성인의 용어-한 방향으로 가자』의 부제로 사용될 만큼 삼성맨들에게 핵심적인 개념이다. 한 방향에 대해 이 책은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한 방향이란 자신이 속한 조직이 결정한 사항에 대해 함께 움직이고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한 방향은 전체의 힘을 같은 방향으로 집중시켜 속도를 높이는 데 목적이 있다. 삼성호는 거대한 항공모함이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21세기 초일류 기업이며 질 위주 경영·국제화·복합화가 우리가 가는 방향이다.’장 교수는 스피드 경영의 한 요인인 삼성맨의 일하는 방식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우선 어느 회사보다 열심히 일한다. 일례로 다른 기업이라면 준공까지 2년은 걸렸을 경기 용인 기흥공장 건설을 6개월 만에 마무리했다. 성과에 따라 확실한 보상이 주어지는 성과급 체제가 동기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스마트하게 일한다. 선행업무를 맡은 팀이 일을 끝낼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동시에 일을 진행하는가 하면 정보와 지식을 공유해 개발 시간을 단축한다. 뛰어난 프로세스 기술로 산출량을 급속히 늘리기도 했다.”
▎경기도 수원시 삼성전자 디지털시티에서 들어선 ‘모바일연구소(R5)’는 지상 27층, 지하 5층 규모로 1만 명의 휴대폰 연구개발 인력이 모여 차세대 모바일 기기 등을 개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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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합화를 통한 시너지 창출 역량은 그룹과 자기 회사 안에 광범하게 흩어져 있는 지식·정보·기술을 활용해 부가가치를 만들어내는 역량이다. 관계사 간 협업을 통한 이른바 융복합화 시너지다. 포브스 글로벌판은 지난 3월 이렇게 보도했다.‘삼성이 모바일 분야에서 성공을 거둔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주요 부품을 그룹 안에서 자체 생산한다는 것이다. 갤럭시 S4의 경우 총 부품 가격의 63%가 핵심 부품인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 디스플레이 등 자체적으로 생산한 것이다. 애플·모토로라·노키아 등 전 세계 스마트폰 제조업체 중 이렇게 자체 부품 조달 비중이 큰 기업은 없다. 이 점이 삼성 제품을 다른 제품과 차별화한다.’진화적 혁신 역량은 기존의 기술 및 제품 경로를 따라 기존 기술·제품을 새로운 방식으로 발전시키는 힘을 의미한다. 이 같은 진화적 혁신 제품의 예로는 세계 최초로 선보인 듀얼 폴더폰, MP3 폰, TFT-LCD 채택 휴대전화가 있다. 이런 진화적 혁신의 동력은 학습 조직이다.삼성은 기술과 경영관리 두 측면에서 전방위적으로 지속적인 학습과 혁신을 추구해왔다. 개방형 혁신을 통해 외부의 지식도 빨아들였다. 외부 지식을 흡수해 만든 혁신 제품으로는 세계적 전자펜 업체인 일본 와콤과의 전략적 제휴를 통해 개발한 갤럭시 노트가 대표적이다.삼성 웨이의 또 다른 특징은 병행 개발이다. 삼성전자는 여러 가지 기술적 대안에 투자한 후 최고의 성과를 내는 것에 신속하게 공격적으로 투자한다. 삼성은 LCD와 PDP, CDMA와 GSM에 동시에 투자했다. 삼성전자 출신으로 소니코리아 회장을 지낸 이명우 한양대 특임교수의 회고.“LCD가 맞느냐 아니면 LED냐를 놓고 소니가 내부 합의를 도출할 당시, LG전자도 그랬지만 삼성은 두 가지 다했습니다. LCD가 대세일지 PDP가 대세일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삼성은 LCD는 삼성전자가, PDP는 삼성SDI가 개발하도록 했습니다. 그랬기에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죠.”‘병행과 집중’이랄까? 삼성전자가 분기 당 40개 이상의 휴대전화 모델을 내놓는 것도 병행 개발의 좋은 예다. 2003년 모토로라가 40개의 새 모델을 선보이는 동안 삼성전자는 무려 150개의 모델을 출시했다. 그 과정에서 사업부문(Global Business Manager·GBM) 간에 수직적 통합이 이뤄져 부품의 납기가 단축됐다. GBM 간의 내부 경쟁을 의도적으로 촉발하기도 했다. 그 덕에 시너지가 창출됐다. 1메가 D램을 개발할 땐 국내 연구팀과 미국 현지 연구소인 SSI의 연구팀이 경쟁을 벌였는데 그 결과 개발 속도가 높아졌다.2004년 차세대 디스플레이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기술을 개발할 땐 삼성전자 LCD총괄과 삼성SDI가 맞붙었다. 두 회사는 경쟁적으로 세계 최초 기술 개발 및 제품 출시 기록을 작성하며 서로 펀치를 주고받았다. 그 후 대규모 양산 투자가 불가피해지자 2008년 삼성SDI와 삼성전자 OLED사업부가 합병해 삼성모바일디스플레이로 재출범한다.삼성전자가 선진국과 신흥국 양대 시장에서 선전하는 것도 병행 개발적 발상의 확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일종의 양다리 걸치기 전략이 먹혀든 것. 반면 애플은 선진국 시장에서 스마트폰에 주력했고 노키아는 신흥시장에서 피처폰에 올인했다.삼성의 공급망 관리(Supply Chain Management·SCM)도 주목할 만하다. SCM은 어떤 물건의 수요자와 공급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다양한 과정을 관리하는 일이다. SCM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인 하우 리 스탠퍼드대 교수는 삼성전자와 애플의 SCM을 비교해 이렇게 말했다. “삼성이 유연하고 융통성 있는 물류 시스템을 갖춘 반면 애플의 경우 고정적이고 유연하지 않다. 애플이 지금은 순항 중이지만 만일 제품의 불확실성이 커진다면 SCM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병행개발 후 선택과 집중삼성 웨이는 지속 가능한가? 송재용·이경묵 교수는 삼성이 글로벌 초일류 기업이 되려면 핵심 원천기술을 남보다 앞서 개발하고 새로운 산업 내지 제품군을 창출하는 단절적 혁신 또는 와해적 혁신을 주도할 창조적 혁신 역량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한다.그러기 위해 양손잡이 조직으로 진화하라고 제안한다. 기존의 역량과 시스템·문화를 구축한 조직이 오른손잡이 조직이라면 창조적 혁신과 신사업을 통한 신성장 동력 발굴을 주도할 왼손잡이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장기적·기초적 연구를 담당하는 삼성종합기술원 같은 조직이다.‘눈 덮인 들판이지만 함부로 아무 데로나 걸을 수가 없구나. 오늘 내가 남긴 발자국이 뒤에 따라오는 사람에게 이정표가 되기에.’ 서산대사가 임진왜란 당시 썼다는 시‘야설(夜雪)’이다. 삼성전자는 경쟁사들에 이정표를 남기는 퍼스트 무버가 될 것인가? 함부로 걸어선 안 되겠지만 신중한 걸음이 능사도 아니다. 과거의 성공 방정식이 미래엔 족쇄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