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뚝 연기 자욱했던 구로공단이 IT업체와 패션타운이 공존하는 지식산업단지로 탈바꿈했다. 구로공단의 변화를 이끈 주역들에겐 성공 DNA가 존재한다. 그들은 시장을 먼저 읽고 앞서 움직였다.
▎농지와 미군 탄약창고 터를 닦아 조성한 구로공단은 50년 만에 100여 개 지식산업센터(아파트형 공장)가 세워진 첨단산업단지로 변모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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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얇은 합판에 ‘뺑끼칠’한 문을 열고 들어서니 좁은 부엌 옆에 문풍지로 발라 놓은 방문이 나온다. 낮은 촉수의 백열등, 비닐 캐비닛에 앉은뱅이책상, 한쪽에 급히 개어놓은 이불만으로도 꽉 차버린 10㎡(3평) 남짓한 방. 지난 2월 5일 오후에 찾은 구로공단노동자생활체험관 모습이다. 금천구청은 1970년대 구로공단 일대 속칭 벌집으로 불렸던 생산직 근로자들의 방 풍경을 지난해 5월 서울지하철 1호선 가산디지털단지역 인근에 재현했다.당시 벌집촌은 방 한 칸에 4~6명이 모여 살거나, 심지어 주간조와 야간조가 방을 나눠 쓰는 ‘2부제 셋방’이었다. ‘라보때(라면으로 보통 때운다)’ ‘가리봉동 수준’ ‘공순이’라는 자학적인 표현이 있던 시절이다. ‘서른일곱 개의 방이 있던 그 집, 미로 속에 놓인 방들, 계단을 타고 구불구불 들어가 이젠 더 어쩔 수 없을 것 같은 곳에 작은 부엌이 딸린 방이 또 있던 3층 붉은 벽돌집…’. 소설가 신경숙은 열다섯 나이로 구로공단에서 일명 공순이로 일하던 당시를 소설 ‘외딴방’에 옮겼다.
▎1980년대 구로공단의 전경. 대부분 2~3층 건물로 이뤄졌다(왼쪽). 서울 금천구청이 지난해 5월 개관한 ‘구로공단 노동자 생활 체험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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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관은 쪽방 6개와 수십 명이 함께 썼던 공동세면장 등을 재현했다. 교과서, 라디오, 잡지, 포스터, 소설책, 신발, 주방용품, 연탄 등의 소품도 당시 모습 그대로다. 체험관 담당자인 박미경씨는 “경제발전의 주역이었던 분들의 삶을 아이들과 부모들이 다시 공유할 수 있도록 마련했다”며 “부모세대는 지나간 옛 시절을 추억하고 아이들은 역사를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2 이튿날 오전 9시 서울지하철 2호선 구로디지털단지역. 지하철에서 내려 3번 출구로 빠져나가는 직장인들의 모습이 개미 행렬과도 같다. 버스정류장에서 내린 사람들까지 합류해 서울디지털산업단지(옛 구로공단)로 향하는 출근 장면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구로디지털단지역 하루 이용객은 10만 명이 넘는다.근로자의 모습도 바뀌었다. 거리는 군청색 작업복 점퍼 대신 정장에 흰 와이셔츠나 캐주얼 차림의 IT맨들로 채워졌다. 역 인근에서 20년 넘게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홍은영씨는 “예전엔 젊은 여성근로자가 많았는데 최근 10년 새 젊은 남성들이 부쩍 늘었다”며 “저마다 목에 신분증을 걸고 급히 걸어가는 것을 보면 신기하기도하고 젊은 에너지가 느껴진다”고 했다.역에서 디지털로를 따라 차량으로 10분 정도 달리면 마리오아울렛으로 유명한 가산동 패션단지가 나타난다. 조성 이후 10여년 만에 아시아 최대 패션단지가 된 이곳은 주말이면 젊은이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바로 옆 ‘수출의 다리’를 건너는 차량 행렬은 이날도 어김없이 1㎞ 넘게 밀려 있다. 1만2000여 개 업체, 16만3000명의 근로자가 근무하는 서울디지털산업단지의 아침 풍경은 늘 이렇게 분주하다.
한국 산업구조 변화를 빼닮아구로공단이 올해 50주년을 맞았다. 1964년 수출산업공업단지개발조성법이 제정돼 옛 구로·가리봉동 일대가 수출산업단지로 지정된 지 50년째 되는 해다. 야트막한 야산과 농지, 판자촌 그리고 미군 탄약창고 부지였던 이곳은 1970년대 회색빛 담벼락과 높게 솟은 굴뚝의 공장 밀집 지역이 됐고, 2000년대 이후엔 마천루를 방불케하는 고층 벤처빌딩 숲으로 변했다.구로공단 역사는 한국 산업 변화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지난 12월 4일 금천구청이 진행한 세미나 ‘구로공단 50년의 평가와 의의’에서 손정순 성공회대 노동사연구소 연구교수는 “1980년대 후반까지 대규모 노동력이 소요되는 노동집약적인 경공업 제품을 생산·수출하면서 성장해 왔다는 점, 2000년대 이후 IT 관련 업종의 집적지로 대표되고 있다는 점에서 구로공단은 한국경제의 축약판”이라고 말했다.산업단지 조성 초기에는 입주희망기업이 적었다. 김종혁 한국산업단지공단 과장은 “이때 실질적으로 공단 조성을 위해 발로 뛴 분이 바로 고 이원만 코오롱그룹 창업주”라며 “당시 한국나이론공업협회장 자격으로 산업 구상을 하고 수출산업공단이라는 사단법인을 만들어 입주기업을 모았다”고 들려줬다.초창기 입주기업은 삼화합성공업(비닐완구), 평화안경공업(안경), 대륙금속공업(수도금류), 심산산업(장식품), 싸니전기(수정발진자), 대경물산(철물) 등 재일교포기업과 동남전기공업(라디오·TV), 한국면양(양모·양피제품), 동남미네론화학공업(인조피혁), 한국광학(광학렌즈) 등 국내기업이었다.구로공단은 ‘수출입국’의 첨병이었다. 1970년대 정부의 수출드라이브가 본격화되면서 1977년에는 처음으로 수출 1억 달러를 돌파하며 국가 전체 수출의 10%를 차지했다. 손 교수는 “이 시기의 주요 수출 품목 1위는 섬유·의류·봉제업종 제품이었고, 2위는 전기·전자 조립 제품, 3위는 가발과 잡화였다”며 “1970년대 이 3가지 업종이 구로공단 전체수출액의 80% 이상을 차지했고, 당시 한국 경제 전체 주력 수출품이었다”고 했다.공단에도 부침은 있었다. 1970년대 말~80년대 초 오일쇼크 때는 수많은 입주기업이 문을 닫았다. 1980년대 후반 3저(저금리·저유가·달러약세) 호황 땐 공단도 함께 번성했다. 한국경제가 살면 구로공단도 살고, 한국경제가 위축되면 구로공단도 함께 시드는 구조였다.1990년대 이후 임금상승으로 가격경쟁력 유지가 한계에 도달하자 구로공단의 기업들도 값싼 해외로 공장을 옮기거나 문을 닫아야했다. 1993년 41억7000만 달러였던 수출액은 1999년 14억9000만 달러로, 고용 인원도 5만2700명에서 2만9600명로 줄었다. 그 사이 한국경제의 성장 축은 경공업에서 첨단 IT산업 위주로 옮겨갔다.김종혁 과장은 “1997년 외환위기 앞뒤로 구로공단 내 기업들은 수출에 한계를 드러냈다. 수출 중심의 업종이라 환율에 민감했고, 남의 것을 모방한 단순조립부품이라 산업 트렌드에 따르지 못했던 탓”이라고 분석했다. 많은 기업이 도산하면서 구로공단 공동화 현상이 나타났다. ‘암흑 같은 구로공단’ ‘회색빛 거리’ 등의 표현이 나왔다.
산업트렌드 읽고 각종 지원 활용한 기업 대박현재 구로공단의 모습은 1997년 ‘구로단지 첨단화 계획’에서 시작됐다. 핵심은 기존 생산중심적인 하드웨어적 산업단지 개념을 생산·업무·연구·교육 등을 포함하는 신사업 창출 공간, 혁신 창출 공간으로 변화시키자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조립금속, 섬유, 인쇄 등의 노동집약적 업종을 고도 기술, 벤처, 패션디자인, 지식산업 등 첨단 업종으로 재배치하는 것이다. 경쟁력이 떨어져 문을 닫거나 해외로 떠난 옛 공장터엔 지식산업센터(아파트형 공장)가 들어섰다. 1999년 완공된 키콕스 벤처타운을 시작으로 수많은 IT 업체가 입주하면서 구로공단은 겉모습을 바꿔가기 시작했다.
그 결과 구로공단은 화려하게 부활했다. 2000년 이후 명칭을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바꾸는 등 구로공단의 이미지를 제고하고, 기업 인큐베이터 기능도 본격화했다. 2002년 이후 대기업의 연구개발(R&D)센터, 시제품 제작시설, 지식산업, 정보통신, 소프트웨어, 패션디자인 관련 기업의 입주로 단지의 첨단성도 높아졌다. 2000년대 중반부터는 높은 임대료를 피해 강남 테헤란밸리를 떠난 IT 벤처기업들이 가세했고, 2006년 12월에는 한국벤처기업협회가 강남에서 이곳으로 이전했다.구로공단 변신은 민간기업의 투자와 정책적 지원이 큰 역할을 했다. 박용규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2007년 내놓은 보고서 ‘구로공단의 부활’에서 이를 저규제·저비용, 입지적 비교우위, 네트워크 효과로 정리했다.그는 ‘구로단지는 기업이 주도하고 정부가 지원군 역할을 해 형성된 도시형 기업생태계’라고 정의했다. 경쟁력 쇠퇴로 전통 제조업이 이전한 자리에 민간 건설업체가 지식산업센터를 공급해 중소·벤처기업의 입주를 유도했고 정부도 규제완화, 세제혜택 등을 통해 구로단지의 부활을 지원했다는 설명이다.구로공단의 외형적인 상전벽해는 지식산업센터의 몫이다. 정부는 1996년부터 ‘수도권 공장총량제’ 대상에서 지식산업센터를 제외시키고, 민간 사업자에게도 시공권한을 부여했다. 또 단지 내 입주업종도 비제조업으로 확대해 중소·벤처업체의 입지난을 해소했다.규제완화와 더불어 사업 시행자에게 자금지원 및 취득세·등록세, 재산세·종합토지세, 특별부가세 등의 각종 세제감면 혜택도 줬다. 그 결과 지식산업센터가 대규모로 공급됐다.지식산업센터 건설 초기에 뛰어든 기업이 바로 에이스 종합건설과 대륭종합건설, 우림건설 등이다. 손정순 교수는 “이들 중견 건설업체는 이미 첨단화 계획이 마련되기 이전인 1996년부터 구로공단에 지식산업센터를 설립했다”고 설명했다. “당시 유행하던 삐삐 제조·수리와 관련한 소규모 정보통신 사업체들이 입주했다. 한국경제의 변화와 같이 구로공단도 경공업 중심에서 IT산업으로 변화할 것을 내다본 것이다.”이들 기업은 상대적으로 낮은 지가(강남지역의 10~20% 수준)와 정부의 각종 지원에 주목하고 큰 부담 없이 공장터 확보에 나섰다. 전체면적의 20%까지 지원시설을 부대시설로 지을 수 있어 건물 내 다양한 매장을 갖춰 안정적인 임대 효과도 봤다. 전기료 등 공공요금도 산업용으로 50% 할인해 주는 등 관리비용도 강남권 사무실의 절반 수준이어서 입주 업체도 부담을 덜었다.지식산업센터는 대형화와 고급화를 거쳤다. 2004년 12월 준공된 금천구 가산동의 우림라이온스밸리1차는 2만7780㎡(8400평) 부지에 축구장 18개 면적에 달하는 연면적 19만392㎡(5만7600평)의 메머드급 건물로 400개에 이르는 업체가 입주했다. 2007년 4월 준공된 구로구 구로3동의 삼성IT밸리는 호텔식 로비와 인테리어, 그리고 첨단비즈니스 시설로 차별화했다. 중앙보안관제시스템, 광 통신망, 중·소회의실을 포함한 각종 비즈니스시설을 선보여 당시 큰 인기를 끌었다.저비용 입지에다 첨단시설을 갖추자 구로공단이 지니고 있는 낡은 이미지 탓에 이곳을 주목하지 않던 강남의 벤처기업이 속속 몰려들었다. 김종혁 과장은 “서울디지털산업단지 내 지식산업센터는 지난해 10월 기준 107동에 이르며 2동이 건설 중에 있다”며 “서울디지털산업단지(1·2·3단지)의 전체 대지 면적은 198만1552㎡(60만평)지만 그 위에 세워진 지식산업센터의 총 건평은 459만529㎡(약 139만평)로, 여의도 면적의 1.5배에 이른다”고 했다.내실은 첨단 산업이 채웠다. 주력 업종이 제조업에서 출판, 영상, 방송, 정보서비스업, 전문, 과학 및 기술 서비스업 부문으로 변화한 것. 이는 사업체 비중과 취업자 수에서 고스란히 나타난다. 한국산업단지공단에 따르면 지난해 10월말 현재 이곳 입주 기업 수는 총 1만1931개. 업종은 비제조업체(콘텐츠 개발 등 IT 관련 포함)가 7198개로 가장 많고, 이어 전기전자 2553개, 기계 663개, 섬유의복 651개 순이다. 정보통신업체가 30%를 넘고, 전체 입주기업의 절반 이상이 IT업체다. 고용 근로자는 16만3000명으로 급증했다. 이들은 지난해 15조3190억원어치를 생산하고 29억6600만달러어치를 수출했다.유명기업으로는 LG전자 휴대폰 본부, 롯데정보통신(U시티 사업), 천재교육(학습지·참고서) 등이 있다. 중소기업으로는 세계 3차원 인쇄검사장비 시장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고영테크놀러지와 에듀윌(온라인 교육), 웰크론(극세사 제품), 한경희생활과학(생활가전), 신영와코르(이너웨어) 등이 있다. 경동나비엔(보일러), 양지사(다이어리), 웅진코웨이개발(생활가전), 이랜드(의류), 한국후지필름(카메라·인화), 솔브레인이엔지(반도체·LCD 재료), 해피랜드(아동복) 등도 눈에 띈다.손정순 교수는 “아직 서울디지털산업단지는 제조업과 IT가 공존하는 형세”라고 말했다. “공단 내 제조업은 사업장이 이원화된 양상이다. 사업장이 존재하지만 실제 생산은 지방 또는 해외로 이전한 채 기획·관리·영업 기능의 본사 컨트롤타워 역할만 담당하고 있는 유형과 의류·봉제, 전자 부품 조립·가공 등 전형적인 노동집약적 제조업 부문만이 남아 있는 유형이다.”이곳에 입주한 각종 기관 및 협회도 많다. KAIST EMDEC, 한국산업기술대 등 산학협력기관, 한국산업기술시험원 등 시험인증기관 등은 물론이고 동반성장위원회와 중소기업협력재단 등 정부기관도 이곳에 자리했다. LG전자의 3개 연구소 등 기업부설연구소도 1000개가 넘는다.서울디지털산업단지는 대형 쇼핑몰로도 유명해졌다. 구로공단 시절 의류공장이었던 곳들이 마리오아울렛, W몰같은 도심형 쇼핑시설로 변신하면서 젊은 층을 끌어 모으고 있다. 동대문시장 일대와 함께 서울 최대 도심형 쇼핑타운으로 꼽힌다. 특히 일부 브랜드는 백화점 매장 매출을 뛰어넘어 ‘전국 1위 점포’로 자리 잡고 있다.
▎1974년 한국산업단지공단이 구로공단 탄생 10돌을 기념해 만든 상징물 ‘횃불을 들고 있는 여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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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문화 입혀 창조산업 키우다김경민 서울대 교수(환경대학원)는 “최근 의류기획·디자인, 생산·제조, 유통·판매까지 전 과정을 제조회사가 총괄하는 SPA 브랜드가 유행인데 서울디지털산업단지는 2000년대 이후 마리오아울렛과 W몰 등이 들어서면서 이 같은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고 했다.SPA 상품의 가장 큰 특징은 기획-디자인-생산-유통(판매)의 기간을 단축하는 것인데 이곳엔 사무실과 공장, 매장이 한데 모여 있어 경쟁력이 높다는 설명이다.마리오아울렛과 W몰 모두 구로공단 시절 현 위치에 의류 공장을 운영하며 자체 의류제품과 대기업 하청제품을 만들던 기업이다. 마리오아울렛은 여성의류 등을 생산하고 있는 까르띠니트가, W몰은 조다쉬 지오다노 등에 의류를 납품하던 원신월드가 모회사다.김 교수는 “구로지역은 디자인과 높은 수준의 생산 능력 그리고 유통 채널까지 모든 것이 한 지역에서 이뤄지는 대한민국의 패션 1번지다. 한국계 사장에 의해 세계적인 SPA상품으로 성장한 포에버21이 서울 사무소를 삼성동에서 구로로 옮긴 것은 이곳의 위상을 알려주는 증표”라며 “더욱 중요한 부분은 고부가가치 영역인 디자인 분야의 인력이 이 지역에 다수 모여 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전문가들은 마리오아울렛, W몰의 성공에서 보듯 첨단 IT산업단지에 패션, 디자인 등 문화를 입혀 브랜드를 높여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서울디지털산업단지는 외관이 변했음에도 근무 환경은 좋지는 않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교통난은 물론이고 녹지와 휴식공간 부족도 심각하다. 단기간에 아파트형 공장이 워낙 빽빽하게 들어서면서, 쉼과 여유의 공간이 없다는 것이다. 지난해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이 서울디지털단지 내 근로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를 보면 응답자의 52.2%가 ‘문화편의시설이 부족하다’고 응답했다.김경민 교수는 “미국의 실리콘 밸리, 프랑스 니스 인근의 소피아 앙티폴리스 등 세계적인 벤처단지에는 업무 공간과 더불어 삶을 즐길 수 있는 여백의 공간이 있다”며 “16만 명 이상이 일하는 곳인데 편안히 대화를 나눌 공원조차 없다는 점은 현대 한국의 팍팍한 일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한 단면”이라고 꼬집었다.이 때문에 한국산업단지공단은 편의시설 마련에 나섰다. 현재 건설 중인 G밸리플라자엔 편의시설과 롯데비즈니스호텔 등 숙박시설이 들어선다. 향후 5년 내 가산문화복지센터, 독산비즈니스센터, 디지털 박물관, 산학융합 캠퍼스 등도 입주시킬 계획이다. 공단 측은 또 2020년까지 고급 인력의 요구에 맞는 맞춤형 복합산업단지를 구축하겠다는 계획이다. 1단지는 창조산업, 2단지는 패션문화산업, 3단지는 IT산업 중심의 거점을 마련한다는 내용이다.
▎지난해 9월 27일 오후 서울 구로구 서울디지털산업단지에서 열린 G랠리 넥타이마라톤대회에서 참가자들이 힘차게 뛰고 있다. 넥타이마라톤 대회는 2003년부터 매년 열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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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디지털산업단지는 여전히 부침을 거듭하고 있다. 판교 테크노밸리, 상암 DMC 등 수도권 일대에 비슷한 환경을 갖춘 산업단지가 조성되면서 더 저렴한 임대료를 찾아 떠나는 기업이 나타나고 있는 것. 서울 강남에서 왔다가 출퇴근 문제 등으로 다시 유턴하는 기업도 있다. 게다가 다산다사(多産多死)하는 벤처기업의 특성상 산업단지의 지속성장가능성도 문제다.
산·학·연·관 벽 허무는 클러스터 돼야남기범 서울시립대 교수(도시사회학과)는 “서울디지털산업단지는 첨단산업단지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영세화, 인프라의 약화, 기업지원시설의 부족 등이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며 “산·학·연·관 네트워크 구축으로 대학과 기업들 간의 상호 정보교류, 기술이전 등 연구 및 디자인 중심의 단지로 변모하기에도 여전히 미흡하다”고 지적했다. 단순 기업 집적지로는 한계가 명확하며 창의·융합 공간으로 변신해야 한다는 주장이다.전문가들은 물리적인 단순 집적지 수준이 아닌 산·학·연·관 사이의 벽을 허무는 ‘기능적 클러스터’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중소기업 간 지식과 정보 공유를 통해 동반성장을 촉진하는 데 클러스터만한 게 없기 때문이다. 한국산업단지공단 자료에 따르면 클러스터에 참여해 활발한 네트워크를 구성한 기업은 그렇지 않은 회사보다 생산 및 수출, 고용 성과가 6배까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남 교수는 “서울디지털산업단지는 벤처형 IT·생명공학(BT) 산업의 인큐베이터와 초기 확장생산지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며 “특히 구성원의 자발적인 협력을 통한 네트워크형성과 거버넌스 구축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성공하면 떠나는 곳’이 아닌 ‘이곳에서 성공신화를 만들고 정착하는 곳’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