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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eaning digital footprint - 우리에게 ‘잊혀질 권리’를 달라 

 

개인정보 유출 사고가 잇따라 터지면서 ‘디지털 세탁업’이 주목받고 있다. 산타크루즈나 뉴스케어 등의 디지털 세탁업체는 인터넷에 떠도는 개인정보나 개인의 게시물 등을 없애주면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프랜차이즈 사업의 선두를 달리는 A기업 관계자는 아침마다 컴퓨터 켜기가 두려웠다. “회사에 대해 잘못 알려진 정보때문에 악성 댓글이 심했기 때문입니다.” A기업은 ‘대기업이 골목상권을 침해했다’는 비판을 수도 없이 받았다. 실제와 다른 정보였다. 전국에 있는 수천 개의 가맹점 중 A기업이 운영하는 직영점은 1%에 불과했다. 99%의 가맹점은 지역 주민들이 직접 운영했다. 언론을 통해 A기업의 입장을 설명했지만, 인터넷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언론은 우리의 입장을 반영했지만 인터넷에선 우리 회사를 오해하는 내용이 더 많았다”고 A기업 관계자는 한숨을 쉬었다.

서울에 사는 주부 백모(40) 씨는 컴퓨터 화면을 보고 “또 털렸네”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백 씨의 컴퓨터 화면에는 “고객님께 머리 숙여 사과 드립니다”라고 시작하는 KT에서 내건 개인정보 유출 사과문이 떠 있다. 백 씨의 이름, 주민등록번호, 전화번호 등 11개의 개인정보가 유출됐다. 지난해 12월 KB국민카드·NH농협카드·롯데카드에서 개인정보 유출 사태 때 카드번호, 카드 유효기간 등 백 씨의 개인정보 21개 항목이 유출됐다. 그는 자신의 정보가 더 이상 개인정보가 아님을 알게 됐다. “내 민감한 정보가 인터넷에서 떠돌 수 있다고 생각하면 두렵습니다. 내 정보가 어떻게 사용될지 모르잖아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인터넷은 이제 우리 생활에 필수적인 도구가 됐다. 인터넷에 정보가 뜨면 그 정보는 소멸하지 않고 인터넷에서 계속 떠돈다. 그 정보가 옳은 정보면 괜찮지만, 잘못된 정보라면 그 부작용 때문에 기업과 개인이 피해를 볼 수 있다. 인터넷은 정보를 한 번 흡수하면 내뱉지 않는다. ‘잊혀질 권리’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이유다. 사람들이 잊혀질 권리를 요구하면서 ‘디지털 세탁업’이라는 새로운 업종이 뜨고 있다.

디지털 세탁업은 인터넷에 유출된 기업과 개인의 잘못된 정보, 그리고 개인의 내밀한 동영상·사진 등을 대신 전문 업체가 삭제를 해주는 일을 말한다. 산타크루즈, 뉴스케어 등이 대표적 디지털 세탁업체다. 지난해 5월부터 활동을 시작한 산타크루즈는 입소문을 타면서 기업과 연예인, 청소년의 상담 신청이 쏟아지고 있다.

“내 명의로 가입한 사이트 탈퇴해 달라” 요청 쏟아져

디지털 세탁업체는 기업이나 개인의 의뢰를 받으면 인터넷에 떠도는 잘못된 정보나 개인의 은밀한 자료를 추출한다. 이후 포털 사이트나 웹하드 업체에 삭제를 요청한다. 카페나 블로그에 올라온 자료도 디지털 세탁업체가 나서서 삭제 요청을 하고 게시물을 내리게 한다. 산타크루즈 김호진 대표는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 SNS도 해외 본사에 요청해 삭제하도록 의뢰한다”고 설명했다. 개인이 해결하기 어려운 일을 디지털 세탁업체가 대신해주는 셈이다.

디지털 세탁업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는 이유는 통계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인터넷진흥원 개인정보침해 신고센터에 개인정보 침해신고 상담 건수는 시간이 갈수록 폭증한다. 2009년 3만5167건에 불과했던 상담건수는 2011년 12만2215건, 2013년 17만7736건으로 4년 만에 6배 이상 늘어났다. 인터넷에 자신의 정보가 무단 이용·도용되는 사건이 급속하게 늘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카드사 개인정보 유출 사태 이후 디지털 세탁업체에 “내 명의로 가입한 모든 사이트에서 탈퇴하고 싶다”는 의뢰가 많았다.

자신의 정보가 도용될 수 있음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한국인터넷진흥원 개인정보침해대응팀 김미영 팀장도 “카드사개인정보 유출 후 주민번호 이용 내용 확인을 위한 민원이 크게 증가했다”고 말했다. 호기심에 찍었던 사진이나 동영상이 인터넷에 유출돼 피해보는 이들도 디지털 세탁업체를 찾고 있다. 개인 사진이나 동영상 유출로 개명하거나 심지어 자살에 이르는 경우도 발생한다.

산타크루즈에 상담을 요청한 한 여성의 사연은 개인의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 보여준다. 그는 10여 년 전 호기심에 찍었던 누드사진이 자신도 모르게 인터넷에 유포된 후 삶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사이버수사대에 신고했지만, 최초 유포자를 잡는 것은 불가능했다. 혼자 인터넷을 뒤져가며 사진을 찾아 삭제했지만, 음지에서 계속 퍼져나갔다. 자살을 시도할 정도였다. 그가 마지막으로 택한 방법은 개명이었다. 그가 산타크루즈를 노크한 것은 “개명하기 전 인터넷에 남긴 흔적들을 모두 지우고 싶다”는 이유였다. ‘잊혀질 권리’를 호소한 것이다.

‘ 잊혀질 권리’ 유럽과 미국에서 법제화 움직임

잊혀질 권리는 영국 옥스퍼드대 인터넷연구소 빅토르 마이어 쇤베르거 교수가 저서인 『잊혀질 권리(Delete The Virtue of Forgetting in the Digital Age)』에서 주장해 이목을 끌었다. 쇤베르거 교수는 “유사 이래로 인류에게는 망각이 일반적이었고, 기억은 예외였다. 그렇지만 디지털 기술과 전 지구적 네트워크 때문에 이 균형이 역전됐다. 오늘날 널리 확산된 기술의 도움으로 망각은 예외가 되고 기억은 일반적인 게 돼가고 있다”고 책에서 밝혔다. 디지털시대에서 자신의 정보와 게시물 등이 없어지지 않고 남는 것을 우려한 것이다. 유럽과 미국에서 잊혀질 권리에 관련된 법안이 일부 통과됐다. 한국에서도 법제화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잊혀질 권리의 부상과 함께 디지털 세탁업이라는 새로운 트렌드가 나온 것이다. 디지털 세탁업체도 “공인이 아니라면 개인의 사생활 정보는 ‘기억될 권리’보다 ‘잊혀질 권리’가 우선한다”고 주장했다.

디지털 세탁업체인 뉴스케어 관계자는 “사람들은 인터넷에서 자신의 흔적이 사라지지 않는 것을 두려워한다”면서 “디지털 세탁업은 꾸준히 성장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인터넷진흥원 김미영 팀장도 “디지털 세탁업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는 것은 잊혀질 권리에 대한 논의나 실제 SNS 등에 게시된 글이 범죄에 악용된 사례가 언론에 자주 보도됐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디지털 세탁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만능열쇠가 아니다”라고 조언했다. 악용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기업 중 일부는 디지털 세탁업체를 통해 평판관리를 하려는 의도를 드러내기도 한다. 디스캐치라는 디지털 세탁업체도 이런 문제 때문에 사업을 접었다. 디스캐치 관계자는 “사업 초기 기업에서 좋지 않은 게시판 글을 없앨 수 있냐는 문의가 많았다”면서 “개인 정보 보호를 위해 사업을 시작했지만, 법적으로 문제가 되는 의뢰가 많았다”고 했다.

잘못된 기업 운영방식을 고칠 생각은 하지 않고 잊혀질 권리를 악용하는 것이다. 소비자의 ‘기억할 권리’를 침해하는 기업의 행태를 방지하는 것이 디지털 세탁업체가 선결해야 할 문제다. A기업 관계자도 “기업이 소비자의 댓글을 무단 삭제하면 큰 역풍을 받는다”고 조언했다.

디지털 세탁업을 믿기보다 개인이 정보보호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업체도 무분별한 정보 수집을 멈춰야 한다는 지적이 높다. 오픈넷 전응휘 이사장은 “개인정보 유출 문제는 계속될 것”이라고 했다. “무분별한 개인정보 수집을 막아야 해결할 수 있다. 디지털 세탁업이 나오는 것은 개인정보를 무분별하게 수집하는 풍토에서 나온 것이다.”

주부 백 씨는 자신의 개인정보가 유출된 후 인터넷 사용에 변화가 생겼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1000원 쿠폰을 받기 위해 개인정보를 기입하는 것도 멈췄다. 주민번호나 전화번호를 요구하는 서비스가 있으면 약관을 꼼꼼하게 읽어보는 습관을 기르고 있다. “개인정보가 유출됐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무서웠어요. 앞으로 내 정보를 스스로 관리해야죠.”

201404호 (2014.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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