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친환경·고효율 차량 개발에 적극 나서지 않았던 현대·기아차가 변했다. 지난해 말부터 하이브리드 차량 라인업을 늘렸고, 올해는 소비자의 요구가 높았던 소나타·그랜저 디젤 출시설까지 나오고 있다. 현대·기아차의 변화는 무엇 때문일까.
▎지난해 10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현대차 공장을 찾은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왼쪽 두 번째)이 자동차를 점검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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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현대·기아차는 그랜저 하이브리드, K7·K5 하이브리드를 연달아 내놓았다. 올해 소나타·그랜저 디젤이 출시될 것이라는 이야기도 계속 나오고 있다. 그동안 중·대형 가솔린 차량 판매에 치중했던 현대·기아차의 갑작스런 변화는 무슨 이유일까. 전문가들은 “내년 1월 시행예정인 ‘저탄소차 협력금 제도’ 때문”이라며 “현대·기아차의 선제 대응이 아쉽다”고 분석했다.저탄소차 협력금 제도는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기준(중립구간)보다 적은 자동차를 구입하면 차량 구매자에게 정부가 재정적인 지원(50만~300만원 지원 예정)을 하고, 그 반대의 경우 차량 구매자가 부담금(50만~300만원)을 내는 제도다. 쉽게 풀이하면 연비가 좋은 경·소형차의 경우 차량 가격이 낮아지고, 연비가 좋지 않은 중·대형 차량 가격은 현재보다 높아진다. 에너지관리공단은 이산화탄소 배출량과 연비의 관계에 대해 “연비가 높은 자동차는 이산화탄소를 적게 배출한다”고 밝히고 있다.저탄소차 협력금 제도의 모델은 2008년부터 프랑스에서 시행했던 ‘보너스-맬러스’ 제도다. 프랑스는 보너스-맬러스 제도를 도입한 후 매년 24만t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이는 데 성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소형 신차 등록비율이 늘어나는 효과도 얻었다.주무부처인 환경부와 환경전문가들은 저탄소차 협력금 제도가 중·대형차 위주의 소비문화를 바꿀 수 있다고 판단한다. 녹색교통운동 송상석 사무처장은 “한국은 배기량별 세제를 운영했다. 큰 차를 사면 세금을 더 내게 했지만, 중·대형차 선호 현상은 오히려 높아졌다”면서 “이를 해결할 방법을 찾다가 프랑스의 보너스-맬러스 제도를 주목한 것”이라고 밝혔다.경·소형차의 판매량이 늘어난다는 것은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줄어드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은 세계 8위의 온실가스 배출 국가다. 202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현재 대비 30% 감축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자동차 부분에서 34%를 감축해야만 가능한 수치다. 중앙대 김정인 교수(경제학)는 “제조업 등 산업체가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는 것은 부담이 크다”면서 “이를 완화하려고 수송 부문의 감축비율을 높였고 수송 부문에서 줄이는 것이 비용 대비 효율적이다”고 설명했다.친환경 고효율 차량 개발에 미적이던 현대·기아차는 큰 타격을 받게 된다. 지난 1월 16일 산업통상자원부가 발표한 ‘자동차 등록현황 통계’를 살펴보면 현대·기아차의 위기감을 느낄 수 있다. 지난해 12월 현재 국내 자동차 누적등록대수는 1940만864대다. 이 중 현대·기아차는 1401만8331대로 전체의 75.8%를 차지한다.같은 해 12월 현재 승용차 누적 등록대수는 1507만8354대로 이 중 경·소형차는 239만7119대다. 중형차 881만3125대, 대형차가 386만110대다. 승용차 시장에서 중·대형 승용차 점유율은 84%나 된다. 중·대형 차량의 점유율이 커지면 그 이익의 대부분은 현대·기아차가 얻고 있는 상황이다. 전기차나 하이브리드 등 친환경 차량 개발을 서두르지 않는 이유다.친환경·고효율 차 개발 서둘러야2012년 환경부의 내부 보고서에 따르면 저탄소차 협력금 제도의 중립 구간은 탄소배출량 130g/㎞~145g/㎞다. 제도 시행 전이기 때문에 중립 구간이 유동적이다. 만일 이 중립 구간을 따르면 현대·기아차의 베스트 셀링카 대부분은 부담금을 내야 한다. 2011년 판매 차량 중 K5 2.0, 쏘나타 2.0, 투싼2.0, 스포티지, 싼타페 2.0D, 그랜드카니발 2.2, 제네시스, 모하비, 에쿠스 5.0 등은 부담금을 내야 한다. 보조금을 받는 차량은 아반테/포르테 하이브리드, 모닝 1.0, 쏘나타/K5 하이브리드, 액센트 1.6 디젤, 프라이드 1,5 디젤 등이었다.그동안 소비자는 다양한 라인업의 하이브리드 차량과 디젤 차량을 원했다. 하지만 현대·기아차는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그 틈새는 기술력이 뛰어난 유럽 디젤 차량이 차지했다. 한때 현대·기아차의 내수 점유율은 80%를 넘었다. 하지만 소비자의 요구와 치열한 연비경쟁에 대응하지 않았고, 내수 점유율은 70%대로 내려갔다.저탄소차 협력금 제도의 주무부처인 환경부 교통환경과 관계자는 “현대차는 돈 되는 것만 팔다가 발등에 불 떨어졌다”며 “뒤늦게 하이브리드와 디젤 차량 개발을 서두르고 있다”고 지적했다. 자동차 업계 관계자도 “현대·기아차 내부에서도 충돌이 있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저탄소차 협력금 제도 시행을 받아들여 친환경차 개발을 서둘러야 한다는 측과 이익을 보장했던 가솔린 중·대형 차량을 포기할 수 없다는 의견이 대립한다는 것.저탄소차 협력금 제도를 두고 환경부와 산업통상자원부도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단적인 예가 윤상직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의 발언이다. 3월 5일 윤 장관은 한 인터뷰에서 “저탄소차 협력금 제도가 수입차에 유리하고 국산차에는 불리한 형평성 문제가 있어 전반적으로 재검토하고 있다”고 말한 것.산자부 장관의 발언에 대해 ‘통상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업계의 목소리만 대변했다’ 등의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다. 중앙대 김정인 교수는 “통상을 책임지는 장관으로서 표현에 문제가 있고 통상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며칠 후 김재홍 산업통상자원부 1차관이 해명에 나섰다. 3월 10일 기자간담회에서 “저탄소차 협력금 제도가 내년 시행하는 것으로 일단 잡혔는데, 조세연구원과 산업연구원, 환경연구원 등 3개 기관에서 연구를 진행 중”이라며 “결과가 나오면 대국민 공청회를 통해 논의하고 확정지을 것”이라며 장관 발언의 파장을 막으려고 노력했다.이에 대해 환경부 관계자는 “산자부 장관이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은 것”이라며 “환경부는 내년에 이 제도를 시행한다는 데 변함이 없다. 4월에 기관 용역이 나오면 정부의 방침도 가닥을 잡을 것”이라고 설명했다.현대·기아차 관계자는 “저탄소차 협력금 제도 시행이 너무 빠르다”며 하소연했다. 이 관계자는 “저탄소차 협력금 제도가 서민들에게 돈을 걷어서 수입차에 혜택을 주는 것”이라며 “자동차 만드는 것이 금방 되는 것도 아닌데, 환경부가 너무 몰아붙이고 있다. 시행 시기를 늦춰야 한다”고 말했다.전문가들은 현대·기아차의 분발을 요구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친환경 고효율 차량 개발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것. 김정인 교수는 “현대·기아차는 이 제도와 상관없이 친환경 차량 개발에 힘써야 한다”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내수 시장이 포화 상태이므로 살길은 수출 밖에 없다. 유럽의 디젤차와 경쟁할 수 있는 기술력을 키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