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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URIFUTU RESORT & SPA - 에티오피안 망명자 관광 산업의 개척자 되다 

 

사진 지미연 기자
엄혹한 군부 정치를 피해 16세에 고국 에티오피아를 떠나야 했던 타디우스 벨레테는 23년 만에 성공한 사업가로 고국에 돌아왔다. 에티오피아 최대 부호 중 한 명인 그는 에티오피아를 한국에 알리며 양국간 경제협력 분야를 찾고 있다.



한국전쟁 참전국 에티오피아와 한국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있다. 지난해 6월 한국과 에티오피아 수교 50주년을 맞아 에티오피아항공이 주 4회 직항 노선을 개설한 이후 관광상품이 출시됐다. 이를 진두지휘하는 사람은 쿠리푸트 리조트 & 스파(Kurifutu Resort & Spa) 대표 타디우스 벨레테(Tadiwos Belete·50)다. 65년 역사의 에티오피아항공은 아시아에 15개의 직항로를 개설했다. 아프리카 항공사 중 한국에 취항한 첫 번째 사례다.

벨레테 대표는 에티오피아항공 계열 여행사인 ‘에티오피안 홀리데이즈’의 대표를 겸하고 있다. 그는 “에티오피아항공과의 제휴에 쿠리푸트 리조트가 한몫했다”며 “에티오피아 관광 산업에 기여한 점을 인정받은 것 같다”고 말했다. 벨레테 대표는 에티오피아에서 쿠리푸트 리조트 2곳을 운영 중이고, 4개의 리조트를 추가 건설 중이다. 에티오피아 자연과 역사를 모티브로 만든 쿠리푸트 리조트에는 스파와 와인 하우스, 식당 등이 갖춰져 있다. 에티오피아 정부도 관광 산업의 성장 가능성에 주목하면서 그의 행보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요즘 벨레테 대표는 한국과의 비즈니스에 힘을 쏟고 있다. 에티오피아 직항로 개설 이후 에티오피아를 찾는 한국인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인 관광객을 위해 다양한 관광 상품을 개발하고 있다. 지난 3월 한국의 샤프여행사와 손잡고 첫 번째 상품인 ‘에티오피아 북부 자연 문화유산 탐방’을 선보였다.

얼마 전 이 상품을 신청한 첫 팀이 에티오피아 관광을 마치고 돌아왔다. 벨레테 대표는 “앞으로 샤프 여행사뿐만 아니라 다른 한국기업들과 다양한 사업협력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며 “한국인 투자유치에 적극 나서겠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그는 한국 기업인을 현지로 초청해 에티오피아의 매력과 성장 가능성을 홍보하기도 했다.

황무지 땅에 만든 리조트 성공시켜

벨레테 대표가 고국의 관광산업 활성화에 발 벗고 나선 이유가 있다. 그는 대표적인 ‘에티오피안 디아스포라(Ethiopian Diaspora)’다. 에티오피아의 정치 억압을 피해 다른 국가나 지역으로 이주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타국에서 떠돌던 그들이 고국에 민주 정부가 들어선 이후 돌아와 경제 성장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벨레테 대표의 인생살이를 엿보면 에티오피안 디아스포라를 이해할 수 있다.

1974년 에티오피아 군부는 쿠테타를 일으켜 하일레 살레시에 황제를 축출했고 악명높은 임시군사행정위원회 ‘데르그(Derg)’를 설치했다. 군부는 사회주의 정권을 세웠고, 주요 산업과 금융기관, 토지 등을 국유화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수십만 명의 에티오피아 젊은이는 자의반 타의반 고향을 떠나 수단·카르툼 등으로 피해야만 했다.

고국에서 도망치다 붙잡혀 죽기도 하고 무기한 감금당한 젊은이가 수두룩 했다. 에티오피안 디아스포라가 생겨나기 시작한 것. 1980년 16세에 가족을 고향에 남겨두고 수단으로 피난을 간 벨레테도 이 중 한 명이다. “3년 동안 수단에서 먹고 살기 위해 온갖 일을 다 했다”고 그는 말했다.

16세 소년이 혈혈단신으로 타지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농장에서 새를 쫓는 인간 허수아비가 되기도 했고 가정부로도 일 했다. 타디우스 벨레테라는 이름이 어렵다고 ‘오즈만 모하마드 새드’라고 바꾼 이도 있었다. “나를 처음 고용했던 사람이 내 종교와 문화를 무시하고 지어준 새 이름을 정부 기관에 등록시키는 바람에 이름이 두 개가 됐다.” 타국살이의 설움을 몸으로 겪은 것. 고국에 대한 애착이 소년의 가슴에 새겨지기 시작했다.

벨레테의 인생은 미국에 가면서 바뀌었다. 자신을 돌봐주던 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수단과 카르툼에서 3년을 보낸 후 미국 시카고로 떠날 수 있었다. 그곳에서 1년을 보낸 후 보스톤에 정착했다. 새로운 삶이 시작된 곳이다. 공립 2년제 대학에 입학해 회계학을 전공했고, 지금은 세 아이의 엄마가 된 아내도 그곳에서 만났다. 아내도 어렸을 때 고국을 떠난 에티오피안 디아스포라다. 벨레테 대표는 미국에서 가수로 활동하고 있는 아내를 콘서트에서 처음 만났다고 했다. 그는 에티오피아 출신 아내를 만나면서 고향에 돌아가겠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하지만 가진 것 하나 없는 20대 청년이 미국에 뿌리 내리기는 쉽지 않았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수많은 도전을 해야했다. 에티오피안 식당을 열고, 에티오피안 가수 프로모션 일도 했다. 그러면서 점차 사업에 눈뜨기 시작했다. 그의 인생을 바꾼 것은 헤어디자이너 일을 하면서부터다.

“헤어디자이너 자질이 있는지 전혀 몰랐고 그냥 먹고 살기 위해 도전했다”는 그는 미용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직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보스톤의 번화가 뉴베리에 있는 ‘잔 피에르 데이비드 살롱’에 취직했다. 6개월 만에 가위를 잡았고, 주당 3000달러를 버는 헤어디자이너가 된 것. 살롱 주인은 그에게 매니저 역할까지 맡겼다. 헤어디자이너 자질과 사업가 능력이 결합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벨레테 대표는 돈을 벌자 독립을 결심했다. 뉴베리에 직원이 22명이나 되는 큰 규모의 미용실을 열었다. 얼마 후 2호점까지 열었다. ‘보스턴 비즈니스’ 잡지 커버에 ‘성공한 흑인 사업가’로 소개될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미국에 안주하지 않았다. 에티오피아를 떠난 지 23년 후에 고국에 돌아갔다. 군부가 몰락하고 민주 정부가 들어선 에티오피아는 해외에서 성공한 디아스포라에게 경제성장에 힘을 실어달라고 요청했다.

벨레테 대표도 고국의 부름을 받았다. 고향 에티오피아는 여전히 가난했지만, 사업 가능성이 컸다. 정부는 경제성장을 위해서 다양한 정책을 펼쳤다. 벨레테 대표는 고국에 돌아오자마자 수도 아디스아바바에 살롱과 스파를 결합한 ‘보스톤 스파’를 열었다.

이후 관광산업에 눈을 돌렸다. 관광객이 먹고 즐길 수 있는 리조트가 부족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아디스아바바에서 45㎞ 떨어진 데브레 자이트라는 지역에 ‘쿠리푸트 리조트 앤 스파’를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가족들이 미쳤다며 말렸다. 그곳은 아무 것도 없는 황무지였다.

그러나 벨레테 대표는 선견지명이 있었다. 에티오피아에 온 관광객들이 쿠리푸트 리조트를 찾기 시작했다. 반기문 유엔사무총장 등 세계 각국 지도자들도 에티오피아에 오면 이곳을 들른다. 현재 직원은 1500명에 이른다. 에티오피아 정부와 민간기업들은 짧은 시간에 기적을 이뤄낸 벨레테 대표를 눈여겨 보게 됐다.

에티오피아 정부도 화답했다. 2010년 에티오피아 정부는 ‘성장과 구조변환 계획(Growth and Transformation Plan, GTP)’을 발표했다. 에티오피아는 도시 개발에 기반을 둔 GTP를 통해 지속가능한 경제성장을 이루려고 한다. 벨레테 대표가 바빠진 이유다. “정부의 경제성장 전략은 좋은 결과를 낼 것이다. 한국 기업에 에티오피아는 기회의 땅이다.”

벨레테 대표의 꿈은 무엇일까. “고국을 사랑하고, 에티오피아를 위해 일했던 사람으로 기억되는 것이다.” 소박한 대답이지만 그의 꿈은 태양처럼 뜨겁다.

201406호 (2014.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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