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16일 서울 서초동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흥미로운 공연이 열렸다. 국립국악원 정악단의 2014년 정기공연 ‘풍류로 아름다운 세상’첫날 공연 ‘심불로(心不老)’가 그것으로, 국악의 치유적 기능을 강조해 많은 관심을 받았다. 풍류음악(정악)에 스토리텔링이 더해진 음악극 ‘심불로’는 조선 광해군 시대를 배경으로 가상의 인물인 조선 최초의 음악치료사 강경과 기생 유연이 「신노심불로(身老心不老)」라는 ‘풍류의서’를 만드는 과정을 그렸다. 태양인·태음인·소양인·소음인으로 구분하는 ‘사상의 학’ 체계에 국악기의 8가지 재료를 연결했는데, 체질에 따라서 좋은 음식이 있듯이 특별히 더 좋은 음악도 있다는 메시지다.이 공연은 정재국(73) 국립국악원 정극단 예술감독이 총지휘하고 윤중강(55) 음악평론가가 연출과 대본을 맡았다. 공연 전날 두 사람을 만났다. 정 감독은 “풍류라고 하면 흔히 놀고 즐기는 음악으로 생각하는데 정신적인 음악이고 수신의 음악”이라며 “요즘 시절이 하 수상하고 가슴 아픈 일도 많아 대중의 시름을 덜어주고 싶은 마음에 기획했다”고 말했다. 윤 평론가는 “작품의 시대적 배경을 전쟁과 당쟁이 많았던 조선 광해군 때로 잡은 것도 현 시대를 투영하기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사상체질에 따라 맞는 국악기 있다공연 첫 장은 풍류를 통해 음풍농월하고 자기 수양하던 남자가 당쟁 과정에서 밀려 낙향하면서 시작된다. 고향에 돌아와 마을 사람의 고단한 삶을 본 그는 대금 연주를 통해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준다. 자살하려는 여자를 음악으로 구하고 그와 사랑에 빠지면서 둘은 함께 음악 의 기능성을 담은 치유서를 만든다.윤 평론가는 “예부터 어르신들이 자주 하시던 말씀이 ‘마음이 즐거우면 몸은 늙어도 마음은 늙지 않는다’였다” 며 “풍류치료사라는 상상에서 공연을 기획했지만 문헌을 찾고 공부하는 과정에서 국악의 치유 효과를 알게 됐고, 이를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우리 선조들은 높고 낮음, 빠름과 늦음의 폭이 크지 않은 정악에서 중용을 배우고, 여러 악기가 어우러진 시나위에서 개인의 자유와 단체의 조화를 배웠다. 평소 사상의학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국악과의 접목 부분을 찾기 시작했다.”그는 태양인·태음인·소양인·소음인의 체질에 국악기의 재료(팔음)인 금(金)·석(石)·사(絲)·죽(竹)·포(匏)·토 (土)·혁(革)·목(木)을 접목했다. 먼저 쉽게 화를 내기 쉬운 태양인은 쇠와 돌로 만든 편종이나 편경 연주가 어울린다고 한다. 태양인은 일처리에 있어 막힘이 없지만 자아를 들여다보는 기회는 적다. 지나친 적극성은 몸의 화를 불러오고, 이 화가 강해지면 병에 노출된다. 윤 평론가 는 “편종과 편경은 연주할 때 기다림과 여유가 필요한 악기”라며 “절도 있게 때리는 동작을 통해서 화를 누그러뜨릴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태양인은 귀가 발달했으니 편종, 편경을 두드리면서 그 정확한 음정 자체에 몰입해 감정을 추스를 수 있다는 설명이다.소양인은 솔직담백하고 강하며 조급한 성격이다. 자신의 감정을 쉽게 드러내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성격은 다른 사람에게 스트레스를 줄 수 있다. 이들은 말을 급하게 해서 손해를 보는 경우가 있으니 한 템포 여유 있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악기가 필요하다. 윤 평론가는 “생황이나 훈(일종의 오카리나) 과 같은 악기가 적합하다”고 했다. “생황은 들숨과 날숨의 호흡을 조절하면서 연주해야 한다. 여유 있는 심성을 갖게 하는데 안성맞춤이다. 생황의 화음을 통해서 조화를 배우고, 훈을 통해서 흙의 기운을 섭취해야 성격이 느긋해진다.”이에 반해 내성적인 소음인은 장구나 북이 어울린다. 소음인은 신중함이 지나쳐서 답답한 경우도 많다. 주변 사람이 이런 신중함 때문에 힘들어하기도 한다. 이 경우 느린 연주보다는 비트가 있는 리듬 악기가 좋다. 비트가 빠르고, 소리가 클수록 성격을 고치는 효과는 크다. 타악기에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은 편이지만 한 번 알게 되면 깊게 빠진다는 설명이다.정적이고 화를 잘 참는 태음인에겐 침착한 대금이나 거문고를 권한다. 태음인은 말을 많이 하면 쉽게 피곤함을 느끼기 때문에 화가 나도 침묵으로 일관하는데 이것이 곧 병이 된다. 사람관계 속에서 스트레스를 받기 쉬운 태음인은 조용히 혼자 연주하는 것이 좋다. 윤 평론가는 “이들은 ‘풍류’가 가장 필요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태음인은 특히 허리가 발달돼서 오래도록 앉아있을 수 있다. 거문고와 대금을 주기적으로 연주하는 습관을 기르는 것 이 좋다.”
국악은 기업경영에도 도움 된다정 감독은 “정악, 그러니까 풍류음악은 서예, 다도와 잘 어울리며 특히 태교음악으로도 좋다”고 강조했다. 실제 풍류음악은 선비의 인격 수양과 궁중이나 양반가 여인의 태교를 목적으로 쓰였다. 근래에도 병원 등에서 심리치료나 태교음악으로 각광받고 있다. 서울 강동경희대병원 한 방음악치료센터에서는 한방음악으로 치료를 진행하고 있다. 간의 기능이 떨어졌을 때는 목(木)의 기운을 가진 음악을 들려준다.윤 평론가는 “정 감독은 실학주의자”라고 말했다. 1972년 명동예술극장에서 국악 사상 첫 피리독주회를 연 것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개량 피리를 개발하고 학생들에게 피리 연주의 다양성을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는 것이다. 윤 평론가는 “정 감독은 ‘우리 것은 좋은 것’이라는 단순함을 뛰어넘어 다른 문화 영역과 협업하는 것을 강조한다”며 “호흡악기는 연주자의 생명이 길지 못해 피리의 경우 대개 쉰 살 정도면 손에서 놓는데 일흔 넘은 정 감독이 여전히 연주를 하는 것도 현장에 서고 싶은 마음 때문”이라고 했다. 윤 평론가 가 “매 연주 때마다 최고령 피리 독주의 역사를 쓰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자 정 감독은 “담배 끊고 등산을 열심히 해서인지 아직 멀쩡하다. 병원에서 40대 폐활량이라고 했다”며 웃었다.두 사람은 인터뷰 내내 유쾌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이 차가 있지만 어느덧 30년 지기다. 군 복무시절 아침마다 라디오에서 흐르던 정 감독의 피리소리에 반한 윤 평론가는 이후 그의 연주를 논하기 시작했다. 정 감독은 직언을 서슴치 않는 윤 평론가를 믿고 공연 때마다 도움을 구하고 있다. 정 감독은 “이 사람이 스물다섯에 평론가로 등단할 때 쓴 평론의 주제가 황병기 선생이었다. 당시만 해도 국악계의 황제로 여겨져 범접하지 못했던 분인데 대단한 용기였다”며 추켜세웠다.국악의 대중화는 정 감독에게도 여전히 숙제다. 그는 “일흔이 넘은 나이에 국악원 정악단 예술감독을 다시 맡은 이유이기도 하다”며 “우선 기업가 등 사회 리더들이 국악을 통해 수신제가하고 이용후생해야 한다”고 강조 했다. 그는 10여 년 전 만나 지금까지 음악으로 교류하는 윤영달 크라운해태 회장을 예로 들었다. 윤 회장은 1998 년 외환위기의 파고를 넘지 못하고 회사가 부도 처리 됐을 때 ‘대금 선율’에 마음을 기댔다. 부친이 세운 회사를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는 생각에 죽음도 생각했지만 청명한 대금 선율이 그를 깨웠다. 이후 국악, 문학 등 예술 아카데미를 사내에 설치해 직원들의 마음을 달래고 창의력을 키우는 ‘예술경영’에 나섰다. 현재 국립국악원에는 40여 명의 CEO와 임원들이 모임을 만들어 국악을 배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