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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형석 미미박스 대표 - “글로벌시장에서 애플,구글과 경쟁하고 싶다” 

 

최영진 포브스 차장 사진 전민규 기자
미미박스에는 군고구마를 팔아 한 달에 800만원을 벌고, 이베이를 이용해 미국 생활비를 충당했던 하형석 대표의 인생역전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하형석 대표는 지난 1월 글로벌 투자자로부터 330억원의 투자를 받아 한국 스타트업계를 놀라게 했다.
2003년 겨울, 서울 강남역 부근에서 한 대학생이 군고구마를 팔고 있었다. 이 젊은이는 군고구마 장사를 하면서도 기발한 아이디어를 선보였다. 대표적인 것이 ‘시즌 자유이용권’. 손님이 1만5000원짜리 시즌권을 사면 하루에 두 개씩 겨울 내내 군고구마를 먹을 수 있게 했다. 또 다른 유인책은 군고구마 배달이었다. 전화로 주문한 고객들 집으로 군고구마를 배달해 주었다. 장사가 잘 안될 때는 지나가는 이들을 향해 “열심히 살겠습니다”라고 외쳤다. 그러자 길을 가던 이들이 되돌아와서 군고구마를 사줬다. “심지어 열심히 하라고 용돈을 주는 단골 아저씨들도 있었다.”

군고구마 장사는 ‘대박’이었다. 친구와 시작했던 군고구마 장사가 잘돼서 지점까지 냈다. 친구 두 명을 끌어들여 반포역 부근에 군고구마 ‘2호점’을 낸 것이다.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군고구마 장사는 저녁 6시부터 8시30분까지만 했다. 가장 잘 팔리는 시간이 직장인들 퇴근 시간이기 때문이다. 하루에 2~3시간 동안 집중적으로 군고구마를 팔아 올린 매출액만 매월 800만원. 그는 2003년 겨울 4개월 동안 3000만원 넘게 벌었다. 수많은 인파가 몰리는 강남역에서 군고구마를 명물로 만들어 버린 이 대학생은 지금도 여전히 남다른 아이디어를 선보이며 사업을 펼치고 있다. 요즘 한국 스타트업계에서 가장 뜨거운 인물로 꼽히는 하형석(32) 미미박스 대표가 그 주인공이다.

국산 화장품을 해외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플랫폼


2011년 12월 창업한 미미박스는 월정액을 받고 소비자에게 맞춤 화장품을 보내주는 서브스크립션(구독·Subscription) 비즈니스 모델로 출발했다. 현재는 한국의 화장품과 뷰티 기기 등을 해외에 소개하는 플랫폼 역할과 화장품 제조 판매로 수익을 올리고 있다. 지난 해 12월 서브스크립션 비즈니스 모델은 종료됐다. 하 대표는 “회사가 성장하면서 미미박스의 비즈니스 모델이 8번 정도 변한 것 같다. 지금은 한국 화장품을 해외 소비자들에게 판매하는 플랫폼 역할 비중이 커졌다”고 설명했다.

미미박스는 한국보다 해외에서 더 유명한 스타트업이다. 2014년 세계적인 액셀러레이터 와이콤비네이터의 투자를 받은 유일한 한국 스타트업으로 세계 투자자들의 이목을 끌었다. 지난 1월에는 야후 공동창업자 제리양, 디즈니 최고경영자 출신의 풀 프레슬러, 드롭박스 1호 투자자 페즈먼 노자드 등 세계적인 투자자들이 미미박스에 330억원을 투자했다. 한국 스타트업계는 이 소식에 환호했다.

“제리양이나 페즈먼 노자드 등을 처음 봤을 땐 나도 놀랐다.(웃음) 같이 이야기해보니 생각하는 스케일이 다르고 집중력이 남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어떤 사안을 이야기하면서도 중요한 것을 콕 집어내는 실력자들이었다. 배울 게 너무 많았다.” 하 대표는 세계적인 투자자들에게 한국 스타트업의 가능성을 보여준 메신저 역할을 했다. 이런 성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은 남보다 한발 빠른 철저한 준비를 했던게 주효했다. “해외진출에 주력하려고 지난 해 10개월동안 미국에서 보냈다. 글로벌 시장을 목표로 일하다보니 좋은 성과를 얻은 것 같다”며 하 대표는 웃었다.

군고구마를 팔아 한달에 800만원을 벌었던 하 대표는 살아온 이력도 독특하다. 대학시절 그의 전공은 현재 사업과 전혀 무관한 환경공학이었다. 2002년 경희대 환경공학과에 입학했지만 2009년에는 미국 뉴욕 파슨스디자인스쿨을 졸업했다. 공대생이 중간에 패션으로 전공을 바꾼 것이다.

한국에서 대학을 다녔던 사람이 어떻게 파슨스디자인스쿨에 입학했을까. 그가 미국과 인연을 맺은 것은 군 복무(2004년~2006년) 중 아프가니스탄에서 6개월 동안 파병생활을 한 덕분이다. “자원을 해서 아프가니스탄에 통역병으로 갔다. 당시 영어를 잘못했는데, 통역병으로 일하면서 영어를 제대로 배웠다”며 웃었다.

제대 후 아프가니스탄에서 만났던 미국인 친구를 만나러 뉴욕에 가면서 새로운 인생이 열렸다. 뉴욕의 강한 에너지를 느끼면서 패션을 공부하기로 마음먹은 것. “어렸을 때부터 옷에 대한 관심이 남들보다 많았던 것 같다. 돈이 생기면 딱 두 가지를 샀는데, 전자기기와 옷이었다.”

집에서는 유학 자금을 융통해주지 못했다. 2007년 첫 학기 등록금은 누나의 결혼자금으로 해결했다. 생활비는 스스로 벌어야만 했다. 그가 택한 것은 이베이. 뉴욕에서는 하자가 있는 물건을 파는 샘플 세일이 자주 열렸다. 하 대표는 이때를 이용해 물건을 저렴하게 사서 이베이에서 팔았다. “뉴욕은 돈이 많이 필요한 도시였다. 이베이를 이용해 매달 300만원~400만원 정도를 벌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베이라는 플랫폼을 어떻게 이용하는지 그때 배웠던 것 같다. 미미박스는 군고구마 장사와 이베이에서 배운 것을 결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후 뉴욕에 있는 톰포드 인터내셔널을 거쳐 제너럴아이디어 최범석 디자이너에서 패션 경험을 쌓았다. 2010년에는 베이비러브디스코 코리아라는 컨설팅 회사를 창업하기도 했다. 2010년부터 2011년까지 티몬 B2B 팀장으로 일한 후 2011년 12월 미미박스를 창업했다. 미미박스를 창업한 이유는 단순하게 “친구들과 뭔가를 같이 해보고 싶어서”라고 했다.

미국, 중국에도 미미박스 지사 설립


▎하형석 대표가 들고 있는 핑크색 박스는 서브스크립션 비즈니스를 할 때 사용했던 것이다.
창업 이유는 소박했지만, 3년이 지난 미미박스가 이룬 성과는 놀랍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중국 상하이에 미미박스 지사가 설립됐다. 시작할 때는 4명이었지만 현재는 직원이 2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서울 역삼동에 있는 미미박스 한국 본사에는 미국과 중국에서 온 현지 직원도 함께 근무하고 있다. 한국어, 영어, 중국어가 함께 사용되는 글로벌 사무실이다.

올해 매출 목표는 1000억원이다. “창업 후 매년 400%씩 성장을 했다. 1000억원 매출을 대비해서 물류센터도 확충했다.” 이번에 받은 투자금은 물류와 기술개발 등에 사용할 계획이다. 미미박스의 매출액 중 70%는 여전히 한국 시장에서 이뤄진다. 1000억원의 매출을 올리려면 해외 시장, 특히 중국 시장에서 급속한 성장을 거둬야만 가능한 수치다.

지금은 글로벌 시장을 이야기하지만, 미미박스의 처음은 초라했다. 홈페이지도 없었고, 서비스를 구축할 수 있는 엔지니어도 없었다. 심지어 미미박스는 후발주자였다. 후발주자가 경쟁에서 이기기 쉽지 않다. 그런데도 하 대표가 뷰티 시장에 뛰어든 것은 “당시 온라인 뷰티 시장은 시작 단계였다. 누구도 이 시장을 선점하지 못했고, 도전해 볼만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1%의 차이로 잘되는 회사와 그렇지 못한 회사가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잘할 수 있는 분야라고 생각했고, 최선을 다했다.”

미미박스 창업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과정이었다. 하 대표의 창업자금은 3500만원이 전부였다. 책상 네 개가 들어가는 조그마한 사무실을 구했다. 한 사람이 전화통화를 하면 다른 이들은 전화통화를 하기 힘들 정도로 사무실 환경이 열악했다. 하 대표를 포함해 창업 멤버 4명은 매일 아침 7시 30분이면 사무실에 모였다. 자정을 넘어서야 퇴근하는 강행군이 이어졌다.

거래처인 화장품 회사 담당자와 약속을 잡는 것도 쉽지 않았다. “100명에게 전화를 하면 2~3명만 미팅 약속을 잡아줬다. 담당자와 통화하는 것도 어려웠고, ‘미미박스입니다’라고 하면 ‘우린 박스 필요없다’며 대부분 전화를 그냥 끊었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이라면 움츠러들기 마련인데...”라는 기자의 의문에 “혼자였으면 버티지 못했을 것”이라며 웃었다.

끈질긴 영업활동 덕분에 3개월 후 미미박스 서비스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서비스 시작 후 1개월 만에 월 1억원, 3개월 만에 월 2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성장세가 예상보다 빨랐다. 섣부른 사업확대로 인해 2억5000만원의 빚을 지기도 했지만, 미미박스는 매출이 급신장했다.

하지만 미미박스는 여전히 국내용이었다. 글로벌로 눈을 돌릴 여력이나 경험도 없었다.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2013년 7월 미래창조과학부가 주최한 ‘나는 글로벌 벤처다’에서 미미박스가 대상을 수상했다. 이때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던 인사가 와이콤비네이터 관계자였다.

시상식이 끝난 후 와이콤비네이터 인사는 하 대표에게 “당신들은 미국에서 성공할 수 있다. 1조원 이상의 매출을 올릴 수 있는 사업모델”이라고 추켜세운 것. 하 대표는 충격을 받았다. “우리보고 1조원 회사가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하니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 말이 우리를 불타오르게 했다”고 회고했다.

2014년 1월 하 대표는 글로벌 벤처 대상 상금 1000만원을 들고 미국으로 떠났다. 회사 직원들에게 “미미박스의 내일을 준비하겠다”는 당찬 포부와 함께. 와이콤비네이터는 하 대표를 강하게 훈련시켰다. “와이콤비네이터 관계자를 매주 한 번씩 만났는데, 만나면 하는 첫마디가 ‘지난주 몇 퍼센트 성장했어?’라는 질문이었다. ‘9% 성장했다’고 하면 ‘왜 10%가 안되느냐 다음 주에는 10% 성장률을 갖고 와달라’고 했다. 만날 때 ‘안녕’이라는 인사도 없었다. 강하게 트레이닝을 시켰다. 자연스럽게 스타트업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국내가 아닌 세계를 보는 눈이 생기기 시작했다.”

하 대표는 와이콤비네이터를 통해 다양한 자극을 받았다. 2012년 포브스는 최고의 액셀러 레이터로 와이콤비네이터를 꼽을 정도로 구성원들의 면면이 화려하다. 야후!스토어의 전신인 비아웹을 창업한 폴 그레이엄이 와이콤비네이터의 공동창업자다. “와이콤비네이터 사람들은 다들 천재였다. 구글 지 메일을 만든 이도 있었다. 그들이 ‘몇일 동안 뭘 해와라’ 그러면 할 수 밖에 없었다. 밤을 새워서라도 해내야만 했다.”

“ 1조원 매출 올릴 수 있는 사업모델”

하 대표는 미국에서 주 7일을 일했다. 하루 하루가 전쟁이었다. 매일 살아남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때 경험했던 것 때문에 지금도 해외 지사를 처음 만들면 구성원들은 주 7일을 일해야만 한다. 그게 어느 새 미미박스의 전통이 됐다. “꿈이라고만 생각한 것이 현실이 되는 것을 직원들이 느끼면 변하게 된다. 그런 경험을 하려면 열심히 일하는 수밖에 없다.”

와이콤비네이터가 요구하는 성장률과 사업 계획 등을 모두 만족시키기 위해 하 대표는 밤낮없이 일했다. 하 대표의 노력은 냉철하기로 소문난 와이콤비네이터 사람들을 감탄시켰다. 와이콤비네이터는 하 대표에게 큰 기회를 선물했다. 2014년 3월 실리콘밸리에서 활동하는 400여개의 투자사들 앞에서 사업 아이디어를 발표 할 수 있게 한 것. 폴 그레이엄은 하 대표가 발표할 내용을 세세한 부분까지 챙겨줬다. 발표할 목소리의 톤까지 살필 정도였다. 하 대표는 이날 발표회를 끝마친 후 70여 곳에서 전화를 받았다. 대성공이었다.

“와이콤비네이터는 미미박스를 실리콘밸리에 데뷔시켰다. 발표 날 제일 좋은 순서에 우리를 배치하고, 우리 홍보도 많이 해줬다. 수백억원의 투자를 받을 수 있는 것도 와이콤비네이터 덕분이다.”

미국 생활은 하 대표의 마인드를 180도 바꿔놨다. 미미박스를 시작했을 때는 단순하게 ‘잘해야지’라는 생각에 그쳤지만, 와이콤비네이터를 만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미미박스가 ‘한국의 스타트업’이 아닌 ‘한국을 대표하는’ 스타트업이라고 느낀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니까 내 자신과 직원들에게 화가 났다”면서 “그때부터 행동이 굼뜬 직원들에게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미미박스가 미국에서 성공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 당시 하 대표와 함께 일했던 직원들은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면서 울 정도였다.

하 대표의 목표도 달라졌다. 한국의 뷰티 산업을 세계에 소개한다는 포부가 생겼다. 가장 먼저 ‘3S 전략’을 세웠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중국 상하이, 서울에서 미미박스의 성장세를 높이는 전략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후 동남아 시장을 공략할 계획이다. 한국의 대기업도 이루기 어려운 성과다. 하 대표는 “대기업은 못해도 우리는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미국에서 생활하다 보니까 한국이 많이 뒤쳐졌다는 것을 느꼈다. 글로벌 시장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는 삼성전자가 외로워 보일 정도다. 누군가는 애플과 구글이랑 맞서 싸워야 할 것이다. 미미박스가 해야 할 일인 것 같다. (미미박스를)삼성보다 큰 기업으로 만들고 싶다. 투자를 적게 받으려고 했는데, 글로벌 회사로 키우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많이 받았다. 투자는 계속 받을 것이다. 내 지분이 적어진다고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던데, 스타트업은 공존 공생이다. 함께 벌어서 함께 나누는 것이다.”

미미박스 사무실에 있는 회의실 중 한 곳에는 ‘400조’라는 이름표가 붙어있다. 하 대표가 미미박스로 이루고 싶은 목표다.

- 글 최영진 포브스코리아 기자 / 사진 전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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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박스는 고객데이터를 면밀히 분석해 그에 맞는 화장품을 제공하는 플랫폼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인 와이콤비네이터에 들어간 유일한 한국스타트업으로, 해외에서 더 주목을 받고 있다.


201505호 (2015.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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