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 신용불량자로 추락했던 위기를 창업으로 이겨낸 김세중 대표의 스토리는 언제 들어도 흥미진진하다. 실패를 거울삼아 돈이 아닌 실력과 사람에 집중하면서 스타트업계의 스타로 떠올랐다.
▎젤리버스는 몰디브, 픽스플레이, 루키캠 등으로 사진 앱 부문에서 글로벌 시장의 강자로 꼽힌다. 김세중 대표가 여성 사용자들에게 호평을 받고 있는 루키캠으로 셀카 촬영을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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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갓 스물을 넘긴 청년에겐 거칠 것이 없었다. 대학 재학 때 벌써 CRM(Customer relationship management, 고객 관계 관리) 관련 회사를 창업해 엑시트에 성공했다. 젊은이들이 몰리는 홍대 클럽을 인수한 뒤 팔아 1억원이 넘는 차익을 남기기도 했다. 하는 일마다 성공하면서 대학생의 통장에는 금새 억대를 넘는 돈이 쌓였다. 젊은 부자들과의 교류도 많아졌다. 자연히 “부자가 되고 싶다”는 열망이 솟았다. 그는 ‘한방’을 노렸다. 보석 채굴권 사업에 투자자로 참여했다. 그때는 해외 자원 사업에 투자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돌아볼 기회가 없었다. 2000년대 초반에는 돈이 있는 사람들이 동남아시아 자원 사업에 뛰어드는 것이 유행처럼 번져있었다.“단지 돈 많은 형들이 뛰어드니 당연히 잘되는 줄 알았다.” 그는 해외 자원 사업에 미리 투자하면 일확천금을 만질 줄 알았다고 했다. 가진 돈에 빚까지 내서 5억원을 투자했다. 결과적으로 해외 자원 사업투자는 덜 여문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기회가 됐다. 보석 채굴 사업 계약을 맺었던 미얀마 정부에서는 반정부 시위와 쿠데타가 하루가 멀다고 일어났다. 채굴 사업은 착수도 못한 채 순식간에 반년이 지나갔다. 지인과 함께 참여했던 사업은 신기루처럼 허공에 사라졌다. 2억원이 빚으로 남았다. 성공만을 알던 청년이 하루아침에 신용불량자가 됐다. 그의 나이 22살때 이야기다.
인생의 쓴 약이 된 첫 실패
▎젤리버스의 대표적인 사진 앱으로 꼽히는 (위로부터) 몰디브, 픽스플레이, 루키캠. 젤리버스가 출시한 7개의 앱은 지금까지 6800만명이 다운로드를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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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후 신용불량자였던 그 청년은 글로벌 스타트업 창업자로 다시 이름을 날리고 있다. 스마트폰 사진 앱의 글로벌 강자로 인정받고 있는 젤리버스 창업자 김세중(36) 대표다. 사업 실패로 신용불량자 신세로 추락한 것이 젊은 청년에게 약이 됐다. “그때 망한 이후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배웠다. 인생에 로또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던 20대 시절의 김세중은 지금 없다. 대신 사람과 실력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늘 마음에 새기는 창업가 김세중만이 남아있다. 그는 보석 채굴권 사업 실패를 되돌아보면서 “큰 실패를 맛보면서 내 인생이 달라졌다. 돈을 벌기 위한 기회를 찾으면 실패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회고했다.그의 스토리를 아는 스타트업 후배 창업자들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그를 찾는다. 회사 일로 바쁘지만, 후배들이 도움을 요청하면 김 대표는 거절하는 일이 없다. ‘스타트업계의 멘토’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다. 신용불량자 대학생에서 성공한 창업가가 되기까지 10여 년 동안 그에게 어떤 일이 있었을까.인생의 쓴맛을 보고 좌절하던 청년을 양지로 끌어낸 것은 ‘일’이었다. “당시 지인의 소개로 NHN에 병역특례로 입사하면서 일에만 빠져 살았다”고 설명했다. 당시 NHN에서 일하던 임직원은 그가 고등학교 시절 백댄서로 돈을 벌었고, 공부도 잘해 연세대 재료공학부에 진학한 것이 화제가 됐던 특이한 대학생이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대학 시절 창업과 사업으로 성공하고, 패션모델로도 일했던 패기만만했던 젊은이였다는 것도 아는 이가 없었다. 그저 묵묵히 일에만 몰두했기 때문이다. 월급 통장에 돈이 들어와도 빚 때문에 90%의 돈이 바로 빠져나갔다. 그래도 일에만 빠져 살았다. “NHN에서 일도 많이 배우고, 맡았던 프로젝트에서 좋은 성과를 올렸다. 이 때문에 넥슨에서 나를 스카우트했다”고 설명했다. NHN과 넥슨은 당시 가장 핫한 IT 기업이었다. 큰 프로젝트의 처음과 끝을 자연스럽게 경험할 수 있었고, 기업이 성장하면서 발생하는 인력구조 재편이나 의사결정 과정 등을 직접 체험했다. “젤리버스를 운영할 때 일이 생기면 과거 NHN이나 넥슨은 어떻게 해결했는지 되새김질한다. 그러면 문제가 풀릴 때가 많다.”그렇게 신용불량자 딱지를 없애기 위해 걸린 시간이 5년. 그는 다시 창업에 나섰다. 넥슨에서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 “독립을 하겠다”는 김 대표의 말에 모두 “당신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하나?”라는 반응이 가장 많았다. 넥슨 사람들도 그가 그저 일만 열심히 하는 직원으로만 알았기 때문이다. “넥슨처럼 큰 기업에서는 내가 가지고 있는 아이디어를 사업으로 만드는 게 오히려 어려웠다. 실패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있었다”며 웃었다.2009년 12월 24일(회사 창업일을 신나는 기억으로 남기기 위해 크리스마스 이브를 택했다) 그는 젤리버스를 창업했다. 남들에게 기쁨을 주는 ‘젤리’와 함께 목적지를 가는 버스를 합해서 젤리버스라는 사명을 지었다. 창업 후 김 대표는 자신을 포함해 6명으로 팀을 꾸렸고, 5개월 만에 명함 앱과 지도 앱을 만들어 출시했다. 결과는 실패. “팀을 세팅했으니 뭔가를 해보자는 생각으로 도전했던 서비스였는데, 완전히 망했다. 뭘 해야 할까 생각하다가 사진 앱을 생각했다.”당시 사진 앱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해볼 만한 시장이었다. 몇 개월 뒤 안드로이드 앱인 ‘MiniDSLR’ 사진 유료앱을 티스토어에 출시했다. 출시 1개월 만에 티스토어 전체 유료 1위에 올랐다. 매출은 2000만원. “출시 2개월 만에 매출액이 150만원으로 떨어졌다. 그 뒤로는 위로 치고 올라가지 못했다. 유료 앱으로 한국 시장에서 승부를 거는 게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됐다.”그가 글로벌 시장을 두드리게 된 계기다. 안드로이드 시장을 포기하고, 애플 앱스토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돈 보다는 앱의 품질에 집중했다. 다른 사진 앱과 차별점이 없으면 성공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김 대표는 앱 자체에서 이미지 프로세싱을 탑재하는 승부수를 뒀다.“당시 사진 앱은 대부분 애플이 제공하는 API(Application Programming Interface, 응용 프로그램 프로그래밍 인터페이스)를 사용했다. 이미지를 처리하는 속도도 느리고, 큰 사이즈의 사진을 처리하는 게 어려웠다. 우리는 큰 사이즈의 이미지를 빨리 처리하기 위해 독자적으로 기술 개발에 나섰다”고 설명했다. 그는 돈을 추구하는 대신 기술에 투자한 것이다. 1년 6개월 동안 기술 개발에 몰두하느라 젤리버스 구성원들은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기술에 집중한 효과는 금방 나타났다. 2011년 1월 애플 앱스토어에 ‘큐브로’라는 사진 앱을 출시했다. 젤리버스의 첫 글로벌 제품이다. 아시아 시장에서 성과를 거뒀지만, 유럽과 미국에서는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2012년 10월 김 대표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으로 개발한 ‘픽스플레이 프로’를 출시했다. 쉽게 말해 대박을 쳤다. 사진 전문가들도 인정할 정도였다. 큰 사이즈의 사진을 처리할 수 있었고, 속도도 무척 빨랐다.“미국 사용자들은 스마트폰으로 촬영한 사진 인화를 많이 했다. 픽스플레이를 이용하면 사진 인화에 무리가 없었다. 그게 성공 요인이었다”고 김 대표는 자랑했다. 미국을 시작으로 젤리버스의 사진 앱은 글로벌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하루에 100여 통 이상 씩 전 세계 사용자들로부터 메일을 받기 시작했다. 제품에 대한 평가와 개선을 요구하는 이메일이었다. 픽스플레이 출시 초기에는 김 대표가 직접 이메일에 답변을 했다. 모르는 언어로 된 메일은 구글 번역기를 돌려가면서 답변을 해줬다. 이런 노력 덕분에 젤리버스 앱 사용자들의 로열티는 높다고 정평이 나있다. 대표적인 예로 일본의 모델 에피소드가 있다. 젤리버스 앱을 사용하던 일본 모델이 제품이 좋다고 트위터에 멘션을 올렸고, 이에 김 대표가 직접 고맙다는 답변을 했다. “여성 모델이었는데, 내가 보내 준 멘션을 지인들에게 또 자랑하더라. 몇 번 메시지를 주고 받은 후 일본 출시 앱 모델이 되어달라고 부탁했는데, 흔쾌히 받아줬다”고 자랑했다.젤리버스가 출시한 몰디브, 루키캠, 픽스플레이 등의 앱은 18개 언어로 전 세계에 서비스되고 있다. 전 세계 앱스토어(155 개국)에 출시되어 있다. 18개 언어는 모두 사용자들의 도움을 받아서 진행했다고 한다. 이런 사용자들의 로열티 때문인지, 젤리버스가 출시한 7개의 앱은 지금까지 6800만 명이 다운로드를 받았고, 매월 사용자수는 매월 850만 명이나 된다. 매출액(구체적인 액수를 밝히지 않았지만, 수십억 원의 매출 규모로 추정된다) 중 5%가 한국에서 발생하고, 나머지 95%는 해외에서 올리고 있다.
애플 본사도 젤리버스 제품에 주목
▎김세중 대표는 함께 일하는 직원들에게 기업 운영의 모든 것을 공개하고 있다. 임직원 대부분이 젤리버스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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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리버스의 앱은 애플 본사도 주목하고 있다. 2012년 12월 5일, 김 대표는 새벽에 애플이 보낸 메일을 받았다. 처음 봤을 때 앱스토어에 앱을 출시한 기업들에 보내는 애플의 공지사항인 줄 알았다. 다음 날 아침 메일을 찬찬히 살펴보다 깜짝 놀랐다. “공지사항이 아니라 애플마케팅팀에서 우리에게 보낸 메일이었다. 우리가 출시한 픽스플레이를 애플 프로모션에 사용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며 김 대표는 웃었다. 당연히 OK 사인을 보냈다. 이후 애플 앱스토어에서 펼치는 프로모션 행사에 픽스플레이도 선정됐다.앱스토어 메인 화면에 픽스플레이가 뜨면서 젤리버스는 더 많은 주목을 받게 됐다. 더군다나 또 다른 앱을 앱스토어에 올렸을 때 애플 마케팅팀에서 “왜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고 앱을 올렸나. 당신들의 앱 출시 계획을 알려줬으면 한다”는 친절한 메일을 또 받았다. “여전히 애플과 좋은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젤리버스의 앱 검수기간은 3일에 끝날 때도 있다. 보통 앱은 2주 정도 걸린다. 이외에도 애플은 다양한 행사를 할 때마다 젤리버스의 앱을 띄워주고 있다”며 김 대표는 즐거워했다.젤리버스를 주목하는 곳은 애플뿐만이 아니다. 많은 벤처캐피탈이 김 대표에게 투자 제안을 해오고 있고, 한국을 대표하는 대기업들도 인수제안을 해오고 있다. 김 대표의 답변은 여전히 ‘No’다. 젤리버스는 초창기 앤젤 투자를 한번 받은 이후 외부 투자를 받지 않았다. 보통의 스타트업이 규모를 키우고 성과를 내기 위해 투자를 유치하는 행보와는 사뭇 다른 셈이다. 김 대표는 왜 이런 행보를 하는 것일까. “투자나 인수제안을 모두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젤리버스의 지속가능성을 보장할 수 있는 기회나 제안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을 뿐이다”고 설명했다.그는 투자나 인수 제안에 집중하는 대신 함께 일하는 직원들의 발전에 공을 들이고 있다. 김 대표를 포함해 모든 구성원들은 젤리버스의 주식을 소유하고 있다. 젤리버스 구성원을 이야기할 때마다 김 대표가 ‘식구’라고 표현하는 이유다. 젤리버스의 평균 나이는 30살. 평균 연봉은 5000만원이다. 매년 2번의 해외 워크숍에는 직원이 모두 참여하고, 해외에 나갈 때마다 스타트업 방문 등의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다. 여기에 의류비·의료비 지원뿐만 아니라 명절에는 임직원 부모들에게도 용돈을 준다.젤리버스의 매출과 이익은 모든 직원들이 다 알고 있다. 심지어 회사의 통장 잔고가 얼마인지도 파악할 정도다. 김 대표가 이렇게까지 투명하게 경영하는 이유가 있다. “회사는 개인의 삶을 책임지는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시스템을 마련하려면 대표가 돈에 대한 욕심을 줄여야 한다. 돈 대신 함께 하는 사람들과 미래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김 대표는 젤리버스의 시즌2를 준비 중이다. 글로벌 시장에서 사진 앱으로 인정을 받았지만, 젤리버스의 지속성장을 위해서 동영상 시장에 도전할 계획이다. 사진과 영상을 바탕으로 미디어 회사로 진화를 시작하는 것이다.
스타트업 얼라이언스의 추천 이유!글로벌하게 6800만다운로드를 기록한 사진앱들을 내놓은 젤리버스는 숨어있는 강한 스타트업입이다. 이런 글로벌한 성공 배경에는 전 직원이 다같이 해외로 여행을 떠나서 현지시장을 배우는 독특한 문화가 있다.- 글 최영진 포브스코리아 기자·사진 전민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