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이석우의 와인 이야기(3) 

오래된 빈티지 와인의 놀라운 생명력 

이석우 중앙일보 조인스 공동대표 겸 디지털제작 전략담당
노년의 백발과 깊게 파인 주름에서 인생의 깊이가 느껴지듯이, 오래된 와인의 묵은 향과 맛에서 끈질긴 생명력과 원숙함을 느낄 수 있다.

앙드레이 첼리체프(Andre Tschelistcheff)는 1930~70년대 활동했던 미국 나파(Napa)의 전설적인 와인메이커였다. 하루는 1898년산 샤토 라피트(Chateau Lafite)를 한 모금 마시고, 주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래된 와인을 맛보는 것은 나이 많은 여인과 사랑을 나누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한마디를 보탰다. “가능은 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조금 뒤, 라피트를 한 모금 더 마셨다. “가능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즐거울 수 있습니다.” 이윽고 잔을 비우면서 말했다. “그렇지만 약간의 상상력이 필요하지요.” (Benjamin Wallace, 『 Billionaire’s Vinegar: The Mystery of the Wine World’s Most Expensive Bottle of Wine』가운데서)

와인을 마시다 보면, 와인과 사람 간에 닮은 점이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와인은 병 속에서 숙성과정을 거치면서, 과일의 풍미가 두드러지는 유년기, 모든 요소가 균형을 잡아가는 청년기, 미네랄과 토양의 느낌이 드러나는 장년기를 거쳐 서서히 쇠락하다가, 와인으로서의 생명을 마감한다. 이 같은 와인의 ‘생명 주기’는 포도 품종, 토양, 양조 과정 등 복합적인 요소에 의해, 짧게는 3~5년에서 길게는 수십 년에 이른다. 예컨대, 프랑스 보졸레 지역에서 생산되는 보졸레누보(Beaujolais Nouveau)는 가메이(Gamay) 품종의 포도를 수확한 후, 6~8주간의 짧은 발효과정만 거쳐서 병입되고, 신선한 과일의 맛을 즐기기 위해 곧바로 판매되어 소비된다. 보졸레 누보가 와인으로서의 생명을 다하여 식초로 변하는 데에는 수년이 걸리겠지만, 병입 후에 와인이 진화하지 않기 때문에 가급적 빨리 마시는 것이 좋다.

장기 숙성용 와인엔 많은 정성과 비용 들어가


▎화이트 와인이 90년 가까이 병 속에서 숙성되면서, 로제 와인처럼 색이 변했다. 마셔보니 입안에서도 말린 시트러스의 풍미가 느껴졌고, 산도 또한 남아 있었다.
반면, 오랜 기간 동안 숙성과정을 통해서 와인이 천천히 진화하도록 의도하고 생산하는 와인들이 있다. 이런 와인을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정성과 비용이 든다. 첫째, 햇볕이 잘 들고, 배수가 잘 되고, 미네랄 성분이 풍부한 밭을 확보한다. 둘째, 카베르네 소비뇽, 메를로, 피노누아, 샤도네이 등 장기숙성용 와인을 만들기 위한 포도품종을 선택해서 재배한다. 하나의 품종에도 다양한 변종(clone)들이 있어서, 만들고자 하는 와인의 특성을 고려해서 결정을 하게 된다. 셋째, 농축적인 와인을 생산하기 위해서 단위면적당 포도 수확량을 줄이는 노력을 하는 한편, 포도가 잘 익도록 지속적으로 포도밭을 관리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양조단계에서 발효 공정과 오크통 숙성 과정을 통해서 장기 숙성용 와인을 생산하여 병입한다.


▎1919년산 코르통 샤를마뉴. 병 표면에는 두꺼운 흙먼지가 앉았고, 레이블도 누더기처럼 병에 겨우 붙어 있었다.
이렇게 생산된 장기 숙성용 와인은 놀라울 정도의 생명력을 지닌다. 와인으로서의 수명을 다했을 것으로 생각했던 와인이 노년의 원숙한 아름다움을 희미하게나마 경험하게 해줄 때에는 작은 희열마저 느낄 수 있다. 첼리체프가 1898년산 샤토 라피트를 마시면서 노년의 사랑을 빗대어 표현한 것도 이러한 느낌을 이야기한 것이리라.

수년 전 필자도 운 좋게 아주 오래된 와인의 매력을 느낄 기회가 있었다. 지인께서 외국여행 도중 아주 싼 가격에 샀다고 하면서, 1919년산 코르통 샤를마뉴(Corton Charlemagne)를 꺼냈다. 와인 표기규정이 도입되기 이전에 생산된 와인이라서, 어느 도멘에서 만든 와인인지도 알 수 없었다. 90년이나 된 그 와인을 보는 순간, 분명히 식초가 되어 와인으로서의 생명을 다했을 것이라고 단정했다. 병 표면에는 두꺼운 흙먼지가 앉았고, 레이블도 누더기처럼 병에 겨우 붙어 있었다. 코르크는 검게 변색되어 단단하게 굳어져서, 빼는데 무척 애를 먹었다. 침전물을 걸러내기 위해 디켄터에 옮겨 따른 와인은 연한 적갈색을 띄었다.

화이트 와인이 90년 가까이 병 속에서 숙성되면서, 로제 와인처럼 색이 변한 것이다. 돈을 내고 이런 와인을 산지인이 좀 안쓰럽다는 생각도 잠시했다. 그러나 잔에 따른 와인의 향을 맡는 순간, 내 생각이 섣불렀다는 것을 금새 깨달았다. 산화된 와인에서 나는 시큼한 냄새가 다소 느껴지기는 했지만, 말린 오렌지와 살구 등 과일향들이 신기하게도 살아 있었다. 와인을 마셔보니, 입안에서도 말린 시트러스의 풍미가 느껴졌고, 산도 또한 남아 있었다. 90년의 세월을 버티고서도 아직까지 와인으로서의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

1898년산 샤토 라피트나 1919년산 코르통 샤를마뉴는 병입 후 10~15년쯤 지난 시점에 마셨어야 가장 힘 있고 화려한 모습을 보여줬을 것이다. 사람의 한 평생을 평가할 때도, 가장 아름답고 화려했던 시절이 언제였는지를 묻는다면, 많은 이들이 20대의 혈기왕성한 ‘리즈’ 시절이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유년시절은 순수한 대로의 아름다움이 있고, 노년 시절은 원숙한 대로의 아름다움이 있지 않은가. 노년의 백발과 깊게 파인 주름에서 인생의 깊이가 느껴지듯이, 오래된 와인의 묵은 향과 맛에서 끈질긴 생명력과 원숙함을 느낄 수 있다.

묵은 향과 맛에서 끈질긴 생명력과 원숙함이

아쉽게도 우리나라에서는 오래된 빈티지 와인들을 구하기가 어렵다. 장기간 숙성된 와인을 마시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어린 와인을 수입하여 숙성시키거나, 아니면 숙성된 와인을 수입하는 방법이다. 두 가지 모두 우리에게는 힘들다.

유럽에서는 전통적으로 어린 와인을 사다가, 주택의 지하 창고에 보관하여 숙성시킨 후에 마셨다. 유럽의 기후 특성상, 지하 창고는 와인을 보관하기에 적합한 온도와 습도를 자연적으로 제공했다. 그러나 아파트가 주된 주거형태인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어린 와인을 수년간 적당한 온도와 습도를 유지해서 보관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와인 수입사들도 오래된 빈티지 와인들을 수입하려면 상당한 재정적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 오래된 와인이라, 그 상태를 장담할 수 없는데다가, 와인 산지에서 우리나라까지 운송하는 과정에서 변질될 우려가 크기 때문에, 잘못되는 경우 반품요청이 쇄도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와인진열대에 오래된 빈티지 와인들이 보이는 것은, 일부 뜻있는 수입사들이 우리나라 소비자들에게 잘 익은 와인을 소개하겠다는 의지로 읽혀서 반갑다.

이석우 - 카카오 공동대표이사를 거쳐 현재 중앙일보 조인스 공동대표 겸 디지털제작 전략담당으로 일하고 있다. 번역서『와인력』을 출간한 와인 마니아다.

201607호 (2016.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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