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에이전트는 선수를 대신해 다양한 활동을 담당하는
대리인을 말한다. 현재 국내 프로스포츠 가운데 에이전트 제도를
시행하는 종목은 프로축구가 유일하다. 프로야구는 이르면
내년부터 에이전트 제도를 도입할 예정이다.
800만 관중 시대를 연 프로야구 산업은 에이전트 도입으로
중대한 전환점을 맞게 될 것이다.
▎스캇 보라스.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스포츠 에이전트 순위 1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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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전트는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지만 스포츠 시장을 움직이는 또 다른 축이다. 에이전트는 선수들을 대신해 이적과 연봉 협상, 세금 업무, 매니지먼트(광고·방송 출연) 등을 담당한다.포브스는 지난 9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스포츠 에이전트’ 순위를 발표했다. 1위는 류현진(LA 다저스)과 추신수(텍사스 레인저스)의 에이전트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스캇 보라스(63·미국)다. 보라스 코퍼레이션을 운영하는 그는 야구 선수를 주 고객으로 한다. 보라스 코퍼레이션이 지난해 맺은 계약 총액은 22억 달러(약 2조5000억원)에 달한다. 대행 수수료 수입은 계약 총액의 약 6%인 1억3200만 달러(약 1500억원)다.
급물살 타는 한국 프로야구 에이전트
▎스캇보라스는 류현진(LA 다저스)과 추신수(텍사스 레인저스)의 에이전트로 국내에도 잘 알려져 있다. / 중앙포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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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리그를 전전하던 선수 출신 보라스는 야구를 그만두고 약사와 변호사 자격을 딴 뒤 에이전트 업계에 뛰어든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보라스는 경제학자와 심리학자를 채용해 선수의 장점을 최대한 부각시키는 보고서를 만들어 최고 계약을 성사시킨다. 배짱도 두둑하다. 2013년 류현진의 다저스 계약 당시 마감 30초 전까지 버티다 6년간 3600만 달러(417억원)에 도장을 찍었다. 2013년 추신수와 텍사스의 7년간 1억3000만 달러(1400억원) 잭팟 계약도 이뤄냈다. 보라스는 구단들 사이에선 ‘악마 에이전트’라 불리지만, 선수들에게는 큰 돈을 안겨줘 ‘천사 에이전트’로 통한다. 보라스 코퍼레이션처럼 1년 계약액이 10억 달러가 넘는 에이전시는 전 세계에 7곳이나 된다.한국 프로야구 구단들은 지금껏 에이전트 제도 도입에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각 구단의 연 매출은 400억원을 넘어섰지만 대부분의 구단이 매출의 절반 이상을 모기업에 의존하고 있다. 구단의 재정 자립이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에이전트는 시기상조라는 인식이 강했다.그 동안 구단은 우월한 정보력을 바탕으로 선수들과의 협상에서 주도권을 쥐었다. 지난 2009년 프로야구선수 인권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연봉협상 때 구단과 단 한 차례 만났다는 답변이 56.3%, 협상 시간은 30분 이하라는 응답이 57.3%에 달했다. 하지만 전문지식으로 무장한 에이전트가 선수의 협상을 대리할 경우 주도권이 선수에게 넘어갈 거라고 구단들은 우려했다.이런 분위기 속에 한국야구위원회(KBO)는 야구 규약(제30조 대면계약)을 통해 선수가 대리인을 통해 구단과 연봉협상을 하는 것을 제한해 왔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 2001년 3월 이 규정이 불공정거래행위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시정명령 조치를 내렸다. 그 전 해인 2000년 일본 프로야구에서 에이전트 제도를 도입한 게 자극제가 됐다.KBO는 이후 ‘선수가 대리인을 통해 계약을 체결하고자 할 경우 변호사만을 대리인으로 해야 한다’고 해당 규정을 손질했다. 그러나 부칙(제172조)에서 ‘한국 프로야구의 여건 및 선수협회의 전체 합의에 따라 그 시행시기를 정하도록 한다’는 단서 조항을 달았다. 그리고는 구체적인 시행 일시를 규정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에이전트 도입을 차일피일 미뤄왔다. 프로야구 에이전트로 활동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변호사들은 꾸준히 KBO를 압박했다. 서울지방변호사회는 2014년 12월 법률 위반을 이유로 KBO를 공정위에 신고하기도 했다.양해영 KBO 사무총장은 지난 9월 29일 기자회견에서 “이르면 내년에 에이전트 제도가 도입될 수도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이후 꾸준히 진행됐던 프로야구 에이전트 도입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는 의미였다. 문체부는 지난 2013년 8월 ‘스포츠 비전 2018’을 발표하면서 프로스포츠 활성화와 선수 권익보호 방안으로 에이전트 제도를 도입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어 지난해 12월 스포츠산업진흥법을 개정하면서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지난 2월에는 ‘스포츠산업 활성화 대책’을 발표하고 올해 안에 에이전트 제도 정착 및 활성화 방안을 마련하겠다는 로드맵을 제시했다.이후 KBO와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가 지속적으로 만나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김선웅 선수협 사무국장(변호사)은 “한국시리즈가 끝난 뒤에 KBO와 만나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며 “공청회 등을 통해 의견 수렴을 한 뒤 내년 초에는 에이전트 희망자 신청을 받고 공인 작업을 진행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정금조 KBO 운영육성부장도 “내년 시즌 중에 제도 도입을 확정, 발표하고 시즌이 끝난 뒤 2018시즌 연봉 협상 때부터 이를 시행하기로 선수협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고 전했다.올 시즌 프로야구에서는 악재가 여기저기서 터졌다. 가장 큰 충격을 준 건 승부조작 사건이었다. 지난 7월 말, 창원지방검찰청은 NC 다이노스 투수 이태양과 상무에서 군 복무 중인 넥센 히어로즈 외야수 문우람을 승부조작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이어 KIA 타이거즈 투수 유창식도 자진신고를 했고, NC 이재학도 같은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 선수들의 음주운전 적발은 연례행사처럼 나왔다. 사생활이 노출되면서 논란이 된 사례도 여러 건 있었다. 지난 시즌 말 야구계를 뒤흔든 도박 사건은 언제 다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이었다.
선수들 일탈에 ‘관리 차원’ 필요성 대두
▎프로야구 에이전트 제도 도입은 올해 NC 투수 이태양의 승부조작 시도(사진) 내용이 밝혀지는 등 선수들 일탈에 대한 ‘관리 차원’에서 필요성이 대두된 측면도 있다.(왼쪽사진) 오승환 에이전트인 김동욱 스포츠인텔리전스 그룹 대표. 오승환을 일본(한신 타이거스)과 미국 메이저리그로 진출시켰다.(오른쪽) / 중앙포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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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는 지난 7월 발표한 승부조작 재발방지 대책에 ‘에이전트 제도 조기 도입’을 포함시켰다. 에이전트는 단순히 협상의 대리인에 머물지 않는다. 선수의 전반적인 생활을 관리해 상품 가치를 유지한다. 전용배 단국대 스포츠경영학과 교수는 “선수들의 일탈이 반복되면서 구단들 사이에서 선수 교육의 일부를 담당할 수 있는 에이전트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A구단 관계자 역시 “운동만 해온 선수들에게 ‘멘토’가 부족하다. 동료 선수, 구단 관계자에게 말하기 어려운 일이 비일비재하다. 에이전트가 이 역할을 해줄 수 있다”고 말했다.에이전트 도입을 통해 구단과 선수의 관계가 새롭게 정립될 것이라는 기대도 나온다. 에이전트는 타 팀의 연봉 구조, 다른 선수들의 계약조건 등 다양한 정보를 앞세워 교섭 경험이 부족한 선수들을 대신해 구단과 협상을 진행한다. 선수는 경기력 향상에만 집중할 수 있다. 선수 가치평가가 객관화되면 수급시장이 투명해지고 트레이드 등 선수 교류가 활성화되면서 리그 수준도 올라갈 수 있다.B구단 대표는 “에이전트 도입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구단의 운영 비용이 증가할 것이란 우려가 있지만, 최근 FA(자유계약선수)와 외국인 선수 몸값이 폭등한 건 구단들의 과잉 경쟁에서 생긴 거품이라고 봐야 한다. 에이전트 제도가 거품을 진정시킬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박성배 한양대 스포츠산업학과 교수는 “선수의 시장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객관적인 지표가 많이 개발되면 선수들 연봉이 합리적인 선에서 맞춰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정금조 부장 역시 “에이전트 도입이 구단 경영에 부정적 영향을 준다고만 보지 않는 분위기다. 선수와의 불필요한 마찰을 줄이고, 경기력 향상에도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윈-윈(winwin) 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고 밝혔다.에이전트는 선수의 상품 가치를 극대화시키는 종합적인 매니지먼트를 해야 한다. 이 역할을 구단이나 선수 개인이 맡기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현재 일부 스타급 선수들은 에이전시와 매니지먼트 계약을 맺고 있지만 구단과의 일정 조정, 수익 배분 등이 명확하게 정립되지 않은 상태다. 에이전트 제도가 활성화된다면 선수들은 경기에 나서는 것 외에도 광고 등 다양한 상업 활동으로 부가가치를 높일 수 있고 스포츠 산업 전반이 활기를 띌 수 있다.박성배 교수는 “프로야구 전체 선수의 연봉이 600억원 수준이다. 연봉 협상에 따른 수수료율을 2% 정도로 잡는다면 12억원에 불과하다. 굉장히 작은 시장이란 오해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적 시장이 활성화 되고, 연예인들이 담당했던 광고를 스타급 선수들이 대체한다면 시장 규모는 커질 것으로 본다. 벌써부터 대형 연예 기획사들이 시장성을 보고 발 빠르게 스포츠 쪽에 진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해외 에이전시에서도 한국 시장 노려“모 선수의 에이전트라는 사람과 통화한 뒤에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2명에게 똑같은 전화를 받았다. 3명이 동시에 한 선수의 에이전트라고 나선 것이다.” C구단 관계자의 말이다. 선수와의 친분을 앞세워 에이전트 행세를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선수들도 곤혹스러워 한다. 지난 시즌이 끝난 뒤에는 FA 자격을 얻은 D선수의 에이전트를 자처한 인물이 복수의 구단 관계자를 만나 몸값 올리기를 시도하기도 했다. 때문에 에이전트 도입에 앞서 자격 범위를 어떻게 제한할 것이냐가 관건이 되고 있다. 전용배 교수는 “최소한의 검증 절차를 거쳐 누구나 에이전트가 될 수 있게 해야 한다. 도입 초기에는 에이전트가 우후죽순처럼 난립할 것이다. 하지만 2~3년 후에는 시장 원리에 따라서 준비된 소수만 정착할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축구의 경우 국제축구연맹(FIFA)의 선수 에이전트 제도가 2015년 4월 1일부로 사실상 폐지되면서 선수와 구단 양측의 협상을 대리하는 ‘중개인’ 시대가 열렸다. 중개인은 시험을 통해 자격증을 취득할 필요가 없다. 각국 축구협회에 필요한 서류와 등록비를 내고 중개인 보험 가입만 증명하면 활동할 수 있다.현재 KBO 규약상으로는 변호사만 에이전트 자격이 있다. 정금조 KBO 부장은 “일본도 변호사에게만 자격을 준다. 또 변호사 한 명이 한 선수만 관리할 수 있게 한다. 대형 에이전시에서 스타급 선수들을 독식할 경우 압력단체로 변질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에이전트 업무를 준비 중인 법무법인 충정의 진한수 변호사는 “현재 활동하는 에이전트들도 법적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대부분 로펌에 외주를 준다. 계약서 작성, 세금 업무 등 변호사만 할 수 있는 업무가 많다”고 설명했다. 김선웅 선수협 사무국장은 “현재까지 나온 안을 보면 변호사 외에도 선수 출신, 스포츠 마케팅 관련 업무 경력자, 구단 프런트 출신, 다른 종목 공인 에이전트 등에게도 자격을 줄 가능성이 높다. 결격 사유를 필터링하고, 야구 규약, 에이전트 규정 숙지 등 기본 소양을 검증하는 테스트를 치를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오승환(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김현수(볼티모어 오리올스)·이대호(시애틀 매리너스) 등의 메이저리그 진출을 도왔던 에이전트들이 시장을 선도하는 모양새다. 이들은 해외 진출 가능성이 있는 선수들을 대상으로 에이전트 계약을 체결하고 있다. 해외 에이전시에서도 한국 시장을 노리고 있다.수수료율은 에이전트 시장의 규모를 결정할 중요한 잣대가 될 것이다. 박성배 교수는 “미국의 경우 미식축구가 3%, 프로농구가 4%, 메이저리그가 5% 정도를 받는다. 축구에서는 최대 10%까지 수수료를 받는 것으로 나와 있다. 일본 프로야구는 1~2%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정금조 부장은 “정률제를 채택할 경우 에이전트가 자신의 몫을 더 챙기기 위해 구단에 무리한 요구를 할 가능성이 있다. 수수료 지출이 증가하면 결국 구단이 부담을 느낄 것”이라고 말했다. KBO는 일본 프로야구를 벤치마킹해 연봉 1억원 이하의 선수는 수수료 500만원, 1억원 이상의 경우에도 1000만원을 넘지 못하도록 규제한다는 구상이다. 구단들은 스타급 선수들의 연봉이 늘어날 경우 저연봉 선수들의 연봉을 줄이려고 할 것이다. 에이전트 입장에서는 저연봉 선수에게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빈익빈 부익부’가 심화될 우려가 있다. 김선웅 사무국장은 “저연봉 선수들도 에이전트 제도의 혜택을 볼 수 있도록 1군 선수를 보유하면 2군 선수도 함께 관리를 해야 한다는 식의 의무 조항을 둘 수도 있다”고 밝혔다.
유망주 해외 유출 막을 대비책 강구해야에이전트 제도 도입이 선수들의 해외 진출을 가속화시킬 거라는 주장도 있다. 시장 규모가 크지 않은 국내 프로스포츠의 현실에서 에이전트들은 해외 시장으로 선수들을 진출시켜야 목돈을 쥘 수 있다. 프로축구에서 에이전트를 도입한 2000년대 초반 유명 선수들이 일본으로 대거 진출한 사례도 있다. 정금조 부장은 “KBO가 가장 걱정하는 부분이다. 일본은 대리인 계약을 체결한 선수가 전체의 3%에 지나지 않는다. 70명 정도만 에이전트를 두고 있다. 우리로 보면 해외 이적을 노릴 만한 20~30명 정도의 스타급 선수들이 해당된다. 결국 이 선수들이 연봉 협상 때마다 해외 이적이라는 카드를 들고 구단을 압박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국내 프로야구 시장 규모와 현실에 걸맞는 한국형 모델을 구축해야 하는 숙제가 남아 있다. 박성배 교수는 “3~5년 정도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자리를 잡게 될 것”으로 내다봤다.- 정영재 선임기자 jerry@joongang.co.kr·김원 기자 kim.wo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