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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용 KCC정보통신 회장 

정보통신 사업의 문익점 

조용탁 기자 ytcho@joongang.co.kr
이주용 KCC 정보통신 회장은 한국 컴퓨터 산업의 1세대다. 정보통신 산업에서 수많은 한국 최초의 기록을 만들어온 그를 3월10일 KCC 정보통신 본사에서 만났다.

▎한국 컴퓨터 산업의 1세대인 이주용 회장은 정보통신 산업에서 수많은 한국 최초의 기록을 만들어 왔다.
“소프트웨어를 한번 설명해 보세요.” 이주용 KCC 정보통신 회장이 기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KCC 정보통신 본사에서 인터뷰를 시작하자마자 물어온 말이다. 답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소프트웨어가 무엇인지는 알 것 같은데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애매했다.

“하드웨어는 쉬워요. 보이거든요. 중앙연산장치, 메모리, 메인보드가 한눈에 들어와요. 근데, 이 소프트웨어는 말로 설명이 어려워요.”

그는 같은 질문을 1960년대에 받았었다. 컴퓨터조차 생소한 단어이던 시절이다. 소프트웨어의 중요함을 역설하는 그에게 담당 공무원, 기업인, 대학 교수들이 물었다. ‘도대체 소프트웨어가 어디에 쓰는 물건이냐’는 것이었다.

이 회장은 아직도 당시를 아쉬워한다. 본인이 말주변이 없어 설명을 잘 못했다는 것이다. 하드웨어 산업 발전을 위해서는 높은 수준의 기술력이 필요하다. 제조 설비도 있어야 해서 막대한 자금을 필요로 한다. 소프트웨어는 똑똑한 머리와 손가락만 있으면 된다. 60년대 우리나라가 소프트웨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투자해 왔으면 지금 세계 소프트웨어 산업을 이끌어 가는 국가로 자리했을 것이란 아쉬움이었다. 그는 “인도가 90년대 후반 시작했음에도 빠른 시기에 소프트웨어 강국으로 떠오른 것을 보라”며 “지금도 하드웨어의 발전은 소프트웨어가 이끌고 있기에 더욱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이 회장은 한국 컴퓨터 산업의 1세대다. ‘컴퓨터 전산분야의 문익점’이라 불린다. 컴퓨터 한 대의 무게가 무려 35t이나 나가던 시절, 0과 1로만 된 기계어로 직접 프로그램을 만들어 냈다. 한국 최초의 컴퓨터를 들여와 보급했고, 이를 운영할 프로그램을 만들어 국내 주요 시설 전산화에 크게 기여했다. 프로그램을 해외에 수출한 최초의 한국인이다.

컴퓨터와의 인연은 미국 IBM에서 시작됐다. 그는 미시간주립대학 경제과를 졸업하고 IBM에 입사했다. 그의 업무는 IBM의 첫 번째 컴퓨터인 IBM650을 다루는 일이었다. 당시 IBM은 컴퓨터 산업을 주도하던 정보통신(IT) 기업이었다. 뉴욕 본사에서 이 회장은 유능한 컴퓨터 프로그래머이자 엔지니어로 조직에서 인정받았다. 그는 IBM에 입사한 최초의 한국인으로 뉴욕에서 자리 잡고 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전쟁의 폐허에서 일어나 새로운 삶을 원하는 사람들이 고국에 있었다. 1인당 국민소득 78달러 시절이다. 한국 GDP는 그가 일하던 IBM의 연매출보다도 적었다. “IBM에서 일하며 소프트웨어의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컴퓨터 언어가 빠르게 발전하며 산업에 미치는 영향을 보자, 한국에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IBM 출신의 한국 컴퓨터 산업 1세대


▎1967년 5월14일 전자계산조직 FACOM222 이동광경.
1963년 그는 IBM의 왓슨 회장에게 편지를 썼다. 아시아에서 한국도 주목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한국에서 컴퓨터 사업을 하는 것이 IBM에게도 큰 이익이 될 것이라고 편지에 적었다. 예상 외의 답장이 날라왔다. 한국으로 가서 IBM이 어떤 사업을 할 수 있을지 알아보라는 것이다. IBM의 전설적인 경영자 왓슨은 한국과 인연이 깊은 사람이었다. 아들이 주한미군으로 동두천에서 근무했다. 왓슨 회장의 부인은 한미재단의 이사장이었다.

이 회장이 한국으로 향하기 전, IBM은 그에게 네 가지 지침을 내렸다. 첫째, 당신은 IBM을 대표하는 인물이니 최고급 숙소에서 지내며 품위를 지킬 것. 둘째, 한국 최고의 변호사를 선임해 사업을 논의할 것. 셋째, 사업 가능성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되, 어떠한 영업도 하지 말고 시장을 살필 것. 넷째, 왓슨 회장이 100만 달러 상당의 컴퓨터를 기부할 대학을 선정할 것 등이었다.

꿈을 가지고 한국에 왔지만 현실은 간단치 않았다. 당시 한국에는 컴퓨터를 활용할 만한 조직이 없었다. 정부 관계자는 컴퓨터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생필품을 만드는 굴뚝산업에만 매달리고 있었다. “컴퓨터는 사람의 뇌를 대신할 수 있는 도구로 산업혁명에 버금가는 아니 제2의 산업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매개체라고 역설하고 다녔지만 들어주는 이들이 없었습니다. IBM이 원하는 수준의 사업 보고서를 만들기 어려웠습니다.”

대학에 컴퓨터를 기부하는 일조차 어려웠다. 서울대에선 총장을 만나지도 못했다. 교직원을 만나 IBM 한국 대표라고 소개하자 ‘미국 여행사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 기부하러 찾아갔는데,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하느냐는 설명을 해야 하는 현실이 갑갑했다. 한양대에선 컴퓨터 대신 현찰로 주면 안 되냐는 제안이 왔다. 연세대는 그나마 긍정적이었다. 언더우드 이사장이 직접 나섰다. 그는 “연세대에 컴퓨터를 설치해 달라”며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컴퓨터는 설치비가 만만치 않았다. 재정이 빠듯한 연세대는 정부와 컴퓨터를 공동으로 이용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IBM 본사에서 이 계획을 틀었다. 순수 연구 목적 이외에 정부 프로젝트에는 사용하면 안 된다는 이유였다.

한국생산성본부 전자계산소장 시절 컴퓨터 도입


▎1981년 10월 새마을호 승차권 전산발매시스템 가동식.
결국 이 회장은 결국 사업을 접고 미국 IBM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그동안 도움을 준 지인들에게 인사를 하러 다니다가 우연히 기회를 잡게 됐다. 한국생산성본부에서 컴퓨터 도입을 고려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곳의 이은복 이사장은 이 회장에게 직원들의 컴퓨터 교육을 간곡히 부탁했다. 이 회장은 “이 땅에 목화씨를 들여온 문익점 선생처럼 정보화의 씨앗을 뿌리고 싶은 마음에 그냥 눌러앉았다”고 밝혔다. 그는 1967년 생산성본부 전자계산소장에 취임해 컴퓨터 도입 프로젝트를 지휘했다.

생산성본부의 컴퓨터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그는 IBM이 아닌 후지쓰를 선택했다. 사양은 떨어지지만 훨씬 저렴한 가격에 들여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해 3월 35t 무게의 컴퓨터가 한국에 들어왔다. 7월에는 컴퓨터를 사용해 본격적으로 업무를 시작했다.

하지만 환경은 여전히 열악했다. 들여올 FACOM222는 당시로는 파격적인 고급 프로그래밍 언어를 사용하는 컴퓨터다. 이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프로그래머가 필요했다. 이 회장은 회사 인사위원회에 건의했다.

“프로그래머가 최소한 10명은 필요합니다.”

“…프로그래머가 뭔가요?”

“컴퓨터가 일을 하려면 프로그래머가 프로그램을 짜줘야 합니다. 기계에 일을 시키려면 사람이 아니라 기계가 아는 언어로 번역해줘야 하는 원리입니다.”

“계산기가 무슨 번역입니까?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당시 이 회장과 인사 담당자 사이에서 오간 대화다. 우여곡절 끝에 세 명을 할당받았다. 이 회장은 오기로 버텼다. 불모지나 다름없는 환경이었지만 컴퓨터의 역사를 열어가는 개척자라고 스스로 의미를 부여했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생산성본부 전자계산소는 한국 최초의 컴퓨터 교육전문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공무원 위탁 교육을 하면서 국가행정 전산화 타당성 조사 프로젝트도 맡았다. 업무가 너무 몰리자 그는 아예 한국전자계산소(현 KCC정보통신)를 설립해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했다.

첫 단추는 잘 꿰었지만 여전히 컴퓨터 사업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컴퓨터 도입에 따른 불이익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주판이면 충분하지 무슨 컴퓨터냐’고 주장하는 이도 있었다. 이 회장은 반대하는 사람들을 설득하며 컴퓨터 전도사가 됐다. 그는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사용될 프로그램을 공급하기 위해 밤 새워 직접 프로그램을 개발했던 일이 아직도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KCC정보통신은 70년대에 여러 차례 수출탑을 수상했다. 당시 컴퓨터에 데이터를 입력하기 위해서는 두루마리 종이에 특별한 마크를 표시해야 했다. 이 작업을 미국과 일본으로부터 한국에 유치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미국이 프로그램 제작이나 콜센터를 아웃소싱해서 인도에서 운영하는 것과 같은 개념입니다. 미국 주요 기관에서 사용하는 컴퓨터용 키펀치를 한국에서 만들어 납품하는 방식입니다.”

KCC정보통신의 주고객은 미국의 특허청과 주요 도서관들이었다. 둘 다 방대한 데이터를 보유하고 있는데 이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전산화 작업이 한창이었다. 미국 프로젝트를 성사시키자 일본에서도 주문이 왔다. 일본 공항의 출입국 기록 정보의 키펀칭 작업을 시작으로 공공정보 분류 주문이 늘기 시작했다.

뒤늦게나마 한국에서도 전산화의 중요함을 인식했다. KCC정보통신은 굵직한 정부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1975년 주민등록번호 전산화, 80년 김포국제공항의 실시간 전산화, 81년엔 철도청 온라인 시스템을 구축했다.

“차량 운행 정보와 운용가능 승객 수, 예약과 현장 판매 정보를 컴퓨터로 관리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때 개발한 소프트웨어는 100만 달러에 태국으로 수출까지 한다. 한국이 수출한 최초의 컴퓨터 프로그램이다. 제5공화국 당시 국민투표 개표와 집계를 위해 KCC의 컴퓨터가 사용되기도 했다.

숨가쁘게 70~80년대를 달려온 이 회장은 90년대 들어 일선에서 조금씩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는 1935년 생이다. 20여 년 전 환갑을 넘어서면서 소프트웨어 분야를 이끄는 데 무리를 느꼈다.

컴퓨터 분야는 5년마다 혁명이 벌어진다. 그만큼 변화가 빠르고 크다. 이 회장은 90년대 초반 미국에서 열린 컴퓨터 세미나에 참석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이 회장은 “내 나이도 한계에 달했구나는 생각이 들었다”며 “마침 노조가 일선에서 물러나길 원해 두말 않고 전문 경영인에게 자리를 물려줬다”고 말했다.

지난 연말 그는 미래창조과학부에서 주는 소프트웨어 산업발전유공자 포상부문 훈장을 받았다. 국내 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훈장의 등급을 상향한 덕에 그는 ‘금탑산업훈장’을 수상한 최초의 소프트웨어 산업인이 됐다. 30년 전 동탑산업 훈장을 받은 이후 20년 만에 금탑을 수상했다. 그는 그저 감사할 뿐이라고 말했다. 이 회장은 요즘 한국 위상을 보면 감개무량하다고 말한다. 1962년 고국을 처음 찾았을 때와 비교가 어려울 정도로 발전했다. 컴퓨터를 계산기로 여기던 관료들도 이제는 웃으며 이야기할 추억거리다.

“소프트웨어 강국으로 가는 관건은 창의성”


▎1984년 10월1 일 무궁화,통일호 승차권 전산발매.
아직 아쉬운 점이라면 창의성이다. 한국 사람들은 주입식 교육의 결과인지, 문제를 보면 안 되는 점들을 먼저 파악한다. 하지만 미국은 가능성을 더 크게 바라보며 이를 어떻게 할지 고민한다. 시각이 다르니 문제를 해결하는 접근 방법도 차이가 있다. IT 산업엔 미국적 시각이 더 경쟁력이 있다고 본다. 그는 60년대 초반 미국 증권거래소 전산화 작업에 참여한 일을 떠올렸다. 딜러들의 주문을 컴퓨터 언어로 변환해서 자동화하는 일이었다. 듣자마자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그의 동료는 생각이 달랐다.

“우리가 소리를 어떻게 듣느냐고 묻더군요. 음파를 귀에 있는 감각기관이 잡아 뇌세포에서 전기 반응이 일어나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같은 방식으로 접근하면 사람 목소리를 알아듣는 컴퓨터를 만드는 일이 가능할 것이라고 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음파를 이용해 단순하게 구현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을 보면 놀랍고 신기했습니다.”

한국은 강력한 IT 제조 기반을 구축한 국가다. 이 회장은 여기에 소프트웨어만 받쳐주면 더욱 경쟁력이 강해질 것이라고 믿는다. 미국을 제외하면 어떤 나라도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두 분야의 강국으로 자리하지 못했다. 한국의 도전적인 젊은이들이 마음껏 일할 장(場)을 마련해줘야 한다고 그가 주장하는 이유다.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의 양 날개를 펼칠 때, 한국은 제가 평생 꿈꾸던 IT 강국으로 날아오를 것입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 조용탁 기자 ytcho@joongang.co.kr

201704호 (2017.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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