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심 B와 H는 경도에 따라 굵기를 결정하는 기준이다. 전세계 연필 길이 표준은 18㎝이다. 이 기업이 세계 최초로 규격화를 정하면서 시작됐다. 2세기반 동안 9대째 가업 경영을 잇고 있는 필기구 브랜드 파버카스텔이다.
“무언가를 만들거나 창조하기를 원한다면, 먼저 그 무언가가 자기 살과 핏속에서 흐르도록 만들어야 해.”1869년 5월 31일 로타르 폰 파버 남작이 동생인 에버하르트에게 보낸 편지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파버카스텔의 256년 역사엔 그 ‘무언가’가 이어져오고 있다. 세계적 필기구 브랜드 파버카스텔은 1761년부터 9대째 이어오는 장수가족기업이다. 19세기 유럽에서는 연필을 파버라고 불렀을 정도로 연필계를 대표해왔다.연간 20억 자루 연필을 생산, 세계 140개 국에서 8억 유로 이상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반 고흐와 괴테 등 예술가들이 애용한 연필로도 알려져 있다. 제품을 출시할 때마다 베스트셀러이니, 그 역사를 이으면 ‘스테디셀러이자 베스트셀러’인 셈이다.카스파르 파버와 아들 안톤 빌헬름 파버가 창업한 이 회사는 손자인 4대 회장 로타 폰 파버 때 세계적 반열에 올랐다. ‘연필의 아버지’로 불린다. 로타 폰 파버는 책상 위에서 구르지 않는 육각형 연필을 개발했고 연필심에 경도 개념을 최초로 적용했다. 프랑스 나폴레옹 3세가 특사를 보내 경영 노하우를 벤치마킹 했을 정도다.파버카스텔은 지금도 장인정신과 과학을 결합해 혁신을 거듭한다. 독일 공장을 체코로 이전하면 임금을 3분의 1로 줄일 수 있었지만 30년 이상 숙련된 노동자를 위해 공장을 유지한 것은 잘 알려진 일화다.찰스 그라폰 파버카스텔 백작(37)은 이들의 후손이다. 지난해 38년 경영의 마침표를 찍은 아버지 안톤 백작의 작고 후, 찰스 그라폰 파버카스텔은 9대째 바통을 이어받았다. 서른 일곱. 큰 가업을 물려받기엔 이른 나이 아니냐는 우려와는 달리 파버카스텔 백작의 경영은 연착륙 중이다. 현재 고급 필기구 라인인 그라폰 파버카스텔의 경영을 맡은 그는 2018년 신제품 시연회를 열기 위해 한국에 방문했다. 10월 18일 광화문 포시즌스 호텔에서 만난 파버카스텔 백작은 시종일관 경쾌하고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밤늦게 이뤄진 인터뷰에도 지친 기색 하나 없었다. 그는 기업 철학으로 ‘가치’를 여러 번 강조했다.
세대 간 잇는 가치 배워
▎1. 파버카스텔의 색연필 생산과정. / 2. 독일 뉘렌베르크의 연필 생산 공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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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6년 장수기업으로 9대까지 성공적으로 이어온 비결은.행운도 따라야 하고 여러 가지 요소가 있을 수 있지만 무엇보다 가치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세대를 초월해서 계승한 가족기업이 갖는 가치다. 장기적인 계획과 사고에 기반한 의사결정은 가족기업이 세대를 이어간 가치와 연결된다. 단기적인 성과에 연연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젊은 CEO로 가업을 잇는 데 부담되는 점은 없었나.물론 세대마다 도전은 생긴다. 난 9번째 세대로 나와 세 명의 자매가 있다. 아버지는 늘 회사를 자신의 것이라 생각한 적이 없다. 늘 다음 세대를 위해 가꾸라고 하셨다. 세대 교체에 대해 그만큼 책임감과 도전의식을 갖게 됐다.
후계를 위한 승계 절차가 있나.(고개를 저으며) 특별한 승계절차는 없다. 물론 아버지께 가르침을 받은 훈련(discipline)은 있다. 첫 번째 겸손하라, 두 번째 다른 사람을 존중하라, 세 번째 성공에 대한 야망을 가지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9대 회장으로 계승할 점과 혁신할 점은 무엇인가.내가 선대로부터 꾸준히 교육받은 건 ‘가치를 실현하라는 것’이었다. 저희 슬로건이 ‘COMPANION FOR LIFE’(인생의 동반자)다. 회사는 역량과 전통, 우수한 품질, 혁신창의성, 사회적·환경적 책임 등 네 가지 가치가 있다. 내가 파버카스텔 경영에 합류하게 된 것이 가족이라 당연히 상속되는 것은 아니다. 난 회사 밖에서 경험을 더 쌓았다. 독립심을 기르는 게 중요했고, 아버지도 그렇게 살라고 가르치셨다. 오히려 다른 경험을 한 것이 회사를 위해 좋은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경험이 경영에 도움이 됐나.첫 번째 커리어를 쌓은 곳은 파이낸스 분야(PRIVATE EQUITY) 였다. 매니지먼트에서 중요하다.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MBA과정을 수료했다. 이후 전략자문 컨설팅 회사에서 4년 동안 일했다. 힘든 시간이었지만 얻은 교훈도 많았다. 프로젝트마다 신속히 처리하는 게 일이었는데 구조적으로 생각하고 전략적인 사고를 하는 데 있어서 도움이 됐다. 미국뿐 아니라 스위스에서도 공부했다. 다른 나라의 학교에서 공부한 것은 각 문화의 뉘앙스 차이도 배울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다.
그 경험을 파버카스텔에 적용해볼 생각인가.당연히 그렇다.
파버카스텔의 위기극복 전략은 무엇인가.“난 온 지 얼마 안 돼서 직접 겪지는 않았지만 아버지에게 위기의 순간을 전해 들었다. 1970년대 초 당시 파버카스텔은 독일에서 계산기를 팔았다. 파버카스텔 매출의 30~40%를 차지했었다. 전자계산기가 발명되자 하루아침에 시장이 없어져 버렸다. 아버지는 이것을 계기로 하나의 제품에 너무 크게 의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다양한 제품군을 구축하게 됐다. 어린이가 쓰는 제품부터 사무실, 아티스트 용품, 프리미엄 라인 등 여러 가지로 구성했다. 글로벌하게 다각화를 시도해왔다. 위기 때 구조조정을 크게 했고 재투자로 극복하셨다. 1980년대엔 원재료에 대한 프로젝트로 산림 조성 사업을 했다. 나무 하나가 어느 정도 자라려면 13년이 걸린다. 장기적인 시각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다.파버카스텔은 친환경 경영으로도 유명하다. 나무를 심는 프로젝트에 많은 투자를 해왔다. 흑연과 나무 자원을 소모하는 데 환경보호 역발상을 한 것이다. 브라질 삼림지대에 2500㎢의 숲을 보유해 2만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파버카스텔의 사회책임론은 무엇인가.많은 기업이 책임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는 쉽지만 실천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우린 실천했다. 연간 100만 그루 이상의 나무를 심고 산림 조성 면적만 1만2000ha에 달한다. CO2배출보다 저감을 위해 많은 일을 하는 몇 안되는 기업이다.
파버카스텔의 인재상이 궁금하다.열정과 동기가 필요하다. 회사문화라고 생각하는데, 이곳은 장기근속자가 많다. 아주 중요한 점이다. 개인보다는 팀의 동기(motivation)가 더 많은 걸 성취할 수 있다. 올해 새로 나온 컬러도 팀이 이뤄낸 성과다.(올해 그라폰파버카스텔은 기존의 색을 탈피해 파격적인 핑크, 오렌지, 블루의 제품 라인을 선보였다) 젊은 세대가 감동 받고 열광할 수 있으려면 전통의 가치를 돌려주면서 수요를 맞춰야 한다. (안 주머니에서 펜을 꺼내들며) 참, 내 또래 젊은 남성들은 이런 블랙의 남성미를 표현한 디자인도 좋아한다.(웃음)
혁신은 지속적인 개선의 과정, 지난해 최대 실적 올려
▎내년에 출시할 새 제품을 들고 있는 파버카스텔 백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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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질문은 수도 없이 들었을 듯하다. 디지털 시대의 아날로그는 영원할 수 있을까.수천 번 정도 받은 질문인 것 같다.(웃음) 아이폰이 2007년 정도에 등장했나. 2016년 파버카스텔 256년 역사 가운데 최대 실적을 올렸다. 오히려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제품이 기회를 얻을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성취감에 취해 디지털 시대에 적응하는 걸 게을리하면 안 된다. 기회를 보고 적극적으로 활용할 것이다.
한국에서는 ‘고인 물은 썩는다’라는 속담이 있다. 매너리즘을 탈피하기 위한 차별화 전략이 있나.우리에게 혁신이란 아이폰의 신기술 같은 게 아니다. 지속적인 개선의 과정이다. 아버지께서는 여러 개의 작은 발걸음이 모이면 하나의 큰 발걸음이 된다고 말씀하셨다. 우리 제품을 고객들이 원하고 열망하도록 만드는 게 목표다.
한국 기업은 대체적으로 역사가 짧아 100년 기업이 목표다. 장수기업 오너로 한국 기업에 해줄 조언이 있나.이 역시 아버지의 말씀인데, ‘미래를 보는 눈을 떼지 말되, 과거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해오셨다.
파버카스텔의 새 경영자로 비전을 말해 달라.파버카스텔의 장기적인 계획은 후손으로서 지금까지 선대에서 키워온 기업을 더 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개인적인 목표는 제 세대에 조그마한 기여라도 더해 주어진 몫을 다하고 싶다. 조상에 대한 의무이자 8000여 명 가족 같은 직원들에 대한 책임이다.
파버카스텔은 독일 내 ‘히든챔피언’ 기업이다. 어떤 문화가 히든챔피언을 만드나.히든챔피언 기업은 특정 분야에 전문화를 한 기업이다. 독일에는 히든챔피언과 관련해 이런 속담이 있다. ‘구두닦이는 구두상자를 버리지 말아라.’- 박지현 기자 centerpark@joongang.co.kr·사진 전민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