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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철’ 고래 싸움에 등 터진 ‘현대로템’ 

 

김영문 기자
북미 정상회담 이후 남북 간 철도 연결과 경제협력을 기대하는 이가 크게 늘었다. 최대 수혜 업체로 현대로템이 꼽힌다. 덕분에 1만원대였던 주가는 4만원대를 넘기기도 했다. 하지만 2대 주주였던 모건스탠리는 지분을 처분했고, 회사채 공모도 겨우 마쳤다. 글로벌 시장에서 중궈중처를 만난 현대로템은 속수무책이다. 무엇이 문제일까.

▎사진은 2016년 11월 현대로템이 (주)SR에 납품한 SRT ‘동력집중식’ 최종편성 10량 중 선두 부분. / 사진:현대로템 제공
“한국 현대로템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해외 수주 경쟁에서도 가끔 만납니다. 가격경쟁력을 내세운 현대로템이 제시한 가격보다 20~30% 더 싸게 만들 수 있죠. 기술력도 문제없습니다. 고속철 수주 시장에선 현대로템을 본 적이 없습니다. 알스톰이나 지멘스도 중궈중처를 만나면 긴장해야 합니다.”

자오밍더(赵明德) 중궈중처(中國中車·CRRC) 푸젠 공장 책임자가 한 말이다. 2017년 9월 중국 난징에 있는 전동차 공장에서 만난 그는 “전 세계에서 굴러다니는 전동차 10대 중 3대는 중국산”이라며 “원가경쟁력에선 우리와 경쟁할 수 있는 회사는 없다고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국 언론도 이미 “한국 철도산업 침몰시킨 中 저가 공세의 비밀!”(중앙일보 2017년 9월 27일)이라는 기사에서 중궈중처를 소개했다.

중궈중처는 2015년 탄생했다. 정확히 말하면 2015년 중국 양대 고속철 제조사인 중궈난처(中國南車·CSR)와 중궈베이처(中國北車·CNR)가 7개월 만에 합병을 완료하고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중국 본토 A주와 홍콩 H주에 동시 상장한 두 회사의 통합절차도 마무리했다. 그 전에도 매출액 기준으로 이미 세계 철도차량 업체 순위에서 중궈난처·중궈베이처가 나란히 1·2위를 차지하던 터였다.

세계 시장 점유율 69%(고속철 차량 기준)짜리 공룡은 이렇게 탄생했다. ‘가격경쟁력’을 무기로 중궈중처는 수년간 거침없는 행보를 이어갔다. 반면 현대로템은 그해 해외시장에서 찬밥이었다. 사실상 전무에 가까운 해외 수주로 마이너스 실적이라는 위기를 맞았다. 현대로템에 따르면 2015년 10월 터키 안탈리아 트램(노면전차) 18편성(총 90량)을 386억원에 수주했다. 해외 수주는 그게 다였다. 엄밀히 따지면 트램은 철도차량이 아니다.

최근 몇 년간 현대로템의 실적은 어땠을까. 2015년 1929억 적자를 기록했다. 2013년 1700억원을 넘어섰던 영업이익은 2014년 66억원으로 급감하더니 2015년엔 적자로 돌아섰다. 2016년 1062억원 영업이익으로 흑자 전환에 성공했지만, 이듬해인 2017년 영업실적은 반토막 난 454억원에 그쳤다. 연 3조원대 매출은 2016년부터 2조원대로 내려앉은 상황이다. 현대로템은 1999년 7월 현대모비스, 대우중공업, 한진중공업의 철도차량 사업 빅딜로 탄생한 국내 유일의 철도차량 제작사다. 덕분에 한국 내 전동차와 고속철 사업을 사실상 독식해왔다. 글로벌 시장 진출도 다소 여유 있게 준비할 수 있었다.

中 중궈중처 잡으려 독일·프랑스 손잡아


▎중국 칭다오에 있는 중궈중처(CRRC) 공장 내부(왼쪽). 경남 창원 현대로템 공장 내부.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중국 철도산업은 순식간에 성장하며 시장 판도를 바꿔버렸다. 내수시장 독식에 안주하던 현대로템은 세계 철도차량 업체 순위에서 10위권 밖으로 밀려났고, 철도기술 강국이 모여 있는 유럽에선 비상이 걸렸다. 급기야 유럽의 경제적 라이벌인 독일과 프랑스가 손을 잡기에 이르렀다. 2017년 9월 지멘스는 철도차량 사업부인 지멘스모빌리티를 알스톰과 합병하는 내용의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지멘스모빌리티와 알스톰사는 각각 고속철 차량 ICE와 TGV를 생산하고 있다. 양사는 새로 생길 합작사 지분을 50%씩 보유하기로 했다. 이 합병은 순전히 연간 360억 달러(약 40조원)의 매출을 올리며 세계 1위에 올라선 중궈중처와 경쟁하기 위해서다.

합병이 완전히 끝난 건 아니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의 승인이 남았다. 현지에선 에어버스와 같은 초대형 기업의 탄생을 기대하고 있다. 콧대 높은 독일과 프랑스 정치권도 중국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한 발씩 물러선 것이다. 두 기업은 양사의 기술력을 총동원해 다시금 중궈중처에 도전하겠다며 심기일전하고 있다. 물론 이 두 회사의 매출을 합해도 중궈중처의 절반에 불과하다.

너무 잘나가면 부침이 심한 법. 2016년 미국 기업이 중국 기업 컨소시엄과 함께 미국에서 추진해온 120억 달러 투자 규모의 고속철 건설 합작 계약을 전격 취소했다. 중국 기업의 첫 미국 내 고속철 사업으로 평가받은 이 프로젝트는 로스앤젤레스와 라스베이거스를 고속철도로 잇는 사업이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2015년 9월 미국을 방문하기 직전에 발표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 측 파트너인 엑스프레스 웨스트(Xpress West)는 “‘고속철도 차량을 미국 내에서 생산해야 한다’는 미국 연방정부의 요구를 맞추기 힘들 것 같다”며 계약을 취소했다.

2014년 11월 중국철도건설유한공사 컨소시엄이 멕시코에서 수주한 37억5000만 달러 고속철 사업도 마찬가지다. 멕시코 정부는 중국 컨소시엄이 이 사업을 수주한 지 사흘 만에 입찰 과정이 불투명하다는 이유로 발주를 취소했다. 2015년 1월 입찰을 재개했고, 중국철도 건설유한공사를 비롯해 5개 해외기업(컨소시엄)이 참여했지만, 사업 자체가 무기한 중단됐다. 알고 보니 초기 입찰 때 사업비가 너무 적다고 판단한 유럽 업체들이 최종 입찰에서 대거 발을 빼서였다.

현대로템, 고속철 수출 한번도 성공 못 해


전병서 중국경제금융연구소 소장은 “멕시코 정부가 취소 결정 이후 고속철 사업에 중궈중처 대신 유럽업체를 선정할 경우 사업비가 최대 20조원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진화에 나섰다”며 “이례적으로 멕시코 정부는 중국 측에 131만 달러(약 14억원)를 배상하는 동시에 신공항 건설에 중국 기업 참여를 희망하는 등 관계 개선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글로벌 고속철 시장은 긴박하게 돌아갔지만, 현대로템은 그렇지 않았다. 물론 중국보다 한 발 빠르긴 했다. 2003년 경부고속전철(KTX)에 이어 2009년 자체 기술로 개발한 신형 고속전철(KTX-산천) 제작에 나섰다. 중국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 개최 때만 해도 프랑스 TGV, 독일 ICE, 일본 신칸센 등에서 기술을 이전받아 고속철 사업에 막 뛰어든 풋내기였다.

같은 해 9월 베이징에서 원자바오 총리가 한승수 전국무총리를 만났을 때도 “한국 고속철 기술을 배우고 싶다”며 기술이전을 요청했었다. 당시 현대로템은 프랑스 알스톰사의 기술을 바탕으로 고속철 국산화에 막 성공한 때였다. 기술이전은 성사되지 않았지만, 중국 업체는 자국의 거대한 철도 인프라 시장을 발판 삼아 기술 선진국을 모두 제쳐버렸다.

중궈중처는 판세를 뒤집은 뒤 격차를 더 벌려나갔다. 2018년 6월까지 현대로템은 단 한 차례도 해외 고속철 차량 수출에 성공하지 못했다. 정부 사업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코레일, 철도시설공단이 2005년 이후 해외에서 수주한 철도 관련 사업 총 106개 중 고속철 건설 사업은 ‘0’건이었고, 컨설팅 자문, 실시설계, 시공감리 등 부수적인 사업이 전부였다.

반면 중국 고속철 노선은 전 세계 고속철 노선의 65% 이상을 차지한다. 2017년 말 기준으로 운영 중인 고속철 노선은 3만2000㎞ 가운데 중국 내 노선만 2만2000㎞에 달한다. 2위는 2615㎞의 일본, 3위는 스페인 2355㎞, 4위는 프랑스 1985㎞이고, 한국은 1000㎞에도 미치지 못한다. 중국은 고속철도 관련 대부분 분야에서 세계 최고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더 나아가 중국은 2020년까지 국내 고속철도 노선을 총 3만㎞로 늘릴 계획이다.

기술도 현대로템이 중궈중처에 밀린다. 고속철도 건설엔 ▶철로 노반 조성 ▶차량 생산 ▶운행 시스템 구축 등 3가지 기술이 필요하다. 중궈중처는 이미 3가지 분야에서 대부분 국산화를 이뤘다. 하지만 현대로템은 고속철 차량 기술조차 한 발 늦다. 현대로템은 프랑스 알스톰 TGV의 ‘동력집중식’(앞뒤 동력차만 엔진 배치)을 고수해왔고, ‘KTX-산천’, ‘KTX-산천Ⅱ’도 같은 방식이다.

배경은 이랬다. 현대로템은 2012년에야 ‘동력분산식’(객차마다 엔진 배치) 개발을 완료했는데, 그때는 이미 세계 고속철 차량 수주 시장에서 대세로 굳은 상황이었다. 실제 배치는 2020년에나 이뤄질 예정이다. 현대로템은 2016년 12월 코레일과 3000억원 상당의 동력분산식 고속철 차량(250㎞, 300㎞) 100량 납품 계약을 체결하고, 2020년 12월까지 인도하기로 했다.

속도도 늦다. 중국 고속철의 최고속도는 시속 605㎞(시험운행)로 세계에서 가장 빠르다. 김포공항에서 제주공항까지 날아가는 여객기의 속도와 비슷하다. 현대로템도 설계상 최고속도 421.4㎞를 기록한 ‘해무’를 개발했지만, 여전히 200㎞ 가까이 차이가 난다. 중궈중처는 현재 중국 베이징과 상하이(1318㎞ 구간)를 연결하는 노선에 최고속도 400㎞, 평균 시속 350㎞로 달리는 2세대 고속철 차량인 ‘푸싱(復興)호’를 투입했고, 1세대 ‘허셰(和諧)호’도 300㎞ 이상 속도로 달린다.

특히 푸싱호는 중궈중처의 자존심이다. 내부 부품의 국산화율을 84%까지 끌어올린 이 열차는 내구성도 유럽 고속철보다 좋다. 중궈중처 측은 “운행 가능 거리는 유럽 기준 20만㎞보다 3배나 긴 60만㎞에 달한다”며 “열차 수명도 30년으로 기존 1세대급 허셰호보다 10년이나 늘었다”고 밝혔다.

고속철 최고속도, 中 605㎞ vs 韓 421㎞

이젠 독일조차 일부 구간에 중국산 철도 설비 수입을 검토할 정도다. 원천기술이 없어 ‘짝퉁’ 회사란 오명은 없어졌고, 나름의 기술경쟁력으로 해외 역진출에 성공한 셈이다. 하지만 현대로템은 좁은 내수 시장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사실상 한국 시장을 독점하는 체제라 발전도 더디다. 익명을 요구한 공과대학 한 교수는 “노반 자체를 설계하는 토목 기술은 뛰어나지만 고속철 차량, 신호, 통신 등 각종 시스템 기술은 민망한 수준”이라며 “결국 무산된 ‘말레이시아~싱가포르 고속철도 건설사업 수주전’에서 국내 컨소시엄 중 차량 제작을 맡은 현대로템의 현지 기술평가가 중국·일본보다 한참 밀린다는 얘기가 있었다”고 말했다.

실제도 그랬다. 현대로템의 연구개발(R&D) 투자 비용이 매출의 3%를 넘긴 건 2016년부터다. 2017년엔 4%를 넘어섰지만, 2011년부터 2015년까진 최소 0.8%, 최대 2.9% 수준에 그쳤다. 특히 그나마 수주 상황이 좋았던 2013년엔 연구개발 투자비를 매출의 0.8%인 251억원까지 낮췄다. 그러다 2015년부터 지난해까지 890억원 이상을 연구개발 비용으로 쓰고 있다.

현대로템 연구개발비 비중, 中 절반 수준


중궈중처는 2017년 기준으로 5년 동안 매년 매출의 5.3% 이상을 연구개발 비용으로 투자했다. 액수로는 584억 위안, 한국 돈으로 10조원에 달한다. 쑨용차이(孙永才) 중궈중처 전무는 “중국 전역에 연구센터 11곳, 기술센터 20곳, 해외 연구센터 13곳을 운영 중”이라며 “열차 설계 및 관련 부품 개발, 열차 운행 기술 등 고속철 차량 개발에 필요한 기술 전반을 연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규모의 차이가 너무 커 절대 비용으로 상대가 안 되지만, 그만큼 연구개발 의지가 극명하게 갈렸다.

현대로템 탓만 할 수도 없다. 중국이 해외 고속철 사업을 수주하는 과정을 보면 ‘동남아·중남미·아프리카 등 우호적인 개발도상국에 차량 수출→선진국에 부가가치가 높은 차량+건설의 결합 상품 수출→철도기술표준 확산’의 단계를 밟는다. 중국 수출입은행은 2017년 기준으로 전 세계 50개 해외 철도 사업에 200억 달러 가까운 자금을 지원했다. 현대로템도 고속철 차량 수주는 아니지만, 2016년 4월 정부와 수출입은행의 금융지원하에 터키 이스탄불 전동차 300량을 수주하는 데 성공했다. 정부의 역할도 그만큼 중요했는 얘기다.

전병서 중국경제금융연구소 소장은 현대로템에 드리워진 그늘을 이렇게 정리했다.

“중궈난처와 중궈베이처가 합병한 이유는 두 회사의 역량을 합치기 위해서였죠. 입찰금액의 40%만 써내도 원가경쟁력을 갖출 수 있어 ‘가격경쟁력’도 막강합니다. 기술이요? 2만㎞ 이상 운영하는 중국이 1년에 기껏해야 1000㎞ 까는 유럽 업체를 뛰어넘는 건 시간문제죠. 중궈중처를 뛰어넘겠다는 의지보다 협력을 모색하는 게 더 현실적인 듯싶습니다.”

- 김영문 기자 ymk0806@joongang.co.kr

201807호 (2018.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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