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년 간장 브랜드 ‘깃코만’을 지탱한 가족교서깃코만은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간장 브랜드다. 깃코만(Kikkoman)은 일본 에도시대 때부터 간장을 제조하기 시작한 식품회사다. 1630년에 자그마한 시골 간장 회사로 시작해 도쿠가와 시대, 메이지유신, 2차 세계대전을 지나 현재까지 약 380년 동안 설립자의 후손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깃코만에서 깃(kik)은 장수와 행운을 의미한다. 코(ko)는 최고를, 만(man)은 영원을 의미한다. 이는 ‘최고의 제품으로 장수하는 최고의 회사’를 의미하는데 깃코만은 몇 세기를 거쳐 회사 이름을 실현하는 업적을 이루었다. 이들은 17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가족교서를 가지고 있는데, 여기에는 창업자의 가치가 반영돼 있으며 이러한 가치기준은 지금까지도 기업활동의 중심이 되고 있다.일본 장수기업의 대부분은 창업 이후 경영의 근간을 이루는 ‘기업이념’을 잘 바꾸지 않는다. 생산기술, 시장개발, 상품개발에는 적극적으로 나서면서도 기업이념이나 사풍은 그대로 계승한다.둘째, ‘전통의 계승’과 동시에 ‘혁신’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혁신은 시대와 고객의 니즈에 맞는 신상품이나 새로운 서비스 개발, 신시장 개척, 신사업 진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루어진다. 즉, 장수 가족기업들은 전통을 지켜나가면서, 혁신을 이루고, 매상을 높이고, 이익을 확보해온 것이다. 이들은 오랜 세월 동안 쌓아온 노하우를 바탕으로 핵심경쟁력을 축적하고 이를 기반으로 세대를 이어 혁신의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130년 된 ‘다나카귀금속’은 초정밀 금극세선 세계 1위‘다나카귀금속’도 1885년 전당포로 출발해 현재 순금 세선으로 세계시장 점유율 1위의 있는 일본 기업이다. 전당포에서 시작해 최첨단 기술을 보유한 세계적인 기업이 되기까지 지난 130년의 역사는 혁신의 연속이다.‘다나카귀금속’은 1885년 도쿄에서 전당포를 겸한 환전소로 처음 문을 열었다. 처음에는 고객이 맡기고 찾아가지 않은 금반지를 금괴 덩어리로 만들어 팔았다. 일본 공업화의 물결을 타고 공업용 제조사로 변신을 시도한다.1889년 다나카는 전구에 사용되는 백금 필라멘트 와이어부터 백금 금속회로에 이르기까지 일본 최초로 백금 미세 필라멘트 와이어를 제조하는 회사로 성장했다. 당시 다나카는 백금 정제기술을 보유한 유일한 회사로 엄청난 수요가 집중됐다. 1900년대 접어들면서는 덩어리 금을 다시 얇게 만드는 기술과 도금 기술을 활용해 부가가치를 창풀했다.1920년엔 ‘다나카 2세’가 경영을 맡아 백금의 공업용 수요를 본격적으로 개발했다. 프랑스 전문가를 초청해 백금 미세선과 바늘 연구에 착수한 끝에 일본 최초로 ‘촉매용 백금망’을 개발했다. 이때의 연구 성과가 현재 세계 제일을 자랑하는 ‘금극세선’ 기술로 이어했다.1963년 기업을 맡은 ‘다나카 3세’는 급변하는 컴퓨터 산업의 발전에 따라 일본 최초로 반도체 칩에 사용되는 금 와이어를 생산해 이후 반도체 기술 발전에 공헌했다. 당시 순금 1g을 두께 0.05mm 선으로 3000m까지 늘리던 기술은 두께 10μm(0.01mm)인 극세선을 제작하는 기술로 진화해 반도체는 물론 액정 디스플레이용 드라이어, 자동차, 심지어 물이나 공기 정화장치 등 매우 다양한 분야로 영역을 확장했다.1990년대에는 다각화를 위해 일본 및 해외 연관 기업을 매수해 세계 시장에 진출했으며, 2010년 의료 분야에 진출해 금 입자를 이용한 고감도 전립선암 진단키트를 개발했다. 2014년에는 태양전지염료, 2016년에는 지카바이러스 검출 시약 개발을 위한 백금전지를 개발하는 등 100년 이상 축적해온 기술 노하우를 활용해 제품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2015년 글로벌 전략 거점으로 실리콘밸리에 다나카 아메리카(Tanaka America)를 설립했으며 2016년 기준 매출 1조700만 엔(한화 약 11조원)을 기록해 명실상부한 ‘다나카귀금속그룹’으로 변모했다. 현재 창업자의 4대 후손들이 기업에 참여하고 있지만, 경영은 전문경영인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지난 130년간 ‘다나카귀금속그룹’이 다뤄온 사업 분야를 보면 그야말로 일본의 첨단산업 분야의 발전 역사와 맥을 같이한다. 1세대는 전당포에서 시작해 전구 등 전기 부품(백금선) 개발로 전환하고, 2세대는 산업용 수요를 개발해 통신 및 전자교환기 부품(금극세선)을 확대하고, 3세대는 산업 전반으로 수요를 확대해 반도체, 자동차 등 산업 전반(초정밀 금극세선), 4세대에는 다각화를 통해 바이오, 태양에너지 염료 등의 분야로 진출했으며, 이제 환경산업에 선도적으로 투자하며 5세대 비즈니스를 준비하고 있다.
혈연보다 기업의 영속을 더 중시하는 문화다나카귀금속그룹은 시대의 변화를 읽으면서 핵심기술을 끊임없이 비즈니스화하며 라이프사이클을 반복하는 데 성공한 사례다. 여러 세대에 걸쳐 핵심역량을 축적하지 않았으면 불가능했을 일이다.셋째, 기업의 최고 가치를 기업의 존속(승계)에 둔다. 기업이 지속 가능하려면 기업을 이어갈 좋은 후계자가 준비돼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시니세’ 기업들은 후계자 양성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며, 자녀들이 좋은 생활습관을 갖도록 강조한다. 특히 어릴 때부터 자녀들이 가업을 접하게 하고, 실례를 들어 선대의 경험이나 지혜를 알기 쉽게 전승한다. 이처럼 어렸을 때부터 가게나 회사에서 부모가 일하는 모습을 보고 자란 자녀들은 승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가업에 대한 책임감도 갖게 된다. 일본에서 변호사나 교수를 하다가도 돌아와 가업을 맡는 경우가 많은데 바로 이러한 배경 때문이다.대부분의 기업이 장자 승계를 중시하지만, 만약 아들의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데릴사위를 들여 후계자로 기업을 이어가도록 하는 전통도 ‘시니세’ 기업들의 성공 요인 중 하나다. 혈연보다 기업이 계속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가족기업인 호시료칸인데, 지금도 해마다 4만 명이 찾을 만큼 이름난 일본 전통의 호텔이다. 호시료칸의 역사는 무려 13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호시가(家)에서는 장자 계승의 전통을 따르는데, 후계자가 되면 법원에 개명 신청을 하고 ‘젠고로오’가 된다. 창업자인 선대의 이름을 계승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자녀들은 어머니의 성을 따른다. 개명 의식에는 선대로부터 이어받은 기업을 잘 지켜서 후대에 계승해야 한다는 책임과 의무가 깃들어 있다.‘시니세’를 연구한 학자들은 기업 규모와 관계없이 분명한 창업 이념을 지키면서 대대적으로 혁신을 추구한 기업들이 장수하는 데 성공했다고 본다. 장수기업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생명선은 경영철학과 이념 등 기업의 전통을 보존하고 끊임없는 변화와 혁신에 노력하는 데 달려 있다.
[박스기사] 깃코만 기업의 가족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