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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그룹, 건설發 위기설 

박정원 회장이 넘어야 할 마지막 관문 

장진원 기자 jang.jinwon@joongang.co.kr
두산건설의 어닝쇼크가 두산그룹 전반의 위기로 전이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내 대기업 중 처음으로 4세 총수 시대를 연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으로선 본격적인 경영능력을 평가받을 기회이자 위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형제경영에서 사촌경영으로 확대된 두산의 지배구조와 영업 현실이 녹록지만은 않다는 게 재계의 시선이다.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은 올해 5월 부친인 고(故) 박용곤 명예회장의 뒤를 이어 그룹의 동일인으로 지정되며 재계 첫 4세 총수 시대를 열었다.
지난 5월 15일 공정거래위원회가 ‘2019 대기업집단’ 현황을 발표했다. 공정위는 해마다 5월이면 자산 5조원 이상과 10조원 이상인 기업집단을 지정하고, 이들을 각각 의무공시와 상호출자 제한 기업으로 묶는다. 매년 이뤄지는 대기업 지정과 더불어 공정위는 개별 대기업별로 동일인, 즉 그룹의 경영 전반을 이끄는 ‘총수’ 지정에도 나선다.

올 5월에 발표된 공정위의 총수 지정은 국내 재계에 불어닥친 세대교체 바람을 실감케 했다. 지난 1년 사이에 기존 총수가 작고한 LG그룹, 한진그룹, 두산그룹 등에 새로운 총수가 지정되면서다. 특히 이들 그룹의 오너가(家) 3·4세들이 경영 전면에 등장하면서 재계는 본격적인 3·4세 시대를 맞게 됐다.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은 구광모 LG그룹 회장과 더불어 이번 동일인 지정에서 가장 주목받은 최고경영자(CEO)다. 지난 1987년 공정위가 동일인을 지정하기 시작한 이래, 오너가 4세로는 처음으로 총수 자리에 오르는 기록을 세웠기 때문이다. 박 회장의 경우 이미 2016년부터 그룹의 지주사인 ㈜두산 회장을 맡아왔지만, 이번 총수 지정으로 정부의 ‘인증’을 새로이 받은 셈이다. 이전까지 두산그룹의 총수는 박 회장의 부친인 고(故) 박용곤 명예회장이었다. 박 명예회장은 박두병 초대회장의 장남으로, 지난 3월 87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두산그룹은 1896년 8월 서울 종로에 문을 열었던 ‘박승직 상점’이 모태다. 창업주를 이어 지금에 이르기까지 123년의 역사를 지닌 국내 최고(最古) 기업이다. 그룹의 유구한 역사와 함께 ‘형제경영’으로 상징되는 안정적 지배구조는 두산의 4세 경영시대를 경영권 다툼이 빈번한 다른 오너 기업에 비해 더욱 돋보이게 한다. 하지만 최근 두산그룹이 처한 현실은 박 회장의 총수 등극을 축하하기 위한 샴페인을 터뜨리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최근 들어 심화된 유동성 위기와 이로 인한 재무구조 악화가 박 회장 취임 이후의 두산그룹을 또 한 번 위기설에 몰아넣고 있어서다.

오너 4세 중 첫 ‘총수’ 오른 박정원 회장


위기의 진원은 두산건설이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두산건설은 지난해 영업손실 578억원, 당기순손실은 무려 5807억원에 달하는 어닝쇼크로 건설업계 전반을 충격에 몰아넣었다. 국내 메이저 건설사로 꼽히는 삼성물산(2018년 당기순이익 1조7482억원), 대림산업(6780억원), GS건설(5874억원), 현대건설(5353억원), 대우건설(2973억원), 현대산업개발(2299억원) 등의 지난해 실적과 비교하면 두산건설의 사업 악화가 어느 수준인지 체감된다.

부진한 실적은 고스란히 재무구조 악화로 이어지며 기업의 지속가능성을 해치고 있다. 올 1분기 말 기준, 두산건설의 차입금은 9803억원에 달한다. 더욱이 차입금 전액은 1년 안에 갚아야 하는 단기 부채다. 이 중 회사채 조기상환에 대응하기 위해 모회사인 두산중공업이 지원한 3000억원을 제외하더라도, 나머지 6803억원은 석 달마다 차환을 발행하거나 연장을 해야 하는 프로젝트파이낸싱(PF) 자금이다. 부동산 시장의 상황이 여의치 않을 경우 외부의 지원 없이는 자체적인 대응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2017년 196.7%였던 두산건설의 부채비율은 지난해 말 626.1%, 올 1분기 들어선 712.7%로 급증했다.

두산건설의 위기가 더욱 심각하게 인식되는 건 그룹의 지배구조에서 기인한다. 두산건설을 지배하는 모회사는 지분 46.17%(보통주 기준)를 보유한 두산중공업이다. 중간지주사 역할을 하는 두산중공업은 다시 그룹의 지주사인 ㈜두산이 33.79%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두산건설의 위기가 두산중공업을 거쳐 그룹 전반의 위기로 전이되기 쉬운 구조다.

지난해 두산중공업은 영업이익 1조원을 올렸지만 당기손익은 4217억원 순손실에 그쳤다. 두산건설의 역대급 실적 부진이 고스란히 두산중공업이 보유한 지분만큼 손상차손으로 인식됐기 때문이다. 결국 두산건설에서 촉발된 위기가 두산중공업을 거쳐 두산그룹 전반으로 이어지는 모양새다.

실제로 그룹 차원의 두산건설 살리기가 전방위로 진행 중이다. 지난 5월 두산중공업과 두산건설은 각각 4718억원, 3154억원에 이르는 대규모 유상증자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두산이 두산중공업에 1416억원을 지원했고, 두산중공업은 다시 3000억원을 두산건설에 쏟아부었다. 단기차입금 상환에 급급한 두산건설을 위한 응급처방에 나선 셈이다. 이에 앞서 4월에는 두산중공업과 두산건설이 보유 중이던 계열사 디비씨의 지분을 두산과 두산인프라코어, 두산밥캣 등 우량 계열사가 576억원에 사들이는 자구책도 진행됐다.

두산건설 위기, 중공업과 그룹 전반으로 확대되나


대규모 유상증자나 계열사 지분 매각 등 두산건설을 살리기 위한 사투가 이어지고 있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우려는 여전하다. 외형상 두산건설의 수주잔고는 올 1분기 기준 7조4000억원으로 안정적인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전체 수주잔고의 약 75%를 건축·주택 부문이 차지한다. 부동산 경기 침체가 장기화되고 시장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는 상황임을 감안하면 언제든 다시 유동성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재계에선 그동안 ‘그룹 유동성 위기의 진원지인 두산건설을 떼어버려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이어져왔다. 실제로 지난해 그룹 전체의 매출 기여도에서 두산건설이 차지한 비중은 8%에 불과하다. 영업이익 비중은 -4%에 그쳐 그룹 전체 실적을 까먹는 주범 신세가 됐다. 두산그룹 내 주력 계열사 중 영업이익이 마이너스로 떨어진 곳도 두산건설이 유일하다.

‘미운 오리 새끼’로 전락한 두산건설은 박정원 회장에게도 아픈 손가락이다. 박 회장은 2005년 당시 두산산업개발 부회장으로 건설업에 뛰어든 이래 2009년 두산건설 회장에 올랐고, 그룹 회장에 취임한 이후에도 지금까지 두산건설 회장을 겸임하고 있다. 박 회장은 두산건설 CEO로 일하며 레미콘, 레저, 건설기계 같은 비주력사업을 떼어내는 구조조정을 단행해 재무 안정화를 이루는 등 경영성과를 인정받은 바 있다. 지주 회장 취임 이후에도 두산건설 회장 타이틀을 유지하는 것도 책임경영 차원은 물론, 건설업 자체에 애정이 강하기 때문이라는 게 업계의 평가다.

일각에선 이 같은 표면적인 배경 외에 두산그룹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을 형제경영이라는 독특한 지배구조에서 찾기도 한다. 두산은 박승직 창업주와 박두병 초대회장에 이어 ‘용’자 돌림의 3대째에 이르러 형제들이 그룹 회장을 번갈아 맡는 독특한 경영승계 체제를 유지해왔다. 고(故) 박용오 전 회장이 경영권 다툼 과정에서 그룹에서 축출되는 트라우마를 겪기도 했지만, 이후 형제경영 지배구조는 오너가 중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원칙으로 오히려 더욱 확고히 자리 잡았다는 평가다.

문제는 이 같은 지배구조가 책임경영이나 사업의 영속성 측면에선 오히려 마이너스로 작용한다는 지적에서 나온다. 대표적인 사례가 그룹의 체질 변화다. 1990년대만 하더라도 두산그룹은 OB맥주와 코카콜라, 버거킹, KFC 등을 비롯해 네슬레, 코닥, 3M 등을 기반으로 한 소비재기업이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인수합병(M&A)과 비주력부문 매각 등을 통해 지금의 중공업 기업으로 변신하는 데 성공했다.

B2C 비즈니스의 리스크에서 벗어나 과감한 체질변화를 이룬 두산의 변신은 이후 국내 대기업의 성공적인 경영 사례로 회자돼왔다. 사후약방문 격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두산의 이 같은 실험이 지금에 와선 독으로 작용한다는 분석도 힘을 얻는다. 두산그룹 출신의 한 전직 임원은 “그 같은 지적에 어느 정도 공감한다”며 “과거에는 OB맥주나 하다못해 KFC 같은 소비재 계열사들이 현금 창구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고 지적했다. 이와 달리 현재 위기의 진원으로 꼽히는 건설이나 중공업은 기본적으로 수주산업이다. 전방산업이나 경기 변동에 따라 발주가 따라주지 않으면 급격한 위기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한 재계 관계자는 “잘나갈 때는 아무 문제 없는 듯 보이지만, 막상 위기가 닥치면 공고해 보였던 리더십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장자 상속 위주의 1인 경영체제가 불합리한 점도 많지만, 위기나 부실 상황에서는 무한책임도 가능한 게 사실”이라는 설명이다.

박정원 회장 취임 이후 두산의 지배구조는 3세 시절의 형제경영에서 4세들의 ‘사촌경영’으로 확대되는 모양새다. 현재 두산그룹은 작고한 박용곤 명예회장의 아들인 박정원 회장과 친동생 박지원 ㈜두산 부회장을 위시로 ‘원’자 돌림의 사촌들이 주요 계열사 경영에 활발히 참여하고 있다. 박용성 전 회장의 아들인 박진원 두산메카텍 부회장·박석원 ㈜두산 부사장, 박용현 두산연강재단 이사장의 아들인 박태원 두산건설 부회장·박형원 두산밥캣 부사장·박인원 두산중공업 부사장, 박용만 두산인프라코어 회장의 아들인 박서원 ㈜두산 전무·박재원 두산인프라코어 상무 등이다.

박정원 회장을 시작으로 사촌경영이 이뤄진다면 박진원 두산메카텍 부회장, 박태원 두산건설 부회장, 박서원 ㈜두산 전무 등 각 집안의 장남들이 바통을 이어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재계에서도 박용오 전 회장의 ‘형제의 난’을 겪은 두산그룹이 이 같은 지배구조와 경영승계 원칙을 지켜나가리라 보는 게 일반적이다.

책임경영 어렵게 만든 형제경영의 역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박정원 회장과 동생인 박지원 부회장, 박혜원 두산매거진 부회장 등 박용곤 명예회장의 자녀들은 지난 5월 선친의 지분을 각각 상속받았다. 이로써 박정원 회장은 ㈜두산의 지분을 7.41%로 끌어올리며 최대주주 자리를 공고히 했다. 한편 박정원 회장 삼남매는 지분 상속을 위한 재원 마련을 위해 일부 지분의 블록딜에 나섰고, 이를 통해 각각 121억원, 80억원, 41억원의 현금을 챙겼다.

이 과정에서 주목받는 사실은 박정원 회장 남매 외에도 박진원 부회장, 박석원 부사장, 박태원 부회장, 박형원 부사장, 박인원 부사장, 박서원 전무, 박재원 상무 등 사촌들이 대거 ㈜두산 지분을 12% 이상씩 처분했다는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박정원 회장의 두산 지배력이 강화된 셈이다. 재계에선 변화된 ㈜두산의 지분구조를 통해 향후 사촌 간 계열분리가 이뤄질 거란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박정원 회장 일가가 중공업 부문을 맡고, 건설은 박태원 부회장 일가가, 두산인프라코어는 박서원 전무 일가가 나눠 맡는다는 시나리오다.

지난 4월 이사회에서 결정된 계열분리도 이 같은 예상에 힘을 싣는다. ㈜두산은 4월 15일 인적분할을 통해 소재사업 부문은 두산솔루스로, 연료전지사업 부문은 두산퓨얼셀로 계열분리에 나섰다. 이로써 두산그룹의 주력 사업은 기존의 중공업, 건설, 기계 외에 전자와 화학부문이 추가됐다. 사촌들 간 운신의 폭이 그만큼 넓어진 셈이다. 모회사가 신설법인의 지분을 100% 보유하는 물적분할 대신, 오너가의 기존 지분율이 신설법인에 그대로 적용되는 인적분할에 나선 것도 향후 지분조정을 통한 계열분리를 용이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예상도 가능하다.

박정원 회장 입장에서는 집안의 장손이라는 명분 외에, 그룹의 핵심인 중공업 부문을 맡기 위해선 현재의 위기를 극복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 과거 두산건설의 구조조정과 두산인프라코어의 혁신을 진두지휘하며 경영 능력을 인정받았던 박 회장이 마지막 시험대에 오른 셈이다.

박 회장의 경영능력은 두산인프라코어의 흑자전환 사례에서 엿볼 수 있다. 박 회장이 그룹 회장으로 취임하기 직전인 2015년만 하더라도 두산인프라코어는 적자에 시달리는 골칫덩이였다. 하지만 박 회장은 비주력 사업부문 매각과 수익성 강화 등을 과감히 밀어붙였고, 결과적으로 두산 인프라코어는 흑자전환에 성공해 알토란 계열사로 거듭났다.

2017~2018년 2년 연속 그룹 전체의 영업이익이 1조원대를 회복한 것도 박 회장의 공로로 평가된다. 두산은 2017년 당시 4년 만에 1조원대 영업이익을 회복하며 부활의 날개를 폈다. 최근 불거진 위기설에 대해서도 두산그룹 관계자는 “박 회장의 취임 일성이 재무구조 개선이었다”며 “오히려 두산인프라코어 실적이 부진했던 2015년 당시가 그룹 내 긴장감이 더했다”고 말했다. “두산건설이 그룹 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은 편이고 ㈜두산의 유상증자 지원도 1000억원대 불과해, 이를 그룹 전체의 위기로 보는 건 지나친 확대해석”이라는 설명이다.

201907호 (2019.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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