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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뜻 위해 소신 감출 수도범인들의 머리로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고도의 후퇴 전략도 있다. 양명학 창시자인 유학자 왕수인(王守仁)의 경우가 그렇다. 왕양명으로 더 잘 알려진 바로 그다. 당시 왕기(王畿)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뛰어난 유학자였지만 성격이 호탕해 책상 앞에만 앉아 있지 못하고 매일 술집과 도박장을 전전했다. 왕수인은 왕기의 명성을 듣고 그와 교류하고 싶었지만 왕기가 술집과 도박장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는지라 좀처럼 만날 기회를 찾지 못했다.이에 왕수인은 제자들에게 각종 도박을 배우고 술과 가무도 익히게 했다. 몇 달이 지난 뒤 제자 하나를 시켜 왕기를 찾아가게 했다. 제자는 주루에서 술잔을 비우고 있던 왕기에게 공손히 인사하고 말했다.“존경하는 왕 선생과 패를 겨루고 싶습니다.”왕기는 제자를 비웃으며 말했다.“허허, 죽은 글이나 읽는 서생이 도박을 하겠다고? 그대는 도박이 뭔지나 알고 그런 말을 하는가?”제자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선생께서는 모르고 계시는군요. 저의 스승님은 제자들과 자주 도박을 하십니다.”왕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아니, 그게 정말이오?”“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제 말을 믿지 못하시겠다면 스승님을 만나보시지요. 스승님은 글만 아시는 분이 아닙니다.”왕기는 왕수인을 찾아가 만났다. 두 사람이 깊은 대화를 나눈 뒤, 왕기는 왕수인의 제자가 됐으며, 왕수인의 학문을 선학(禪學)으로 발전시켰다. 사람들이 술과 도박에 빠진 낙오자로만 여기던 왕기를 알아본 안목도 대단하지만, 그런 인재를 문하에 두기 위해 술과 도박까지 마다하지 않았던 왕수인의 후퇴 전략에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자칫 학자가 술과 도박에 빠졌다는 세간의 비판을 받아 평판이 치명적으로 훼손될 위험도 있었던 일이었다. 그야말로 큰 뜻을 펼치기 위해 작은 명예를 버린 위대한 지혜가 아닐 수 없다.국가의 존망을 가르는 대의를 위해서는 더 큰 후퇴도 필요하다. 명나라 무종 때의 문신 이동양(李東陽)의 처신을 보자. 1505년 효종이 죽자 여섯 살 무종이 황제로 즉위했다. 이때 환관 유근을 비롯한 무리가 어린 황제를 놀이에 빠지게 만들고는 전권을 휘두르며 정사를 주물렀다. 이 꼴을 보다 못한 유건과 사천 등 충신들이 자리에서 물러나 낙향해버렸다. 하지만 이동양은 변함없는 마음가짐과 행동으로 황제와 조정을 보필했다.오늘날까지 이동양의 이런 태도를 비판하는 사람이 많다. 자리에 연연해 간신들의 발호를 묵인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꼭 그럴까. 선제인 효종은 임종 시에 이동양과 유건, 사천 세 신하에게 어린 아들을 부탁하고 눈을 감았다. 이 세 사람은 효종의 고명지신(顧命之臣)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유건과 사천은 효종의 고명을 듣고서도 자신의 명예만 생각해 조정을 박차고 나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동양마저 떠나버린다면 효종의 유지는 누가 받들 것이며, 흔들리는 나라를 누가 바로잡는다는 말인가. 이런 마음에서 이동양은 자신의 명예에 흠집이 나더라도 황제와 나라를 지키는 선택을 했던 것이다.
잘나갈수록 절실한 후퇴 전략후퇴 전략은 잘나가는 리더일수록 더욱 절실하고 필요한 것이다. 잘나갈수록 주변의 질시를 얻게 될 뿐만 아니라, 상급자나 권력자에게는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는 경쟁자로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전국시대 진나라의 명장 왕전(王翦)은 그 같은 후퇴 전략의 너무도 유명한 사례다.왕전은 진시황이 황제가 되기 전부터 수많은 공적을 세웠다. 기원전 224년 진시황이 초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장수들을 불러 모았다. 이때 왕전은 황제에게 초나라를 공격하려면 60만 병력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젊은 장수인 이신이 나서 자신은 20만 병력만 있으면 초나라를 굴복시킬 수 있다고 큰소리쳤다. 시황제는 왕전을 늙었다고 비웃고, 이신과 몽염에게 20만 병력을 줘 원정에 나서게 했다. 이에 왕전은 병을 핑계로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했다.이신과 몽염은 초기 전투에서는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신이 이끄는 부대가 초군의 기습을 받아 크게 패하면서 진나라가 도리어 위기에 몰리게 됐다. 그러자 진시황은 왕전의 고향으로 직접 발걸음해 그를 다시 장군으로 모셔 왔다. 왕전이 60만 병력을 이끌고 싸움터로 나아갈 때 진시황은 직접 먼 길까지 나가 그를 환송했다.출병 직전 왕전은 출병의 대가로 비옥한 논밭과 커다란 저택을 달라고 황제에게 청했다. 그러자 시황제가 웃으며 물었다.“대군을 거느리고 출정하는 장군이 어찌 살림을 걱정한단 말이오?”왕전은 태연하게 대답했다.“신은 폐하를 위해 적지 않은 공로를 세웠는데 공후에 책봉되지 못했습니다. 논밭이라도 많아야 신이 전장에 나가 죽더라도 자손들이 먹고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왕전은 전쟁터에 도착해서도 다섯 번이나 황제에게 사람을 보내 대가를 재촉했다. 보다 못한 부장(副將)이 왕전을 말리자 왕전은 이렇게 말했다.“모르는 말 하지 말게. 폐하께서는 의심이 많은 분인데, 지금 진나라의 모든 병력을 나한테 맡겨두고 마음을 놓을 수 있겠나. 폐하께서 황궁에 앉아 우리를 의심하고 있다면 어찌 되겠나 생각해보게. 내가 누차 대가를 요구하는 것은, 내가 나라가 아니라 재산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 위함이라네.”왕전은 이 같은 후퇴의 지혜로써 황제의 의심을 풀어 마음 놓고 전투에만 임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초를 멸망시키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무성후에 봉해졌다.실제로 몇 해 전 국내 기업의 간부들에게 가장 싫은 후배가 어떤 후배냐고 묻는 설문조사에서 1위를 차지한 답변은 ‘리더십이 있는 후배’였다. 꼭 필요할 때까지 발톱을 숨겨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후당 때의 충신 곽숭도 후퇴 전략을 아는 인물이었다. 그는 청렴하기로 유명한 관리였는데, 재상으로 발탁되고 나서는 온갖 경로로 들어오는 돈과 선물을 모두 받아 챙겼다. 그러자 오랜 친구들과 수하들이 수군거리며 그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곽숭도가 그들에게 말했다.“내가 장상이 돼 매년 받는 봉록도 다 쓰지 못할 판인데 선물과 돈이 탐나서 그러겠나. 그것은 각 번진(藩鎭)들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라네. 지금 각 지방을 지키는 번진 대부분은 모두 황제의 신임을 받고 있는 사람들일세. 그런데 그들의 선물을 받지 않으면 어찌 되겠는가? 그들이 나를 의심하고 두려워하지 않겠나 말일세.”이처럼 필요에 따라 소신을 잠시 감추거나 접어두는 것은 소신을 버리는 행동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위험이나 역효과를 뻔히 알면서도 소신을 고집하는 것이 어리석은 짓일 뿐이다. 너무 중국 얘기만 한 것 같으니 우리의 사례를 하나 보태 결론을 대신하고자 한다.충무공 이순신 장군도 그런 후퇴 전략의 고수였다. 진린은 변변히 싸우지도 않고 공적을 얻게 된 것이다. 이에 감동한 진린은 이후 전투에서는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됐다. 마지막 전투였던 노량해전 때도 진린이 왜군의 뇌물을 받고 철수하는 왜군을 순순히 보내주고자 했지만 결국 이순신의 강경한 반대를 거부하지 못했던 것도 이순신이 평소 그에게 준 ‘뇌물(?)’ 덕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