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설득하는 데는 기술이 필요하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필요를 충족하기 앞서 상대의 필요를 먼저 고민하는 사람은 없다. 자신의 이익 추구가 가장 먼저다. 이익이야말로 사람들을 가장 쉽게 움직일 수 있는 지렛대다.
▎사진:일러스트 이정권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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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허난성의 수도였던 카이펑(開封)이 몽골에 의해 점령당했을 때, ‘판관 포청천’으로 유명한 이 유서 깊은 도시는 하마터면 지구상에서 사라질 뻔했었다. 칭기스칸이 도시를 쓸어버리고자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몽골 스타일’이었다. 거주자들을 모두 죽이고, 건물들을 모두 무너뜨려 말을 먹일 수 있는 초원으로 만들어버리는 것 말이다. 이를 ‘성을 도륙한다’는 의미로 ‘도성(屠城)’이라고 했다. 특히 저항이 심했던 도시에는 가차 없었다. 그때 칭기스칸을 설득한 인물이 있었다. 재상 야율초재(耶律楚材)였다. 그는 칸에게 말했다.“전쟁의 목적이란 땅과 백성을 얻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정복지가 아무리 넓은들 백성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옳은 얘기였지만 야율초재가 그렇게만 말했다면 칭기스칸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을 것이다. 떠돌아다니는 유목 DNA를 가진 칭기스칸에게 많은 백성이란 그다지 쓸모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야율초재는 말을 이었다.“지금 중국에서 가장 뛰어난 장인들과 공학자들이 이곳 카이펑에 몰려 있습니다. 그들을 살려두면 제국 건설을 위한 전쟁에 쓰일 각종 무기와 이동수단을 개발하는 데 유용할 것입니다.”야율초재는 칭기스칸을 잘 알았다. 그는 문화와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직 정복만이 그의 관심을 끌 수 있었다. 야율초재는 칭기스칸의 그런 정복욕과 야심에 호소해 뜻을 이룬 것이다. 칭기스칸에 이어 2대 황제 오고타이칸이 금을 멸망시켰을 때도 몽골 지배층들은 정복지에서 농민들을 없애버리고 비옥한 농지를 목장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들은 중국 땅에 초원이 없다고 불평했다. 야율초재는 오고타이를 설득했다.“한족들이 말을 못 탄다고 해서 쓸모없는 게 아닙니다. 그들에게 농사를 짓게 허락하면 많은 세금을 징수할 수 있어 군비를 충족하고도 남을 것입니다.”오고타이는 귀가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야율초재의 건의를 받아들였고, 중국 백성들은 일부 황족을 제외하고는 모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몽골이 중국의 앞선 문명을 흡수해 원나라의 기반을 튼튼히 다질 수 있었음은 두말이 필요 없는 부분이다.이처럼 다른 사람을 설득할 때는 자비나 도덕에 호소할 게 아니라 이익을 설명해야 훨씬 효과적이다. 당신이 어떠한 행동이나 결정을 내렸을 때 인품이 빛나고 주위의 칭송을 받을 것이라는 얘기보다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얘기가 더 귀에 쏙 들어오지 않겠나 말이다. 상대에게 자선을 베풀라고 요청하거나 과거에 받았던 은혜를 갚으라고만 요구한다면, 앞으로 그 상대는 이내 당신을 귀찮아할 가능성이 있다. 칭기스칸이나 오고타이칸 역시 그런 얘기를 들었다면 콧방귀를 뀌고 야율초재를 내쳤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 그가 얻을 이익을 듣고 생긴 탐욕이 결과적으로 자비를 가져온 것이다.야율초재는 이 같은 원리에 통달해 있었다. 거란의 왕족 출신인 야율초재는 젊은 시절 시대를 잘못 만났다고 판단해 불교에 귀의하는 등 은둔 생활을 했다. 하지만 뛰어난 능력과 성품은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드러나지 않을 수 없는 법. 연경을 장악한 1218년 칭기스칸은 대대적으로 인재를 구했다. 이때 야율초재가 시대를 앞선 인재라는 소문을 들은 칭기스칸은 사람을 보내 야율초재를 청했다. 뜻을 펼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 야율초재는 칭기스칸의 부름에 응했다. 칭기스칸은 야율초재가 금나라에 멸망한 요나라 왕실의 후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야율초재가 칭기스칸 앞에 섰을 때 칭기스칸이 말을 던졌다.“금나라는 그대의 나라인 요와 대대로 원수였다. 내가 금을 멸해 그대의 원한을 씻어주겠노라.”감읍하리라는 칭기스칸의 예상과 달리 야율초재는 담담했다. 그러고는 조용히 말했다.“저의 조부께서 이미 금나라에서 벼슬을 했는데 어떻게 금나라 군주를 원수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지나간 일일 뿐입니다.”이러한 야율초재의 대답 역시 자비가 아닌 이익에 호소하는 설득법에 충실한 것이었다. 조상이 금나라 조정에서 벼슬을 했는데도 금나라를 원수로 생각한다면, 원나라에서 벼슬을 하면서도 원나라에 원한을 품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야율초재의 대답은 당신이 나를 중용한다면 나는 다른 마음을 먹지 않고 당신에게 충성할 것이며, 당신은 나의 도움으로 더욱 큰 성과를 이루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었다.사실 칭기스칸의 제안은 야율초재를 시험한 것이었다. 거란족 왕실 후예를 믿을 수 있을지 슬며시 던진 테스트에 야율초재가 너끈히 합격한 것이었다. 이때부터 야율초재에 대한 칭기스칸의 믿음은 한없이 깊어만 갔다. 아들 오고타이에게 “이 사람은 하늘이 내게 주신 선물이다. 앞으로 나랏일과 군사 문제는 모두 야율초재와 상의해 처리하도록 하라”고 말할 정도였다.이 같은 원리는 동서고금을 구별하지 않는다. 기원전 433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벌어지기 직전, 이오니아제도에서 두 번째로 큰 섬으로 페니키아인들이 살고 있던 케르키라섬과 그리스 도시국가 코린트 사이의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둘 모두 아테네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사활을 걸었다. 아테네가 거드는 쪽이 승리할 것이 분명했고, 승자는 패자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을 것도 확실했기 때문이다.먼저 케르키라가 아테네에 사절을 보냈다. 사실 케르키라는 과거 아테네의 적과 동맹을 맺은 적이 있었다. 케르키라의 사절은 이 점을 부인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이전에 아테네를 도운 일이 없고, 오히려 아테네의 적 편에 섰었음을 당당히 인정했다. 하지만 그때는 그것이 이익이었다. 이번에는 아테네가 케르키라를 도와주면 서로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케르키라는 아테네에 버금가는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둘이 힘을 모으면 아테네의 숙적인 스파르타를 위협할 만한 제해권을 확보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케르키라가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제안이었다.코린트도 사절을 보냈다. 코린트 사절은 아테네 앞에서 일장 연설을 했다. 그는 과거 코린트가 아테네를 도와줬던 사례들을 열거했다. 그러면서 아테네가 현재의 친구를 저버리고 과거의 적과 손을 잡으면 다른 나라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느냐고 물었다. 신의를 우습게 아는 아테네와 관계를 끊을지도 모른다고 협박 아닌 협박을 했다. 코린트의 사절은 다시 한번 코린트가 아테네에 해준 일들을 상기시키며 친구의 은혜를 갚는 게 도리라고 강변하며 말을 마쳤다.두 나라 사절이 다녀간 뒤 아테네인들은 회의를 열었다. 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진 않았다. 결론은 쉽게 났다. 투표 결과 케르키라와 동맹을 맺자는 쪽이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이다. 아테네는 심오한 그리스 철학의 중심지지만 아테네인들은 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현실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화려한 수사나 감정적 호소보다 실용적이고 실질적인 논증을 중시했다.게다가 아테네인들은 과거의 일에 얽매이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이 코린트에 대한 신의를 저버린다고 해서 그리스 최강국인 아테네와 동맹을 끊을 만큼 배포가 있는 도시국가는 없다는 현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케르키라는 이런 점을 파악하고 있었다. 아테네인들에게 절실한 것은 현실적인 힘이지, 과거에 진 빚이 아니라는 점을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실증적 역사의 아버지인 그리스 역사학자 투키디데스도 스파르타에 파견된 아테네 사절의 입을 빌려 이렇게 전하고 있다.“약한 자가 강한 자에게 복종하는 것은 세상의 법칙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힘이 있는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당신들도 지금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이제 당신들의 이익을 계산해보고 나서, 옳고 그른 관점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제까지 한 번도 그런 생각 때문에 우월한 세력이 제공하는 좋은 기회를 외면한 적이 없었습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사람을 설득하는 데는 기술이 필요한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나의 필요와 상대의 필요를 혼동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상대에게 자비를 베풀기를 바라는 것은 상대가 나의 필요를 이해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때로는 그것이 대의명분 같은 도덕, 애정 같은 감정으로 포장되기도 하지만 결국 상대에게 그것은 나의 필요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의 필요를 충족하기 앞서 상대의 필요를 먼저 고민하는 사람은 없다. 자신의 이익 추구가 가장 먼저다. 이익이야말로 사람들을 가장 쉽게 움직일 수 있는 지렛대인 것이다. 동서고금이 따로 없다고 했으니 오늘날의 사례를 한번 보자.오늘날 인류의 가장 큰 이슈 중 하나인 환경문제만 해도 그렇다. 많은 나라 정부가 환경규제에 발 벗고 나서고 있지만 지구온난화 문제는 해결의 기미는커녕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최근 호주 디킨대와 미국 미시간대가 공동으로 연구해 전략경영저널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각국 정부의 환경규제가 환경오염이나 지구온난화를 전혀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동아비즈니스리뷰 282호) 공동 연구진은 1992년부터 2009년까지 미 정부의 환경오염 억제 정책이 어떠한 결과를 낳았는지 추적했다.미국의 8000여 개 기업과 1만8000여 개 공장이 대상이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미 연방정부와 주정부가 환경오염을 규제하는 정책을 강화할수록 미 기업들은 생산시설의 해외 이전을 서둘렀다. 상대적으로 환경규제가 느슨하거나 규제가 없는 나라로 생산시설을 이전한 것이다.신흥공업국이나 저개발국가들에는 그런 움직임이 오히려 기회였다. 각종 오염물질을 뿜어내는 산업시설을 적극 받아들였다. 그들에게는 환경오염보다 투자 유치와 고용 창출이 훨씬 시급한 문제였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미국에서 환경규제가 강화될수록 미국의 환경오염은 줄어들었지만 저개발국가의 환경오염은 상대적으로 확대됐다. 미국에서 환경규제가 강한 주일수록 기업은 탈출 유혹을 더욱 크게 느꼈다. 이 같은 오염의 이전 효과 때문에 궁극적으로 전 세계 탄소 배출과 환경오염의 총량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것이다. 이번 연구조사 결과에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전 세계의 오염 총량은 오히려 늘어날 수도 있다. 규제가 있는 곳에서는 그나마 오염물질 배출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이 있겠지만, 규제가 없는 지역에서는 오염은 신경 쓰지 않고 마구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단 예외가 있었다. 환경규제를 기술적으로 감내할 수 있는 기업들에서는 생산기지의 해외 이전 비율이 아주 낮게 나타난 것이다. 굳이 해외 이전을 하지 않더라도 자체적으로 개발하거나 도입한 오염 저감 기술을 활용해 정부 규제에 대처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이에 공동 연구진은 강제적으로 기업을 억누르는 규제정책보다는 기업 스스로 기술적 역량을 강화해 오염을 줄이도록 유도하는 정책이 더 효과적일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친환경 기술에 투자하도록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것이 더욱 현명한 방법이라는 것이다.국민 건강을 위한 자선이나 지구온난화 방지라는 대의명분만으로 기업을 설득하고 강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보다는 기업이 스스로 오염물질을 줄이는 것이 이익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상대를 설득할 때는 자비가 아닌 이익에 호소하라.’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만고불변의 진리가 아닐 수 없다.하지만 이 같은 원칙에도 예외가 있다. 흔한 예는 아니지만 실리보다 명분을 중요시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그들은 물질만능주의를 경멸한다.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는 행위를 역겨워한다. 그보다는 정의나 박애 같은 가치를 더욱 소중히 한다. 분명 이런 사람들이 있다.이런 사람들에게 이익을 강조하면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다. 그들을 설득해야 할 때는 반대로 자비에 호소하는 게 낫다. 그리고 상대가 그런 자비를 베풀 수 있는 충분한 힘과 능력, 지위를 갖고 있음을 강조해야 한다. 대체로 그들은 힘이 강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우월감을 느낄 기회 말고는 원하는 게 없을 수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러면 그는 당신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기뻐하며 자비를 베풀 것이다.역시 지피지기(知彼知己), 즉 상대를 잘 파악하는 건 기본이다. 『전쟁의 기술』 저자인 로버트 그린은 이렇게 말한다.“상대가 탐욕을 드러낼 때는 자비를 들먹이지 마라. 그들이 자비롭게 보이고 싶어하면 탐욕을 내세우지 마라.”하지만 자비를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설령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이익을 완전히 무시하기란 어렵다. 그러니까 상대가 잘 파악되지 않는다면 ‘자비보다는 이익’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는 게 안전할 듯하다.
※ 이훈범은… 남들이 못 보는 세상을 보고 싶어 기자가 되었고, 기자로 살며 본 세상을 칼럼에 녹이고 있다. 역사 속 사건과 인물에서 혜안을 얻는 게 삶의 기쁨이다. 1989년 중앙일보에 얽매여 기자로 산 지 30년째, 그중 10년 이상을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역사, 경영에 답하다』(2009), 『대한민국 국격을 생각한다』(2010, 공저), 『세상에 없는 세상수업』(2014), 『품격』(2019)이 있다. 파리10대학 문학박사 과정 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