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패션 명품 브랜드가 즐비한 미국과 유럽, 유니클로로 패스트패션 시장을 석권한 일본과 비교해 한국을 대표하는 패션 브랜드가 쉬 떠오르지 않는다. ‘산업의 쌀’로 불리는 반도체와 이를 활용한 가전·IT 제품으로 글로벌 강자가 된 한국의 저력이 패션산업에서만큼은 여전히 변방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1960년대 공업화의 기치를 내건 대한민국 號를 이끈 건 섬유산업이었다. ‘여공’으로 상징되던 저렴한 노동력과 때마침 불어닥친 화학섬유 바람은 우리 섬유산업이 도약할 토대를 마련해주었다.1980년대 들면서 섬유산업은 산업 고도화와 중화학공업 육성책으로 인해 산업화라는 무대의 주인공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하지만 현재 섬유산업이 한물간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해 과거의 영광에만 취해 있는 건 물론 아니다. 2017년 기준 국내 섬유패션업체 수는 전체 제조업 내 7.8%를 차지하며 여전히 기간산업의 위상을 잇고 있다. 같은 기간 한국의 섬유 수출량은 세계 15위이고, 스판덱스·타이어코드 같은 고부가가치 섬유 기술력은 미국과 일본, EU(유럽연합)에 이어 4위 수준이다. 반도체와 자동차, 조선의 기술 발전사 못지않게 섬유산업의 기술경쟁력도 세계 최고 수준을 이룩해낸 것이다.섬유를 원재료로 보면 가공한 패션산업의 현재는 어떨까? 손욱의 대화 여섯 번째 순서에선 원대연 전 한국패션협회 회장을 만났다. 원 회장은 1973년 삼성물산 봉제수출과에 입사해 제일모직 사장과 패션협회 회장에 이르기까지 45년간 섬유·패션이라는 한길만 걸어온 스페셜리스트다. ‘빈폴’ 신화로 제일모직을 한국 최고의 패션 브랜드로 키운 원 회장은 “세계 15위 섬유수출국임에도 글로벌 패션 브랜드가 단 하나도 없다”며 “자율과 창의가 사라진 현실이 패션의 초일류를 이루지 못한 결정적 이유”라고 안타까워했다.
손욱: 지난해 초 깜짝 은퇴선언을 하셨습니다. 45년간 패션과 디자인이라는 한 우물을 파오셨는데, 그간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원대연: 패션협회에서만 14년을 일했어요. 지난해 초 은퇴한 후 그저 즐겁게 놀고 있습니다. 사실 패션협회 일도 제일모직과 사디(SADI, 삼성디자인교육원)를 떠난 후 떠밀리듯 맡게 됐어요. 40년 넘도록 제대로 쉰 적이 없었습니다. 요즘 정말 신나게 놀고 있어요.
손욱: 신나게 논다는 건 결국 하고 싶은 일을 즐기며 산다는 말 같습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는 곧 창조의 시대인데, 회장님의 요즘 삶이 또 다른 창조적 삶의 바탕이 되지 않을까 기대가 됩니다. 20년 전 들었던 덴마크 지인의 말이 떠오릅니다. 자기 나라에선 창의적 직업을 가진 사람이 전체 경제활동인구의 42%를 차지한다고 하더군요. 디자인이나 패션 같은 창의적 직업이죠.
원대연: 대단하군요. 그렇게 되면 굳이 대학에 갈 필요도 없어요. 자기가 필요한 전문지식과 경험을 열심히 파고들어 전문가가 되는 것이죠. 요즘은 직업도 굉장히 세분화돼 있잖아요. 초등학교만 졸업해도 되고, 학원만 다녀도 됩니다. 한국 사회는 너무 왜곡되고 경직돼 있어요.
손욱: 인구가 얼마 되지도 않는 유럽의 창조 국가들을 보면서 ‘우리가 저들보다 못한 게 무언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한편으론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패션과 디자인을 왜 따라가지 못하는가를 고민하게 돼죠. 그들의 미적 감각과 창의력을 우리가 따라가지 못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원 회장님은 제일모직과 사디에 이르기까지 우리 패션·디자인산업을 이끄셨습니다. 전문가의 혜안이 궁금합니다.
예술적 가치는 하루아침에 빚어지지 않는다
▎원대연 회장은 어떤 분야든 리더가 패러다임을 바꿔야 이전과 다른 창조적 성과가 나올 수 있다고 강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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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대연: 얼마 전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토스카나 지역의 루카를 비롯해 시에나, 산지미아노, 볼테라를 찾았어요. 우표가 처음 탄생한 산마리노, 베르디가 태어난 파르마도 둘러봤습니다. 이들은 모두 하나의 도시국가였어요. 수천 년 역사 속에서 전쟁과 협력, 번영과 쇠퇴를 누렸던 도시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도시를 지배한 명문가가 모두 예술과 문화를 사랑했다는 겁니다. 예술가와 장인을 굉장히 예우했죠. 수천 년 전 건물이 오늘날까지 남아 영감을 전하는 이유입니다. 미켈란젤로가 묻힌 피렌체 산타크로체 성당을 보세요. 장인을 예우하니 기술이 승계·발전될 수 있었던 겁니다. 우리는 장영실과 김홍도가 어디서 죽었는지도 몰라요. 아무리 기술과 예술에 소질이 있어도 먹고살기 힘들고, 더욱이 천대받으면 존재가치가 없습니다. 예술적 가치가 하루아침에 빚어지진 않는다는 거죠.
손욱: 결국 이탈리아의 예술과 창의도 리더가 만들어놓은 시스템 덕에 가능했다는 말씀이군요.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큰 것 같습니다.
원대연: 이탈리아에 라벤나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고대 로마제국이 서로마와 동로마로 쪼개졌을 때 서로마의 마지막 수도였던 곳이죠. 이곳은 서구 문화와 이슬람문화가 융합된 예술품과 건축물이 많기로 유명합니다. 15년 전 현직에 있을 때 이곳에 출장을 가 한 성당을 찾았는데, 아름다운 모자이크를 보고는 황홀경에 빠졌죠. 성당 밖에선 작은 석고 좌판에 모자이크의 컬러를 조그맣게 옮겨놓아 해설해놓았더군요. 그걸 보는 순간 패션의 컬러 스와치북이 떠올랐습니다. 스와치북은 표준이 되는 색을 지정해놓은 견본책을 말합니다. 라벤나에 있는 성당에서 1500년 전의 스와치북을 찾았던 셈입니다. 수천 년간 쌓아온 미적 감각을 이제 와 모방하겠다는 것 자체가 무모했죠. 사실이 그랬어요. 우리가 만든 컬러와 이탈리아의 컬러 사이에는 차이가 컸습니다. 이병철 회장이 “왜 우리는 못하느냐”고 질타했지만, 수천 년 DNA를 하루아침에 따라갈 수 없는 노릇이죠.반면 우리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50년 만에 이탈리아에 버금가는 경제대국이 됐어요. 기적이죠. 리더가 요사이 말하는 창조경영을 일찌감치 실천한 겁니다. 어떤 분야든 리더가 패러다임을 바꾸고 일하는 환경을 만들어주면 이전과 다른 창조가 일어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흙수저, 금수저가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손욱: 디자인, 특히 산업디자인이 우리 기업에 본격적으로 뿌리내리는 데도 공을 세우셨습니다. 사디가 대표적이죠.
원대연: 이건희 회장은 이미 1990년대 초에 “디자인이 21세기 경쟁력의 핵심”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삼성그룹은 1996년을 디자인 혁명의 해로 정해 1년간 디자인 붐업 운동을 벌였어요. 당시만 해도 학계나 언론은 디자인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이 회장이 한마디 하니 사회적 파급효과가 대단했죠. 오늘날 한국에서 디자인경영이 일반화된 계기입니다. 사디는 1995년 설립했어요. 소프트산업이 무한한 창조의 가능성을 열 수 있다는 판단이었죠. 물론 대학에도 디자인 관련 학과가 있었지만, 제대로 된 학교를 만들어보자는 의지가 충만했었습니다.
손욱: 사디가 디자인 사관학교로 명성을 얻었지만, 초창기에는 자리를 잡는 데 애를 먹었다고 알고 있어요.
원대연: 애초 계획은 디자인 전문대학 설립이었어요. 그런데 수도권에 더는 대학을 신설할 수 없다는 규제 탓에 3년제 디자인 학원을 만들게 된 거죠. 처음엔 자체 노하우가 많이 부족했던 터라 뉴욕의 디자인 명문인 파슨스스쿨과 커리큘럼 등에 관한 제휴를 맺어 시작했습니다.
손욱: 대학이라는 명패, 즉 학위가 중요한 사회에서 사디 같은 비제도권 사설 교육기관이 성공한 사례가 드문 것 같습니다.
원대연: 사실 대학 인가를 받지 못한 데 따른 애로가 많았습니다. 일단 교수진 확보부터 애를 먹었어요. 학생들은 학위를 원했기 때문에 학내 갈등이 심해지는 진통도 겪었습니다. 제가 사디에 직접 관여한 건 1997년부터예요. 제일모직 패션 부문에서 사디를 재정적으로 지원했기 때문에 간접적이나마 책임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교수들과 개별 면담을 했는데 학원이라는 정체성이 큰 문제더군요. 구성원들에게 ‘패러다임을 바꾸자’며 설득에 나섰습니다. 세계적 명문인 파슨스와 FIT(뉴욕패션기술대학교)도 모두 인스티튜드, 즉 연구소에서 출발했어요. 명문 학원이 대학으로 발전한 케이스죠. “우리나라에 디자인 관련 대학 학위가 300개가 있는데, 그중에 세계에서 인정받는 학위가 몇 개나 있느냐”고 물었죠. 제도적 틀 때문에 당장 학위 수여는 어렵지만, 기업의 지원으로 오히려 플렉서블한 커리큘럼이 가능하다고 강조했어요. 디자인은 폼과 권위로 하는 게 아니라 자유로운 움직임과 창조적 상상력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랬더니 모두 공감하더군요.
손욱: 프로덕트디자인과도 사디가 국내 최초로 개설했지요.
원대연: 당시 외국 디자인스쿨에는 프로덕트디자인과가 있었어요. 사디가 명색이 삼성전자 산하 교육기관인데 프로덕트디자인과 없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국내에 관련 전문가가 없다 보니 삼성전자 디자인 파트의 협조를 받아서 손수 학과를 만들었습니다. 삼성전자 고참 디자이너가 퇴역하고 교수진으로 합류한 거죠. 이론과 현장을 갖춘 데다 삼성전자 네트워크까지 풍성한 교수진이 갖춰지자 이미 대학을 졸업한 사람, 직장을 다니다 뒤늦게 디자인에 꿈을 가진 사람들이 신입생으로 몰려들기 시작했어요. 그때까지 골칫거리였던 학위 문제도 쏙 들어가더군요. 3년쯤 지나니 이들이 만들어낸 실용적 디자인 제품들이 레드닷, IF, 굿디자인 같은 세계적 디자인 콘테스트에서 상을 휩쓸기 시작했어요. 사디가 유명해지기 시작한 결정적 계기였죠.실력 있고 성과를 내니 사디 출신들을 기업에서도 눈여겨보기 시작했어요. 세상이 우리를 인정하는데 대학이 아니면 어떻고 3년제면 어떠냐는 자부심이 충만했죠. 학장 재임 시절 2010년대 국내 최고 명문, 2025년 세계 최고 명문디자인학교라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2009년 학장에서 물러나며 패션협회장을 맡았는데, 최근에는 당시 세웠던 교육목표가 희미해진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손욱: 사디 이야기를 들으니 명확한 목표 정립, 또 이를 뚝심 있게 실천하는 리더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것 같습니다. 이건희 회장이 디자인을 부르짖은 건 1988년 회장 취임 직후부터였어요. 이후 1993년 신경영 선언 때 ‘후쿠다 보고서’는 삼성 디자인 혁명의 도화선이 됐죠. 후쿠다 다미오는 일본의 유명한 디자인 교수로 삼성 고문으로 일했어요. 기업의 큰 전략과 정체성에서 상품 전략이 나오고, 결국 기업과 제품을 상징하는 하나의 디자인이 경쟁력의 원천이 된다는 게 후쿠다의 조언이었습니다. 후쿠다는 “삼성은 상품사업부, 제조사업부 중심의 회사”라며 “디자이너가 좋은 디자인을 내놓으면 제조부장이 맘대로 고치고, 다시 사업부장마다 다른 선택을 한다”고 지적했어요. 디자인을 통한 삼성만의 아이덴티티가 없다면 가치를 발휘할 수 없고, 나아가 일류가 될 수 없다는 보고서 내용에 이 회장도 충격을 받았죠. 신경영을 시작하면서 디자인연구소를 이탈리아와 일본, 미국에 세우게 된 배경입니다. 사디 설립도 이런 노력의 일환이었죠. 오늘날 삼성전자 제품은 디자인으로도 세계 명품 반열에 올랐습니다. 우리도 유럽처럼 디자인과 패션 왕국이 되려면 리더의 비전과 철학이 있어야 해요. 우리 패션산업의 한 획을 그은 ‘빈폴’ 신화 역시 원대연 리더십이 바탕이 됐죠.
세계 일류 향한 빈폴 신화
▎손욱 회장은 확고부동한 경영철학의 부재가 아쉽다며, 한국 사회와 기업이 단절의 역사를 걷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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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대연: 사실 빈폴은 너무 아쉬움이 큰 브랜드입니다. 1999년 제일모직 대표이사 취임 후 2009년 물러날 때까지 10년간 모든 열정을 쏟아부은 브랜드예요. 당시 제일모직은 양적경영에 치우친 나머지 ‘재고를 어떻게 털어낼 건가’로 매일 회의하는 수준이었어요. 우수하다는 삼성 인재들이 모여 기껏 고민한다는 게 ‘얼마나 싸게 팔까’라니요. 제일모직이 일류 패션기업이 되려면 반드시 세계가 인정하는 명품 브랜드를 만들어야 한다고 결론 내렸어요. 우선 한국 시장에서라도 탄탄하게 인정받는 브랜드라면, 외국 명품이 들어와도 침해받지 않을 거라 생각했죠. 그다음 목표가 글로벌 경영이었습니다. 바로 중국이죠. 당시 이미 13억 내수를 확보한 중국은 제2의 거대한 내수시장이었어요. 10년 안에 한국·중국을 대표하는 톱 브랜드 3개를 만든다는 목표를 세웠는데, 그중 하나가 빈폴이었습니다.
손욱: 빈폴의 인기가 정말 대단했습니다. 성공 요인이 무엇입니까.
원대연: 브랜드는 소비자가 갖는 이미지에 좌우됩니다. 빈폴의 컬러와 소재, 디자인, 생산을 모두 해외 명품과 비교해 다시 세팅했어요. 2년 정도 지나니 시장 반응이 오더군요. 바로 그해 말 빈폴 노세일을 결정했습니다. 전 직원들이 시기상조라며 반대했어요. “노세일로 손해를 보면 내가 책임지겠다”며 밀어붙였습니다. 그 결과 첫해 생산량 대비 판매율 78%를 달성했어요. 애초 책정한 정가로 생산한 제품의 78%를 팔았다는 뜻입니다. 2004년까지 그 비중이 85%에 달했죠. 기존 브랜드는 65%만 돼도 잘 팔았다고 하던 시절이에요. 그렇게 빈폴 매출이 10년간 3500억원까지 성장했습니다. 패션은 굉장한 고부가가치 산업이에요. 전자가 따라올 수 없죠. 품질 개선이 이뤄지자 매년 폭발적인 성장을 이어갔습니다.
손욱: 요즘은 빈폴의 명성이 예전만 못한 것 같습니다. 아쉽다는 말씀이 와닿습니다.
원대연: 요즘 말로 하면 지속가능한 성장이 막힌 거죠. 우리는 기업과 정부를 가리지 않고 CEO가 바뀌면 전임자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허물어뜨리는 악습이 있어요. 빈폴도 그랬습니다. 3000억원을 벌어 100억원을 투자하지 못하고 결국 노세일 전략을 버렸죠. 단기이익 창출에 급급해 그간 쌓아온 브랜드 파워를 놓치고 만 겁니다. 삼성이 못 하면 누가 할 수 있었겠습니까? 박세리를 보며 꿈을 키운 이들이 박세리 키즈 군단이 됐듯이, 삼성의 빈폴이 명품 반열에 올랐다면 비슷한 브랜드들이 계속 이어졌을 겁니다. 그렇게 됐다면 한국 패션이 세계화됐을 테죠.
손욱: ‘계승’이라는 경영철학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삼성뿐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가 단절의 역사를 걷고 있어요. 모노즈쿠리(장인정신)로 무장한 일본의 기술력도 선대의 것을 계승 발전했기에 이룰 수 있었습니다.
원대연: 결코 변하지 않을 경영철학에 대한 계승이 부족하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다시 빈폴 예를 들어볼까요? 10년간 노세일 정책을 고수하니 여기저기서 세일을 하라는 부탁과 압력이 들어왔어요. 학생들 사이에선 빈폴 로고의 자전거 휠이 18개여야 진짜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돌았죠. 시장에선 이미 고급 브랜드 반열에 올랐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제가 CEO에서 물러난 후 어떻게 변했을까요? 퇴임 직후 불과 3~4일 만에 빈폴 세일 소식을 들었습니다. 한 시즌, 두 시즌 세일하면 인기도 늘고 매출도 늡니다. 하지만 그 시기가 지나면 소비자가 느끼는 희소성이 떨어져요. 온갖 아울렛에 입점하다 보니 정상판매가가 먹히지 않고, 결국 이익도 확 줄게 됩니다. 세계적인 브랜드는커녕 빈폴이라는 브랜드 아이덴티티마저 사라지고 마는 거죠. 지금 우리 패션업계에는 브랜드 철학을 가진 경영자가 없어요. 당장의 매출이 아닌 먼 미래를 보며 세계적인 디자인을 만들겠다는 철학을 가져야 합니다.
손욱: 말씀을 들으니 패션과 디자인이라는 업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이 급선무일 것 같습니다. 특히 전문경영인이 기업의 경영철학을 바탕으로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토양이 마련돼야 해요. 이들이 기업가정신으로 끊임없이 역량을 발휘하게 만들지 않으면 한국의 미래가 어두울 수밖에 없습니다.
원대연: 디자인이든 패션이든 마찬가지입니다. 기업인들이 마음껏 일할 토양을 만들어줘야 해요. 우선 디자이너들이 창의력을 발휘하도록 회사가 나서 자율성을 보장해야 합니다. 디자인을 획일적으로 관리하려 하면 오래 버티지 못해요. 그게 디자인이라는 업의 특성입니다. 사디 커뮤니티 디자인과에서 톱을 한 친구를 데려다 갤럭시 브랜드의 심볼마크를 바꾸는 작업에 참여킨 적이 있어요. 꽤 괜찮은 성과가 나더군요. 그런데 제가 그만두고 나니 그 친구 책상 사이즈부터 줄여버렸다고 해요. 결국 못 버티고 떠나버렸죠.요즘 ‘타다’의 검찰 기소가 화제인데, 창조적 인력을 키우려면 관료사회도 완전히 바뀌어야 합니다. 패션협회 해외 전시나 국내 행사를 정부가 지원하면, 돈 조금 쥐여주면서 모든 사안을 간섭하고 통제하려 나섭니다. 우리 목적은 오른쪽인데 정부는 전시행정에만 몰두하니 결과는 왼쪽에 가 있는 경우가 허다해요. 정부 지원은 결과와 목표를 거두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결과를 못 내면 지원을 끊으면 되는 거예요. 관료가 기안하고 답을 다 내놓은 후에 예산을 지원하면 10년이 지나도 제대로 된 성과를 내기 어렵습니다. 공무원은 자기들끼리 ‘성과가 있다’고 보고하면 끝이에요. 완전한 세금 낭비죠.
손욱: 관료주의가 강하게 남은 또 다른 곳이 바로 교육기관입니다. 사디 학장으로 일하셨으니 우리 교육 현실에 대한 견해도 궁금합니다.
원대연: 대학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육부가 자금 지원으로 대학의 목을 잡고 있어요. 정부가 원하는 연구에만 매달리게 된 배경이죠. 대학 자체도 변화를 기대하기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시장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 채, 100년 된 낡은 공장에서 구식 장비로 제품을 찍어내고 있는 게 오늘날 우리 대학의 현실이에요. 대학과 관료사회가 변할까요? 쉽지 않습니다. 지성인 단체가 또 얼마나 힘이 셉니까. 총장도 선거로 뽑아 4년만 하면 끝이에요. 미국은 학장이나 총장이 학교 발전을 이뤄내면 10년, 20년도 일합니다. 총장은 프로페서가 아니라 CEO예요. 경영 능력을 갖춘 교수 중에서 엄선해서 임명해야 합니다. 기획처장, 학생처장도 마찬가지고요. 사디 학장을 계속했다면 대학 사회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됐을 텐데 안타까울 뿐이죠. ‘사디가 대한민국 최고가 되면 모든 대학이 우리를 따라올 것’이란 꿈을 가졌는데, 지금으로선 허탈한 꿈이 돼버렸어요.
※ 손욱 전 회장은… 40여 년간 삼성그룹에서 근무한 정통 ‘삼성맨’이자 국내 최고의 기술경영자(CTO)로서 평생을 혁신에 전념해왔다.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을 최측근에서 보좌했고, 삼성그룹의 프로세스 혁신과 정보 시스템 구축도 그의 작품이다. 삼성인재개발원장, 삼성종합기술원장 이후 농심에서 현역 생활을 마친 손 전 회장은 현재 한국형리더십연구회 회장, 감사나눔운동 전파 등 사회문화 운동으로 또 다른 혁신을 전파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장진원 기자 jang.jinwon@joongang.co.kr·사진 전민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