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방황하는 손자를 위한 기다림김정길(가명)씨는 3살짜리 손자를 15년째 키우고 있다. 손자는 벌써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부부간 불화로 며느리는 손자가 3살 때 집을 나갔고, 아들은 사업한다며 수개월씩 객지 생활에 나선다. 김씨 부부도 상황이 썩 좋지 않다. 최근 부인이 치매 판정을 받은 것. 그래도 손자 걱정이 앞서 십수 년간 손자 명의로 2000만원을 저축해왔다.하지만 손자도 요새 여자친구를 사귀고 나더니 달라졌다. 집을 나가기 일쑤고, 이젠 아예 나가서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다 가끔 와선 돈을 달라고 한다. 걱정된다. 모은 돈을 좀 더 값진 일에 썼으면 하는 게 할아버지의 마음이다.이런 상황에서 김씨가 우리를 찾았다. 살펴보니 김씨는 지금까지 손자의 후견인이지만, 손자가 성년이 되면 법적으로 간섭할 권한이 사라진다. 일단 사회복지사와 후견법인의 조언을 받았다. 아직 성년이 아닌 손자가 예금을 날릴까 싶어 관리할 방법을 찾아봤다. 손자가 스스로 돈 관리를 할 수 있는 나이가 될 때까지 신탁하는 법이 최선이었다. 손자가 27살 이후 돈을 찾아갈 수 있도록 신탁계약을 자문해줬고, 법원의 신탁관리 허가를 받았다.
2. 후견인이 될 수 없는 외할아버지박현철(가명)씨의 막내딸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직장을 다니며 두 아이를 건사하던 딸이지만, 남편과 이혼한 후 얻은 마음의 병은 암으로 이어졌고, 발병한 지 1년 만에 세상을 등졌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외손주는 고스란히 외할아버지인 박씨가 맡게 됐다.하지만 법적인 문제가 생겼다. 아이들의 양육권을 말끔하게 정리하지 못했다. 당연히 양육권이 온전히 딸에게 있는 줄 알았다. 친권은 이혼한 사위한테도 있었고, 딸이 세상을 떠나자 사위는 친권자로서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딸 명의로 돼 있던 아파트와 예금이 손자 몫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사위가 임의대로 처리할까봐 머리가 복잡해졌다.우리는 일단 법원에 후견인 지정 신청부터 할 것을 권했다. 딸이 이혼하고 외가에서 양육해온 사실과 지금 상태로 양육하는 게 재혼하려는 부친 집에서 자라는 것보다 낫다는 의견을 주장하도록 도왔다. 그리고 딸이 남긴 재산은 손자들을 위해 신탁돼야 한다고 봤다.법원은 일단 신탁계약은 승인해줬다. 딸 사망 이후 자녀들의 복리를 위한 일은 여동생이 임무 대행자를 자처하고 나선 덕분이다. 오랜 기간 친권과 후견권 간 다툼이 이어져 만신창이가 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다행히도 금방 마무리됐다. 손주에게 남겨진 재산은 공정하게 관리되고, 목적에 맞게 지급될 수 있도록 계획을 설계해줬다.
3. 사망한 아들, 무능한 며느리황병수(가명)씨 얘기다. 새벽 근무가 잦았던 아들, 곤히 잠든 어느 날 무심하게 세상을 떠났다. 수차례 거듭된 사업 실패를 만회하려 2~3가지 일을 병행했던 게 몸에 무리가 됐다. 사업 실패 직후 아들이 며느리와도 이혼했기에 두 손자 양육은 할아버지 몫이 됐다.장례식 이후에도 며느리와 연락이 닿지 않았다. 황씨도 아르바이트를 여러 개 전전하다 보니 더 멀어져만 갔다. 그래도 아들이 평소 착실히 불입한 보험료 덕분에 어느 정도 보험금이 나왔다. 황씨는 아들 앞으로 나온 보상금과 보험금이 아이들을 위해 제대로 쓰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혼하고 자식을 등진 며느리도 믿을 수 없었다.우리를 찾은 황씨에게 며느리 대신 후견인 신청부터 할 것을 권했다. 후견인으로서 그 보험금을 신탁하겠다는 법원의 허가도 받았다. 두 손자에게 일정한 생활비를 지급하고, 성인이 되면 그 돈을 찾아갈 수 있게 조치했다.위 사례들은 모두 경제적 어려움에 부닥칠 가능성이 높은 미성년자를 위해서 신탁이 어떻게 보호막이 돼줄 수 있는지 보여준다. 자금 관리에 앞서 가족 간 갈등을 사전에 차단하고, 온전히 미성년자의 몫을 지켜낼 수 있는 역할, 신탁제도는 이미 맹활약 중이다.- 배정식 KEB하나은행 리빙트러스트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