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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모가 들려주는 예술가의 안목과 통찰(21) 공부하는 작가, 양혜규 

블라인드·빨래 건조대·방울이 가슴속을 파고드는 이유 

사진 김현동 기자,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장을 둘러보고 인터뷰를 시작하려는데, 미술관 담당자가 책 한 권을 건넸다. 무려 612쪽에 달하는, 목침만 한 책이었다. 『양혜규에 관한 글 모음, 2001~2020 공기와 물』이다. 국제적인 전시기획자와 미술평론가들이 지난 20년간 작가에 관해 쓴 작가론·대담·기사 중에서 36편을 골라 번역했다. 글 중엔 심지어 ‘양혜규 사전’도 있다. 현존 작가의 작품 세계를 짚는 글이 전시 중에, 도록이 아닌 ‘책’으로 나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설치미술가 양혜규(49)의 작품 세계가 얼마나 깊고 넓은지, 그래서 국제 미술계에서 얼마나 회자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국립현대미술관(MMCA)이 주최하고 현대자동차가 후원하는 ‘MMCA 현대차 시리즈 2020: 양혜규-O& HO’(9월 28일~2021년 2월 28일)는 그런 작가의 다층적, 다면적 예술관에 풍덩 빠져 볼 수 있는 자리다.

▎자신의 시그니처 기물인 블라인드 너머로 양혜규 작가가 서 있다. 그는 무엇을 응시하고 있을까.
“양혜규는 제목을 잘 짓는다. 제목을 보면 시적이거나 코믹하기도 하며 멜랑콜리하기도 하고 심지어 삐딱하기도 하다”는 홍콩 엠플러스 미술관 부관장이자 수석 큐레이터인 정도련의 말처럼, 그의 전시 제목은 오묘하다.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말고도 지금 전 세계에서 시작했거나 시작하는 대규모 개인전이 무려 4개에 이르는데, 이 전시들의 제목 역시 마찬가지다.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는 ‘손잡이들(Handles·11월 15일까지)’, 캐나다 토론토 온타리오 미술관(AGO)에서는 ‘창발(創發·Emergence·10월 1일~2021년 1월 31일)’, 필리핀 마닐라 현대미술디자인박물관(MCAD)에서는 ‘우려의 원추(The Corn of Concern·10월 15일~2021년 2월 28일)’, 영국 테이트 세인트 아이브스에서는 ‘이상한 끌개(Strange Attractor·10월 24일~2021년 5월 3일)’다.

“‘창발’은 생물학에서 온 용어입니다. 어떤 특성이 나타나는 단위의 순간이나 국면을 말하죠. ‘우려의 원추’는 기상학에서 쓰이는 용어인데, 기상재해를 예측하는 모델을 뜻해요. ‘이상한 끌개’ 역시 과학 용어인데, ‘프랙털 구조’와 연관이 있습니다. 전시는 모두 3년 전부터 기획한 것들인데, 최근의 코로나19 시대를 마치 예견이라도 한 듯한 요소들이 들어 있어요. 우리의 상대가 정확히 무엇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는 것, 그다음엔 무엇이 올지 모른다는 것, 그런 불확실성의 시대를 우리가 살게 됐다는 것이죠.”

과학은 물론 소설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죽음에 이르는 병’에 천착하는 등 치열하게 ‘공부하는 작가’를 따라잡기 위해 그토록 두꺼운 책이 나왔나 보다. 그러나 평론은 관람객의 몫이 아니다. 그런 작가의 노력과 내공과 감각이 배어 있는 작품을 보고 그저 즐기면 될 뿐.

서울대 미대 조소과를 졸업한 작가는 1994년 독일로 이주해 프랑크푸르트 국립미술학교 슈테델슐레(Städelschule)에서 마이스터슐러 학위를 받고 현재 모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09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대표 작가였고, 아시아 여성작가 최초로 독일의 볼프강 한 미술상(Wolfgang Hahn Prize)을 2018년 수상했다. 말 그대로 전 세계 비엔날레와 미술관을 ‘누비며’ 자신의 작품을 선보이는 중이다.


▎'소리 나는 동아줄’과 ‘중간 유형’ 시리즈 / 사진:김현동 기자,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작가가 설치 작업을 위해 활용하는 ‘뼈대’는 빨래 건조대·블라인드·전구·(인조) 짚풀·방울 등이다. 그리 특이할 것도 없는 이러한 ‘일상의 사물’들이 작가의 손을 거쳐 모양과 형태와 색깔이 다양하게 바뀌고, 여기에 빛·소리·냄새·바람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자연 현상이 어우러져 관람객의 마음 깊은 곳을 파고든다. 특정 지역이나 특정 문화를 넘어 인류 보편의 감성을 건드린다는 것이 양 작가의 강점이다.

빨래 건조대는 그의 한국 첫 개인전 ‘사동 30번지’(2006)에서 처음 등장했는데, 작가는 이렇게 회상한다.

“그 집이 살아 있다는 상징적 표시, 하나의 신호로서 빨래 건조대를 처음 사용했다. 바깥에다 빨래를 널어놓은 이웃을 둘러보다 보면, 빨래가 마치 집집의 상태를 표시하는 깃발 같아 보였다. 선박에 내건 깃발처럼.”

작가는 자신의 작품 세계를 10가지 범주로 구분한 적이 있다. ‘콜라주된 구성(Collaged Composition)’, ‘가사성(Domesticity)’, ‘환경(Environmental)’, ‘전기와 조명(Electricity and Illumination)’, ‘접기와 비접기(Folding and Unfolding)’, ‘비스듬함(Obliqueness)’, ‘소리 나는 운동(Sonic Movement)’, ‘직조(Weaving)’, ‘목소리와 이미지(Voice andImagery)’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타’다. 이 단어들을 손에 쥐고 전시장을 돌다 보면 작가의 예술 세계가 어렴풋이 몸으로 전해져온다.


▎'소리 나는 가물 - 다림질 가위’ / 사진:김현동 기자,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핫 플레이스인 ‘서울박스’를 점거한 작품은 ‘침묵의 저장고-클릭된 속심’(2017)이다. 높이 17m에 이르는 두 겹의 블라인드 설치물인데, 외피 색깔은 검정이고 내피는 코발트블루다. 밖은 고정돼 있고 안은 돌아간다. 총 154개에 달하는 블라인드가 만들어낸 원통형 구조 속으로 들어가면 마치 우주선에 탑승한 듯, ‘미지와의 조우’를 기다리게 된다.

전래동화 『해와 달이 된 오누이』에 나올 법한 굵은 동아줄을 연상케 하는, 방울로 만들어진 ‘소리 나는 동아줄’(2020)이나 인조 짚을 활용해 북청사자놀음의 한 장면처럼 보이게 한 ‘중간 유형-서리 맞은 다산의 오발 이무기’(2020)에서는 우리의 토속 문화가 느껴진다. 다림질 가위·헤어 드라이기·솥·컴퓨터 마우스를 인격화한 ‘소리 나는 가물(家物)’(2020)은 놋쇠 도금한 작은 방울들을 모아 사람 키만 하게 만들었는데, 도슨트가 작품에 달린 손잡이를 붙들고 밀고 당길 때마다 “차르르르” 하는 방울 소리가 귀를 간지럽힌다.


▎'소리 나는 접이식 건조대 - 마장 마술 #7’ / 사진:김현동 기자,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이렇게 수많은 방울 조각으로 이뤄진 작품은 어쩔 수 없이 굿이나 무속신앙을 떠올리게 하는데, 기독교 국가가 대부분인 유럽에서는 어떤 반응을 얻었을까. 작가는 뜻밖의 말을 들려주었다.


▎'소리 나는 가물 - 조개 집게’ / 사진:김현동 기자,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기독교 전통 안에서는 징글벨 정도지요. 하지만 유럽의 변방이나 시골, 섬 같은 곳에는 기독교 이전의 문화, 소위 이교도나 비주류 문화가 여전히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는데 이런 곳에서는 종이나 방울이 엄청나게 많아서 깜짝 놀랐어요. 방울에 얽힌 자신의 추억을 제게 들려주고 싶어 하는 유럽인 노인도 꽤 많았고. 자연스럽게 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공부하게 되지요.”

다시 공부 얘기다. 온타리오 미술관에서 열리는 ‘창발’전에 내놓을 신작 ‘직조된 흐름-평행선들의 합류’(2020)를 위해 작가는 1613년 뉴욕 업스테이트에 해당하는 지역에 살던 5개 원주민 부족연맹이 네덜란드 침략자와 불간섭 조약을 체결할 때 사용한 흰색과 보라색의 조가비 구슬(왐펌)에 주목했다. 현대인에게는 오브제일 뿐이지만 원주민에게는 문서(조약)였다는 사실을 끄집어내 작품에 녹인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내 서울박스에 자리한 대형 설치작 ‘침묵의 저장고 - 클릭된 속심’ 안에 선 양혜규 작가 / 사진:김현동 기자
영국 콘월에 있는 테이트 세인트 아이브스에서 열리는 ‘이상한 끌개’를 준비하면서는 지역 관련 작가 세 명을 스터디했다. 가장 유명한 지역 작가인 바버라 헵워스, 러시아 구축주의자 나움 가보, 타이완 출신인 리 유안 치아가 서로 어떻게 얽혀 있는지 찾아내 ‘소리 나는 중간 유형-미분 방정식 셋’이라는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이 같은 치밀한 연구는 작가를 단순한 예술가가 아닌 인류학자처럼 보이게 한다. 이에 대해 작가는 “이런 현상조차 이 시대 미술이 갖는 특성”이라며 “저도 예외가 아닌 상태”라고 말했다.

워낙 다양하게 변주되기에 작품이 어렵다는 지적에는 “질문을 던지고 화두를 던질 뿐, 결론을 내려주지 않는 게 제 역할”이라고 말한다.

“많은 작가가 성공과 동시에 실패합니다. 브레히트는 ‘실패를 잘하는 게 성공”이라고 했어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록클라이밍 할 때와 비슷합니다. 손에 뭔가 잡히면 계속 올라가는 거고, 다음에 잡을 게 없으면 못 하는 거고.”

※ 정형모는… 정형모 중앙 컬처앤라이프스타일랩 실장은 중앙일보 문화부장을 지내고 중앙SUNDAY에서 문화에디터로서 고품격 문화스타일잡지 S매거진을 10년간 만들었다. 새로운 것, 멋있는 것, 맛있는 것에 두루 관심이 많다. 고려대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했고, 한국과 러시아의 민관학 교류 채널인 ‘한러대화’에서 언론사회분과 간사를 맡고 있다. 저서로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과 함께 만든 『이어령의 지의 최전선』이 있다.

202011호 (2020.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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