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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준 골프전문기자의 골프·비즈니스·피플 

삼성·CJ·신세계의 골프 경쟁 

1987년 10월 말. 70대 후반의 노신사가 안양컨트리클럽에서 부축을 받으며 마지막 라운드를 했다. 3번 홀을 마쳤을 때 땅거미가 내렸다. 골프장에서는 카트와 오토바이, 자동차 등의 헤드라이트를 켜 페어웨이를 밝혀줬다. 노 신사는 6개 홀을 돌고 라운드를 마쳤다. 그는 약 20일 후 세상을 떠났다. 고 이병철 삼성 회장 얘기다.

▎1968년 개장한 안양컨트리클럽. 설립자인 이병철 회장을 닮아 코스 관리가 완벽하고 조경이 최고다. 나무 값만 수천억원에 이른다. / 사진:안양 CC
위암 수술을 받은 후 이 회장은 골프를 못 했지만 매주 수요일 골프장에 나와 차를 마셨다. 이 회장은 골프장 잔디가 누렇게 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O. 헨리의 소설 『마지막 잎새』처럼 맏딸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이 아버지를 위해 그린에 초록 물감을 칠하기도 했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이 회장의 안양컨트리클럽에 대한 사랑은 대단했다. 최고 골프장을 만들기 위해 일본의 유명 골프장을 둘러봤고 미국, 유럽의 명문 골프장에 대한 조사도 했다. 이 회장은 꽃과 나무에 조예가 깊었고 풀 한 포기에도 정성을 쏟았다. 현재 한국 골프장에 식재된 ‘안양중지’는 이 회장이 만든 잔디연구소에서 나온 것이다.

이 회장이 여행 중에 멋진 나무를 보면 비싼 값을 치러 골프장에 옮겨 심었다고 한다. 현재 안양컨트리클럽의 나무 가격을 산정하면 수천억원일 거라는 평가다. 고 이동찬 코오롱 명예 회장이 우정 힐스 골프장을 만들 때 “안양 골프장 같은 나무를 구할 수 없다”며 안타까워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이 회장은 일주일에 세 번 라운드를 했다 수, 금, 일요일이었다. 홀인원을 세 번 했는데 그중 두 번이 안양컨트리클럽에서였다. 1979년 5월 13일 13번 홀(184야드)에서 5번 우드로 했고, 1981년 11월 22일 17번 홀(148야드)에서 6번 아이언으로 했다고 기록돼 있다.

1968년 개장한 안양컨트리클럽은 오랫동안 한국 최고의 골프장으로 군림했다. 아직도 가장 조경이 아름답고 코스 관리가 완벽한 명문 클럽이다.

삼성가의 인물들은 어릴 때부터 승마와 골프 등을 배웠다. 특히 골프는 국내 유수의 유명 코치에게서 배워 기본기가 좋다고 알려졌다. 호암의 딸들은 초창기 한국 여자 골프의 주요 인물이다. 한국 최초의 여자 골프 대회는 1976년 열린 부녀 아마선수권이었다. 당시 여자 프로 선수는 없었다. 삼성 집안의 이인희, 막내 이명희 자매와 김우중 전 대우 회장의 부인 정희자씨, 국화정씨, 조동순씨 등이 초창기 부녀 아마선수권을 주름잡았다. 레이디 티를 쓰면서 우승 스코어가 80대 초중반 정도였다. 이인희씨는 2회(1978년) 3위, 4회(1980년) 2위, 5회(1981년) 3위에 올랐다.

지난해 작고한 이인희 고문은 원주 오크밸리에 아시아 최고의 코스를 만들려 했다. 둘째 아들 조동만 전 한솔그룹 부회장에게 KLPGA 회장을 맡기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 한솔은 오크밸리 골프장을 매각하는 등 골프에서 발을 뺐다.


▎이병철 회장은 케네스 스미스 클럽을 썼다.
막내딸 이명희 신세계 그룹 회장은 ‘리틀 이병철’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을 만큼 아버지를 닮았고, 아버지처럼 골프에 대한 열정이 매우 컸다. 안양 골프장을 만들 때 호암은 막내딸을 데리고 다녔다. 신세계는 자유CC와 최고 프라이빗 클럽인 트리니티를 만들었다. 이명희 회장은 아버지가 만든 안양 골프장에 버금가는 골프장을 만들겠다는 의지가 강했다고 한다.

호암의 손주인 이재용 삼성 부회장은 스크래치 수준의, 집안에서 가장 뛰어난 골퍼로 알려졌다. R&A(영국왕립골프협회) 멤버이기도 하다. 삼성은 가평, 안성, 동래 베네스트 골프장과 자회사인 레이크사이드 등으로 골프 사업을 하고 있다. 그러나 선대부터 내려온 사업을 관리하는 정도다. 대표 클럽인 안양컨트리클럽의 순위에도 크게 신경 쓰지는 않는다.

장손주인 이재현 CJ 회장의 골프에 대한 열정은 매우 크다. 제주 나인브릿지 골프장은 아시아 최고로 평가받는다. 이 회장은 미국 LA의 명문 클럽인 벨어의 회원이었고 골프에 대한 안목이 매우 높다. 제주 나인브릿지는 로널드 프림이 설계하다가 이후 그의 수석 디자이너인 데이비드 데일이 이어받았다. 당시 프림과 데일은 특급 설계가는 아니었다. 세계 최고를 목표로 한 나인브릿지라면 잭 니클라우스나 로버트 트렌트 존스, 탐 파지오를 쓰는 게 걸맞다. 왜 그랬을까.

최고 설계가들은 자존심이 세다. 골프장 오너 등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지 않는다. 제주 나인브릿지엔 이재현 회장의 의견이 많이 들어갔다. 시그니처 홀인 18번 홀의 아일랜드 그린은 이 회장의 아이디어다. 건천을 넘어 샷을 해야 하는 4, 5번 홀, 한 그린을 두 홀이 함께 쓰는 등의 아이디어도 이 회장의 것이라고 한다.

제주 나인브릿지에는 자연 훼손을 좋아하지 않는 이 회장의 철학이 들어갔다. 원시림 등이 그대로 살아 있다. 코스 내의 나무도 공사할 때는 외부에 옮겨 심었다가 그대로 복구했다고 한다. 반면 산을 깎아서 만든 경기도 여주의 해슬리 나인브릿지는 자연 훼손 면에서 보면 완벽하지는 않다. CJ에서는 코스는 제주가, 클럽 문화는 해슬리가 뛰어나다고 본다.


▎이병철 회장은 막내인 이명희 회장을 데리고 라운드하는 것을 즐겼다.
이 회장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도 골프장을 챙겼다. 2017년 나인브릿지에서 처음으로 PGA 투어 대회인 더 CJ컵이 열렸을 때는 퇴원 직후인데 TV 부스에 나가 코스와 대회를 홍보하고 시상식 등에 참가했다.

제주 나인브릿지는 페어웨이까지 모두 벤트그래스다. 현재 한국 골프 코스에 벤트그래스 페어웨이가 더러 있지만 당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페어웨이 옆에 있는 콘도도 제주 나인브릿지가 한국에서 처음이었다. 법적으로 당시 불가능했다. CJ는 미국에 공무원을 보내 견학하게 해 설득하면서 이를 성사시켰다고 전해진다. 프로숍에도 로로피오나 등 최고급 명품을 갖다 놨다. 직원들이 고급 브랜드를 잘 몰랐는데 이재현 회장은 옷을 사주거나 해외 골프장을 견학하게 하면서 가르쳤다.

CJ는 골프장 순위에 민감하다. 클럽 개장 초기인 2004년 나인브릿지는 미국 골프매거진에 의해 퍼블릭코스를 제외한 ‘세계 100대 회원제 골프코스’로 선정됐다는 보도자료를 냈다. 일본에 이어 아시아에서 2번째로 100대 골프장에 들어갔다고도 했다. 그러나 골프매거진은 이전까지 회원제 골프장만을 대상으로 100대 골프장을 선정하지 않았다. 이후에도 없었다.

2004년엔 골프매거진이 프라이빗 100대 클럽을 발표하긴 했다. 그러나 기사가 아니라 광고 형식으로 냈다. 나인브릿지는 당시 한국 최초 100대 골프장 진입을 위해 노력하던 시기였다. 광고 형식으로 나온 100대 골프장이었다.

이명희 신세계 회장, 이재현 CJ 회장이 가장 열정적


▎해슬리 나인브릿지 9번 홀. 2021년 PGA 투어 더 CJ컵이 열린다. / 사진:나인브릿지,
나인브릿지는 LPGA 투어 대회를 열었고 2002년부터 2015년까지 WCC(월드 클럽 챔피언십)를 개최했다. 명문 클럽 회원들이 참가하는 대회로 자연스럽게 많은 코스 평가위원이 한국에 왔다. 2017년부터는 PGA 투어 대회를 열면서 명문 클럽이라는 위상에 쐐기를 박았다. 이재현 회장은 안양을 제치고 나인브릿지가 국내 1위에 올랐을 때 매우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CJ의 골프장 랭킹에 대한 관심은 삼성가 장자의 자부심 발현이라는 해석이 있다. 이재현 회장은 LPGA, WGC, PGA 투어 개최 등으로 한국의 골프 문화를 업그레이드했다. 또 선수들이 해외로 나갈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줬다. 해슬리는 여러 차례 리노베이션을 거쳐 PGA 투어 대회를 열 수준으로 업그레이드했다. 제주 나인브릿지 회원은 500명 정도다. PGA 투어 대회를 연 이후 대기자가 200명 가까이 된다.

CJ가 경기도 여주에 해슬리 클럽을 만들 때 신세계에서도 인근 이천에 트리니티 골프장을 새로 지었다.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은 힘이 장사이고 엄청난 장타를 친다. 그러나 신세계 골프의 에너지는 이명희 회장이다. 날씨가 나쁘지 않으면 매일 골프를 한다고 알려졌다. 몇십 년째 레슨을 받는데 비디오로 녹화하거나 메모를 하는 등 아직도 열정적이다.

이명희 회장이 트리니티를 해슬리 나인브릿지보다 멋지게 만들라고 독려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삼성 가문 사람들은 다른 곳은 신경 쓰지 않지만 삼성 집안 내부의 경쟁에는 관심이 크다고 한다. CJ에서도 촉각을 곤두세웠다.

트리니티 클럽의 가장 큰 자랑은 클럽하우스다. 영원불멸의 피라미드를 모티브로 한 아르데코 스타일의 클럽하우스는 웅장함에서 한국 최고라 할 만하다. 미리 등록해야 골프장에 들어갈 수 있고 모든 차량은 발레 주차 서비스를 해준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직원들이 보스턴백을 라커까지 들어준다. 신세계백화점 멤버십 중 최고급 클래스가 트리니티다. 클럽하우스에선 신세계가 운영하는 조선호텔의 VIP 수준의 접객 서비스를 받는다.

사생활이 철저히 보장된다. 클럽하우스 내에서 동선이 거의 겹치지 않는데도, 직원들이 다른 사람과 마주치지 않도록 안내해준다. 폐쇄적인 회원관리도 특징이다. 회원과 동반하지 않으면 라운드를 할 수 없는 건 당연하고 비회원은 클럽 홈페이지도 볼 수 없다. 1년 소멸성 회비가 7000만원으로 알려졌다.


▎트리니티 클럽의 웅장한 클럽하우스는 한국에서 최고로 평가받는다.
연습장은 벤트그래스로 조성됐다. 비싼 프로V1 공이 쌓여 있다. 코스는 드라마틱하다. 획일적으로 벙커 서너 개를 배치하는 일반 골프장과 달리 트리니티의 어떤 홀에는 벙커가 8개 있고 어떤 홀에는 없다. 높은 봉우리에서 넓은 세상을 관망하면서 호쾌한 드라이브샷을 치는 홀도 있고 하늘 위에 떠 있는 듯한 그린을 공략하는 홀도 있다. 파 3인 15번 홀 아일랜드 그린에 가려면 호수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물 위를 걷는 느낌이 난다.

트리니티 클럽은 탐 파지오 주니어가 설계했다. 천재 설계가로 유명한 특급 디자이너 탐 파지오가 아니다. 탐 파지오는 비록 코스를 완공하지는 못했지만 삼성가인 한솔그룹과 골프장 설계 계약을 맺었다. 미국 외에 골프장 설계를 거의 하지 않는 그는 100억원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거액 계약에 조건이 있었다. 한국에서 한솔 골프장 이외에 다른 골프장 설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파지오 가문은 골프 집안이다. 가족들도 골프장 설계를 한다. 그의 형 짐 파지오는 한국의 사우스 스프링스를 설계했다. 짐 파지오의 아들이 탐 파지오 주니어다. 주니어는 작은아버지의 추천으로 트리니티 골프장을 설계하게 됐다. 주니어도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작은아버지 정도는 아니다.

오너가 설계 단계에서부터 관여하면서 많은 도움을 줬지만 골프장 부지가 넉넉하지 않다는 한계도 있었다. 일반 골프장에 비하면 널찍하지만, 최고 명문 골프장 기준으로 보면 약간 좁다. 옆에 붙어 있는 자유CC에서 홀을 징발하기도 했다. 그린과 다음 홀 티잉 그라운드가 가까워 소리가 들린다는 등의 불만이 나온다. 18번 홀은 너무나 어렵다.

트리니티의 회원권 분양은 해슬리와의 경쟁의식이 느껴진다. 해슬리가 회원권을 12억원에 분양했는데 트리니티는 15억원으로 책정했다. 해슬리가 회원수를 당시 기준으로는 파격적으로 적은 220명으로 했으며 트리니티는 200명으로 정했다. 해슬리가 20년 후 회원권 반환 조건이었는데 트리니티는 원한다면 요청 즉시 반환해주겠다고 했다. 해슬리보다 더 비싸고, 더 익스클루시브한 명문 클럽이 되겠다는 의지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트리니티는 나인브릿지와 달리 골프 미디어의 골프장 랭킹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기자나 평가위원을 초청하지도 않았고 평가 결과에도 반응이 없다. 트리니티의 한 회원은 “철저한 회원제라 회원만 보며, 주위의 평가는 신경 쓰지 않겠다는 생각”이라고 했다. 그러나 게임에서 절대 지지 않는 방법은 게임을 하지 않는 것이라는 전략을 쓰는 듯한 인상도 있다.

- 성호준 중앙일보 골프전문기자 sung.hojun@joongang.co.kr

202011호 (2020.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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