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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주현이 만난 아트 인플루언서(6) 피아니스트 임현정 

경쟁 시스템 아닌 ‘숭고한 계획’이 날 만들었죠 

- 유주현 중앙 컬처&라이프스타일랩 기자 yjjoo@joongang.co.kr·사진 신인섭 기자
클래식 전공자라면 대개 콩쿠르 입상을 꿈꾼다. 권위적인 국제 콩쿠르에서 입상해야 국내외에서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고, 유명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세계 주요 공연장에서 박수갈채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주요 콩쿠르 입상 경력 없이도 세계적으로 활동하면서, 국제 콩쿠르 심사에 참여하다 불공정 의혹을 제기하며 심사위원직을 내던지고 나온 사람도 있다. 피아니스트 임현정(34)이다.

▎스위스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피아니스트 임현정은 올해 국내에 머물면서 베토벤에 관한 책도 출간하고 유튜브로 팬들과 소통하고 있다. / 사진:봄아트프로젝트
‘세상에서 가장 빠른 왕벌’ 임현정은 클래식계 원조 ‘유튜브 스타’다. 2009년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쇼팽과 라흐마니노프 에튀드 전곡 연주회에서 앙코르 곡으로 연주한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왕벌의 비행’ 영상을 한국에 계신 엄마에게 보여주려고 유튜브에 올렸을 뿐인데, 그 엄청난 속도와 테크닉에 전 세계 네티즌의 감탄이 쏟아졌고, 콩쿠르 입상 못잖은 인지도를 얻은 것이다.

2010년 프랑스 파리에서 8일 연속으로 베토벤 소나타 전곡을 연주한 후에는 전통의 클래식 명가 EMI 클래식스의 러브콜까지 받았다. 2012년 스물다섯 나이에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집을 녹음했고, 한국인 연주자 최초로 빌보드·아이튠스 클래식 차트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열두 살에 혈혈단신 프랑스로 피아노 유학을 떠났던 용감한 소녀가 이룩한 쾌거였다.

스위스 뇌샤텔에 거주하며 유럽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지난 2월 4일 스위스 로잔 리사이틀을 마치고 귀국했다. 7개월 넘도록 한국에 머물고 있는 것은 20여 년 전 유학길에 오른 이래 처음이란다. “지난 2월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코로나19 사태가 터지더군요. 불행 중 다행으로 그나마 고국으로 왔을 때라 큰 혼란은 없었어요. 가족과 못다 한 이야기도 편안하게 나누면서 나름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베토벤 탄생 250주년이자 베토벤 소나타 전곡을 연주한 지 꼭 10년이 되는 올해는 자칭 ‘베토벤교 교주’인 임현정에게도 특별한 해다. 올 초에 베토벤의 삶과 음악에 관한 책 『당신에게 베토벤을 선물합니다』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롯데콘서트홀에서 베토벤 소나타로 꾸미려던 ‘클래식 레볼루션’을 비롯해 많은 공연을 취소해야 했다. “제 공연들이 많이 취소돼 안타깝지만 사실 더더욱 슬퍼하고 있을 분은 베토벤이 아닐까 싶어요. 그를 1년 동안 기념하며 철학과 생각을 더욱더 넓게 나눌 수 있는 기회였는데, 사실 그 부분이 너무 안타깝죠.”

자칭 ‘베토벤교 교주’인데, 어쩌다 그렇게 됐나요.

처음 베토벤 초상화를 보았을 때는 엄하고 부리부리한 눈빛이 꼭 강철 같고 무섭기만 했던 제 아버지가 떠올랐어요. 그런데 10대 시절 개인적으로 큰 사건이 있었죠. 갑자기 아버지가 큰 심장 수술을 받으신 거예요. 아버지는 굉장히 강한 존재였고, 절대 무너질 수 없는 굉장히 단단한 불멸의 무적이었는데, 그런 분이 갑자기 쓰러지셔서 병원에 실려 가신 거죠. 그 후 갑자기 큰 깨달음을 얻었어요. 멀리서 두려움으로 바라보았던 아버지도 아픔과 상처가 있고 그것들을 현재와 화해하고자 노력하는 그저 평범한 인간이었다는, 정말 충격적인 깨달음이었죠.

베토벤 또한 연약한 인간이었다는 걸 깨달은 건가요.

아버지에 대한 깨달음이 신기하게도 저의 예술과 삶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쳤어요. 그 후로 제가 작곡가들과 음악을 대하는 자세에 혁명과 같은 변화가 생겼으니까요. 특히 베토벤이 그저 성스럽기만 한 박물관 작품으로 다가오지 않게 된 거죠. 멀리서만 숭배할 것이 아니라 나의 몸과 영혼을 다 바쳐 하나가 되어 연주하리라, 용기를 갖게 됐어요. 그의 음악은 한 인간의 삶을 그대로 반영한 지극히 개인적이면서도 유니버설한 일기장이라는 것도 뼈져리게 느꼈고요. 그의 모든 것을 알고 싶고, 그의 의도와 하나가 되고, 이런 음악을 작곡했을 때 물결치던 그의 심장과 하나가 되고 싶었죠. 그의 세계에 스토커처럼 빠져들어 갔고 그에 관한 탐구, 음악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탐구하는 여정은 사실 지금도 끝나지 않고 지속되고 있어요.

베토벤에 관한 책까지 썼죠.

10년 전 베토벤 전곡 앨범을 녹음할 때부터 신격화된 베토벤을 극적인 인간으로 들려주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베토벤의 일기장에 담긴 인간적인 희로애락을 음표로 표현했던 건데, 이번엔 그걸 책으로 풀어낸 거죠. 열일곱 살에 아버지에게 소송을 걸었던 당돌한 청년이 우울증에 걸려 폐인이 되고, 자살 위기를 극복해 인간 승리에 이르기까지, 정말 극단적 인생을 산 사람이거든요. 그에 관한 책은 많지만, 그의 음악을 몸과 영혼으로 느끼는 피아니스트로서 쓴 책이니 좀 더 직설적으로 다가가지 않을까요.

베토벤은 극복과 승리의 대명사로 통하는데,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베토벤의 이상처럼 음악이 절망적인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요.

베토벤은 자기 자신을 이긴 인간으로서 승리의 대명사로 통하잖아요. 사실 남을 이기는 것보다 스스로를 이기는 것이 더 힘들다고 하죠. 베토벤은 자기 음악이 인간들로부터 지극히 육체적이고 속물적인 관심사에서 벗어나 영적 승화를 도와주는 도구라고 했는데, 음악이 혼자서 세상을 구한다기보다는 우리 모두가 함께 노력하고 나아가는 데 음악이 많은 위안을 주고 고달픔을 덜어줄 거라고 생각해요.

100년 이상 묵은 클래식 음악이 지금처럼 정신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200~300여 년 전 베토벤, 바흐, 헨델, 쇼팽 등 소리의 과학을 최상의 경지로 이끌었던 이들의 가슴 안에서 뛰었던 심장은 지금 우리 안에 뛰고 있는 심장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해요. 그들은 소리로 우주를, 자연을, 사랑을 표현했고, 그들의 음악은 인간의 삶을 그대로 반영한 마음의 고백이죠. 그 음악을 통해 나의 마음이 정화되고 성숙해지지 않나요. 피아노는 음악의 도구, 음악은 예술의 도구, 예술은 영혼의 수단이라 생각해요. 음악은 언어도 없이 소리, 즉 진동으로 우리의 가슴을 관통하기에 인간의 숭고함과 고귀함 또한 깊게 전달해준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코로나19 이후 클래식 공연 형태도 변화할 것이라는 예측이 있는데, 연주자들은 어떻게 진화를 모색하고 있나요.

무대 위에서 독보적으로, 때로는 약간 신격화되어 멀리 있는 것만 같은 ‘스타’에서 조금 더 인간적으로 청중에게 가깝게 다가가려는 노력을 하게 되지 않을까요. 그런 노력이 더욱 승화되면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는 예술인들이 될 수 있겠죠.

오랜 팬이 작곡해준 곡 스위스서 초연


▎ 사진:봄아트프로젝트
유튜브의 ‘가장 빠른 왕벌’로 떠올라 세계를 날던 그는 올해 다시 유튜브로 돌아갔다. 공연을 못 하는 대신 유튜브에서 연주를 들려주고, 베토벤에 관한 신간을 낭독하며 팬들과 소통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유튜브 생방송으로 저의 음악을 사랑해주시는 소중한 분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죠. 그동안 공연 후 사인회에서 팬분들과 따듯한 눈빛을 나누었다면, 유튜브 생방송으로는 그분들의 귀한 생각을 읽을 수 있고, 같이 토론하며 함께 성장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인 것 같아요.”

얼마 전 유튜브 라이브 방송에서 국내 팬들에게 처음 들려준 정현우 작곡가의 ‘새야새야’도 팬과의 소통으로 탄생했다는 재미난 사연이 있다. 그가 한국에서 연주를 처음 시작했던 2013년부터 연주회마다 찾아오던 꼬마가 장성해서 작곡가가 되었다는 것이다. “중학생 때부터 항상 제 연주회에 와서 사인을 받아가던 친구예요. 지금은 서울대에서 작곡을 전공하고 있는데, 어느 날 자기가 만들고 있는 곡이라며 ‘새야새야’를 들려주더군요. 저도 항상 ‘아리랑’ 등 민요를 편곡해서 앙코르 곡으로 연주하곤 했었는데, 민요의 테마를 살리면서도 독창적 컬러가 들어가 참 좋더군요. 내가 연주할 테니 완성해달라고 해서, 지난 2월에 로잔에서 초연을 했는데 반응이 정말 좋았어요. 한국적 색채가 확 드러나면서도 록, 재즈, 현대음악이 다 들리는 유니크한 곡이라고 다들 좋아하더군요.”

세 살에 피아노를 처음 만난 임현정은 열두 살에 홀로 유학을 떠났다. 한국 음악가들이 흔히 가는 독일이나 오스트리아도 아닌 프랑스에서 콤피엔느 콘서바토리와 루앙 콘서바토리를 거쳐 열여섯 나이에 파리고등국립음악원에 최연소로 입학했다. 왜 베를린도 빈도 아닌 파리였을까.

“세상에서 가장 역사가 깊고 라벨, 드뷔시, 생상스 등 전설적인 작곡가들이 학생으로서 공부했던 파리고등국립음악원에서 꼭 공부하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프랑스로 갔죠.”

어려서부터 유학 생활을 했는데 경제적으로 힘들진 않았나요.

다행히 제가 프랑스에서 공부한 모든 음악원은 국립이었어요. 콤피엔느 콘서바토리와 루앙 콘서바토리는 1년 등록금이 대략 30만원 정도였죠. 파리고등국립음악원에 입학하니 연 60만원 정도 들더군요. 워낙 소수만 뽑는 만큼 입학을 하면 그 정도만 지불하고 전액 장학금을 받는 셈이죠. 그에 대해서는 프랑스 교육 시스템에 정말 감사해요. 그런데 물가가 비싸서 파리 안에서 살지 못하고 변두리에 주차장이었던 집을 구해서 시의 방역 지원을 받으면서 졸업할 때까지 살아야 했죠.

콩쿠르 후광이 없는 걸로 유명한 연주자지만, 애초부터 콩쿠르를 외면한 건 아니었다. 열다섯에 참가했던 콩쿠르에서 악보를 채 외우지도 못한 참가자가 1위를 차지하는 모습에 큰 충격을 받고 출가를 결심하기도 했다. “그런 경험을 겪고 나니 파리고등 국립음악원에 합격했는데도 세상적인 성공 자체가 너무 부질없이 다가왔어요. 왜 껍데기에 집중해야 하나 싶고. 저보다 엄마가 더 좌절하셨는데, 제가 독일 사찰에 가서 수련하며 비구니가 되겠다고 하니 엄마가 좋아하시더군요. 집안에 스님이 나오면 3대가 행복해진다면서요.(웃음) 스님이 거절하셔서 학교로 돌아갔는데, 결국 나의 본질을 탐구하는 마음공부가 너무 좋았던 것 같아요. 지나고 보니 음악을 통해서도 충분히 마음공부가 되더군요. 예술은 영혼의 표현이니 나의 본질을 음악으로 표현할 수 있잖아요. 사실 피아노도 맨날 10시간씩 혼자 도 닦는 것과 마찬가 지니까요.(웃음)”


▎ 사진:봄아트프로젝트
그 후로 한 번도 콩쿠르에 안 나갔나요.

열아홉 살 때 정말 먹고살려고 프랑스 플람 콩쿠르에 나가 대상을 받긴 했어요. 이후 잘츠부르크 등에서 연주 기회가 열렸죠. 남들은 한창 더 큰 콩쿠르에 도전할 나이였지만, 저는 이제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두 번 다시 안 나가겠다고 결심했어요. 누군가의 불행 없이는 승자가 나올 수 없는 경쟁 시스템에서 벗어나서 나 자신을 우주의 ‘숭고한 계획’에 맡기고 믿어보자고 각오한 거죠. 그 ‘숭고한 계획’을 믿을 수밖에 없는 게, 저를 인터내셔널로 만들어준 건 유튜브거든요.

2년 전 한 국제 콩쿠르 심사위원을 사퇴해 화제가 됐었는데.

그 콩쿠르 창립자에게 초대받아 간 건데, 저 빼고 다른 위원들은 심사위원장과 다 아는 사이더군요. 심사위원장 제자가 출전했는데, 모차르트 소나타를 연주하다가 중간에 까먹고 뱅뱅 돌다가 한 악장을 다 점프하고 끝내는 거예요. 안타깝게 생각했는데, 다른 위원들은 그걸 못 본 것처럼 행동하길래 너무 놀랐죠. 손이 떨리고 진정이 안 되서 소리를 지르고 난리를 치고 나왔는데, 결국 그 아이가 됐더군요. 슬펐던 건 정말 재능 있는 아이들이 나왔는데 자기 자신을 탓하며 돌아갔다는 사실이에요. 제가 당했던 역사가 있기에 사흘 동안 악몽을 꾸다가 SNS에 사퇴의 변을 남겼는데, 그게 미디어에 퍼져 나가 깜짝 놀랐죠. 억울한 학부모들의 공감을 많이 받았어요.(웃음)

클래식계에서는 ‘누구 제자’라는 게 중요하니까요.

저는 한국에 라인이 전혀 없어요. 어릴 적 다녔던 피아노학원 선생님이 유일하죠. 제 스승은 파리고등국립음악원의 바르다 교수님인데, 어떤 곡을 한 번 들으면 24개 조로 다 바꿔버릴 수 있는 외계인 같은 분이죠. 하지만 피아노는 부귀영화를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며 콩쿠르 심사도 안 하시는 분이에요. 저는 후배들에게 아직 밟지 않은 새로운 길을 개척하라고 말하고 싶어요. 제가 유학을 간 것도 예술중학교에 떨어져서였는데, 결국 입시 실패가 저에게 최고의 대박이 된 거예요. 정해진 뻔한 길이 아니라 숭고한 계획을 믿고 남이 시도하지 않은 길을 가야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어요. 제가 산증인이잖아요.

그는 통상 예민하고 조심스러운 피아니스트들과 달리 굉장히 쾌활하고 털털했다. 혼자서 침묵하고 사색하는 시간이 많아서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즐겁고 쾌활해진다고 했다. 자기 자신을 ‘존재 그 자체로 숭고한 피아니스트’라면서 자신의 연주를 ‘전 지구인이 들어도 모자라다’고 거침없이 말하기도 한다.

“연주에서 아름다움과 이로움을 추구했다면 전 지구인은 물론 모든 생명에게 그것이 전달되어야 마땅하죠. 굳이 전달할 의도가 없더라도 나비효과로 내 마음과 생각이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니 연주라는 것에 어마어마한 책임감이 따르죠. 지금 같은 시절엔 사람들에게 라흐마니노프 랩소디 파가니니 18번을 들려드리고 싶어요. 이 곡을 슬픈 곡으로 알고 계신 분이 많은데 사실 전혀 그렇지 않거든요. 저는 아침에 해가 뜰 때의 희망, 광명의 빛이 비추는 듯한 느낌을 받죠. 그 느낌을 많은 분께 전달하고 싶네요.”

※ 유주현은…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국제대학원에서 일본의 다카라즈카 가극에 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학창 시절 백일장과 사생대회를 휩쓸던 영광의 기억을 품고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며 살아왔다. 2010년부터 중앙SUNDAY에서 공연을 중심으로 영화, 문학, 음악, 미술 등 문화예술을 독자들에게 더욱 가까이 전달하고자 부단히 글을 쓰고 있다.

202011호 (2020.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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