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agement

Home>포브스>Management

김정웅의 무역이 바꾼 세계사(18) 팍스 몽골리카, 지구촌 시대를 열다 

 

500년 전 유럽 열강들이 시작한 대항해시대가 전 인류의 삶을 바꾸어놓기에 앞서 800년 전 칭기즈칸의 ‘팍스 몽골리카’는 인류 문명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팍스 아메리카나와 팍스 로마나는 흔히 말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인류의 삶을 바꾸어놓은 팍스 몽골리카는 자주 이야기하지 않는다.

▎몽골국립역사박물관에 있는 몽골제국의 세계 정벌 관련 자료.
서로 잘 모르던 유라시아의 문명들은 통신, 상업, 기술, 정치가 서로 연결되는 하나의 제국에서 소통하고 교류하며 통합됐다. 칭기즈칸과 몽골제국이 싸운 중국, 페르시아, 유럽은 풍요롭고 많은 인구와 군사를 거느린 거대한 농경정주문명의 세계였다. 혹자는 칭기즈칸의 몽골제국 이전의 13세기 유라시아는 고여 있는 물과도 같은 ‘대기업병’에 빠져 있었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리스, 로마, 한나라, 당나라, 페르시아 등 몽골제국 이전의 제국들은 몽골제국에 비하면 동네 골목대장에 불과했다. 야만인으로 폄하되는 칭기즈칸의 몽골제국은 역사상 최초로 진정한 의미의 세계제국을 건설했다. 칭기즈칸의 몽골 군대는 정착문명 시대를 종식하고 유목이동문명의 지구촌 시대를 열었다. 현대문명은 일반적으로 르네상스와 대항해시대의 유산이라고 여겨지지만 필자는 그보다 앞선 몽골제국의 유산이라고 본다. 서양 사람들은 몽골제국을 야만스럽고 잔인한 제국으로 폄하하지만 우리 인류의 근대체제는 몽골제국에서 시작됐다. 몽골제국 시대에 동아시아의 상업혁명이 태동했다고 보기도 한다.

칭기즈칸의 전쟁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1206년에 끝난 몽골초원 통일 전쟁이었고, 두 번째는 유라시아 대륙 정복을 위한 전쟁이었다. 칭기즈칸이 유라시아를 정복한 목적은 무역을 확대하려는 경제적인 동기가 강했다. 유목경제는 가축을 방목해 젖과 고기, 가죽을 얻는 단순한 경제구조이므로 부족한 물자는 무역이나 전쟁을 통해서만 획득해야만 했다. 칭기즈칸은 상인들을 중시하여 위구르인 등을 핵심 관리로 등용하고 ‘상인은 누구도 공격할 수 없다’는 칙령을 내리기도 했다.

몽골제국 내 각각의 울루스(칸국)에서는 자기들 나름대로 ‘칸’을 추대했고, 대칸은 특별한 사유가 없다면서 그를 추인했다. 그러나 여전히 칸국들 사이에는 상당한 정도의 ‘연대성’이 있었고, 그것을 지속하는 장치들이 작동하고 있었다. 대칸은 여전히 한 사람에 불과했고 여러 칸국의 칸들은 비록 명목상일지라도 그의 정치적 우위를 인정했다. 그래서 새로운 대칸(카간)이 즉위하면 그는 제국의 여러 울루스에 사신들을 파견하여 그 사실을 알렸고, 칸국의 칸들도 즉위하면 대칸에게 사신을 보냈다. 그뿐만 아니라 대칸은 중국에서 거둔 재정 수입의 일부를 여전히 칸들에게 보내주었고, 칸들 역시 각 칸국에서 거두어들인 수입의 일부를 카간에게 보냈다. 이렇게 느슨한 칸국들의 연맹으로서 제국적 연대감과 일체성을 상당 부분 보존함으로써 칸국들 사이에 정치·경제·문화적 교류가 활발하고 빈번하게 이루어졌고, 그 교류가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를 탄생시켰다.

칭기즈칸의 손자 쿠빌라이칸은 ‘유라시아 자유무역지대’를 구상해고 만들어냈다. 쿠빌라이는 이 구상을 통해 정치ㆍ군사ㆍ경제ㆍ유통ㆍ생산ㆍ교통 등 다방면에 걸쳐 자유무역과 중상주의 정책을 펼쳤다. 또 다인종, 다언어, 다문화를 가진 사람들을 고용해 세계제국을 운영했다. 쿠빌라이칸은 몽골이라는 이름으로 세계를 하나로 묶으려고 했다. 그 중심지는 13세기 쿠빌라이가 건설한 북경이었다. 중국의 수도 북경이 중국 동북쪽 귀퉁이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몽골고원부터 중국까지를 포함해서 보면 북경이 중심이기 때문이다. 쿠빌라이는 통혜하라는 운하를 통해 북경을 발해만과 연결하고, 신중한 남송 공략을 통해 해양을 강화했다. 이때 발전한 도시가 천진과 상해다. 쿠빌라이칸은 이를 통해 기존에 여러 유목제국이 기초를 닦고 확립해놓은 초원의 군사력과 중국의 경제력이라는 토대 위에 무슬림의 상업력을 결합한 대교역권이라는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두 차례에 걸쳐 여몽연합군이 동원된 원 세조 쿠빌라이의 일본 침략을 확대한 지도. 마산의 위치가 잘못 표기되어 있다.
쿠빌라이칸은 제국 내에서의 관세를 일원화했다. 그때까지는 무역품이 각 도시의 항구, 관문을 통과할 때마다 관세가 부과됐다. 이를 쿠빌라이칸은 매각지에서 한 번만 지불하면 되도록 했다. 관세율도 3.3%로 그리 높지 않았다. 그리고 더 큰 거래를 위해 염인(鹽引)의 활용과 지폐의 발행, 은(銀)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체제를 만들어냈다. 이렇게 은이라는 ‘가치’를 통해 세계경제가 하나로 연결됐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몽골제국은 중국, 이슬람권, 유럽, 동남아를 잇는 거대 무역공동체를 만들었으며 그 모든 과정과 절차를 몽골제국의 군대가 지켜주었다. 몽골제국의 정복 활동은 동양과 서양을 지리적으로 연결하고 나침반, 화약, 인쇄술 등이 유럽으로 전해지고 천문학, 역법, 수학, 지도학 등이 중국으로 전래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동서문화의 교류를 촉진하여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 통합을 이뤘다. 칭기즈칸과 몽골제국이야말로 오늘날과 같은 지구촌 통합의 시대를 연 세계화의 선구자였다. 몽골의 지배를 받지 않았던 서유럽, 이집트, 인도, 동남아, 일본조차도 정치, 경제, 문화, 기술, 과학, 사상, 종교 등 모든 면에서 몽골제국과 교류하며 깊은 영향을 받았다. 몽골제국이 지구촌 시대를 연 것이다. 훗날 학자들은 14세기의 세계적 번영을 ‘팍스 몽골리카’라고 부른다.

유럽 아닌 몽골제국에서 시작된 근대 세계


▎1246년 몽골제국의 귀위크칸이 교황에게 보낸 서신, 몽골국립역사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교황이 귀위크칸에게 기독교 국가에 대한 침략을 멈추고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요구한 편지에 대한 답장에는 “해뜨는 곳에서 해지는 곳까지 모든 땅이 짐에게 복종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신의 뜻이다. 너희는 어째서 신의 뜻에 반항하느냐, 당장 몽골제국에 항복하고 교황을 비롯한 기독교 국가의 왕공들은 나에게 친조하라”라고 기록돼 있다. 유럽은 이 편지를 받고 몽골의 재침략에 엄청 떨었으나, 몽골군이 이집트의 노예부대 맘루크군에 패한 이후에 서방 원정은 좌절됐다. 그 이전 1239~40년 헝가리를 점령한 몽골제국의 바투 원정군이 유럽을 완전히 점령하지 않은 이유가 칭기즈칸의 아들 오고타이가 급사해서 유럽 원정군이 회군을 한 이유도 있지만, 당시 유럽은 지지리도 가난한 지역이어서 헝가리 왕의 천막이 가장 값비싼 전리품이었을 정도로 초라했으니, 더는 원정을 할 가치가 없었던 것이다.

칭기즈칸은 기술을 중요시하는 경영인이었다. 몽골제국의 역사서 『집사』에는 투르크족에게 몰살당하고 남은 두 쌍이 가까스로 살아남아 에르게네쿤 계곡으로 달아나서 번성했으나 수가 많아지자 계곡을 나서기로 결심했다는 기록이 있다. 말가죽, 소가죽으로 바람을 불어넣어 쇠가 녹으며 길을 뚫어 초원으로 다시 나오게 되었다 한다. 그래서 칭기즈칸은 정월 초하루에 대장장이 역을 맡아 쇠를 두드리며 조상들의 은덕을 기렸다. 칭기즈칸과 몽골인들은 자기들이 직접 기술을 개발하지는 않았지만 어떻게 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칭기즈칸의 이름인 ‘테무진’이 대장장이라는 해석도 있다. 늑대 어머니의 열 아들이 만든 돌궐(투르크)도 알타이산의 대장장이였듯이 몽골족도 쇠를 잘 다루는 대장장이의 경쟁력으로 세력을 불리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몽골제국은 독일 광부들을 중국 준가르 분지로 데려오고, 중국 의사들을 페르시아에 이식했다. 중국의 장인, 기술자, 전문가들이 영입되어 도시를 포위하는 기술을 전수했고, 페르시아의 증류주 제조법은 고려로 전파되어 우리가 즐겨 마시는 소주가 됐고 유럽에서는 위스키가 됐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양탄자를 퍼트렸고, 레몬과 당근을 페르시아에서 중국으로 전파했으며, 국수, 카드, 차를 중국에서 유럽으로 가져갔다.

그들은 파리 금속세공 장인을 데려와 몽골의 건조한 초원에 분수를 만들게 했고, 영국 귀족을 데려와 군대에서 통역으로 일하게 했으며, 지문을 찍는 중국의 관행을 페르시아에 전파했다. 중국에는 기독교 교회가, 페르시아에는 절과 탑이 건립됐다. 러시아에서는 『쿠란』을 가르치는 이슬람 신학교 건립을 위한 자금을 댔다. 이란에서는 수많은 중국 요리사가 활동하고 있고 많은 무슬림 요리사가 중국에 진출했다. 몽골제국은 이데올로기와 종교에 집착하지 않고 실용적인 해법을 찾았고, 그 답을 찾으면 제국의 모든 지역에 전파했다. 단순히 물자 교환이 아니라 지식 교환을 위해서도 노력했다. 중국 침술은 무슬림에게 알려졌고, 무슬림의 뛰어난 수술 방법은 중국으로 전파했다. 달력과 연감을 통일하고, 인도 수학자들의 도움으로 제국의 모든 물자를 기록했다. 중국, 페르시아, 유럽의 기술자들이 중국 화약과 무슬림의 화염방사기를 결합한 뒤 유럽의 종 주조 기술을 응용하자 혁명적인 발명품인 대포가 탄생했다. 권총에서 미사일에 이르는 방대한 현대무기의 발전이 여기에서 시작된 셈이다.

몽골제국이 대단한 것은 중국, 페르시아, 이집트, 유럽, 고려 등 전 세계 최고의 기술자, 학자들이 몽골제국의 주주로 참가하여 자신들의 재능을 유라시아 전체에 펼칠 기회를 주었고, 몽골제국은 이러한 기술과 사상을 퍼뜨리고 융합, 발전시켜 유라시아의 혁명적인 문명발전을 이뤄낸 것이다. 선거, 공립학교, 우편제도, 대포, 주판 등 유럽이 만들었으리라 당연시했던 문명의 산물은 사실 몽골제국이 만들었다. 멀리 떨어져 있고 가난했던 덕분에 몽골의 침략을 피한 변방 유럽은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고 무역, 기술이전 등 몽골제국의 모든 혜택을 입었다.

미국 사회학자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주장하듯 근대의 세계체제가 유럽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바로 몽골제국의 산물이었다. 몽골제국은 유라시아 대륙을 정복하면서 전쟁 방법에서 혁명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보편적 문화와 세계체제의 핵심도 만들어냈다.

몽골제국의 중요한 네 개 동서 교통로인 천산북로, 천산남로, 서역남로, 초원루트가 아시아와 유럽을 잇고 있었다. 13세기 실크로드의 가장 큰 특징은 초원루트와 천산북로가 사라이, 오트랄, 우르겐치를 중개 기지로 하여 직접 키에프, 크라코우 또는 안티오키아, 베니스, 콘스탄티노플 등 유럽의 여러 도시와 직결됐다는 점이다. 더구나 몽골제국은 실크로드 전역에 얌(역전제)을 시행했기 때문에 동서교통은 유례없는 번영을 이루었고 팍스 몽골리카가 작동했다. 몽골제국의 통일성이 유지되던 몽케칸의 치세에는 ‘금 항아리를 든 여성이 제국의 끝부터 끝까지 걸어가도 아무런 일이 없을 것이다’라는 말이 있었다. 중국과 페르시아만을 잇는 바다의 간선 루트는 몽골제국의 보호 아래 더욱 발전했다. 남송 시절부터 발전해온 해상 교역은 몽골제국 시대에 한층 더 발전했다. 제국의 최대 항구도시 천주에서 10%를 세금으로 징수한 화물은 타 지역에서 징세할 수 없었다. 인도에서 들어온 보석과 진주, 값비싼 상품이 천주에서 내려진 후에 다른 지역으로 보내졌다. 천주에는 해선 1만5000척이 수송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페르시아만과 동아프리카까지 항로가 뻗어 있었다. 몽골제국을 축으로 하는 상업망은 훌레구 울루스와 우호관계를 갖고 있던 제노바와 베네치아 등 이탈리아 상인과 비잔틴 상인이 참여하면서 지중해까지 확대됐다. 14세기부터 본격화된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는 몽골제국이 이룩한 세계 규모의 경제교류와 발전이 그 배경이 됐다.

※ 김정웅 대표는… 연세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하고, 약 30년간 40여 개국 수백만 마일을 날아다니며 지구촌 구석구석에 수십억 달러를 사고팔아 온 무역 일꾼. 2000년 기업 간 전자상거래회사인 서플러스글로벌을 설립해 반도체 중고장비 분야 세계 1위 강소기업으로 성장시켰다. 2012년 발달장애인의 가족을 치유하고 지원하기 위하여 ‘함께웃는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을 맡아 사회공헌에도 힘쓰고 있다. 2019년부터 아시아 최초로 개최된 자폐전문 박람회 Austism Expo 조직위원장을 겸임하고 있다. 2015년 6월 ‘이달의 무역인상’ 수상, 10월 무역의 날 대통령상 수상, 2018년 9월 Forbes Asia 200대 유망 기업에 서플러스글로벌이 선정됐다. 2015년부터 매년 실크로드 현지답사와 연구를 통해 지난 5000여 년간 실크로드 유목민과 장사꾼들의 흥망성쇠와 인류 무역사를 공부하며, 인류 역사의 추동력을 위대한 영웅과 황제, 선지자들보다는 장사꾼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있다.

202106호 (2021.05.23)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