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이훈범 대기자의 ‘상수경영(上手經營)’(6) 

음지에서 더 뜨거운 리더의 의지 

위대한 인물들은 물을 먹었을 때 오히려 투지를 불태운다. 실패를 거울삼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새로 주어진 일이 다소 덜 중요한 업무라 해도 최선을 다한다. 윈스턴 처칠과 덩샤오핑도 음지에서 더 치열하게 견뎌냈다.

▎ 사진:이정권 기자
역사를 보면 승승장구하다가도 단 한 번의 패배나 한순간의 실수로 쓰러져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는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왕좌에서 밀려난 왕들, 전쟁에서 패한 영웅들, 동시대인들에게 외면받은 수많은 천재가 그랬다. 역사적 인물들이 그럴진대 하물며 평범한 사람들이야 말해 무엇하랴.

매년 하는 인사에서 한 번 ‘물’ 먹었다고 좌절하거나 반발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가 가소롭게 느껴지고, ‘내가 이따위 일이나 하고 있을 사람이란 말인가’ 하는 생각에 업무를 등한시하기 쉽다. 특히 입사 동기들보다 뒤처지거나 후배가 앞질러 승진하게 되면 증세가 더욱 심해진다. 자연히 실적이 더 나빠지고 그러다 보면 더욱 윗사람의 눈 밖에 나게 돼 결과적으로 다음번 인사에서 또다시 물을 먹는 악순환을 거듭하게 된다.

이 같은 과정을 한두 번 반복하다 보면 그 사람에 대한 평판이 확고히 굳어져버려 끝내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되기 십상이다. 능력 있다고 인정받던 사람이 이런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 허덕이다 조직에서 버림받는 경우는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위대한 인물들은 바로 그럴 때 남들과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들이다. 위대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래서 위대해진 것이다. 그들은 물을 먹었을 때 오히려 투지를 불태운다. 왜 물을 먹었는지 곱씹어보고 실패를 거울삼아 다시는 이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새로 주어진 일이 다소 덜 중요한 업무라 할지라도 최선을 다한다. 그렇게 하다 보면 그동안 상대적으로 비중이 낮던 분야가 갑자기 새로운 비전으로 각광받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네 번의 실각 딛고 일어선 처칠

그런 것이다. 추운 그늘에 있을 때 더욱 많이 움직여야 몸이 얼지 않는 법 아닌가. 이치야 당연하고 말하기는 쉽지만 행동으로 옮기기는 어려운 이 원칙의 충실한 실천 사례를 돌아보자.

윈스턴 처칠은 관운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서른한 살에 식민 차관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해 여든 살에 총리로 은퇴했다. 하지만 그의 관운이 절로 온 게 아니다. 실패를 기회로 만든 끈기와 노력의 결과였다. 서른다섯 살에 내무장관이 된 처칠은 2년 뒤 세계에서 가장 힘 있는 자리 중 하나인 해군장관 자리에 올랐다. 세계 최강인 대영제국 함대를 지휘하는 사령관이 된 것이다. 하지만 4년 만인 1915년 처칠은 해군장관 직에서 해임되고 만다.

대영제국 함대를 몰고 오스만 제국의 수도인 이스탄불을 공격한 게 화근이었다. 오스만 제국의 심장부에 기습 펀치를 날림으로써 오스만이 독일과 맺은 동맹을 포기하도록 만들려는 의도였다. 독일군의 공세를 막아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던 러시아에 탄약 등 물자를 보급하기 위한 것도 작전의 목적이었다. 영국이 다르다넬스해협을 차지하면 흑해를 통해 러시아에 물자를 보낼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영국 함대만으로 다르다넬스해협을 봉쇄할 수 있으리라는 처칠의 생각은 분명 오판이었다. 두 달 뒤 처칠은 함대를 철수하고 공식적인 작전 실패를 인정해야 했다. 또 패배의 책임을 지고 해군장관 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때 그는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나도 지쳤네. 이제 다 끝났어.”

하지만 끝난 게 아니었다. 해군장관 자리에서 해임된 것은 그가 인생에서 겪어야 할 네 번의 실각 중 첫 번째에 불과했다. 실패의 고통은 컸지만 처칠은 거기서 물러날 사람이 아니었다.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몸속에 군인의 피가 흐르고 있는 처칠은 세계를 휩쓸고 있는 전쟁을 관전자로서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그는 자원입대해 전선에 뛰어들었다. 소령 계급장을 달고 제6 로열 스코틀랜드 퓨질리어 연대의 지휘관으로 프랑스 전선에 투입됐다. 하지만 전직 장관이 일선에 나온 것이 병사들의 눈에는 낯설게만 보였다. 별수 없이 처칠은 이듬해 하원의원 신분으로 의회로 되돌아갔다. 당시 로이드 조지 총리는 과거에 비해 훨씬 사람이 됐다는 평가를 받던 처칠을 군수장관에 임명했다. 군수장관이 되자마자 처칠은 해군장관 시절 계획했던 ‘육상 선박’ 프로젝트를 정력적으로 추진했다. 미국 농촌에서 사용하던 트랙터처럼 무한궤도가 달린 강철 차량에 기관총을 장착하면 전투에서 활약할 수 있을 것이라는 아이디어였다.

육군 장성들은 이 풋내기 군수장관의 제안에 콧방귀를 뀌었지만 비밀 계획의 암호명이었던 ‘탱크’는 처칠의 예상대로 땅 위에서 천하무적이었다. 1918년 8월 프랑스 북부 솜강 유역에 도달한 연합군은 탱크 450대를 앞세워 독일군 전선을 돌파했다.

당시 독일 육군 사령관이었던 에리히 루텐도르프는 탱크의 위력에 놀라 이날을 독일의 패전일로 선언할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전쟁 영웅 처칠은 전쟁이 끝난 뒤 1922년 로이드 조지가 실각하자 함께 물러나야 했다. 이후 쓰라린 패배가 이어졌다. 3년 동안 세 번이나 하원 선거에 출마했지만 연거푸 고배를 마셨다. 스탠리 볼드윈 내각에서 재무장관을 하긴 했지만 1929년 볼드윈이 실각하자 또다시 물러나야 했다. 세 번째 실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주저앉지 않았다. 정치 참여의 길이 막히자 그는 펜을 들었다. 1937년 네빌 체임벌린 총리가 히틀러에 대한 온건 정책을 표방했을 때 언론인으로 변신한 처칠은 격정적인 글로써 재앙을 예고했다. 1939년 7월 그는 자신의 고정 칼럼에 이렇게 썼다.

“지금 폭군의 군대가 엄청난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 독일 내부 사정이 아무리 나빠 보여도 최소한 초기에는 이 군대가 아주 끔찍한 타격을 가할 것이다.”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처칠이 옳았다는 게 증명됐다. 예순네 살 처칠은 체임벌린에 의해 다시 해군장관에 임명됐다. 이듬해에는 체임벌린 대신 총리에 선출됐다. 그는 1945년까지 연합군의 선봉장으로서 전쟁을 이끌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영국 국민은 처칠이 이끄는 보수당 대신 노동당을 선택했다.

나중에 처칠은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의 적들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는 시점에 나는 영국 유권자들로부터 국정에서 손을 떼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번에도 역시 끝이 아니었다. 처칠은 퇴임 직전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다. “스탈린은 뤼베크에서 아드리아까지 ‘철의 장막’을 치고 그 뒤에서 무자비하게 권력을 키워가고 있습니다.”

그가 말한 ‘철의 장막’은 곧 냉전의 상징이 됐고, 처칠은 1951년 일흔여섯 나이로 다시 한번 총리에 선출됐다. 그것이 그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승리였다.

세계가 놀란 ‘오뚝이’ 덩샤오핑

서양에서 처칠이 이처럼 ‘그늘에서 더 많이 움직여야 한다’는 진리를 실천하고 있을 때 동양에서는 덩샤오핑이 같은 마음가짐으로 운명에 맞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덩은 프랑스 유학 중이던 열일곱 살에 공산주의자가 됐다. 1931년 마오쩌둥(毛澤東)의 동지가 됐고 1945년에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 1955년에는 정치국원에 임명되는 등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늘 잘나간 것은 아니었다. 그때까지도 수많은 부침이 있었다. 1931년 마오가 이끄는 중앙 홍군에 합류한 덩은 장제스의 국민당 군대와 싸워 혁혁한 공을 세웠다. 중국 공산당은 초기에 소련파(유학파)와 국내파 사이에 노선 투쟁을 벌였다. 소련파는 도시 노동자 계급을 혁명의 중심세력으로 보고 도시 무장투쟁을 시도했다. 하지만 마오 같은 국내파는 인민 대부분이 농민인 중국에서는 농민 소비에트가 맞다고 주장했다.

이때 덩은 소련 유학파임에도 불구하고 마오의 주장에 동조했다. 도시 노동자 계급이 없는 중국에서 도시 무장투쟁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처음엔 소련파가 승리했고, 덩은 마오 편에 섰다는 이유로 1차 실각을 당했다. 1933년이었다. 현실은 곧 마오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입증했고, 중국 공산당은 대장정 도중인 1935년 열린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마오이즘을 받아들였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탄생 이후 마오는 사회주의 경제 건설을 위해 제1차 5개년계획을 도입했다. 이 계획이 성공을 거두자 마오는 여세를 몰아 1957년 ‘대약진 운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이 무모한 운동은 굶어 죽은 사람이 4000만 명에 이르는 대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때 대약진 운동 실패의 후유증을 극복하기 위해 열린 회의에서 덩이 제시한 것이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이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거였다. 원래 덩의 고향인 쓰촨성에서 이야기되는 속담으로, 나중에 덩의 통치철학이 된 이 말은 1979년 덩이 미국을 방문해 중미수교가 체결된 뒤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마오는 한 발 뒤로 물러나게 됐다. 2대 국가주석으로 선출된 류사오치(劉少奇)는 덩과 손잡고 경제정책을 수정해 시장경제를 도입했다. 하지만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려던 마오와 심한 갈등을 겪어야 했다.

1966년 8월 중국 공산당 지도부들의 거주지인 중난하이(中南海) 안마당에 대자보가 하나 붙었다. ‘사령부를 공격하라’는 제목으로 마오가 직접 쓴 것이었다.

“중앙에서 지방까지 몇몇 지도 동지는 반동적인 부르주아 입장에 서서 부르주아 독재를 실행하고 프롤레타리아의 기세 드높은 문화대혁명 운동을 공격하며 시비를 뒤집고 흑백을 뒤섞고 혁명파를 포위 토벌하고 다른 의견을 억압해 백색테러를 자행하면서 또 제멋대로 부르주아의 위세를 뽐내면서 프롤레타리아의 의지를 꺾고 있다!”

마오의 주요 타깃은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이었다. 이 같은 선동으로 이듬해 류와 덩을 규탄하는 대회가 열렸다. 류는 당내 제1주자파(走資派, 자본주의를 추종하는 세력)로, 덩은 제2주자파로 몰려 가택연금을 당했다. 이어 류는 하남성에 유배돼 홍위병들에게 구타를 당하고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죽고 말았다. 덩도 장시성에서 3년 반 가까이 유배생활을 해야 했다. 두 번째 실각이었다. 하지만 덩은 현실을 모두 받아들였고 자아 비판하는 수모도 감내했다.

음지에서 더 뜨거운 의지

덩은 음지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그 결과 덩은 7년 뒤인 1973년 부총리로 당당하게 복귀했다. 이듬해에는 다시 정치국원에 임명됐고 1975년에는 당 부주석까지 올랐다. 마오는 덩에게 피폐해진 중국 경제를 되살리는 임무를 맡겼다. 하지만 그것도 고작 1년뿐이었다.

덩은 바로 3차 실각을 당했다. 마오의 아내 장칭(江靑) 등 문혁 4인방의 음모와 사주에 의해 갑자기 베이징대학의 벽에 덩을 비방하는 대자보가 붙기 시작했다. 결국 1975년 덩은 마오의 명령에 따라 모든 관직을 버려야 했다. 1976년 1월 저우언라이(周恩來) 장례식에서 조사를 읽은 것을 마지막으로 덩은 공식 석상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이번 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해 9월 마오가 사망한 것이다. 이후 후계자로 지정됐던 화궈펑(華國鋒)과 4인방 사이에 치열한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국방장관 예젠잉(葉劍英)의 도움으로 화가 승리했다. 당 주석과 중앙군사위 주석이 된 화는 곧바로 덩을 복귀시키지 않았다. 잠재적인 경쟁자로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덩은 끝내 화를 몰아내고 1978년 중국공산당 제11기 3중전회에서 다시 권력을 잡았다. 세계가 놀랐고 그에게 부도옹(不倒翁·오뚝이)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1983년 그는 일흔아홉 살 나이로 국가군사위원회 주석 자리에 올랐다.

덩이 오직 권력을 잡기 위해서만 노력한 것은 아니었다. 덩은 4인방과 일전을 벌이는 일촉즉발의 상황 속에서도 싱가포르를 방문했다. 싱가포르의 권위주의 지도자 리콴유(李光耀)한테서 국가 주도의 자본주의적 경제개발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리콴유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덩샤오핑이 1970년대에 싱가포르를 방문하지 않았더라면, 서구의 다국적기업들이 진출하여 창조해놓은 부를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더라면, 덩샤오핑은 아마도 빗장을 열지 않았을 것입니다.”

덩샤오핑은 싱가포르라는 작은 나라가 이룩한 눈부신 경제발전을 보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며 그러한 발전의 원동력이 곧 ‘시장경제’이고, 해외직접투자 유치의 원동력은 곧 ‘경제개방’이라는 것을 배웠던 것이다.

덩은 권력을 잡자마자 개혁과 개방을 실천했다. 그가 정계에서 은퇴한 뒤 중국 정부가 다시 보수화의 길로 접어드는 기미를 보이고 긴축정책으로 인해 경제가 위축되는 현상을 보이자 1992년 여든여덟 살 덩은 광둥성, 상하이 등 남부지방을 순회하며 자신이 도입한 개혁, 개방을 더욱 독려하기 위한 ‘남순강화(南巡講話)’를 남겼다. 그중 두 가지는 이렇다.

“개혁·개방만이 중국의 유일한 살길이다. 개혁을 하지 않으면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개혁에 반대하는 사람은 누구든 물러나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가 하고 있는 많은 것은 사회주의도 가져다 쓸 수 있는 것들이다. 가난이 사회주의는 아니다. 시장경제는 자본주의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 같은 덩샤오핑의 통치철학으로 인해 중국은 해외투자를 끌어들이는 블랙홀이 됐으며 오늘날 스스로 G2라 자부할 만큼 부를 축적하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처칠이 그랬듯 아무리 커다란 시련을 만나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의지였다.

물론 처칠이나 덩샤오핑 같은 인물의 삶이 범상한 것은 아니다. 운도 많이 따른 게 사실이다. 하지만 시사주간지 타임이 두 사람을 두 번씩이나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을 만큼 그들은 치열한 삶을 살았다. 그 치열함은 음지에 있을 때 더욱 뜨거웠다.


※ 이훈범은… 남들이 못 보는 세상을 보고 싶어 기자가 되었고, 기자로 살며 본 세상을 칼럼에 녹이고 있다. 역사 속 사건과 인물에서 혜안을 얻는 게 삶의 기쁨이다. 1989년 중앙일보에 얽매여 기자로 산 지 30년째, 그중 10년 이상을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역사, 경영에 답하다』(2009), 『대한민국 국격을 생각한다』(2010, 공저), 『세상에 없는 세상수업』(2014), 『품격』(2019)이 있다. 파리10대학 문학박사 과정 수료.

202108호 (2021.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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