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남의 TRAVEL & CULTURE | 이탈리아 로마(Roma) 

2400년 전 돌무더기에서 엿보는 로마 역사 

로마 공화정 전반기 켈트족의 침공으로 초토화된 로마는 국력이 바닥에 떨어졌다. 하지만 다시 일어서서 성곽부터 굳건하게 다시 세웠다. 160년 후 로마를 공략하기 위해 알프스산맥을 넘어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한니발은 이 성곽을 보고는 그만 공략을 포기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나중에라도 외양간을 고친 덕택에 또 다른 큰 재앙을 막을 수 있었던 셈이다.

▎세르비우스 성곽 유적과 그 너머 보이는 테르미니 역. / 사진:정태남
늑대 젖을 먹고 자랐다는 로물루스가 기원전 753년에 테베레강 가까이에 솟은 팔라티노 언덕 위에 창건한 조그만 도시국가 로마는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는 도시이다. 즉, 로마는 지구상에서 아주 오래된 몇 개 안 되는 대도시 중 하나로 그야말로 ‘영원의 도시’이다. 2800년이라는 장구한 역사가 흐르는 로마는 도시 전체가 ‘열린 박물관’이기 때문에 길가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듯한 돌덩어리 하나하나에도 깊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러한 이야기 중 상당 부분은 고대 로마 역사와 관련 있다.

로마는 크게 4개 시대로 나뉜다, 즉, 약 1200년 지속된 ‘고대 로마’, 약 1000년 지속된 ‘중세 로마’, 약 300년 지속된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의 로마’, 이탈리아 통일 후 로마가 이탈리아 수도로 승격된 이래 150년 동안의 ‘현대 로마’가 한 지역에 공존한다.

2400년 전에 세운 ‘세르비우스 성곽’


현재 로마의 관문은 로마 중앙역인 테르미니 역(Stazione di Termini)이라고 할 수 있다. ‘테르미니 역’은 일본과 우리나라에서 ‘종착역’이라고 잘못 번역되기도 하는데, 목욕장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테르메(terme)에서 유래했다. 사실 이 역은 로마제국 최대의 공공 목욕 시설이었던 디오클레티아누스 목욕장 유적 가까이에 20세기 중반에 세워졌다.

테르미니 역 앞에 펼쳐진 널따란 광장에 들어서면 오른쪽에 밝은 햇살을 받고 있는 검누런 돌무더기가 눈길을 끈다. 좌우로 길게 펼쳐진 이 돌무더기는 길이가 약 100m에 달하는데,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로 30m, 가로 60cm 정도의 규격화된 크기의 네모반듯한 돌덩이를 규칙적으로 쌓아 올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돌덩어리는 로마 교외 북부의 옛 에트루리아의 화산 지대에서 나오는 투포(tufo)이다.

그럼 이 돌무더기는 무엇일까? 다름 아닌 바로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성곽의 일부분이다. 즉, 고대 로마 시대의 유적이다. 고대 로마라고 하면 우리는 먼저 로마제국을 머리에 떠올리는데, 로마제국 시대 이전에 공화정 시대가 있었고, 그 이전에는 왕정시대가 있었다.


▎세로 30m 정도, 가로 60㎝ 정도로 규격화된 크기의 돌로 쌓은 성곽. / 사진:정태남
즉, 고대 로마의 1200년 역사는 기원전 753년에서 기원전 509년까지 약 250년간 지속된 왕정시대, 기원전 509년에서 기원전 27년까지 약 480년간 지속된 공화정시대, 기원전 27년부터 기원후 476년까지 약 500년간 지속된 제정시대, 즉 로마제국시대로 이루어져 있다.

이 성곽은 왕정시대인 기원전 6세기 로마의 6대 왕 세르비우스 툴리우스의 이름을 따서 ‘세르비우스의 성곽’이란 뜻으로, 이탈리아에서는 ‘무라 세르비아네(Mura serviane)’라고 한다. 그런데 정확히 말하자면 왕정시대가 아니라 공화정시대 전반기인 기원전 378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성곽을 세웠다는 것은 외적의 침입이 예상되었거나, 침입을 받은 경험이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공화정시대에 이 성곽은 어떤 연유로 다시 세웠을까?

초토화된 로마, 다시 일어서다


▎로마 시내 중심부에 있는 세르비우스 성곽의 흔적. / 사진:정태남
기원전 509년에 정치체제가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바뀐 후 로마는 귀족층과 평민층 간 첨예한 갈등으로 국력이 많이 쇠락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기원전 390년에 켈트족의 여러 부족 중 이탈리아반도 북부에 살던 부족이 로마를 공략하기 위해 향해 남하했다. 이들은 거칠고, 포악하고, 용맹스러웠기 때문에 정규 훈련을 받은 이탈리아반도 내 여러 도시의 군대들은 이들을 맞닥뜨리면 지레 겁부터 먹을 정도였다.

한편 켈트족은 현재 프랑스 지역을 중심으로 유럽 중원 광대한 지역에 널리 퍼져 살고 있었는데, 고대 로마인들은 그 지역을 통틀어 갈리아(Gallia)라고 불렀다. 오늘날 프랑스어로는 골(Gaule)이라고 한다.

남하하던 켈트족은 이탈리아반도 중북부에 있는 에트루리아의 도시국가들을 짓밟은 후 테베레강 북쪽 지류를 수비하던 로마군을 궤멸했다. 그 후 로마를 7개월 동안 포위한 다음 세르비우스 왕 때 세운 성곽을 뚫고 로마에서 가장 신성한 유피테르 신전이 세워진 캄피돌리오 언덕 위까지 쳐들어와 로마를 철저하게 약탈하고 초토화했다. 당시 로마의 건축물은 모두 목조였기 때문에 집이란 집은 모두 불타 없어졌다. 켈트족은 퇴각 조건으로 엄청난 양의 금을 로마원로원에 요구했다. 후세에 만들어진 로마의 애국적 무용담에 따르면 평민세력의 모함으로 망명 갔던 귀족계급의 영웅 푸리우스 카밀루스가 이때 로마에 돌아와 “나라를 구하는 것은 금이 아니라 철”이라고 외치고는 켈트족을 물리쳤다고 한다. 여기서 ‘철’은 ‘칼’을 의미한다. 어쨌든 건국 이래 처음으로 외적이 심장부까지 침입해오는 변을 당한 로마는 보잘것없는 나라로 전락했고 차곡차곡 쌓아온 국력은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2400년 전의 세르비우스 성곽 유적과 70년 전의 테르미니 역. / 사진:정태남


하지만 로마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정신만큼은 흔들리지 않았다. 로마는 ‘그대로 주저앉느냐, 아니면 그래도 일어서느냐’의 갈림길에서 푸리우스 카밀루스를 중심으로 뭉쳐 애국심으로 무장하고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로마 방어를 위해 옛날 세르비우스 왕이 세웠던 허술한 성곽 위에 투포 돌덩어리로 성곽을 굳건하게 다시 쌓아 올렸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소 잃고 외양간 고친 격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이 성곽은 로마의 주요 언덕 주변을 모두 둘러쌌고 총길이는 약 11㎞였다. 참고로 서울의 한양도성은 18.6㎞이니 당시 로마는 소도시 크기였던 셈이다.


▎세르비우스 성곽으로 둘러싸인 공화정시대 전반기의 로마(모형). / 사진:정태남
그 후 세월이 흐르면서 작은 도시국가 로마는 세력을 확장해 이탈리아반도를 모두 손아귀에 넣었다. 그다음에는 바다로 눈을 돌려 지중해 패권을 두고 강적 카르타고와 격돌했는데, 이것을 포에니 전쟁이라고 한다. 켈트족이 물러간 다음에 세운 성곽은 161년 후 제2차 포에니 전쟁 중이던 기원전 217년에 한니발의 공격에 대비해 더욱더 보강되어 성곽의 두께는 4~10m, 높이는 10m로 늘어났으며, 성곽 밖의 해자는 폭 30~40m, 깊이 17m에 달했다. 로마를 직접 공격하기 위해 히스파니아(현재의 스페인)에서 출발해 알프스산맥을 넘어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한니발이 이 성곽을 보고는 공략을 포기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그렇다면 나중에라도 외양간을 고친 덕택에 또 다른 큰 재앙을 막을 수 있었던 셈이다.

로마 유적과 공존하는 현대건축 테르미니 역


▎테르미니 역 지하상가에서 보이는 세르비우스 성곽의 일부. / 사진:정태남
그 후 이 성곽은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기회가 없었다. 로마의 국력이 강해져 외적의 침입을 걱정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성곽은 로마 시가지의 행정구역 경계선 정도로만 사용되었는데, 기원전 1세기 율리우스 카이사르(영어식 이름은 줄리어스 시저)는 도시계획을 단행하면서 이 성곽을 아예 헐어내기까지 했다. 그 후 로마 시민들은 오랜 세월 동안 성곽의 필요성을 전혀 모르고 살았다.

헐린 성곽 유적의 파편은 현재 로마 시내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는데, 그중 보존이 가장 잘된 부분이 바로 테르미니 역 앞 광장에 있는 것이다. 테르미니 역 지하상가에서도 파편으로 남은 세르비우스 성곽의 일부를 볼 수 있다. 한편 1950년대 초에 세워진 테르미니 역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혁신적인 역이었으며, 2000년이 넘은 유적이 널려 있고 수백 년 된 건물이 즐비한 로마에서는 아주 보기 드문 현대 건축물 중 하나로 손꼽힌다. 매우 간결하게 디자인된 테르미니 역의 정면부는 병풍처럼 좌우로 길게 펼쳐져 있는데 고대 로마의 성곽 유적과 시각적으로 전혀 거슬리지 않으면서 서로 묘한 조화를 이루며 공존하고 있다. 2000년이 훨씬 넘는 엄청난 세월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 정태남은… 이탈리아 공인건축사, 작가 정태남은 서울대 졸업 후 이탈리아 정부장학생으로 유학, 로마대학교에서 건축부문 학위를 받았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건축 외에 음악· 미술·언어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30년 이상 로마에서 지낸 필자는 이탈리아의 고건축복원전문 건축가들과 협력하면서 역사에 깊이 빠지게 되었고, 유럽의 역사와 문화 전반에 심취하게 되었다. 유럽과 한국을 오가며 대기업·대학·미술관·문화원·방송 등에서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역사, 건축, 미술, 클래식 음악 등에 대해 강연도 하고 있다. 저서로는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 년 로마,』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외 여러 권이 있다.

202108호 (2021.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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