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남의 TRAVEL & CULTURE | 이탈리아 카타니아(Catania) 

‘카타니아의 백조’ 벨리니의 고향 

이탈리아 오페라 역사에서 위대한 작곡가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벨리니는 220년 전 시칠리아 동해안의 고도(古都) 카타니아에서 태어났다. 그는 시의 감정을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로, 밀라노에서 활동하던 1827년부터 파리에서 활동하다가 요절한 1835년까지 이탈리아 오페라에서 가장 빛나는 별이었다.

▎벨리니 기념상이 세워진 스테지코로 광장. / 사진:정태남
로마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을 이륙한 비행기가 시칠리아를 향해 기수를 남쪽으로 돌렸다. 비행기는 이륙한 지 한 시간여 만에 시칠리아섬의 에트나 화산을 끼고 돈 다음 동부 해안 위로 비행한 뒤 카타니아 폰타나로사 공항에 도착했다. 지중해의 강렬한 햇살과 남국의 더위가 엄습해왔다. 카타니아는 이탈리아에서 연중 평균기온이 가장 높은 도시로 손꼽히는데 위도상으로 보면 정확히 서울의 강남구와 일치한다.


카타니아의 심장부는 두오모 광장이다. 이탈리아에서 두오모(Duomo)는 문자 그대로 ‘(신의) 집’이란 뜻인데 한 도시의 주교좌 대성당을 일컫는 표현이다. 이 광장에 세워진 두오모의 정식 명칭은 산타가타(Sant’Agata) 대성당이다. 바로크 양식의 우아한 산타가타 대성당 정면 상부에는 카타니아의 수호 성녀 아가타(Agata)의 조각상이 올려져 있다. 성녀 아가타는 로마제국에서 기독교 박해가 극심했던 251년에 카타니아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카타니아에서는 매년 2월 3일에서 5일까지 성녀 아가타를 기념하는 종교 축제가 성대하게 벌어진다.

에트나 화산의 딸


▎지중해 상공에서 본 에트나 화산과 카타니아 시가지. / 사진:정태남
두모오 광장에서 북쪽으로는 직선도로가 시원하게 뻗어 있다. 도로명이 비아 에트네아(Via Etnea), 즉 ‘에트나(Etna)의 길’이다. 카타니아는 에트나 화산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사실 ‘카타니아’라는 지명도 에트나 화산 가까이에 있다고 하여 그리스어로 ‘~에’라는 뜻의 카타(kata)와 에트나를 뜻하는 아이트나(Aitna)가 합성된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 사람들은 까마득한 옛날부터 해발 3300m가 넘는 에트나 화산의 존재를 직접 피부로 느끼면서 살아왔다. 이를테면 카타니아는 ‘에트나 화산의 딸’인 셈이다.

카타니아는 기원전 8세기에 그리스의 도리스인들이 건너와 건설한 식민지였다. 그런데 역사가 이토록 오래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이 도시는 전혀 고도(古都)로 보이지 않는다. 1787년 이곳을 방문한 괴테도 고대 그리스의 유적보다 굳어버린 용암이 눈에 더 많이 띈다고 기록했을 정도이니 말이다. 시내 곳곳에 고대 그리스의 반원형극장이나 고대 로마의 원형극장 유적이 보이기는 하지만 바로크 양식의 건물들이 단연 압도적으로 많다. 또 다른 특징은 이 도시의 길은 자연적으로 발생한 불규칙적인 형태가 아니라 잘 계획된 도로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다.

고도 카타니아의 도시 풍경이 이처럼 완전히 탈바꿈하게 된 것은 17세기 후반 일련의 자연재해가 휩쓸고 간 이후이다. 1669년에는 에트나 화산이 폭발하여 용암이 거의 바다까지 흘러내려 왔을 정도였고 1693년에는 강한 지진까지 덮쳐 고대 시가지의 모습은 거의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그 후 카타니아는 바로크 건축양식의 건축물이 주류를 이루는 품위 있는 도시로 완전히 새롭게 태어났는데 이를 주도한 건축가는 바카리니(1702~1768)였다. 시칠리아 태생인 그는 로마에서 오랜 경험을 쌓고 시칠리아에 내려와 카타니아 재건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산타가타 대성당의 정면도 그의 작품이다.


▎두오모 광장의 산타가타 대성당. / 사진:정태남
파스타 알라 노르마


▎파스타 알라 노르마. / 사진:정태남
그런데 카타니아에 왔으면 무엇보다도 먼저 파스타 알라 노르마(pasta alla Norma)를 꼭 한번 맛보는 것이 이 도시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이 파스타는 토마토소스에 굵게 잘라 볶은 가지, 리코타 치즈, 바질을 넣어 만드는데 그 원조가 바로 카타니아이다.

‘알라 노르마’에는 ‘원칙대로’라는 뜻도 있고 ‘노르마식’이라는 뜻도 있다. [노르마]라면 빈첸초 벨리니(Vicenzo Bellini, 1801~1835)의 대표적인 오페라 작품 중 하나이기 때문에 이 파스타는 벨리니를 기념하는 요리라는 설이 유력하다.

이탈리아 오페라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5대 작곡가로 로시니, 벨리니, 도니제티, 베르디, 푸치니를 꼽는다. 이 중에서 네 명은 북부 이탈리아 출신인 반면에 벨리니는 남부 이탈리아, 즉 카타니아 출신이다. 따라서 벨리니에 대한 카타니아 사람들의 자부심은 하늘을 찌를 듯하다. 사실 카타니아 시내에는 벨리니 생가, 빌라 벨리니 공원, 벨리니 기념상, 벨리니 묘소, 벨리니 오페라 극장 등이 있어서 벨리니가 마치 성녀 아가타에 버금가는 수호성인처럼 느껴진다.


▎벨리니 기념상. / 사진:정태남
에트나 화산 쪽으로 쭉 뻗은 도로 비아 에트네아에 있는 스테지코로 광장에는 19세기 후반의 이탈리아 조각가 줄리오 몬테베르데가 제작한 하얀 벨리니 기념상이 세워져 있다. 거룩한 모습을 한 벨리니의 좌상 아래에는 그의 대표적인 오페라인 [노르마], [해적], [청교도], [몽유병 여인]의 주인공 조각상이 둘러져 있고, 그 아래에는 악보가 새겨져 있다. 벨리니는 시의 감정을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로 1827년부터 1835년까지 이탈리아 오페라에서 가장 빛나는 별이었다. 또 쇼팽은 고고한기품과 깊은 우수를 띤 벨리니의 음악에 크게 매료되어 그의 오페라에 나오는 아리아를 피아노곡으로 편곡하기도 했다.

벨리니 탄생 220주년


▎산타가타 대성당에 안치된 벨리니 묘소 . / 사진:정태남
카타니아 중심부에 자리한 그리스 반원형극장 유적 옆에 있는 벨리니 생가는 1923년 11월에 29일 ‘벨리니 기념관’으로 지정되었다. 벨리니가 1801년 11월 3일에 이곳에서 태어났으니 지금으로부터 꼭 220년 전이다. 기념관 안에 들어서니 그가 쓰던 피아노와 벽에 걸려 있는 소년 시절의 초상화가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데 그의 얼굴은 깊은 우수에 젖어 있는 듯하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역시 음악가였기에 벨리니는 음악적 환경 속에서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천재의 모습을 서서히 드러냈고 18세 때 카타니아 귀족들의 장학금으로 나폴리로 유학 가서 그곳에서 남다른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고는 밀라노의 라 스칼라극장으로 진출했다. 밀라노에서 그의 오페라가 성공하자 그의 명성은 국제적으로 퍼져 나갔다. 그 후 영국 런던을 거쳐 로시니가 군림하고 있던 프랑스 파리에서도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프랑스 정부로부터 훈장도 받아 이탈리아 오페라 작곡가로서는 로시니에 버금가는 위치를 차지하게 됐다. 하지만 1835년 9월 24일, 파리 생활 2년째였던 그는 34번째 생일을 한 달 조금 앞두고 급성대장염으로 절명하고 말았다. 숨을 거둘 때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카타니아의 백조’라고 불리던 벨리니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파리의 청중들은 충격을 받았다. 그가 세상을 뜬 지 9일째 되던 날, 파리의 청중들은 그의 10번째이자 마지막 오페라인 [청교도] 공연을 숨죽여 지켜보며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다음 날, 벨리니를 아들처럼 돌봐주던 로시니는 앵발리드 성당에서 그의 장례식을 치러주었고, 쇼팽은 그의 유해를 라 페르셰즈 공동묘지에 안장했다.


▎벨리니 생가에 보존된 벨리니의 피아노와 소년 시절 초상화. / 사진:정태남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1년이 지난 1876년 9월 24일 아침, 그의 유해는 파리에서 고향 카타니아로 옮겨져 산타가타 대성당 안에 안장됐다. 대리석 묘판 위에는 지금도 항상 꽃 한 송이가 놓여 있고 기둥에 장식된 조각에는 오페라 [몽유병 여인] 중의 유명한 아리아 ‘아 꽃이여, 네가 그렇게도 일찍 시들 줄이야’(Ah, non credea mirarti si’ presto estinto, o fiore!)가 새겨져 있다.

러시아 작곡가 스트라빈스키(1882~1971)는 벨리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구하려는 노력조차 없이 선율을 얻었다. 마치 하늘이 ‘네게는 베토벤에게 부족했던 것만 모두 주리라’고 약속하고 은총을 내린 듯이….” 벨리니는 ‘백조의 노래’를 남기고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다. 백조는 음악의 신 아폴로에게 바쳐진 새인데 죽기 전에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고 한다.

※ 정태남은… 이탈리아 공인건축사, 작가 정태남은 서울대 졸업 후 이탈리아 정부장학생으로 유학, 로마대학교에서 건축부문 학위를 받았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건축 외에 음악·미술·언어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30년 이상 로마에서 지낸 필자는 이탈리아의 고건축복원전문 건축가들과 협력하면서 역사에 깊이 빠지게 되었고, 유럽의 역사와 문화 전반에 심취하게 되었다. 유럽과 한국을 오가며 대기업·대학·미술관·문화원·방송 등에서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역사, 건축, 미술, 클래식 음악 등에 대해 강연도 하고 있다. 저서로는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 년 로마』,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외 여러 권이 있다.

202111호 (2021.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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