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남의 TRAVEL & CULTURE] 이탈리아 피렌체 & 라벤나(Firenze & Ravenna) 

단테 서거 700주년에 찾아보는 두 ‘단테 도시’ 

단테는 이탈리아가 낳은 최고의 시인이다. 올해는 그가 서거한 지 700주년을 기념하는 해이다. 고향 피렌체에서 추방되었던 그는 유랑 기간인 1307년부터 『신곡』을 쓰기 시작해 1321년에 라벤나에서 이를 완성하고는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이 작품에서 중세 세계와 기독교 정신이 담긴 대서사시를 창조했다.

▎우피치 박물관에서 본 아르노강의 폰테 벡키오. 바로 그 너머 보이는 다리가 폰테 산타 트리니타이다. / 사진:정태남
올해는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 1265~1321)의 서거 700주년을 기념하는 해이다. 단테는 이탈리아가 배출한 가장 위대한 문학 천재이자, 자신의 생애와 개인적인 특징을 작품에 반영한 최초의 인물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그를 최초의 근대 예술가라고 부른다.

단테의 고향 피렌체


단테는 중세가 끝나가고 르네상스의 여명이 서서히 밝아오기 시작하던 1265년경에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그의 고향 피렌체에서 그와 관련된 장소를 몇 군데 찾아본다면, 먼저 ‘단테의 집’을 꼽을 수 있겠다. 피렌체 시가지 중심부에 있는 이 중세의 집은 13세기에 알리기에리 가문의 소유였다. 바로 이곳에서 단테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단테가 9살 되던 1274년 5월 1일의 일이다. 소년 단테는 아버지를 따라 부유한 은행가 폴코 포르티나리의 저택에서 열리는 칼렌디마지오(Calendimaggio) 축제에 갔다. ‘5월의 첫날’이란 뜻의 이 축제는 봄이 온 것을 축하해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함께 모여서 먹고 마시며 즐기던 전통 축제였다. 단테는 이 축제에서 8살 난 주인집의 딸 베아트리체(Beatrice)를 보고는 그만 눈과 마음이 완전히 뒤집혀버리고 말았다. 훗날 단테는 그때 영혼이 전율하는 듯한 경험을 했다고 기술했다.

단테와 관련된 두 번째 장소로는 아르노강의 다리인 폰테 산타 트리니타(Ponte Santa Trinita)를 꼽을 수 있겠다. 이 다리는 폰테 벡키오(Ponte Vecchio)에서 서쪽으로 200m 떨어진 곳에 놓여 있다. 한편 피렌체 시가지를 통과하는 아르노강에서 가장 중요한 랜드마크이자 피렌체의 명소 중 하나인 ‘폰테 벡키오’는 ‘오래된(vecchio) 다리(ponte)’라는 뜻이다. (국내 출판물에서 ‘베키오 다리’라고 쓰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아주 어색한 번역이다.) 이 다리의 기원은 로마제국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중세에 여러 번 증축되고 개축된 다음 1565년 바자리(G. Vasari, 1511~1574)의 설계에 의해 지금처럼 특이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는 메디치 가문의 집무 건물인 우피치 궁(현재 우피치 박물관)과 강 건너편 메디치 가문의 새 관저인 핏티 궁(Palazzo Pitti)을 직접 연결하는 긴 통로를 동쪽 편 상가 위에 만들었다. 이 다리에서는 폰테 산타 트리니타가 확연하게 보인다. 만약 단테가 다시 살아난다면 폰테 벡키오는 형태가 많이 달라졌기 때문에 금방 알아보지 못하겠지만 폰테 산타 트리니타는 여러 번 개축되긴 했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는 아닐 것이다.

단테는 18세 때 폰테 벡키오에서 강변로를 따라 이 다리 쪽으로 걸어오는 그녀와 9년 만에 다시 우연히 마주쳤다고 한다. 그때 간단한 인사만 나누었을 뿐 대화는 없었다. 그럼에도 단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내적 경험을 했다. 그런데 당시 그녀는 집안에서 일찌감치 점찍어둔 은행가 바르디 가문의 시모네와 결혼한 신분이었고 단테도 집안에서 일찌감치 점찍어둔, 부유한 도나티 집안의 딸 젬마와 결혼해 자식도 낳은 상태였다. 게다가 이 두 사람은 이 세상에서 더는 만날 인연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단테에 따르면 그때 그녀를 본 것이 생애 두 번째이자 마지막이었다고 하니 말이다. 그의 마음속은 베아트리체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베아트리체는 꽃다운 24세 나이에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단테의 집. 현재 박물관으로 쓰인다. / 사진:정태남
단테와 관련된 세 번째 장소로는 피렌체 중심지에 자리한 중세의 좁은 골목길에 있는 산타 마르게리타 데이 체르키(Santa Margherita dei Cerchi)라는 13세기의 조그만 성당을 꼽을 수 있겠다. 이 성당은 ‘단테의 성당’으로 불린다. 베아트리체가 기도하러 이 성당에 왔다고 하며, 단테는 이 성당에서 젬마 도나티와 결혼식을 올렸다고 전해진다. 성당 내부 왼쪽 제단 아래 바닥에는 베아트리체의 묘소도 있는데 실은 가묘(假墓)다. 그 위에 놓인 대리석 명판에는 베아트리체의 아버지 폴코 포르티나리가 이곳을 가족 묘소로 만들었고 베아트리체는 1291년 6월 8일 이곳에 묻혔다고 적혀 있다.

베아트리체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녀를 잊지 못하던 단테는 마음의 상처를 달래려고 고대 로마의 고전을 탐독했다. 그러고는 평생에 걸쳐 그녀를 영원한 존재로 찬양해나갈 것을 다짐했다.

유랑 시기에 쓴 『신곡』


▎폰테 벡키오에서 본 폰테 산타 트리니타. / 사진:정태남
한편 단테가 살던 시대의 피렌체는 경제적으로 크게 발전하면서 앞으로 문화의 중심지가 될 바탕을 다져나갔다. 하지만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교황 간의 알력 다툼으로 피렌체는 교황 지지파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지지파로 분열되었다. 단테는 청년 시절에 정치에 참여했다가 정쟁에 휘말려 1302년에 피렌체에서 추방되었고 그때부터 19년 동안 유랑 생활을 시작했다.

그가 유랑 시기에 쓴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신곡』이다. 1307년에서 1321년에 걸쳐 쓴 이 작품에서 그는 중세 세계와 기독교 정신이 담긴 대서사시를 창조했다. 그는 이 작품 제목을 원래 ‘희극(Commedia)’이라 했다. 이 작품은 크게 ‘지옥 편’, ‘연옥 편’, ‘천국 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전체적인 줄거리는 대략 다음과 같다.

단테는 35살 되던 해인 1300년, 부활절을 앞둔 성(聖)금요일 전날 밤에 길을 잃고 어두운 숲속을 헤매며 번민의 밤을 보낸 뒤, 빛이 비치는 언덕 위로 다가가려 했으나 야수 세 마리가 길을 가로막는다. 그때 고대 로마의 문인 베르길리우스가 나타나 그를 인도한다. 그는 먼저 단테를 지옥으로 안내하고, 다음에는 연옥의 산으로 안내한 다음 꼭대기에서 베아트리체에게 그의 앞길을 맡긴다. 베아트리체에게 인도된 단테는 하늘 높은 곳에 이르러 신(神)의 모습을 우러러보게 된다.


▎라벤나에 세워진 단테의 묘당. / 사진:정태남
이 작품에서 베르길리우스는 인간의 이성(理性)을 상징하고 베아트리체와 단테의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와 인류의 관계를 상징한 것이라고도 볼 수도 있다. 후세의 보카치오(1313~1375)는 이 작품을 신성하다고 해서『신곡(神曲)』(La Divina Commedia)이라고 불렀고, 이 제목으로 1555년 베네치아에서 처음 출판되었다. 단테가 살던 시대에는 이런 문학작품은 당연히 라틴어로 쓰는 것이 기본이었지만 단테는 이 작품을 피렌체와 주변의 토스카나 지방에 사는 보통 사람들이 쓰던 언어로 썼다. 이리하여 피렌체와 그 주변 토스카나 지방에서 쓰던 말은 나중에 이탈리아의 표준어로 굳어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라벤나에 묻힌 단테


▎'단테의 성당'에 있는 베아트리체의 묘소. / 사진:정태남
한편 방랑하던 단테를 라벤나로 불러들여 보호하고 후원한 인물은 폴렌타 가문의 구이도 노벨로(1275경~1333)였다. 시인이자 라벤나의 군주였던 그는 단테를 1318년에 라벤나로 초빙했다. 단테는 그의 도움으로 라벤나에 자식들을 불러들여 함께 살게 되었고, 라벤나의 젊은 시인들을 가르쳤다. 그는 육체적 정신적 평안을 누리며 ‘천국 편’ 집필에 몰두해 라벤나에 정착한 지 3년이 되던 1321년에 마침내 『신곡』을 모두 완성했다.

단테는 『신곡』을 완성한 직후 구이도 노벨로의 요청으로 베네치아와 라벤나 간 분쟁을 중재할 특사 자격으로 베네치아에 파견되었다. 그런데 베네치아에서 라벤나로 돌아오던 도중에 말라리아에 걸려서 1321년 9월 13일에서 14일 사이 한밤중에 56세 나이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튿날 단테의 시신은 석관에 담겨 라벤나의 산 프란체스코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그 후 피렌체는 ‘피렌체의 위대한 아들’ 단테를 추방한 것을 크게 후회하고는 단테가 죽은 지 75년이 지난 1396년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단테의 유골 반환을 끈질기게 요구했다. 하지만 라벤나는 이에 전혀 응답하지 않았고 1781년에는 산 프란체스코 대성당 가까이에 아예 신전 같은 형태의 우아한 묘당을 세워 그 안에 단테의 석관을 안치했다. 그럼으로써 라벤나가 단테의 도시임을 만방에 천명했던 것이다.


▎단테 기념상과 산타 크로체 성당. / 사진:정태남
이런 상황에서 1830년에 피렌체는 미켈란젤로, 갈릴레오 갈릴레이 등 피렌체 출신의 위대한 인물들의 묘소가 안치된 산타 크로체 성당 안에 단테의 묘소를 만들었다. 또 1865년에는 단테 탄생 600주년을 맞아 이 성당 앞에 큼지막한 단테 기념상을 세웠다. 따라서 이 성당도 피렌체에서 단테와 관련된 장소를 꼽을 때 빼놓을 수 없다. 물론 단테의 묘소는 가묘(假墓)이긴 하지만.

※ 정태남은… 이탈리아 공인건축사, 작가 정태남은 서울대 졸업 후 이탈리아 정부장학생으로 유학, 로마대학교에서 건축부문 학위를 받았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건축 외에 음악· 미술·언어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30년 이상 로마에서 지낸 필자는 이탈리아의 고건축복원전문 건축가들과 협력하면서 역사에 깊이 빠지게 되었고, 유럽의 역사와 문화 전반에 심취하게 되었다. 유럽과 한국을 오가며 대기업·대학·미술관·문화원·방송 등에서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역사, 건축, 미술, 클래식 음악 등에 대해 강연도 하고 있다. 저서로는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외 여러 권이 있다.

202112호 (2021.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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