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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주현이 만난 아트 인플루언서(18) 현대무용가 김보람 

“춤이 말처럼 자연스러워지는 그 날까지” 

유주현 중앙 컬처&라이프스타일랩 기자
세계 최고의 팝밴드 콜드플레이와 어깨를 나란히-. 지금 우리 무용계 최고의 월드스타는 현대무용 단체인 앰비규어스 댄스컴퍼니다. 지난해 이날치 ‘범내려온다’에 맞춘 세상 힙한 안무와 기상천외한 의상 코드로 한국관광공사 홍보 영상 조회수 3억 뷰 돌파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우더니, 올해는 콜드플레이가 BTS보다 이들에게 먼저 러브콜을 보냈고, 댄스 버전의 공식 뮤직비디오를 따로 찍었다. 명품 브랜드 구찌, BMW 광고도 찍었다. 최근 이들을 모시기 위해 고양·춘천·천안·포항 문화재단이 뭉쳐 신작 [얼이섞다]를 만들고 12월 2일까지 투어를 이어간다. 민간 무용단체의 신작 제작에 지역 문화재단들이 힘을 합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 사진:고양문화재단
가장 비주류 예술인 현대무용 분야에서 글로벌 스타가 탄생한 셈인데, 예술감독 김보람(38)의 이력을 보면 납득이 간다. 2000년대 초반 엄정화, 이정현 등 유명 가수의 백업댄서를 하다 현대무용가로 전향한 만큼 대중적인 감각이 몸에 배어 있다. 대중은 그의 춤에서 재미를 발견하지만, 의도한 건 아니다. 관광버스 막춤처럼 쉬워 보여도 따라 하기 어려운 춤은 반골 기질에서 나왔다.

“자연스러운 걸 거부하는 경향이 있어요. 다들 오케이라고 할 때 ‘왜 다 오케이지?’ 이런 질문을 던지는 버릇이 있거든요. 움직임을 만들 때도 자연스럽게 나오는 방향보다 다른 건 없나 생각하죠. 그러다 보니 독특한 움직임이 나오는 것이지, 재미를 위한 장치를 고민하는 건 아니에요. 무용이란 건 같은 작품이라도 보는 사람의 감정에 따라 다르게 보이고, 내 작업이 어떤 거냐를 넘어서 보는 사람이 분위기를 이끌기도 하니까. 서울에서 심각하게 보는 공연도 지방에 내려가면 시작 전부터 이미 들떠서 그 자체로 즐겁게 보기도 하거든요.”

민간 무용단체 신작을 지역 문화재단들이 공동 제작하는 새 역사를 썼는데요.

너무 감사하고 뷰티풀한 일이죠. 보통 한국에서 6개월 동안 신작을 만들어 올리면 이틀 공연하고 끝이거든요. 방송댄스도 한 곡 연습하면 몇 달 공연하는데 말이죠. 신작을 만들기 전부터 1년 치 투어를 잡는 유럽 시스템이 부러웠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비슷한 경험을 하네요. 한국이 문화예술 쪽으로 점점 발전하고 있으니, 다른 단체들에도 이런 기회가 많아졌으면 해요.

공연 제목인 ‘얼이섞다’는 ‘어리석다’가 어원으로, ‘얼이 썩었다’는 부정적 의미를 ‘얼을 섞다’라는 긍정적 의미로 새롭게 해석했다. 지난 8월 국립현대무용단의 트리플빌 공연 [힙합(HIP合)]의 한 작품이었던 ‘춤이나 춤이나’를 확장한 무대로, MBC 라디오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가 채집한 향토민요를 그대로 활용했다. 잊혀가는 과거의 소리와 요즘 가장 힙한 앰비규어스의 춤이 만났고 거대한 무대장치와 테크노 음악까지 어우러진 미래지향적인 작품이다.

“옛날 라디오에서 들었던 그 소리들이 늘 머릿속에 있었어요. 조상들이 일하면서 편하게 부르던 순수한 소리들이 이젠 다 사라져버렸는데, 그게 너무 아깝잖아요. 그 소리 그대로 같이 가면서 테크노 장면을 더해서 현대적인 감성의 문화로 다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본 거죠. 처음엔 우리나라에 이런 소리들도 있었나 싶겠지만, 나중에 그 소리와 춤이 현대적인 분위기와도 잘 어울리고 흥겹다고 느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만들었어요.”

‘범 내려온다’ 이전에도 ‘피버’ 등 한국적 작업을 꾸준히 해왔죠.

안무가 데뷔 무렵부터 모든 작업에 한국 노래를 한 곡씩 꼭 넣었어요. 대표작 [바디콘서트]에서는 커튼콜 때 아리랑을 썼고요. 한국 사람이니까 자연스러운 거죠. 딱히 전통을 해석하고 표현해야 한다는 생각보다 제가 좋아해서 그런 것 같아요. 이번에도 마찬가지죠. 요즘 너무 힙합이나 서양문화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소리도 진짜 좋은데 모르고 있지 않나 싶어서요. 만들면 저도 재밌고요.

비트가 없고 장단만 있는 우리 소리에 맞춰 춤추는 게 힘들지 않나요.

그래서 더 재밌어요. 요즘 음악은 박자가 정해져 있고 그걸 지켜야 하는데, 이분들은 자기 흥을 매번 새롭게 만들어내니까요. 정해진 리듬에 익숙한 요즘 사람들은 낯설겠지만, 그 매력을 더 잘 보여주는 안무를 짰어요. 호흡이 확 바뀌거나 일정하지 않은 리듬을 잘 캐치해서 움직임으로 표현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앰비규어스 인기에는 힙한 비주얼 콘셉트도 한몫했는데, 무대 세트까지 제작한 것은 처음이란다. 거대한 뿌리 모양의 대도구가 분절된 채 흩어져 있다가 무용수들이 춤을 추면서 직접 조립해 하나로 만드는 만만치 않은 작업이다. 왜 굳이 이런 힘든 일을 할까.

“옛날 소리를 갖고 왔으니까 뿌리를 떠올렸죠. 현대사회 분위기를 반영하기 위해 뒤얽힌 콘셉트로 자유롭게 퍼져 있다가, 무용수들이 그걸 하나로 만들어 하늘로 올라가는 우주선 이미지까지 가져가려는 거예요. 여러 콘셉트가 하나로 섞여서 미래로 날아가는 느낌이랄까요.”

앰비규어스의 시그니처인 선글라스도 늘 끼는 이유가 있겠죠.

선글라스를 끼고 무대에 서면 잘 보이지도 않고 낯선 상황이라 춤추기 힘들어지는데, 우린 그 핸디캡이 자연스러워요. 안무가 데뷔 무렵에 무용수들이나 저나 전문적이지 않아서 불안했는데, 그런 상황에서 선글라스를 끼니까 확 전문가처럼 보이더군요. 얼굴에 감정이 안 보이니까. 잘 못 추는 사람은 표정에 다 드러나는데 선글라스를 끼니 잘 못 춰도 냉정하게 추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예요.(웃음) 시작은 그렇게 했지만 이제는 표정이 아니라 몸으로만 소통하기 위해서 씁니다. 선글라스뿐만 아니라 물안경, 검정 봉다리, 헬맷 등 얼굴을 가릴 수 있는 건 다 써봤어요. 몸으로만 감정을 전달하고 싶거든요. 무용이라는 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걸 해야 되기 때문에 그러는 게 적절한 방법인 거 같아요.

“치열한 엔터업계에서 경쟁력 길러”


▎앰비규어스 댄스컴퍼니의 신작 [얼이섞다]는 고양·춘천·포항·천안 문화재단이 공동 제작했다. / 사진:고양문화재단
전남 완도 출신인 그는 자연에서 친구들과 뛰놀다가도 혼자 있을 때면 TV 가요 프로그램을 보며 현진영, 서태지를 따라 춤을 췄다. “어려서부터 은근히 현실적이라, 공부를 못하니 빨리 고등학교 졸업하고 장사할 생각이었어요. 고등학생 때 처음 서울에 놀러와 피플크루라는 댄스팀 공연을 우연히 봤는데,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서울로 전학을 와서 프렌즈라는 방송댄스팀에 들어갔죠. 아마 피플크루 공연을 못 봤다면 지금 완도에서 장사하고 있을 거예요.(웃음)”

백업댄서 활동을 하면서도 대학에서 현대무용을 전공했다. 미국에 가서 ‘마돈나 백댄서’가 되려고 대학에 간 것이란다. “‘라떼는’(웃음) 엔터테인먼트 쪽에서 댄서라는 직업이 피라미드 가장 아래에 있었죠. 불합리한 대우가 자연스러웠고. 저도 그래서 미국으로 가고 싶었어요. 시스템이 잘돼 있으니 댄서로서 자부심 갖고 일할 수 있으니까요. 비자를 받으러 대학 무용과에 들어갔는데, 내가 선곡해서 작품을 만든다는 게 매력적이었어요. 정해진 음악, 가수에 맞추는 방송댄스가 답답했던 거죠. 하지만 그 시절 방송은 굉장히 치열했거든요. 살아남기 위해 이 악물고 춤을 췄는데, 그때 길러진 경쟁력 덕분에 제가 아직까지 춤추고 있는 것 같아요.”

콜드플레이와 함께한 작업은 어땠나요.

그러고 보니 같이 밥도 한 번 못 먹었네요.(웃음) 회의하고, 댄스 레슨만 열심히 했어요. 크리스 마틴은 자기 작업에서 춤을 같이 춘 게 처음이라더군요. 보기보다 어렵다면서도 되게 좋아하면서 재밌게 잘하던데요.

가수들에게서 협업 제안이 많이 오겠어요.

협업도 중요하지만 우리 작업이 훨씬 중요하다 보니 웬만한 건 다 거절하고 있어요. 이날치와도 일정이 가능한 선에서만 공연을 같이하죠. 컬래버 자체가 사실 부담스럽기도 해요. 우리가 아무리 이날치와 협업했다고 해도, TV를 보시는 분들은 이날치 백댄서라 생각하잖아요. 엔터테인먼트 문화에서는 댄서가 뒤에서는 게 당연하니까요. 콜드플레이와의 작업도 그런 걸 우려했는데, 따로 댄스버전 비디오를 만들자는 제안을 할 정도로 정말 협업으로 생각하더군요. 그 정도로 협업 마인드가 있으니까 했지, BTS가 제안해도 가수 뒤에서 백업만 해주는 일을 할 마음은 없어요.

요즘 ‘스우파 현상’으로 백업댄서들도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데요.

춤에 관심이 높아지고 댄서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관객을 매료하는 것이니 좋은 현상이죠. 스트리트댄스도 눈요기를 넘어 그 안에 스토리가 있고 각자 표현하는 이유가 있다면 좋은 거죠. 우리도 장르를 구분 짓지 않거든요. 그 벽을 넘나드는 건 무용가의 능력에 달린 것 같아요.

그럼 ‘무용’과 ‘댄스’는 아무 차이 없는 걸까요.

공연 형태가 다르겠죠. 무용은 당장 1분간 만족시키기 위한 춤이 아니라 1시간 동안 이야기를 만들어서 소통하는 거니까요. 어떤 작품은 1시간 동안 그냥 서 있기만 하잖아요. 춤을 췄냐 안 췄냐의 문제가 아니라 미술작품처럼 작가가 무엇을 전달하고 싶고, 전달할 방법을 찾는 것 자체가 무용이죠. [스우파] 파이널에서 엄마를 주제로 한 아이키의 작업을 확장해서 1시간 동안 극장에서 공연한다면 현대무용이라 생각해요. 춤이란 걸 1시간 동안 아무런 스토리 없이 본다는 건 마치 아프리카인과 1시간 동안 대화하는 것과 똑같아요. 그럴 때 말이 아니라 뭘 표현하는지 집중하게 되는데, 그게 무용을 보는 방식이죠.

“BTS라도 백업할 생각 없어”

사실 그도 ‘마돈나 백댄서’를 꿈꾸다 현대무용가가 되면서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앰비규어스’란 이름도 그래서 나왔다. “친구 자취방에서 술 마시다 영어사전을 펼쳤는데 멋있어 보여서 붙인 이름”이라면서도 “무용 안무를 시작할 때, 방송과 스트리트댄스를 훨씬 오래한 사람으로서 과연 내가 추는 춤이 현대무용처럼 보일까, 애매하게 보이지 않을까 생각도 했다”고 고백한다.

‘애매한’ 춤을 춘다지만, 그는 나름 현대무용계 거장 안성수에게 배운 정통파다. “안성수 선생님 밑에서 무용 작업을 제대로 배웠어요. 발레를 정말 좋아하게 만들어주셨는데, 한국무용을 하려면 전통춤을 알아야 되듯이 현대 장르에 속하려면 발레를 알아야 하죠. 발레 자체가 과학적으로 이뤄진 신체훈련이라서 몸을 쓰는 메커니즘을 이해하게 됐어요.”

현대무용가들도 매일 발레를 연습하나요.

제 경우에는 하루라도 발레 연습을 하지 않으면 자동차에 기름칠을 안 한 것처럼 몸이 뻑뻑한 느낌이에요. 무용수들은 무대 오르기 전에 이미 땀을 한 바가지 흘리고 올라가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지, 무대에 바로 올라서 그냥 춤추는 게 아니에요.

팀원들에게 ‘춤추지 말라’고 한다던데, 무슨 뜻인가요.

우리 작업은 대부분 음악을 분석해서 소리마다 움직임을 기호처럼 만들어 표현하는 거예요. ‘이 소리에는 이 움직임’ 하는 식이다 보니 박자에 맞춰 춤춘다기보다 현재 나오는 소리에 반응해서 바로바로 표현해야 하죠. 근데 음악을 들으면 자연스럽게 리듬을 타게 되잖아요. 그 리듬 타는 것을 배제하고 온전히 소리만 표현하는 작업을 하자는 얘기예요. ‘범 내려온다’ 경우는 다르죠. 소리를 표현하는 게 아니라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면 되는 거니까. 반면 [얼이섞다]는 목소리와 호흡을 몸으로 다 표현하는 거라서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춤’이 아닌 거죠.

무용을 통해 하고 싶은 일은 뭘까요.

‘범 내려온다’로 이렇게 뜰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더군요. 다만 춤을 추는 이유라면, 많은 사람이 춤을 보러 가고, 춤도 추게 됐으면 해요. 몸짓이란 게 고유의 언어고, 원시시대부터 춤인지도 모른 채 춤을 춰왔잖아요. 지금은 기분 좋아서 몸을 움직이면서도 부끄러움을 느끼는데, 그런 개념에서 벗어나 몸을 쓰는 일이 말하듯이 자연스러워지면 좋겠어요. 특히나 기술이 발전해 몸 쓰는 일이 점점 없어지는 세상에서 춤이라도 어떻게든 살려야 지능과 몸이 균형을 잘 이루지 않을까요. [스우파]로 춤 얘기들을 많이 하는데, 이제 고민해야 할 시점이에요. 춤도 교육으로 차근차근 이뤄져야 하니까요. 어려서부터 노래 교육을 받으니 노래방에 자연스럽게 가는 것처럼, 스트레스 풀러 500원짜리 댄스방에 가는 문화도 생기면 좋겠어요.

※ 유주현은…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국제대학원에서 일본의 다카라즈카 가극에 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학창 시절 백일장과 사생대회를 휩쓸던 영광의 기억을 품고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며 살아왔다. 2010년부터 중앙SUNDAY에서 공연을 중심으로 영화, 문학, 음악, 미술 등 문화예술을 독자들에게 더욱 가까이 전달하고자 부단히 글을 쓰고 있다.

202112호 (2021.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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