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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웅의 무역이 바꾼 세계사(24) 인간의 무역 본능 

 

무역과 교환이 없었다면 호모사피엔스는 네안데르탈인에게 밀려 존재감 없이 사라진 인류가 되었을 수도 있다. 현생인류인 호모사피엔스가 수십만 년 전 뛰어난 환경 적응력으로 네안데르탈인과 호모에렉투스를 제치고 지구를 지배하게 된 것은 비친족 간의 광범위한 협력 덕분이었을 것이다.

인류학자 브라이언 스튜어트 박사는 호모사피엔스 사이의 비친족 간 식량 나누기와 장거리 교역 및 의식을 함께 치르는 관계가 이들이 기후변화나 환경 변화에 반사적으로 적응하게 하고 네안데르탈인이나 호모에렉투스 같은 다른 인류를 능가하고 대체할 수 있도록 했을 것이라 한다. 영장류는 서로의 털을 손질해주고 음식을 나누어 먹는 등 체계적으로 재화와 서비스를 교환하지만, 원거리 교역은 호모사피엔스 이외의 다른 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행동이다. 무엇이 인류가 무역을 하게 이끌었을까?

진화인류학자들은 아프리카 동부와 서부에서 일어난 인류 행동의 기원을 10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찾는다. 특히 인간은 ‘운반하고 교환하는’ 본능으로 다양한 재화를 점점 더 많이 거래하기 시작했다. 인류 역사의 여명기부터 메소포타미아와 아라비아 남부 사이에는 곡물과 금속의 장거리 무역이 활발했다. 세계적으로 무역이 수만 년에 걸쳐 늘어나면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삶을 지탱하는 사상, 문물, 과학, 종교, 철학과 같은 축적된 결과를 만들어냈다.

인류 역사는 청동기시대인 4000~5000년 전에 문자가 생기면서 기록되기 시작했지만 도시가 탄생한 1만 년 전보다 훨씬 더 이전인 수만 년 전부터 비너스상, 흑요석 등 무역이 이루어지면서 초기 문명 교류가 시작되었다. 후기 구석기시대 풍만한 비너스상은 유라시아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지금까지 발견된 구석기 비너스상의 모습은 비슷하다. 얼굴 형태는 거의 없고, 팔과 발은 짧고 유방은 늘어졌고 허리가 두꺼우며 복부와 엉덩이, 넓적다리, 음부는 눈에 띄게 과장했다. 아마 구석기시대에는 풍성한 여자들이 인기였을 것이다. 세워놓을 수 없게 만들어진 것으로 봐서 들고 다니는 목적이었다.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며 몸의 일부를 과장한 조각상을 품에 지녔다는 해석도 있지만 포르노성 에로 예술이거나 섹스 보조 기구였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프랑스에서 바이칼호 연안까지 북방 유라시아 광활한 영역에서 출토되고 있는데, 2만1000년 전부터 2만 년까지 후기 구석기시대에 많이 만들어졌다.

초창기 장거리 무역을 학인할 수 있는 수단은 석기처럼 오랫동안 변하지 않는 유물뿐이다. 몇만 년 전에 흑요석과 석기 같은 전략적인 물자가 장거리까지 운반된 사실은 명백한 무역의 증거이다. 흑요석은 화산 분출로 만들어진 화산유리인데, 조성비를 보면 어떤 화산에서 나온 돌인지 알 수 있어서 세계적으로 인류 무역의 중요한 사료로 쓰인다. 이 검은색 유리질 화산암은 면도날처럼 날카롭게 쪼개지는 특성이 있어 석기시대에 절삭 도구와 무기로 폭넓게 애용되었다. 요즘에도 수술칼로 쓰일 정도로 날카롭고 예리한 석기이며, 고대에는 무기와 도구를 만드는 중요한 전략물자였다. 다행스럽게도 정교한 원자 지문 기술을 적용하면 발굴된 흑요석이 어떤 화산에서 나왔는지 추적할 수 있어 선사시대의 무역활동을 유추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발견되는 돌날은 아르메니아 두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됐다. 화산에서 400㎞ 떨어진 지역에서는 출토된 뗀석기 중 절반이 흑요석이었는데 800㎞ 떨어진 지역에서 출토된 뗀석기는 2%만 흑요석이었다.

한반도 전역에서 출토되는 흑요석 석기는 백두산과 큐슈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2만 년 전 구석기시대에 백두산 흑요석 석기는 700㎞ 떨어진 대구 월성동, 1000㎞ 떨어진 전남 장흥, 저 멀리 몽골고원의 알타이까지 팔려 나갔다. 53만 년 전 뉴기니와 북부 뉴아일랜드섬에 살던 사람들은 칼날을 대신한 흑요석을 바다 건너 400㎞ 떨어진 뉴브리튼섬에서 가져왔다.

동굴벽화와 해양 유적을 조사해보면, 배는 1만5000년 전 북유럽에서 처음 등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초기의 선박은 동물 가죽을 순록의 뿔 같은 단단한 뼈대에 이어 붙인 형태였고, 사냥과 이동에 주로 활용되었다. 일반적으로 노를 젓는 사람이 후미에 앉았고, 무기를 든 사냥꾼이나 승객이 앞에 탔다. 이 시대에 순록 뼈로 만든 바늘이 동시에 발견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바늘은 가죽으로 배를 제작할 때 꼭 필요한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추운 북유럽의 스텝 지대 같은 지형에서는 모피를 두른 사냥꾼들이 쓸 만한 나무가 부족했다. 그래서 원시적인 통나무배가 등장하기 전에 사람들은 가죽으로 배를 만들었다.

고대국가 흥망성쇠의 열쇠 소금


▎강원도 홍천군 하화계리에서 출토된 흑요석 석기들.
인간이 마을에 정착해 야생 고기를 먹는 양이 줄어들면서 소금 섭취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인체에는 식탁용 소금통 3~4개 분량의 소금이 있는데 땀으로 소금을 배출하기 때문에 소금을 계속 섭취해야 한다. 야생동물의 고기에는 충분한 양의 소금이 있지만, 농사로 얻은 곡물이 식단에 포함되면서 소금 부족 현상이 나타났다. 인간이 기르던 가축들도 소금이 필요하고, 소는 인간보다 10배나 많은 소금을 필요로 한다. 큰 마을이나 도시에서는 소금이 필수적인 상품이 되었다. 세계 4대문명이 바다와 접한 큰 강에서 나온 것도 인간이 채식을 먹고 살기 위해서는 소금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고대국가들의 흥망성쇠는 소금 무역과 관련 있다. 결국 소금은 최초의 국제적인 무역 상품이 되었다. 인류 최초의 도시인 예리코도 소금을 쉽게 구할 수 있는 사해 근처에 생겼다. 로마시대에는 군인들 월급을 소금으로 줘서 오늘날에도 월급을 Salt에서 유래한 Salary라고 부르게 되었다. 기원전 221년 진나라에서 소금은 최초의 국가 독점 상품이었으며, 로마시대에도 국가가 소금을 독점하며 재정을 유지했다. 동아시아에서 소금을 만들 수 있는 해안가는 그리 많지 않다. 서해안과 발해만에서 생산되는 소금을 동아시아 각지의 소비자들에게 전달하면 산지보다 10배, 20배의 가격으로 큰 이익을 내고 팔았을 것이다. 수십 배 이익이 나는 소금 장사가 선사시대부터 동아시아인들의 문명 교류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고조선도 소금 장사로 먹고살았던 나라였다. 기원전 7세기에 관중(管仲)이 쓴 『관자(管子)』해왕 편, 경중갑 편에도 ‘발해는 황해 바닷가 염전에서 광범위한 소금 생산이 이뤄졌다’는 기록이 있다. 주몽과 결혼해서 고구려를 건국한 ‘소서노’도 소금 장사의 딸이었고, 고구려 15대 왕인 미천왕도 소금 장수 출신이다. 백제가 건국된 곳 중의 하나인 미추홀(지금의 인천)도 옛날부터 유명한 소금 산지였다. 소금 유통이 중요하다 보니 염포, 염창, 염티 등 소금과 관련된 지명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농업이 발전하고 잉여 농산물이 생기자 해양의 배 기술이 농경민에게도 전파되었다. 가죽-뼈대 형태의 배를 이용해 하천을 왕래했고, 이때 시작된 무역의 형태는 이후 수천 년 동안 계속되었다. 농경민족의 상인들은 곡물, 가축, 의복 등을 싣고 하류로 가서 수렵 채집인들의 가죽 등과 교환했다. 기원전 5000년에 사용된 도끼와 자귀는 석기시대에 수상 무역이 일어났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이다. 발칸반도에서 만들어진 도끼와 날은 흑해의 도나우강 어귀부터 발트해와 북해에 이르는 드넓은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지만 고대에 수상운송은 육상운송에 비해 비용도 싸고 효율이 훨씬 더 높았다. 짐수레를 끄는 말 한마리가 90㎏을 지고 갈 수 있고, 마차를 이용해 잘 닦인 길에서는 1800㎏을 끌 수 있지만 짐을 하천의 배에 싣고 길에서 끌 때는 무려 27톤을 운반할 수 있다. 고대의 작은 배에서도 이 정도의 짐을 실어 나를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인류 문명이 큰 강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은 강을 따라 농사를 짓기 쉽기도 했지만 물길을 따라 무거운 상품을 나를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상. 사실적이라기보다는 이상적으로 표현한 여성상에 가깝다.
기원전 5세기 헤르도토스의 기록에는 가죽을 이어 붙인 배가 야자수나무로 만든 통에 든 포도주를 옮겼다는 내용이 있다. 이때 배는 방패처럼 둥근 형태로 생겼고, 아르메니아 상인 둘이 유프라테스에서 바빌론까지 몰고 갔다. 속도는 느렸지만 선원과 배 건조 재료는 최소한으로 줄이면서도 많은 짐을 실을 수 있었다. 이 선박에는 최대 14톤까지 짐을 실을 수 있었고 당나귀도 태웠다. 상인들은 목적지에 도착하면 목재 틀을 해체해서 버렸지만, 비싼 가죽은 접어서 당나귀 등에 싣고 아르메니아로 가지고 돌아가서 배를 만들 때 재사용했다. 초창기 무역은 이런 모습으로 진행되었다.

경제사학자인 윌리엄 번스타인은 메소포타미아 문명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무역을 다룬 책 『무역의 세계사』에서 무역을 ‘인간의 거부할 수 없는 본능’으로 규정했다. 그는 “무역은 식량, 피난처, 성적 호감, 교제처럼 원초적 욕구에 속한다”면서 “교역에 참여하려는 욕구는 인류 행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세계를 번영으로 이끌었다”고 이야기한다. 시대마다 실크로드는 개방과 폐쇄를 반복하면서 유라시아 국가들의 흥망성쇠를 좌우했다.

15세기부터 대항해시대가 열리면서 인류는 한층 더 개방되고 전 지구적으로 상품이 대량으로 유통되게 만들었다. 조선과 중국은 세계사의 도도한 흐름을 타지 못하고 20세기에는 식민지로 전락했지만, 20세기 후반부터 세계무역의 흐름을 타면서 다시 도약했다. 한국은 해방 이후 양극 체제, 신자유주의의 흐름을 타며 선진국의 문턱에 다다르게 되었다. 그러나 미중 무역전쟁으로 전 지구적 공급망이 쇠퇴하는 시대에 한국의 미래는 불안해졌다. 소규모 개방경제 체제인 한국이 앞으로도 살아갈 길은 만만치 않겠지만 여전히 개방과 포용이 답이라 믿는다.

※ 김정웅 대표는… 연세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하고, 약 30년간 40여 개국 수백만 마일을 날아다니며 지구촌 구석구석에 수십억 달러를 사고팔아 온 무역 일꾼. 2000년 기업 간 전자상거래회사인 서플러스글로벌을 설립해 반도체 중고장비 분야 세계 1위 강소기업으로 성장시켰다. 2012년 발달장애인의 가족을 치유하고 지원하기 위하여 ‘함께웃는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을 맡아 사회공헌에도 힘쓰고 있다. 2019년부터 아시아 최초로 개최된 자폐전문 박람회 Austism Expo 조직위원장을 겸임하고 있다. 2015년 6월 ‘이달의 무역인상’ 수상, 10월 무역의 날 대통령상 수상, 2018년 9월 Forbes Asia 200대 유망 기업에 서플러스글로벌이 선정됐다. 2015년부터 매년 실크로드 현지답사와 연구를 통해 지난 5000여 년간 실크로드 유목민과 장사꾼들의 흥망성쇠와 인류 무역사를 공부하며, 인류 역사의 추동력을 위대한 영웅과 황제, 선지자들보다는 장사꾼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있다.

202201호 (2021.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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