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김진호의 ‘음악과 삶’ 

19세기 독일 작곡가 다수는 시골 사람이었다 

독일은 오스트리아와 함께 명실상부한 고전음악 강국이다. 독일어를 사용하는 이 두 국가는 유명한 고전음악 작곡가를 많이 배출했다. 원인이 무엇일까.

▎인구 6만의 소도시 바이마르의 국립 바이마르 오케스트라 (The Staatskapelle Weimar). / 사진:국립바이마르 오케스트라 2016~2017시즌 팸플릿
독일어를 사용하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유명한 고전음악 작곡가를 많이 배출한 원인에 대한 정답을 현재까지 세상 누구도 알지 못한다. 매우 많은 요인이 작용했을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음악적 요인 이외에, 사회적·정치적·문화적·경제적·지리적·역사적 요인들이 있었을 것이며, 생물학적 요인들도 거론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 전제 오류일 수 있기 때문이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유명한 고전음악 작곡가가 많이 배출되었다’라는 전제가 틀렸을 수 있다. 대중은 물론 고전음악 음악가들도 잘 모르는, 다른 나라 출신 고전음악 작곡가도 많기 때문이다. 음악사 분야에서 권위 있는 사전들을 보면, 생전 처음 보는 작곡가들의 이름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들 중에는 프랑스나 영국, 스페인, 이탈리아, 러시아, 체코, 헝가리 같은 나라 출신도 꽤 많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유명한 고전음악 작곡가가 많이 배출되었다는 앞의 전제를 맞는 것으로 보려면, ‘유명한’이라는 단어를 상식적인 수준에서 생각하면 된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고전음악 관련 연주회가 자주 열리는데, 그 연주회의 레퍼토리를 살펴봄으로써 유명한 작곡가들을 특정할 수 있다. 레퍼토리 연구는 음악학자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연구 주제인데, 여러 연구에 따르면, 고전음악계 연주회에서는 역사에서 실존했던 작곡가들의 매우 큰 풀(pool)에서 극히 일부 작곡가들의 작품만 자주 연주된다. 그런 작품을 쓴 작곡가를 유명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면, 유명 작곡가 중 상당수가 독일인이거나 오스트리아인이라는 논리는 대충 맞다. 이런 논리로부터 좀 더 나아가보자. 19세기 독일은 낭만주의 음악가를 많이 배출했던 무척 드문 나라가 된다.

19세기 독일의 낭만주의 작곡가들을 열거해보자. 낭만주의 세계를 열었던 베토벤에서 출발할 수 있다.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 활동하고 생을 마쳤지만, 그가 태어나서 청년기까지 살았던 곳은 한때 서독의 수도였던 본(Bonn)이었다. 베토벤(1770~1827) 이후에, 쾨니히스베르크 출신 E. T. A. 호프만(1776~1822), 오이틴 출신 칼 마리아 폰 베버(1786~1826), 뤼더스도르프 출신 마이어베어(1791~1864), 함부르크 출신 멘델스존(1809~1847), 츠비카우 출신 슈만(1810~1856), 라이프치히 출신의 바그너(1813~1883), 쾰른 출신 자크 오펜바흐(1819~1880), 함부르크 출신 브람스(1833~1897), 쾰른 출신 막스 부르흐(1838~1920), 지크부르크 출신 훔퍼딩크(1854~1921), 뮌헨 출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1864~1949), 브란트 출신 막스 레거(1873~1916) 등을 꼽을 수 있다. 20세기와 18, 17세기 작곡가까지 열거한다면 더 많은 이름이 담긴 리스트를 제시할 수 있다. 대중적으로는 유명하지 않지만, 나름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이들까지 거론한다면 더 많아질 것이다.

그런데 이 작곡가들이 태어난 도시들을 살펴보자. 많이 알려지지 않은 도시들이고, 인구수도 무척 적은 경우가 많다. 오이틴(Eutin)이라는 도시를 들어보았는가? 2015년 연말 기준으로 1만6979명이 거주하는 아주 작은 도시다. [무도회의 권유]라는 우아한 곡과 오페라 [마탄의 사수]를 작곡한 칼 마리아 폰 베버가 태어난 곳이다. 본과 퀼른 근처에 있는, 인구 4만1016명이 사는 지크부르크(Siegburg)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동화 오페라[헨젤과 그레텔]을 작곡한 훔퍼딩크의 고향이다. 독일 동부 작센주에 있는 도시 츠비카우(Zwickau)에는 2010년 기준으로 9만3000명가량이 산다. [피아노 협주곡 가단조], 교향곡 [라인], 가곡집 [여인의 사랑과 생애]와 [시인의 사랑] 등을 작곡한 슈만의 고향이다. 훗날 파리에서 자신의 오페라를 발표해 인기를 끌었던 마이어베어가 태어났던 곳은 베를린 근처 뤼더스도르프(Rüdersdorf)라는 아주 작은 도시로, 2020년 기준으로 1만6025명이 산다. 남부 바바리아 지방의 브란트(Brand)는 2020년 기준으로 인구가 고작 1138명이다. 위에 적은 세계적 작곡가들의 고향이 이렇듯 대체로 작은 도시다. 그들이 태어나 살아갔던 19세기에도 뮌헨 같은 몇몇 도시를 제외하면 인구는 큰 차이가 없었다고 한다.


▎괴팅겐대학교 정문. 괴팅겐대학교의 교수는 535명이며 학생은 3만 명에 이른다. 인구 11만 명이 사는 괴팅겐시에 자리한 이 대학교에서는 음악학(musicology)을 전공으로 가르친다. / 사진:괴팅겐대학교 홈페이지
위 리스트에는 베를린 출신 작곡가가 없다. 베를린은 오늘날 독일의 수도 아닌가. 물론 베를린이 19세기 내내 수도는 아니었다. 독일이 처음 통일되었던 1871년부터 2차 세계대전에 패전할 때까지 독일 땅 위에 존재했던 독일제국(1871~1918)과 바이마르공화국(1919~1933)에 이어 나치 독일(1933~1945)의 수도 이기는 했다. 1949년 이후 독일은 동서독으로 분단되었고, 동독의 수도는 (동)베를린, 서독의 수도는 본이었다. 그 베를린의 인구는 2019년 기준으로 376만9495명이다. 베를린을 감싸고 있는 브란덴부르크주의 인구는 2019년 기준으로 252만198명이다. 베를린과 브란덴부르크의 인구를 합하면 대략 630만 명이다. 서울과 경기도의 인구는 2021년 기준으로 각각 976만 명, 1390만 명이다. 독일의 수도이자 유럽연합 최대의 도시인 베를린 인구는 우리나라 제2의 도시 부산의 인구 수준이다. 2021년 기준으로 342만 명이 부산에 산다. 독일 제2의 도시는 브람스와 멘델스존의 고향인 함부르크인데, 현재 인구는 대략 180만 명이고, 이것은 대구의 인구(245만 명)보다 조금 적고 대전의 인구(152만 명)보다는 조금 많다. 대구와 대전은 각각 한국의 제4, 제5의 도시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고향인 독일 제3의 도시 뮌헨에는 147만 명이 살며, 이 인구는 한국 제6의 도시인 광주광역시의 인구 149만 명과 비슷한 수준이다. 대성당으로 유명하며 막스 부르흐의 고향인 독일 제4의 도시 쾰른에는 108만 명이 사는데, 이 인구는 한국 제10의 도시 용인의 인구 106만 명과 동급이다. 막스 부르흐는 감미로운 [바이올린 협주곡]과 [스코틀랜드 환상곡]을 작곡했다. 위에 적지 않은 독일의 소도시들도 잠깐 살펴보자. 12만 명이 조금 안 되는 인구가 사는 괴팅겐에는 괴팅겐대학교가 있다. 이 대학교 졸업생 명단에는 수학의 제왕 가우스, 현대수학의 문을 연 리만, 현상학자 후설, 동화 『백설공주』와 『잠자는 숲 속의 미녀』를 쓴 그림 형제, 법학자 루돌프 폰 예링, 독일을 통일한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양철북』의 저자 귄터 그라스 등이 기재되어 있다. 졸업생과 교수 가운데 45명이 노벨상을 받았다. 독일의 고전적 정신문화의 중심지라고 평가받는 바이마르의 인구는 6만 명을 조금 넘는다. ‘한국정신문화의 수도’를 표방하는 안동의 인구는 15만 명이 넘는다. 2030년까지 인구 30만 명이 거주하는 도시를 만드는 것이 안동시의 시정목표라고 한다. 한국과 달리, 독일 인구의 70%가 거주자 수가 10만 명 이하인 소도시나 시골에 산다. 2020년 기준으로 독일 전체 인구는 8324만 명이며 2021년 한국 전체 인구는 5169만 명이다. 독일은 지방분권 강국이고 한국은 서울과 경기, 인천으로 구성되는 수도권의 인구가 나머지 지역의 인구보다 많은 나라다.

1806년, 신성로마제국이 나폴레옹에 의해 멸망했다. 서기 843년부터 중부 유럽에서 존재해왔던, 여러 민족의 느슨한 연합체로서의 신성로마제국 안에는 독일 왕국, 보헤미아 왕국, 이탈리아 왕국, 부르군트 왕국 등이 있었다. 1815년, 신성로마제국에 느슨하게 묶여 있었던 국가들이 다시 모여 독일 연방을 만들어냈다. 독일 연방은 1866년에 구성원이었던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전쟁함으로써 해체되었다. 이 전쟁에서 이긴 신흥 군사 강국 프로이센은 여세를 몰아 1870년에 있었던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독일을 사상 처음으로 통일했다. 비스마르크가 이끌었던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 프랑스와는 전쟁했지만, 독일 연방 내 다른 왕국들과는 대화하고 협상했다. 신성로마제국 시절에도 그랬고, 그 이후 독일 연방 시절에도 독일 땅에는 중앙집권화된 하나의 정부와 국가가 없었다. 지역별로 공국들이 있었고, 이런 분열 상황을 개탄했던 독일의 지식인이 많았다. 역설적으로, 오랫동안 계속된 지방 분열 상황이 오히려 현대 지방분권 강국으로 이어지는 배경이 되었다. 앞서 적었던 여러 작곡가 중 다수는 독일의 각 지방 공국의 궁정 악장 등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칼 마리아 폰 베버는 드레스덴의 가극장 지휘자로, 드레스덴 궁정 예배당의 지휘자로 활동하며 살아갔다.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지방에서 안정적인 권력을 유지, 행사해왔던 독일의 여러 공국은 나름의 경제력과 문화적 분위기를 가졌던 고전음악 인큐베이터가 아니었을까.


▎벤츠 박물관에 전시된 콘셉트카. 벤츠 박물관과 벤츠 본사가 있는 슈투트가르트는 독일 제6의 도시로, 인구는 63만 명이고 GDP는 우리 돈으로 대략 45조원다. 한국의 제19위 도시인 안산시의 인구는 65만 명이며 GDP는 24조원다. 슈투트가르트에는 국립대학과 국립예술대학, 시립교향악단과 시립미술관, 시립박물관 등이 있다. / 사진:김진호
2500만 명이 사는 한국의 수도권 체제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쩌면 현 단계에서는 한국의 유일한 성장 동력이 수도권 체제일 수도 있겠지만, 과연 오래갈 수 있을까? 한국의 수도권과 지방 중소도시들은 19세기 독일의 여러 공국이 보여주었던 안정성을 예술가들에게 제공해주고 있을까?

※ 김진호는…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와 동 대학교의 사회학과를 졸업한 후 프랑스 파리 4대학에서 음악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국립안동대학교 음악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매혹의 음색』(갈무리, 2014)과 『모차르트 호모 사피엔스』(갈무리, 2017) 등의 저서가 있다.

202205호 (2022.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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