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시대부터 험난한 바닷길과 강을 누볐던 상인들은 유라시아를 실핏줄처럼 연결하면서 무역을 통해 세상을 바꿔왔지만 그들의 발자취는 기록보다는 고고학적 발굴에 의존해야 한다.
오랫동안 문명 교류를 연구해온 정수일 선생은 유라시아의 문명 교류 길이었던 실크로드를 오아시스길, 초원길, 바닷길 등 세 갈래의 큰 길로 설명한다. 첫 번째 오아시스길은 한반도에서 출발해 중국의 시안(고대의 장안)을 거쳐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사막의 오아시스를 지나 터키와 로마로 연결되는 길이다. 실크로드라고 하면 이 길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두 번째 초원길은 유라시아 대륙의 북방 초원지대를 동서로 횡단하는 길로, 한반도에서 만주 대흥안령을 거쳐, 몽골초원, 알타이산맥, 카자흐 초원, 아랄해 남안, 카스피해 북안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세 번째 바닷길은 한반도, 일본에서 중국 남부 해안을 거쳐 인도양을 지나 아라비아해, 홍해, 지중해로 이어지는 길이다.당나라 장안부터 로마까지 직선거리 9000㎞ 길은, 실제로는 1만2000㎞에 달하는 장대한 길이며, 하루에 30~40㎞를 가는 낙타를 타면 1년 이상 걸리는 거리다. 고대 상인들은 이어달리기 방식으로 로마에서 장안까지, 장안에서 경주까지 낙타와 당나귀 등에 문물을 싣고 날랐다. 몽골제국 시대에는 촘촘히 짜인 역참제를 이용해서 유럽에서 북경까지 3개월에 주파했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고대 로마의 콘스탄티노플, 바그다드, 사마르칸트에서 유행하던 물건이 몇 달 지나지 않아 신라 경주에서 유행했다고 하니, 고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개방적이고 글로벌한 세계였다. 이 길을 『왕오천축국전』을 쓴 혜초, 고구려의 후손 고선지, 인도로 불경을 구하러 간 법현, 현장법사, 이름난 여행가인 마르코 폴로, 이븐바투타가 지나갔으며, 또 이 길에는 다리우스 2세, 알렉산더, 칭기즈칸, 티무르와 같은 영웅들의 흔적이 생생히 남아 있다.육상 실크로드는 최소한 2000년 동안 지구상에서 가장 큰 교역 네트워크였다. 위구르와 당나라의 견마무역이 절정기였던 8세기 말, 위구르가 1년간 판 말이 10만 마리에 달했다고 한다. 말 가격이 가장 비쌀 때는 한 마리당 비단 40필이었다고 하니, 단순 계산해도 비단 400만 필이 1년 동안에 위구르에 팔린 셈이다. 인구가 그리 많지 않은 위구르가 비단 400만 필을 쓸 일은 없었을 것이고, 대부분의 비단은 중국에서 받은 조공품들과 같이 서방으로 재수출됐을 것이다. 이 막대한 교역은 당대 최대의 경제대국 당나라를 일시적 채무불이행 상태에 빠뜨릴 정도였다.서아시아의 채도(彩陶) 기술은 한나라 때 여행가이자 군이었던 장건(張騫)이 이 길을 가기 4000년 전에 동방으로 전해졌을 것이다. 또 그보다 몇천 년 전에는 중원의 원시 토기 기술이 서방으로 전해졌을 지도 모른다. 기원전 2000년 전 무렵에는 청동기 기술이 서방에서 중원으로, 다시 1000년이 지나서는 비단을 위시한 중원과 중국의 각종 물품이 서방으로 흘러 들어갔다.
인도유럽어족의 기원
▎오사카 역사박물관에 전시된 8세기 무렵 나니와 시대 실크로드. 사진 설명에 일본에 큰 영향을 줬던 신라는 빠져 있고 발해의 상경이 포함되어 있다. 일본인들은 한반도에서 도래한 문명을 별로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다. 실크로드 국가들을 돌아다니며 역사 박물관의 지도들을 들여다보면 국수적이거나 한국에 대해 부정확한 표기들이 거의 모든 나라에서 발견된다. 21세기 전 세계 대부분 국가가 자국 중심의 국가주의로 우경화의 길을 걸으면서, 역사관이 점점 더 국수적으로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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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아인, 히타이트인, 그리스인, 스키타이인, 슬라브인, 게르만인, 켈트인 같은 유목민 전사들은 말을 길들이고, 여러 마리 말이 끄는 전차를 발명한 뒤, 기원전 3000년 전부터 유럽과 아시아의 대부분 지역을 점령했다. 아리아족은 4000~5000년 전에 말이 끄는 전차를 개발해 유럽과 인도를 점령하고 25억 인류가 사용하는 인도유럽어족을 만들었다. 기원전 1500년 전에 아리아인은 인도로 진출했고, 그 후 훨씬 더 동쪽의 타림분지까지 이동했다. 덕분에 오늘날 인도유럽어족 언어를 쓰는 사람들은 15억 명에 달하고, 인도유럽어족의 일파인 영미 사람들이 세상을 주도하면서 우리말과 전혀 다른 언어 구조를 가진 영어를 배우느라 심하게 고생을 하고 있다.기원전 1000년 전 무렵부터 개량돼서 덩치가 커진 말은 사람을 등에 싣고 다니기 시작했고 하반신만으로 말을 다루면서 두 팔로 무기를 자유자재로 사용하게 된 기마 전사들은 불과 200년 전까지 승승장구하며 유라시아 대륙을 휩쓸고 다녔다. 기원후 5세기에는 아틸라가 다스렸던 훈족이 유럽에 도착했고, 투르크족은 서기 1000년에 아나톨리아(오늘날 터키)로 이주해서 중앙아시아 일대는 터키에서 위구르까지 투르크어 계열의 말을 쓰고 있다. 칭기즈칸이 이끈 몽골족은 13~14세기에 유럽을 침공했고 칭기즈칸으로 추정되는 13세기 인물의 유전자가 전 세계 수천만 명에게 뿌려졌다.기원전 7세기 러시아 남부 초원에 세워진 최초의 유목국가 스키타이와 기원전 3세기에 출현한 흉노 등에서 시작해서 18세기 중반 최후의 유목제국 준가르가 멸망할 때까지 유목국가들은 4000~5000년 이상 농경국가들과 각축하며 인류 역사를 이끌어왔다. 중국 역사는 만리장성을 사이에 둔 북방 유목민과 남쪽 농경민의 투쟁사라고 할 수 있다. 이란 역사도 동북방의 유목 투란인과 남방의 이란인(농경민)의 대결이었고, 러시아 역사도 북쪽의 삼림민(슬라브)과 남쪽의 유목민의 대결이었던 것이다. 기원전 3세기부터 몽골초원을 중심으로 강성해진 흉노의 일파는 5세기 아틸라의 훈족이 되어 유럽까지 쳐들어갔다. 투르크족(돌궐)은 서기 1000년에 아나톨리아까지 이주해갔다. 스키타이, 흉노, 칭기즈칸의 몽골제국과 아틸라의 훈족, 티무르 제국은 실크로드를 장악하면서 세계 역사의 흐름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흉노에 밀려서 조공을 바치던 한나라는 무제(기원전 156~87)가 등극하자 흉노의 왼팔인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흉노의 수익기반인 오아시스 국가들을 분리시켜야 했다. 또 장건을 월지국, 오손국에 파견하여 동맹을 맺으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오아시스 국가들과 군사외교 동맹을 맺는 데는 실패했지만 그는 서역에 풍부하고 다양한 정보를 한나라로 가지고 와서 한나라가 서방 여러 나라와 본격적으로 교류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 시대 인도 상인들은 향신료와 면직물, 상아를 중국과 서방에 수출했다. 실크로드의 장사꾼들은 중가리아(준가르)에서 아스트라한 모피를 사다가 간쑤성에 있는 량저우(오늘날의 우웨이)에서 팔고, 티베트고원에서는 소금을, 몽골의 알타이산맥에서는 금을 사다가 차지(오늘날의 타슈켄트)와 사마르칸트에서 금세공 장인들에게 팔았다.그와 동시대인인 사마천은 『사기』에서 장건을 두고 ‘서역착공(西域鑿空)’, 즉 서역으로 가는 구멍을 뚫었다고 표현했다. 한나라 입장에서는 구멍을 뚫은 것이지만, 사실 몇만 년 전부터 실크로드에는 상인들이 오고 가며 무역을 해왔었다. 장건이 이 길을 가기 200년 전에 만들어진 알타이의 파지리크 고분에서는 진나라의 거울과 초나라의 비단이 출토되었다. 장건이 서역에 갔을 때는 이미 현지 사람들이 사천성의 명품 대나무 특산품과 옷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역사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장사꾼들은 장건이 어렵게 뚫었다고 하는 길들을 수시로 드나들면서 돈을 벌고 있었다. 장건이 서역을 다녀오고 800년 뒤에 중국 대륙에는 수나라, 당나라의 통일제국이 들어섰다. 이때부터 기술 수준과 생산력이 역전되어 동방에서 서방으로 가는 품목이 더 많아진 듯하다. 예컨대 유리 제작 기술은 서방에서 왔지만, 그 후에 발명된 화약 제조 기술은 서방으로 갔다. 제지술, 나침반, 인쇄술 등도 모두 마찬가지였다.목화의 생산과 전파도 인간의 삶을 크게 바꾸어놓았다. 한반도에는 고려시대 문익점이 목화를 들여왔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인도가 원산지인 목화를 너무 뒤늦게 도입했다. 실크로드 무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해 한반도 백성들이 겨울을 추위에 떨면서 보냈다는 의미다.실크로드 무역을 통해 동식물도 옮겨 다녔다. 호두를 표함한 견과류, 포도, 사과, 살구 등이 인류의 식탁을 풍성하게 채웠고, 온갖 동식물과 더불어 병균도 오갔다. 오늘날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가도 풍토병에 잘 걸리지 않는 것은 실크로드를 오간 우리 선조들이 자기 몸을 희생해서 물려준 면역력 덕분이다.
소그드 상인들의 활약
▎몽골 노인울라산에 있는 흉노 무덤에서 발견된 펠트 카페트 직물. 국립중앙박물관, [칸의 제국, 몽골] 전시회, 2018. 기원전 1~기원후 1세기. 직물임에도 2000여 년 동안 보존돼 주목을 받는 유물. 색실로 인물들을 수놓았는데, 직물의 원산지가 시리아나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확인돼 1세기에도 유라시아 전역에서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음을 잘 보여준다. 이 펠트에 나온 인물들의 얼굴은 투르크계라는 것이 확실하게 느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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팍스 로마나와 한나라 시대의 안정적인 국제무역 시스템이 로마와 중국 간 장거리 무역을 활성화했듯이 7~9세기 이슬람 제국과 당나라가 위세를 떨치면서 칼리프가 지배하는 땅과 당나라는 더 직접적으로 무역을 했다. 이슬람 제국은 육상, 해상으로 글로벌 물류 시스템을 통합했고, 칼리프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세력은 누구나 길을 이용할 수 있었다. 8세기 중반에 페르시아인으로 추정되는 무슬림 상인 수천 명이 당나라의 항구뿐 아니라 내륙 도시까지 진출했다. 수많은 아랍인이 자연환경이 뛰어나고 금이 많이 나는 신라를 동경하여 한반도로 건너와 영구 정착했다고 한다. 『천일 야화』에는 팍스 이슬라미카를 “하룬 알 라시드의 이름과 광영이 중앙아시아의 언덕들에서 북유럽의 숲속까지, 또한 북아프리카 및 이베리아반도에서 중국, 타타르 근경에 이르기까지 울려 퍼진시대”라는 기록이 있다.5세기부터 10세기까지 유라시아 국제 교역을 주도한 소그드 상인들은 돌궐, 위구르 유목제국과 손잡고 이집트에서 한반도까지 유라시아의 느슨한 통합을 만들어냈다. 7세기에 상업제국 이슬람은 인도와 무역을 하며 받아들인 과학기술과 제철기술을 바탕으로 혜성같이 떠올랐고 유라시아 전역에 걸쳐 문명과 문물의 교류가 대규모로 일어났다. 이때 이슬람의 뛰어난 과학기술과 학문이 유라시아 전역에 퍼졌다. 이슬람제국의 대정복 운동이 끝나고 유라시아의 광역경제가 시작된 것이다.13세기 초에 건설된 몽골제국은 70년 가까이 이어진 정복전쟁으로 유럽과 인도 일부를 제외한 유라시아 대륙 거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그들은 위구르, 이슬람 상인들과 손잡고 인류 역사상 전례 없는 광역 네트워크를 만들어 세계 각지의 사람들과 문물이 교류하고 융합하는 장을 마련해주었다. 우리가 배웠던 역사 교과서에는 제대로 나오지 않았지만 칭기즈칸과 몽골제국이야말로 르네상스와 대항해시대에 앞서 오늘날과 같은 지구촌 통합의시대를 연 세계화의 선구자였다.1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 비행기를 73대 넘게 격추했던 전설적인 독일의 전투기 조종사, 붉은 남작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의 삼촌인 지질학자 페르디난트 폰 리히트호펜에 의해 19세기 말 ‘실크로드’라는 낭만적인 이름이 지어졌다. 이 이름은 광대한 유라시아 네트워크의 지엽적인 부분만 담은 표현이지만 딱히 대체할 만한 표현이 없어 계속 쓰고 있다. 필자도 실크로드라는 단어가 감성적으로 쉽게 다가오는 느낌은 좋지만 이 단어의 프레임에 갇히는 것 같아 찜찜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사실 실크, 비단은 고대의 히트 상품 중 하나였고 기원전부터 동아시아에서 독점적으로 생산되어 저 멀리 영국과 이집트까지 팔려 나간 상징적인 상품이다. 유통물량이나 파급효과로 따지면 비단이 ‘소금‘이나 ‘말’에 밀리겠지만 상징성이 크다. 파급효과로 따진다면 실크로드 대신에 ‘Horse Road’나 ‘말의 길’이라고 써야 한다. 그 이후에는 차(Tea), 향신료(후추 등)와 도자기 등에 그 지위를 넘겨주었다. 동서교류의 모든 시대를 보면 실크보다는 차(Tea)가 훨씬 더 중요했던 무역 품목이었을 것이라한다. 따라서 좀 더 정확한 표현을 쓰자면 실크로드보다는 ‘유라시아 네트워크’라고 해야 할 것이다. 2018년 만나뵈었던 카자흐스탄 알마티의 저명한 고려인 역사학자 강 게오르기 선생은 ‘아시아-유로 네크워크’라는 표현을 써야 한다고 지적했다.19세기 말 이후 스웨덴의 스벤 헤딘, 영국의 아우렐 스타인, 프랑스의 폴 펠리오 등이 탐사를 주도하면서 중앙아시아, 중국 서부지역 등 사막의 모래 속에 묻혀 있던 막대한 유물을 유럽으로 수집해갔다. 20세기 초반 일본 오타니 탐험대가 수집한 실크로드의 선사 유물 1700점은 조선총독부에 넘겨졌다가 광복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고스란히 넘어오면서 우리나라도 얼떨결에 실크로드 유물을 보유한 나라가 되었다. 20세기 중반 이후에는 이 실크로드가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일본인들이 주축이 되어 연구가 이루어졌으며, 최근 중국이 ‘일대일로’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자 실크로드에 대한 관심은 또다시 뜨거워지면서 미중 패권경쟁의 무대로 떠오르고 있다.인류가 문명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은 서로 다른 문화, 문명과의 교류이다. 실크로드는 수만 년 전부터 오늘날까지 도도한 문명 교류의 통로였다. 구석기시대 타제석기부터 기원전 3000년 전 수메르의 학문과 산업기술까지 인간은 무역을 통해 문물을 교류하고 상호작용을 하며, 새로운 문물을 유라시아 전역에 퍼뜨렸다.고대 실크로드 이야기를 하면 우리는 로마와 당나라, 페르시아 등 거대 제국에만 주목하고 이들 사이의 수많은 유목민족은 문명과 교류의 전달자, 상인으로만 보는 경향이 있다. 실크로드의 유목국가들은 단순한 전달자나 상인이 아니라 당당한 문명의 주역들이었지만, 농경제국의 기록에 의존하는 사학자들 때문에 기록을 남기지 않는 초원의 유목민들과 사막의 오아시스민들은 역사에서 정당하게 대우받지 못하고 있다. 유라시아 역사는 유목민과 농경정주민의 투쟁사이다. 유라시아 초원의 유목민족들은 그 남쪽의 농경사회와 더불어 세계사를 움직인 두 수레바퀴 중 하나인 것이다.15세기 말 대항해시대가 시작되고 유럽 열강들은 총칼로 바닷길을 열면서 인류의 문명 교류를 전 지구적으로 확산했다. 남극대륙에서 북극대륙까지, 남아메리카 안데스산맥에서 시베리아 동토의 땅, 아프리카의 깊은 밀림 속 오지까지. 20세기 전반까지 인류 문명 교류에서 낙오자가 되었던 한반도가 20세기 후반에 남쪽은 냉전체제, 중국의 부상 등과 더불어 실력과 운을 겸비해서 세계 최빈국에서 1인당 GDP 3만 달러가 넘는 세계 6위의 수출국으로 떠올랐다. 미국, 일본에서 들여온 기술과 자본, 또 냉전시대에 자본주의 진영의 개방된 시장 덕분에 고도성장했고, 이어 1980년대에 시작된 세계화 시대 덕분에 오늘날 같은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불과 50년 전만 해도 봄 보리 수확 전까지 보릿고개라는 식량난을 겪으면서 굶주렸던 남한 사람들은 전 세계가 부러워하는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 아시아 최고의 콘텐트 강국이 되었다.그런데 이제 판이 또 바뀌고 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태동된 신냉전시대가 본격화하고 있다. 인류 역사상 가장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세계에서 약한 고리들이 하나씩 끊어지면서 공급망 대란이 일어나고 있다. 실크로드도 항상 열려 있지는 않았다. 실크로드의 육상, 해상 장거리 교역은 제국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개방과 패쇄를 반복했고, 이에 따라 유라시아민족과 국가들의 흥망성쇠도 영향을 받았다.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열린 세상과 닫힌 세상을 반복했던 것이다. 21세기 남한의 장사꾼들은 과거 미소 냉전시대의 닫힌 세상이 미중 신냉전시대로 재현되는 것이 두렵다.
※ 김정웅 대표는… 연세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하고, 약 30년간 40여 개국 수백만 마일을 날아다니며 지구촌 구석구석에 수십억 달러를 사고팔아 온 무역 일꾼. 2000년 기업 간 전자상거래회사인 서플러스글로벌을 설립해 반도체 중고장비 분야 세계 1위 강소기업으로 성장시켰다. 2012년 발달장애인의 가족을 치유하고 지원하기 위하여 ‘함께웃는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을 맡아 사회공헌에도 힘쓰고 있다. 2019년부터 아시아 최초로 개최된 자폐전문 박람회 Austism Expo 조직위원장을 겸임하고 있다. 2015년 6월 ‘이달의 무역인상’ 수상, 10월 무역의 날 대통령상 수상, 2018년 9월 Forbes Asia 200대 유망 기업에 서플러스글로벌이 선정됐다. 2015년부터 매년 실크로드 현지답사와 연구를 통해 지난 5000여 년간 실크로드 유목민과 장사꾼들의 흥망성쇠와 인류 무역사를 공부하며, 인류 역사의 추동력을 위대한 영웅과 황제, 선지자들보다는 장사꾼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