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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남의 TRAVEL & CULTURE | 이탈리아 폼페이(Pompei) 

시간이 영원히 멈추어버린 로마제국 도시 

폼페이는 주변의 비옥한 토양 덕택에 농업이 발달했고, 또 지리적인 위치 덕택에 교역과 해운업 관련 분야가 크게 발전했다. 따라서 폼페이는 로마제국 내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활발하고 화려한 도시로 손꼽혔다. 하지만 베수비오 화산 폭발이라는 예고 없이 찾아온 대재앙으로 인하여 한순간에 종말을 맞고 말았다.

▎폼페이의 중심광장 포룸의 유적. 멀리 베수비오 화산이 보인다. / 사진:정태남
남부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도시 나폴리. 나폴리만(灣) 일대는 예로부터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자랑한다. 이 경관의 구심점은 바로 베수비오 화산이다. 즉, 나폴리 일대는 화산 지역이기 때문에 아름다움 이면에는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폼페이는 나폴리에서 직선거리로 동남쪽으로 대략 20㎞ 떨어져 있고 베수비오 화산은 나폴리와 폼페이 사이 중간쯤 지점에서 북동쪽에 솟아 있다.


폼페이에 도착하면 유적지 바로 남쪽에 비아 플리니오(Via Plinio)라는 도로명이 먼저 눈길을 끈다. 플리니오는 기원후 1세기의 인물 플리니우스(Plinius)의 이탈리아어 표기이다. 플리니우스는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다. 즉, 외삼촌과 조카인데, 이름이 같기 때문에 보통 대(大)플리니우스와 소(小)플리니우스로 구분한다. 대플리니우스는 방대한 『박물지(Naturalis Historia)』를 저술한 학자이자 나폴리만(灣) 서쪽 끝 미세눔에 주둔하던 로마제국 해군함대의 사령관이었다. 그는 멀리서 베수비오 화산 폭발을 목격하고는 난민 구출을 위해 현장 가까이 갔다가 가스에 질식하여 목숨을 잃고 말았다. 세월이 흐른 후 소(小)플리니우스는 역사가 타키투스의 요청으로, 삼촌의 죽음과 당시의 상황을 소상하게 편지에 기록하여 그에게 보냈는데 이것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2000년 전의 부유한 지방도시


▎포룸의 신전들과 폐허가 된 공공건물들. / 사진:정태남
폼페이 유적지의 입구 포르타 마리나(Porta Marina)에 들어서면 타임캡슐을 타고 2000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다. 포르타 마리나는 바다 쪽으로 향하던 성문인데 옛날에는 이곳에서 해안까지 거리가 500m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나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그 거리가 1.5㎞ 이상 늘어났기 때문에 지금의 폼페이는 내륙 도시처럼 보인다.

폼페이의 심장부는 널찍한 포룸이다. 포룸은 일반적으로 고대로마 도시에서 신전과 관공서가 밀집된 중심광장을 말한다. 폼페이의 정치·행정·종교·경제의 중심지였던 이 포룸에 서면 시야는 북쪽 멀리 솟아 있는 베수비오 화산에 멈춘다. 옛날 폼페이 사람들은 베수비오 화산을 이 도시의 수호신처럼 여겼을 것이다.

포룸의 북쪽 면에는 유피테르 신전, 서쪽 면에는 바실리카(공회당)와 아폴로 신전, 동쪽 면에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신전 등 폐허가 된 주요 건물들이 널려 있다. 남쪽에는 관청 유적이 있는데,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것을 보면 폼페이는 당시 작은 지방 도시였음을 알 수 있다. 작은 지방 도시였지만 시가지는 잘 계획되어 있어서 시내의 모든 길은 좁은 골목길이라도 판석(板石)으로 깔끔하게 포장되어 있었으며 상하수도 시설도 갖추고 있었다.


▎공공목욕장의 열탕 내부. / 사진:정태남
폼페이의 중심 거리는 포룸에서 동쪽으로 길게 뻗은 비아 아본단짜(Via Abbondanza)이다. 포룸과 이 거리 주변에는 목욕장, 화려한 귀족 저택과 중산층 주택, 상가 등이 있다. 특히 이 거리의 남쪽 비탈진 곳에는 대극장과 소극장으로 이루어진 ‘문화의 전당’이 자리 잡고 있으며 이 거리가 끝나는 외곽 지역에는 원형극장이 있다. 대략 1만2000명에서 2만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하니 폼페이 시민 거의 모두를 수용할 수 있었던 셈이다. 이 원형극장은 기원전 80~70년경에 세워졌으니 로마의 콜로세움보다 150여 년 전에 세워졌다는 뜻이다.

이런 공공시설이 있다는 것은 폼페이가 상당히 부유한 도시였음을 말해준다. 사실 폼페이는 주변의 비옥한 토양 덕택에 농업이 발달했고, 또 지리적인 위치 덕택에 교역과 해운업 관련 분야가 크게 발전했기 때문에 폼페이는 로마제국 내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활발하고 화려한 도시로 손꼽혔다.

예고 없이 찾아온 대재앙


▎포장된 길. 길 위에 놓인 큰 돌은 우천 시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 사진:정태남
이러한 폼페이에 비극의 전조가 시작된 것은 네로 황제가 재위하던 시기인 기원후 63년 2월 5일이었다. 그날 대지진이 발생하여 석상들이 받침대에서 굴러떨어지고, 공공건물은 무너져내렸다. 이 지진은 폼페이뿐 아니라 누케리아(현재의 노체라), 헤르쿨라네움(현재의 에르콜라노), 네아폴리스(현재의 나폴리) 같은 주변 도시들도 강타했다. 폼페이 사람들은 오랜 기간에 걸쳐 공공건물들과 개인 주택들을 복구했다.

16년이 지난 기원후 79년은 모든 것을 복구하여 지진의 기억이 어렴풋해질 때쯤이었다. 그해 8월 24일 오후, 운명의 시간이 아무런 예고 없이 찾아왔다. 수호신 같았던 베수비오 화산이 갑자기 폭발하여 무서운 불을 하늘 높이 뿜어 올렸던 것이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탄 수백 개와 맞먹는 위력의 폭발이었다. 공교롭게도 바로 전날이 불의 신 불카누스(Vulcanus) 축제일이었다. 참고로, 이탈리아어로 화산을 volcano(볼카노)라고 하는데 영어에서도 이를 그대로 쓴다. 이것은 바로 Vulcanus에서 온 말이다.


▎기원전 2~3세기에 비탈진 지형 위에 세워진 대극장. / 사진:정태남
화산 폭발은 연쇄적으로 12시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고 하는데, 그때 마침 바람이 폼페이 쪽으로 불어와 자정 무렵에는 화산재와 화산석이 하늘로부터 폼페이 사람들 머리 위로 비 오듯이 쏟아져 내렸고 화산가스가 도시 전체를 덮쳤다. 이리하여 폼페이는 하루 만에 죽음의 도시로 변했고, 폼페이의 시간은 영원히 멈추어버리고 말았다. 이는 티투스가 황제로 즉위한 지 두 달 만의 일이었다. 티투스는 로마에 거대한 콜로세움을 착공했던 베스파시아누스의 장남이었고 베스파시아누스는 네로 황제가 기원후 68년에 자살한 후 야기된 정치적 혼란기를 평정하고 황제로 등극한 장군이었다.

그런데 폼페이 최후의 날에 폼페이 시민 대부분이 몰살당했을까? 사실은 많은 사람이 제때 피신하여 화를 면했다고 한다. 당시 폼페이의 인구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견해가 다르지만 대략 2만 명 정도로 추산한다. 그중 노예가 전체 인구의 40%에 해당하는 8000명 정도였을 것이라고 한다. 목숨을 잃은 사람은 전체 인구의 10%에 해당하는 2000명 정도로 추산된다. 그럼 이 사람들은 어떻게 죽었을까? 화산이 폭발했으니 뜨거운 용암에 의해 죽은 것으로 생각하기 쉽겠지만 사실은 크게 세 가지 요인에 의해 죽었다. 첫째는 지붕과 기둥이 무너져 그 아래에 깔려 죽은 경우, 둘째는 화산재가 폐에 차서 죽은 경우, 셋째는 화산가스에 질식하여 죽은 경우이다.

계속되는 발굴작업


▎최대 2만 명을 수용할 수 있었던 원형경기장의 외관. / 사진:정태남
그 후 폼페이는 매몰된 채로 완전히 잊혔다가 오랜 세월이 흐른 18세기 중반에야 본격적으로 발굴되기 시작했다. 용암에 묻힌 에르콜라노와 달리, 화산재 두께가 4~6m였지만 다행히도 비교적 걷어내기 쉬웠기 때문에 지금까지 상당 부분을 발굴해낼 수 있었다. 현재 전체의 3분의 2 정도가 발굴되었는데 이것만으로도 로마제국 시대 도시의 구조, 예술과 생활상을 엿볼 수 있게 되었다.

발굴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가끔은 기존의 사실을 완전히 뒤집는 새로운 내용들이 밝혀지기도 한다. 일례로, 최근 학자들은 폼페이가 매몰된 시기가 여름이 아니라 가을이라고 본다. 이유는 사체들의 모습을 보면 여름옷이 아닌 다소 두꺼운 옷을 입은 흔적이 있고, 청과물 가게에서는 10월에나 볼 수 있는 과일과 채소가 발굴되었으며, 한 여인의 지갑에서는 티투스 황제가 재위했던 79년 9월 중순에 발행된 동전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소플리니우스의 기록을 후세에 잘못 필사했던 것일까?

어쨌든 폼페이는 로마제국 시대의 한 단면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세계 유일의 완벽한 ‘열린 박물관 도시’이며, 일생에 한 번은 꼭 찾아가볼 만한 곳이다. 그러고 보니 옛날 폼페이의 재앙은 후세 인류에게는 아주 귀중한 선물이 된 셈이다.

※ 정태남은… 이탈리아 공인건축사, 작가 정태남은 서울대 졸업 후 이탈리아 정부장학생으로 유학, 로마대학교에서 건축부문 학위를 받았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건축분야 외에도 미술, 음악, 역사, 언어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로마를 중심으로 30년 이상 유럽에서 활동했다. 저서로는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동유럽 문화도시기행』,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외에 여러 권이 있다.(culturebox@naver.com)

202212호 (2022.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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