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와 나치의 유대인 학살 사건이나 스탈린의 대숙청 사건 등을 접할 때 ‘인간이 인간에게 어떻게 이렇게까지 잔인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인상이 찌뿌려지기도 한다. 내 주변의 사람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인간에 대한 혐오는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가기도 하지만, 나 역시 그러한 인간 중 하나라는 사실은 무기력감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프란시스코 고야 [전쟁의 참상 제39번: 잘하는 짓이다! 시체를 가지고] 18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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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자 존 렉터는 저서 『인간은 왜 잔인해지는가』에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잔인해지는 이유를 ‘대상화’의 개념으로 설명했다. 상대를 나와 같은 사람으로 총체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낮은 수준인 도구이자 물건으로만 본다는 의미이다. 대상화의 가장 낮은 수준은 일상적 무관심이지만, 두 번째 단계는 타인을 나의 욕망을 실현하는 도구에 불과하다고 인지하는 유도체화이며, 마지막 단계는 상대를 인간으로서의 자격도 없다고 여기는 비인간화이다.
인간의 잔혹함을 목격한 화가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는 1746년 스페인의 가난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당시 유럽의 변방에 지나지 않았던 스페인은 대국의 침략 위협에 끊임없이 시달리고 있었으며, 왕정이 무력 세력들에 의해 빈번하게 교체되며 끊임없이 전쟁이 일어났다. 고야는 화가의 눈을 통해 끔찍한 시대의 모습을 그림에 담았다. 1810년부터 6년간 고야는 인간의 잔인성을 담은 그림 80장을 완성했고, 그의 사후인 1863년, 『전쟁의 참상』이라는 제목으로 판화집이 공식 출판됐다.1808년 프랑스 군인들이 스페인을 침략하려고 진입했다. 그러나 스페인 민중들은 프랑스군이 자신들을 스페인 지도자들의 학정으로부터 구해주기 위해 온 것이라고 생각해 군대를 환영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나폴레옹의 형인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스페인 왕으로 임명했고, 스페인 민중들은 이에 분노했다. 더는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한 스페인 민중들은 1808년 5월 2일, 민중시위를 벌였다. 그러자 프랑스 군대가 진압에 나섰고 시위에 참여한 시민들을 잔인하게 처형하는 등 학살극이 벌어졌다. 고야는 이 사건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다.궁정화가였던 고야는 1814년 섭정관에게 마드리드에서 일어난 스페인 시민의 봉기를 그림으로 남기는 것을 제안했다. 섭정관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고야는 이 사건을 시위 편인 [1808년 5월 2일]과 학살 편인 [1808년 5월 3일]이라는 작품에 담았다.
나 역시 같은 인간이라는 혐오감
▎프란시스코 고야 [1808년 5월 3일] 18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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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1808년 5월 3일]을 살펴보면, 어두운 밤하늘을 배경으로 저 멀리 교회가 보이고 왼편에는 시민들이 늘어서 있다. 오른편에는 고개를 숙인 프랑스 군인들이 스페인 시민들에게 총을 겨누고 있다. 군인들도 눈 뜨고 못 볼 만큼 처참한 살육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5·18 민주화 운동 때 우리나라 군인들이 그러했듯이, 혁명의 주체가 되었던 프랑스 군인들은 어느샌가 총 쏘는 기계로 전락해 있었다. 마치 가축을 도살하듯 기계적으로 시민들을 죽이고 또 죽이던 처형은 밤새도록 이어져 새벽을 맞았다.시민들은 두려움에 떨며 다른 사람의 뒤편에 숨기도 하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고통스러워하기도 하며, 머리를 움켜쥐며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애쓰기도 한다. 그들의 발밑에는 이미 목숨을 잃은 시체가 즐비하다. 총살형이 벌어지고 있는 지금, 여기 서 있는 시민들은 죽을 것이 분명하며, 그들 뒤에 길게 늘어진 줄은 앞으로도 많은 사람이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려준다.인간에게서 발견한 추악함과 광기는 인간 사회 전체에 대한 혐오로 퍼져나갔고, 시대의 잔혹함은 화가 자신에게도 부메랑처럼 돌아왔다. 그는 곧 자신이 그러한 인간 중 한 명이라는 사실과 직면하게 되었다.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
▎프란시스코 고야 [로스 카프리초스 제43번: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 17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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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는 1792년에 콜레라를 앓았는데 그때 고열 휴유증으로 청각을 잃었다. 그가 보아왔던 잔혹하고 어두운 세계는 세상의 소리가 사라짐과 동시에 더욱 깊이 잠기고 말았다. 고야가 그린 작품 [로스 카프리초스]에 등장하는 한 남자는 깊은 잠에 빠진 듯 책상 위에 엎드려 있다. 책상에는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고, 이는 곧 이 그림의 부제가 되었다. 남자의 등 뒤로 스라소니, 부엉이, 박쥐의 모습을 한 괴물들이 깨어나 눈을 뜨고 날갯짓을 하고 있다. 고야는 이 그림에서 한 인간이 이성을 외면하는 순간, 언제든지 괴물을 꺼낼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즉, 누구나 괴물을 마음속에 품고 있으며, 그것을 꺼내지 않으려 이성이 노력하는 것일 뿐, 나 역시 언제든 누군가를 해칠 수 있는 나약한 인간일 뿐이라고 고야는 이야기한다.프리드리히 니체의 저서 『선악의 저편』에는 “괴물과 싸우는 자는 그때 자기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오랫동안 심연(深淵)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심연도 그대를 들여다본다.”는 문구가 잠언 형식으로 등장한다. 인간은 본디 선하다는 성선설이 존재하는 이유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망을 숨기려고 만들어낸 가식적인 거짓말일 뿐이라는 의미이다. 니체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내면과 무의식, 욕망의 세계를 들여다보라는 주의를 주었다면, 고야는 욕망에 이기지 못한 인간이 결국 심연으로부터 지배당하는 공포를 표현했다.남자는 종이에 무언가를 쓰다 잠이 들었고, 그의 뒤에는 스페인에서 지혜의 여신과 함께 다니는 동물로 알려진 부엉이가 날고 있다. 지혜로운 자라도 욕망의 그늘 안에 갇히면, 결국 그의 지혜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 충성하게 될 것이다. 잠에서 깨어난 남자는 다시 이성의 힘으로 욕망을 누를 것인가, 아니면 다른 선택을 할 것인가. 그는 과연 어떤 글을 써 내려나가게 될까.
무엇이 옳은 선택인가
▎프란시스코 고야 [라사리요 데 토르메스] 18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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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사리요 데 토르메스』는 스페인의 사실주의 소설이다. 특이한 점은 과거 소설들의 주인공은 대부분 왕이나 신분이 높은 사람이었는데, 이 소설은 신분이 낮은 피카로라는 소년이 주인공이라는 것이다.인간은 스스로를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며, 그렇지 못한 자를 고결하게 비난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인간조차 이성을 버리고 자신의 의지와 달리 움직이는 것은 언제일까. 고야가 살았던 스페인에서 수많은 종교재판이 행해졌듯, 인간은 고통받는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으로 진실을 저버리기도 한다. 유대교인이 아닌 자들도 며칠 동안 고통스러운 고문을 받고 나면 유대교인이라고 거짓자백을 했다. 살아남고 싶은 욕망 때문에 스페인 사람들은 조국을 버리고 프랑스 편에 서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의 편에 서서 자신의 안위를 챙긴 한국인 역시 검은 욕망에 사로잡힌 자들이었다.소설 『라사리요 데 토르메스』에서 주인공 피카로는 천한 신분의 아이었고, 그 아이가 모시던 주인님은 장님이었다. 아이는 배고팠고, 굶주렸으며, 소시지가 먹고싶었다. 배고픔이라는 가장 원초적이고 강한 욕망을 이기지 못한 피카로는 주인의 음식에 손을 댄다. 피카로는 주인의 소시지를 몰래 먹은 후 주인의 빵 사이에 소시지 대신 무를 집어넣는다. 그러나 냄새로 이를 알아챈 주인이 피카로의 입을 강제로 벌리고 입안에 남아 있는 소시지의 냄새를 확인하고 있다. 소시지가 먹고 싶은 욕망, 내 것을 부당하게 빼앗기고 싶지 않은 욕망. 서로에 대한 예의가 없는 욕망들은 개인을 메마르게 하고,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며, 사회를 불편한 곳으로 만든다. 어디에도 배려는 보이지 않는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
▎프란시스코 고야 [아들을 먹어치우는 사투르누스] 18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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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대상화하는 것이 처음에는 불편했던 사람들도 사건이 반복되면 무뎌진다. 누군가를 함부로 대하는 것, 학대하는 것, 피해자를 방임하는 것도 처음이 어렵지 그다음은 쉬워진다. 스페인 국민을 무차별하게 사살했던 프랑스 군인들도 자신을 사랑해주는 부모 밑에서 자란 소년들이었을 것이다. 말하는 법, 숫자 읽기, 테이블 매너를 배웠을 것이며, 생명의 소중함을 배우고 이웃을 배려하는 법도 배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소년들이 자라 다른 이를 죽이고 죽는 모습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어른이 되었다.프랑스가 나쁘고 스페인이 피해자인 것만은 아니었다. 프랑스에 뺏겼던 주권을 다시 찾은 스페인은 자신들이 당한 만큼 똑같이 되돌려준다. 모든 인간 안에는 괴물이 살고 있고, 그들이 활동할 기회의 장을 만나는 순간 괴물은 폭발하듯 움직인다. 선하게 살아가는 이들은 기회가 없었을 뿐, 누구나 괴물이 될 잠재력이 있다는 것이 고야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고야 자신도 그중 하나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고야의 작품 [아들을 먹어치우는 사투르누스]에는 그리스신화에서 올림푸스의 왕 제우스의 아버지인 사투르누스가 등장한다. 사투르누스는 고대 로마의 농경신으로, 그리스에서는 크로노스라 불린다. 크로노스는 아버지 우라노스가 자식들을 계속 죽이자 아버지의 생식기를 잘라 바다에 던진 자이기도 하다. 크로노스는 아버지를 거세할 때 ‘태어난 너의 자식이 너를 죽일 것이다’라는 저주를 받았다. 크로노스는 아이가 태어나는 대로 계속 먹어치웠고, 고야는 그런 장면을 포착하여 작품으로 탄생시켰다.살고 싶은 욕망은 아버지가 아들을 먹어치우는 행동까지도 가능하게 한다. 죽고 싶지 않아 두려움에 떨며 이미 머리를 먹어치워 죽어버린 아이의 팔을 물어뜯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은 자신을 위해 타인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는 무심하고 잔인한 사회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 것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은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홀로코스트 동안 겪은 기억을 모아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저서를 발간했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는 인간의 대상화 중 세 번째 단계인 비인간화가 그 어느 곳보다 잔인하게 진행되었던 곳이다. 프랭클은 2차 세계대전 중 수용소를 무려 네 번이나 옮겨 다니며 매번 선택이 죽음과 직결되는 절대적이고 불가피한 시련과 맞닥뜨렸다. 그러나 인간다움을 상실한 이곳에서 프랭클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이 책의 원제목이 『Man search for meaning』인 것에서도 알 수 있듯, 그가 내린 결론은 의미 있고 목적 있는 삶으로 만드는 것이었다.굶주린 상황에서 남의 음식을 훔치는 사람, 고통받거나 죽어가는 동료를 방관하는 사람, 나치의 편에 서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프랭클은 환경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는 수용소 생활 중에서도, 가치 있는 목표를 자유의지로 선택하고 그를 위해 노력하고 투쟁해 훌륭한 인격을 보이고 인간 존엄성을 지켜낸 사람들을 본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 또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 대부분이 살아남을 이유와 목표가 확실한 사람이었음을 확인했다.결국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를 선택하고, 내면의 자유를 찾는 것이다. 쾌락을 얻거나 고통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다.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으며, 살아 있는 한 욕망은 필연적으로 이성과 싸워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왜 사는가’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살아간다면, 삶은 가치 있는 방향으로 향해 갈 것이고, 자신이 그러하듯이 삶의 가치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도 여전히 많을 것이다. 인간을 대상화하는 사회에 좌절하기보다는 ‘나’부터 인간다움을 잃지 않으며 살아가기 위해 삶의 의미를 찾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 김소울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플로리다주립대학교에서 미술치료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국제임상미술치료학회 회장이며 국민대학교 디자인대학원 미술치료전공 겸임교수이자 가천대학교 조형예술대학 객원교수이다. 플로리다마음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치유미술관』외 12권의 저역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