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말 밑바닥부터 시작해 길을 열었다. ‘작업복은 노동자 복지’라는 일념으로 작업복·작업화·유니폼 등을 선보이며 가격·품질에서 ‘시장의 기준’을 제시했다. 티뷰크(T·BUC) 브랜드로 알려진 새울토피아의 홍대선 회장. 그는 G밸리가 자리한 금천·구로 지역에서 복지재단을 운영하며 선한 영향력을 펼치고 있다.
▎홍대선 새울토피아 회장은 40년 가까이 작업복 (작업화·유니폼) 생산 한길을 걸어왔다. 쉼 없는 연구개발과 지역사회 나눔을 통해 ‘장사꾼 기질’에서 ‘기업가 정신’으로 성장했다. |
|
한국 노동 현장에 작업복 개념이 도입된 시기는 1980년대 이후로, 산업현장 노동자의 안전과 근로 환경 개선의 상징이 되면서 수요가 크게 증가했다. 새울토피아는 1978년 산업안전 보호구 판매로 시작해 작업복(작업화·유니폼) 분야에서 40년 넘게 한 우물을 판 기업이다. 특히 1990년대 들어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패션 대기업이 뛰어들었지만 1조원(2022년 기준) 규모 시장에서 여전히 선두를 지키고 있다. 자체 공장 없이 아웃소싱으로 시장에 진출한 대기업과 달리 자체 공장을 갖추고 가격·품질 면에서 시장의 기준을 제시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대표 브랜드는 2000년 론칭한 ‘티뷰크(T·BUC)’로, 산업현장에선 꽤 유명하다. 사무용 근무복부터 기능성 작업복, 안전화까지 우수한 품질과 합리적인 가격을 내세워 국내 유니폼 브랜드 1위를 달리고 있다. 새울토피아의 2022년 국내외 매출은 1200억원 규모. 한국 본사를 중심으로 중국에서 원부자재 소싱을, 인도네시아와 미얀마에서 생산 공장을 가동하고 있다.새울토피아의 시장 경쟁력은 가격과 품질에서 찾을 수 있다. 서울 금천구 본사에서 만난 홍대선 회장은 “우리 회사의 슬로건이 ‘하이 퀄리티, 로 프라이스’인데 이를 실현하려면 기술력과 함께 공장을 직접 운영해 품질관리를 탄탄히 잡아야 한다”며 “자본이 쌓이면서 인수합병(M&A) 기회도 많았지만 ‘한 분야에서 최고가 되자’는 생각에 곁눈질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홍 회장은 열정맨이다. 하루 2만 보를 걸으며, 시사·경제 이슈를 담은 블로그 ‘홍따샤의 세상이야기’도 직접 운영한다. 그는 “인터뷰 한다 해서 오랜만에 양복을 챙겨 입었다”며 웃었다.
“필드에 약하면 어느 기업이든 성공 못 해”
▎홍대선 새울토피아 회장은 “ 생 산 현장에서 뛸 때, 내가 가진 것을 나눌 때 가장 행복하다”고 말했다. |
|
시작은 1978년 서울 영등포의 작은 점포 ‘새마을산업공사’를 사들이면서다. 산업안전 보호구, 청소용품 위주의 잡화점이었는데 가까운 곳은 자전거로, 먼 곳은 용달차로 배달하며 사업을 키웠다. 본격적으로 작업복 생산에 나선 것은 1980년대 들어서다. 홍 회장은 “산업화 속도가 빨라지면서 제품 소싱을 위해 중국 심천, 우한 등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우연찮게 미싱 3000대가 가동되고 있는 군복 공장을 방문했는데 그 활기찬 분위기에 압도당했다”고 말했다.당시 한국에서도 노동 현장의 작업복 수요가 늘고 있었지만 대형 생산업체가 없어 공장마다 봉제공장에 맞춤으로 주문해 입는 실정이었다. 고민 끝에 홍 회장이 내린 결론은 ‘작업복의 기성화’였다. 서울 방산시장, 평화시장 등을 돌아다니면서 시장조사를 하고 다시 중국에 갔다. 그러나 생산원가는 상당히 낮았지만 원단, 원부자재의 퀄리티가 형편없었다. 원단 염색 등 기술력도 부족해 한국에 들여온 제품은 한 계절을 넘기지 못했고 반품이 쇄도했다. 가진 돈의 반 이상을 투자했는데 한 푼도 건지지 못하고 실패로 끝났다.“그때 고난은 재기의 발판이었다.” 홍 회장은 이때부터 옷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더는 시행착오가 없어야 한다’는 각오로 원단, 염색, 변색, 봉제 등 현장을 찾아다니며 치열하게 공부했다. 그 결과 중국에서 생산한 두 번째 작업복은 대박이 났다. 이때 인연을 맺은 중국 거래처와 계속 함께하고 있다. 홍 회장은 “1992년 한중 수교가 이뤄지면서 본격적으로 사업이 커졌고, IMF 외환위기 때도 대금 납부 연장 등으로 위기를 넘는 데 많은 도움을 줬다”고 말했다.홍 회장은 “1990년대만 해도 품질보다는 가격이 우선인 시대여서 바느질이 잘되었나 정도만 따지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품질과 가격을 다 잡고 싶었다”며 “원부자재를 직거래해 제작단가를 최소화했고, 해외에 공장을 직접 운영해 가격 대비 성능이 우수한 작업복을 만들어냈다”고 말했다. 2000년 티뷰크 브랜드를 론칭하면서 사업은 본격적으로 상승세를 탔다. 2006년엔 자체 사옥을 매입하면서 G밸리와 인연을 맺었다.
“시장의 가격거품 거둬낸 역할에 자부심”새울토피아는 2008년에 인도네시아 공장을 인수해 자체 생산을 시작했고, 인건비 상승을 피해 2022년엔 미얀마에도 공장을 세워 가동 중이다. 홍 회장은 “우리 같은 중소기업이 가격과 품질 모두 수준급으로 유지하려면 자체 공장이 필수적”이라며 “품질을 못 잡았다면 이 자리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다. 지금도 인도네시아와 미얀마 공장에 한 달에 한 번 출장을 간다”고 말했다. 그는 “필드에 약하면 어느 기업이든 성공하지 못한다”고 덧붙였다.이처럼 품질 경영은 새울토피아 성장의 근간이 됐다. 대표적인 것이 티뷰크 안전 라인으로, EN ISO 20471(유럽국제안전규격)에 적합한 고휘도 반사띠를 사용한 제품이다. 어느 방향에서 어느 각도로 빛이 들어오더라도 광원의 방향으로 빛을 반사해 운전자로부터 작업자의 안전을 확보한다. 홍 회장은 “재귀반사 기능으로 ISO 인증을 받은 회사는 쓰리엠(3M)과 새울토피아뿐”이라고 말했다.2000년대 들어 기업이 대형화·전문화되면서 기능성에 대한 니즈가 높아졌다. 홍 회장은 현재 업계 1위 브랜드인 티뷰크를 2000년에 론칭했다. ‘더 베스트 유니폼 컬렉션(The Best Uniform Collection)’에서 이니셜을 땄다. 2009년엔 회사 이름도 새울토피아(SAEOUL TOPIA Co.)로 바꾸었다. 새마을에서 ‘마’ 자를 빼고 ‘새을’이라고 지었다가 발음이 쉽지 않아 88서울올림픽 선정지 발표 당시 사마란치 IOC 위원장의 ‘쌔울 코리아’를 차용해 ‘새울’로 명명했다. 홍 회장은 “이전엔 메인 라벨 없이 사이드 라벨만 붙여왔는데 기능성을 중요시하는 시대가 열리고 외국 브랜드들이 속속 한국에 상륙하면서 상표의 중요성도 커져서 메인 라벨을 붙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2001년엔 국내 브랜드 최초로 작업복 카탈로그를 만들어 시장에 보급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8만 부 넘게 발행하면서 시장 트렌드를 선도하고 있다. 현재 새울토피아는 브랜드 3개와 서브라인 2개를 운영한다. 작업복 브랜드 중 가장 많은 제품군을 보유하고 있는 티뷰크는 기성복임에도 불구하고 자수·전사·나염·재귀반사띠 등 다양한 맞춤형 후가공 서비스가 특징이다. 캐주얼 감성의 단체복 마크(MARK)는 외출복으로 입어도 손색이 없고, 티뷰크 세이프티는 안전규격이 필수인 현장과 수요가 많지 않더라도 전문성과 특성이 강한 현장에서 일하는 작업자를 위한 제품이다.홍 회장은 “이렇게 많은 품목을 유지하는 회사는 우리뿐”이라며 “원단과 부자재 소싱의 어려움과 작업 공정의 복잡함, 재고량 문제 등도 있지만 소비자의 니즈에 답하겠다는 목표로 다양한 제품을 공급하고 있다”고 말했다.새울토피아 제품의 가장 큰 매력은 가성비다. 기능성을 갖추면서도 제품 가격을 타 브랜드의 절반 정도로 책정했다. 홍 회장은 “작지만 뚜렷한 성공을 이루면서 시장의 가격 결정에서 중요한 지위를 갖게 됐다. 브랜드 투자 대신 같은 퀄리티의 제품을 반값에 선보이면서 가격거품을 뺐다고 자부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최근 다양해지는 MZ세대의 취향을 이해하기는 하지만 작업복 시장만큼은 그렇게 브랜드에 좌우되지 않는다”며 “‘작업복과 유니폼은 직원복지’라는 게 우리의 철학”이라고 강조했다.새울토피아는 전국 120여 곳의 티뷰크 공식대리점과 총판사업자들의 안정적인 매출을 보장하기 위해 본사는 직접 판매에 나서지 않는다. 홍 회장은 “본사에 영업부가 없다. 모든 판매는 대리점과 총판사업자에게 맡긴다. 총판에 중간마진을 최대한 주고, 그들이 직접 판매를 통해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눔엔 오지랖 안 아껴 “그래도 남는 장사”홍 회장은 G밸리가 자리한 금천·구로 지역에서 손꼽히는 사회사업가다. 2007년 티뷰크사회복지재단을 설립한 그는 이후 금천누리복지관, 궁동종합사회복지관 등을 운영하면서 집수리 사업, 밑반찬 지원 사업, 다문화 가정 결혼식 지원, 자연정화활동 등을 진행하고 있다. 또 소상공인들과 청년활동가들에게 무상으로 작업복을 지급하고, 인도네시아와 미얀마 현지 공장 노동자의 복지 향상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홍 회장은 “사재를 털어 나눔 활동을 시작하게 된 데는 유년 시절의 아픔이 있다”고 말했다. 한국전쟁 전 조부의 월북과 연좌제에 묶인 아버지 탓에 집안은 퇴락의 길을 걸었고, 그는 어린 나이에 신문 배달과 ‘아이스께끼’ 장사 등으로 집안을 도와야 했다. 그는 “이런 경험들이 돈에 대한 집착과 돈을 벌 수 있는 강단을 만들었고, 이후 복지재단 설립의 동기가 된 것 같다”며 “일부에서 ‘정치하려느냐’는 말도 나와서 감사패도 안 받고 조용히 봉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G밸리에서 홍 회장의 얼굴을 아는 이가 많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또 “생산 현장에서 뛸 때, 내가 가진 것을 나눌 때 가장 행복하다”고 덧붙였다. 쉼 없는 연구개발과 지역사회 나눔을 통해 ‘장사꾼 기질’에서 ‘기업가 정신’으로 한 걸음 나간 것이다.“내가 좀 괴짜”라는 그의 말처럼 나눔 활동 오지랖은 현재도 넓어지고 있다. 지난 2월엔 인천 계양구청 앞에 ‘홍따샤왕갈비탕 계양점’을 오픈했다. 제주도의 대박 왕갈비탕집 노하우를 옮겨온 일종의 프랜차이즈 매장인데, 생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족에게 자본금을 지원하는 자립형 매장이다. 생활비를 주는 나눔에서 자립을 돕는 지원으로 진화한 것으로, 올해 4~5호점까지 낸다는 계획이다. 홍 회장은 “일을 자꾸 벌인다는 말을 듣곤 하지만 이게 진짜 내가 행복한 이유다. 돈은 써야 내 돈이지 쓰지도 못하고 가면 남의 돈”이라며 “그래도 남는 장사”라고 말했다.- 조득진 선임기자 chodj21@joongang.co.kr·사진 임익순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