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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웅의 무역이 바꾼 세계사(36) 로마와 한나라, 미국과 중국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이 점점 더 치열해지고 있다. 21세기 세계 패권을 두고 경쟁하는 초강대국 미국과 중국의 원형은 고대의 로마와 한나라에서 찾아볼 수 있다. 미국은 서구에서 로마를 계승한 공화정 국가이며, 중국은 한나라가 구축한 중화 세계를 계승한 나라다.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2세기까지는 페르시아와 인도의 쿠샨왕조도 있었지만, 큰 그림에서는 중국과 로마 두 나라를 중심으로 세계사의 큰 틀이 만들어진 중요한 시기이다. 기원전 100년을 전후한 시기, 유라시아 전역에 풍운이 일었다. 그 이전 진시황의 중국 통일, 마케도니아 알렉산더의 제국 건설, 마우리아 왕조의 인도 통일이 있었으나 이 셋 모두 오래가지 못했다. 지중해에서 황해에 이르기까지 유라시아 대륙 전역에서 새로운 시대 질서를 요구했고, 한나라, 로마, 쿠샨, 페르시아가 이 시대를 주도했다. 페르시아가 금은 세공품과 비단 등 중개무역으로 큰 이익을 보며 두 나라의 직접 접촉을 막았지만, 한나라는 간접적인 접촉을 통해 로마를 대진국(大秦國)이라 불렀으며 그 존재를 알고 있었다.

기원후 91년 몽골고원의 북흉노는 한족과 신흥 선비족에 쫓겨났다가 2세기 후 훈족으로 유럽사에 등장해서 4세기 중반 흑해 고트족을 공격하며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훈족은 흉노라고 여겨지는데, 이들 훈족으로 인해 수많은 고트족 피란민이 로마제국 변방에 몰려들어 대혼란을 일으켰고, 이는 연이어 게르만족 대이동과 서로마의 붕괴를 불러왔다. 후한시대인 서기 166년에는 로마 사절단(상인)이 낙양에 와서 상아, 무소뿔, 거북껍질을 바쳤고 3일간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 로마 사절단은 비단을 구하기 위해 2년간 1만2000㎞를 달려 낙양까지 온 것이다. 당시 로마에서는 요즘 돈으로 22억 달러 상당의 비단을 수입했으며, 한나라는 중화사상과 중화제국을 형성해 동아시아 문화의 기초를 만들었고, 로마는 근대 유럽 문명과 패권국 미국의 원형을 제공했다.

한나라와 로마제국이 교류를 시작한 이래 약 450년 동안 고대 세계는 엄청난 변화를 거듭했다. 예수가 탄생할 무렵, 두 제국은 세계 인구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한나라 황제들은 무역과 통신을 발달시키고자 한나라 전역을 가로지르는 길이 3만5000㎞ 도로를 건설했으며,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도입했다. 장안성은 25만 명이 훌쩍 넘는 인구를 가진 거대한 상업도시로 성장했으며, 한나라는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실크로드의 무역 네트워크를 확보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당대 최첨단 무기인 중앙아시아의 빠른 말, 한혈마(汗血馬)를 확보한다는 목적도 있었다.

이 시대에 박트리아 왕국을 점령한 월지는 실크로드의 ‘원형 교차로’라는 탁월한 입지에 힘입어 쿠샨제국이라는 정주국가를 건설했다. 박트리아의 틸리아 테베에서 발견된 1세기 무덤에서 시신은 금실로 장식한 화려한 옷을 입고, 손에는 그리스식 장례 전통에 따라 지중해산 향수병, 중국산 거울, 중앙아시아 금화를 쥐고 있었다. 또 그리스와 유목민의 전설·신·생물을 묘사한, 중앙아시아와 북인도산 보석이 함께 묻혀 있었다. 쿠샨제국 서쪽에서는 그리스 후예였던 셀레우코스제국이 파르티아에 잠식당하고 있었다. 파르티아는 쿠샨제국과 마찬가지로 중국과 유럽 사이에서 실크로드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제국을 건설했다.

1세기 중엽에 로마 항해사였던 히파루스(Hipalus)가 아라비아인들로부터 인도양 계절풍의 비밀을 알아내고, 아테네에서 홍해를 거쳐 인도에 이르는 원거리 무역에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되었다. 중국에서 인도로 팔려나간 비단이 인도 서해안으로부터 해로로 로마까지 운송되기 시작했다. 3세기 중엽에는 로마의 배가 인도차이나와 광동성까지 항해하기도 했다.

독일 사회과학자 제프리 파커에 따르면 인류 역사상 두 번의 군사혁명이 있었고, 이 군사혁명들이 제국의 질서를 만들었다고 한다. 첫 번째 군사혁명은 고대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 일어났다. 주왕조가 명목상의 권위를 유지하던 춘추시대를 지나 전국시대에는 칠웅이라 불리는 한, 위, 조, 제, 초, 연, 진 등 일곱 나라가 각기 중원을 놓고 치열하게 전쟁을 벌였다. 모두가 부국강병을 기치로 내세웠는데, 부를 쌓아 막강한 군사력을 키워 상대편 땅을 차지하는 승자독식의 시대였다. 이때 군대의 숫자가 100만에 이르렀다. 100만 명 규모의 인력과 자원을 운영할 수 있는 행정력, 정치력, 경제력이 함께 발전했다. 즉, 표면적으로는 군사력의 발전, 즉 군사혁명이었지만, 실제로는 그 힘을 운영할 수 있는 제국 질서의 성립을 뜻한다. 이로 인해 중국은 진나라의 통일 이후에 제국의 역사를 이어나갔다. 반면 유럽은 로마 멸망 이후에 여러 국가로 분열되며 국가 간 치열한 각축이 계속되었다.


▎로마인들에게 사랑받은 중국 비단. / 사진: 위키피디아
두 번째 군사혁명은 근대 유럽에서 일어났다. 중국 전국시대와 비슷하게 유럽에서도 15~16세기 이후, 여러 국가 간에 치열한 전쟁이 일어났다. 15세기까지만 해도 3만 명에 불과했던 프랑스 군대는 루이 14세 때에는 45만 명으로 늘었다. 중국에서는 전국시대의 각축이 진시황의 통일로 마무리되었지만 유럽에서는 결판이 나지 않고 전쟁이 200~300년간 계속되었다. 부국강병의 결과로 얻은 강력한 경제력과 군사력으로 끊임없이 전쟁을 했지만 유럽 전체가 끝내 하나의 제국으로 통합되1지는 못했다. 그렇게 비축된 경제력과 군사력으로 유럽 국가들은 바깥으로 눈을 돌려 세계 각지의 식민지로 뻗어나갔다. 제프리 파커에 따르면 “유럽 각국은 유럽 바깥에 각자 자신의 제국을 건설했다. 그 식민지 중의 하나였던 미국의 천혜의 자원과 지리적 강점을 바탕으로 20세기의 로마, 미국을 건설한 것이다.

2000년 한나라와 로마제국, 양대 제국은 간접적으로 접촉하며 서로 호의를 가졌지만, 21세기에 이들을 계승한 중화인민공화국과 미합중국은 세계 패권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시대가 저물어가고, 탈세계화되는 격동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두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새우 등이 터지는 게 아니라 돌고래 같은 한국이 되면 좋겠다.

중국산 비단 때문에 경제 파탄에 이른 로마


▎비단 속옷을 입으며 남성의 비단 금지령을 무너뜨린 로마의 황제 칼리굴라. / 사진: 위키피디아
로마인들의 중국 비단 사랑은 대단했다. 원산지인 중국에서도 비단은 비싼 옷감이었지만, 로마에 도착하면 가격은 100배가 뛰어올랐다. 비단은 같은 무게의 금보다 비싼 적도 있었다. 몇 온스 가격이 일반 시민의 1년 소득과 비슷할 만큼 비쌌다. 아무리 비싸도 로마인들의 비단 사랑은 식을 줄 몰랐다. 로마 여인들은 특히 몸매가 다 드러나는 얇은 비단을 좋아했다.

로마제국이 비단을 수입하기 위해 막대한 금·은·화폐를 사용해 국가 재정이 파탄 나 멸망했다는 설도 있다. 당시 로마의 정치인 가이우스 플리니우스 세쿤두스는 “아주 먼 동방에 있는 숲속에서 비단을 수확해서 여러 단계 가공을 거쳐 로마에 수출하자 로마는 비단옷에 매혹되기 시작했다. 아무리 보수적으로 계산해도 인도·중국·아라비아반도는 매년 무역을 통해 1만 세르테르세스의 이익을 남겼다. 이는 로마 부녀자들이 사치품을 구매하는 총액과 같은 규모였다”라고 『박물지』에 기록했다.

기원전 3000년부터 중국에서 생산되기 시작한 비단은 국가적인 첨단 사업이었고, 제조법은 비밀에 부쳤다. 비단 제조 기밀을 누설하는 자는 사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중국에서 로마까지 비단이 들어오는 길은 크게 두 갈래였다. 하나는 실크로드라고 불리는, 중국에서 지중해 연안까지 중앙유라시아를 관통하는 육로이고, 다른 하나는 말라카해협을 지나 인도양을 거쳐 홍해를 거슬러 올라와 알렉산드리아까지 오는 해로였다. 두 길이 너무 달라서 한때 로마인들은 육로로 오는 비단의 생산국은 세레스, 해로로 오는 비단의 생산국은 시나에라고 부르는 등 서로 다른 국가라고 착각했다.

중국은 은본위제 국가였기 때문에 로마는 비단 수입의 대가로 은을 제공했는데, 비단의 인기가 높아지자 유출되는 은의 양도 크게 늘었다. 기원후 14년 로마 원로원은 남성이 비단옷을 착용하지 못하게 했다. 비단이 퇴폐 문화를 조장한다고 하여 비단옷 자체를 공식적으로 금지하자 오히려 비단 무역은 급증했다. 로마인들의 비단 구매욕이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던 것이다. 다음 황제인 칼리굴라가 비단 속옷을 입으면서 금수령은 무너지고 남자들도 비단옷에 빠지게 되었다. 이후 비단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2세기 무렵에는 비단 자체가 화폐처럼 거래에 활용되기도 했다.

로마 재정은 비단 대금으로 지불되는 은의 유출을 감당하지 못했다. 은화에 들어가는 은의 함량은 줄어들었고, 돈의 가치가 떨어지고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3세기 중반에는 은의 함량이 초기 은화의 5000분의 1까지 떨어져 고철 가치까지 추락했다. 화폐가치의 하락은 물가상승으로 이어졌고,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화폐로 세금을 징수하는 것이 의미가 없어지자 디오클레티 아누스 황제는 조세를 현물로 받기 시작했다. 현물 납세는 경제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시장 수요를 위한 생산은 사라졌고, 경제 전체가 자급자족 형태로 바뀌었다. 자급자족 경제에서는 현물 간 거래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금화나 은화 같은 화폐는 거의 유통되지 않았고, 군인의 급료도 생필품이나 곡물, 가축 등 현물로 지급되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어렵게 되자 접경지대에 주둔하고 있던 군인들을 국내로 불러들일 수밖에 없었다. 지중해 전역에 걸쳐 있던 로마제국의 쇠퇴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결국 비단 수입으로 인한 중국과의 대규모 무역적자가 로마의 몰락을 촉발한 것이다. 로마 철학자 세네카와 정치가인 플리니우스는 비단 수입으로 인한 막대한 재정 지출이 로마의 쇠퇴를 재촉했다고 지적했다.

오늘날 미국을 보면 로마제국이 쇠퇴하는 모습과 닮아가고 있다. 미국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 이렇게 해도 되는지 걱정될 정도로 돈을 많이 찍어냈다. 금 태환이 폐지된 1970년 이후 금값은 500~600배가량 치솟았다. 2000년 전 중국 비단 때문에 발생한 로마의 심각한 무역적자는 21세기에도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똑같이 재현되고 있다. 24년째 기업경영을 하면서 이렇게 미래가 불확실한 적이 없었다. 앞으로 수십 년간 로마시대 말기와 같은 경제 파탄이 난다면 우리네 인생살이는 더 고달파질 것이다.

※ 김정웅 대표는… 연세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하고, 약 30년간 40여 개국 수백만 마일을 날아다니며 지구촌 구석구석에 수십억 달러를 사고팔아 온 무역 일꾼. 2000년 기업 간 전자상거래회사인 서플러스글로벌을 설립해 반도체 중고장비 분야 세계 1위 강소기업으로 성장시켰다. 2012년 발달장애인의 가족을 치유하고 지원하기 위하여 ‘함께웃는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을 맡아 사회공헌에도 힘쓰고 있다. 2019년부터 아시아 최초로 개최된 자폐전문 박람회 Austism Expo 조직위원장을 겸임하고 있다. 2015년 6월 ‘이달의 무역인상’ 수상, 10월 무역의 날 대통령상 수상, 2018년 9월 Forbes Asia 200대 유망 기업에 서플러스글로벌이 선정됐다. 2015년부터 매년 실크로드 현지답사와 연구를 통해 지난 5000여 년간 실크로드 유목민과 장사꾼들의 흥망성쇠와 인류 무역사를 공부하며, 인류 역사의 추동력을 위대한 영웅과 황제, 선지자들보다는 장사꾼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있다.

202305호 (2023.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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