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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남의 TRAVEL & CULTURE | 오스트리아/하인부르크 & 로라우(Hainburg & Rohrau) 

하이든의 어린 시절 추억을 간직한 시골 마을 

‘빈(Wien)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3대 음악가는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이다. 그중 요제프 하이든(Joseph Haydn, 1732~1809)은 최고 연장자로, 모차르트보다 24세, 베토벤보다 38세 더 많다. 그런데 모차르트와 베토벤은 각각 잘츠부르크(Salzburg)와 본(Bonn) 같은 명문 도시 출신이지만 하이든은 웬만한 지도에서는 표시도 안 되는 작은 시골 마을 로라우 출신이다.

▎하이든 생가의 안뜰. / 사진:정태남
로라우는 수도 빈에서 동쪽으로 약 45㎞에 위치한 작은 시골 도시 하인부르크(Hainburg)에서 남쪽으로 12㎞가량 떨어져 있다. 하인부르크는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동쪽에 있는 도시이며, 이곳에서 슬로바키아 국경까지는 4㎞밖에 되지 않는다.

소박한 하이든의 고향


우아한 성모 마리아 성당이 보이는 하인부르크 시가지 중심부에 들어서면 하이든의 흉상이 먼저 눈에 띈다. 이 도시는 하이든이 6세부터 8세까지 살았던 곳이다. 이곳에서 하인부르크의 향토음악가 엠베르거(F. Emberger)씨가 전통악사 복장 차림으로 동양의 먼 나라에서 이 구석까지 찾아온 ‘하이든 순례자’를 맞아주었다. 그가 백파이프를 연주하자 지나가던 초등학생들이 축제의 한 장면 같은 광경을 신기하게 지켜봤다. 아이들의 얼굴을 보니 하이든의 어린 시절이 연상되었다. 사실 하이든은 축제 때 연주되던 이런 민속음악에 크게 매료되었던 것이다.

하인부르크에서 하이든이 태어난 로라우로 향했다. 이 마을에는 18세기에 세운 하라흐(Harrach) 궁이 구심점을 이루고 있는데, 합스부르크 왕조하에서 하라흐 가문은 명문 귀족 가문 중 하나로 손꼽혔다. 하라흐 궁에서 약 250m 떨어진 도로변에는 하이든의 생가가 있다. 이 생가는 원래 오두막집이었지만 깔끔하게 복원되어 지금은 하이든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박물관 안에는 하이든이 활동하던 시대에 쓰던 악기를 비롯하여, 하이든 가족과 관련된 당시의 서류, 악보 등이 전시되어 있어서 하이든의 생애를 엿볼 수 있다. 특히 하이든과 그의 동생 미하엘 하이든이 태어났던 방은 당시처럼 재현되어 있다.


▎하이든의 어린 시절 추억이 담긴 하인부르크 중심 광장의 성당. / 사진:정태남
하이든은 만우절인 1732년 4월 1일에 마티아스 하이든과 에바 마리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만우절에 놀림당하는 것이 싫어서 생일을 3월 31일로 앞당겼다고 한다. 그를 포함한 12남매 중 6명은 일찍 죽었고 살아남은 아들 3명은 모두 음악가가 되었다. 요제프와 동생 미하엘 하이든은 유명한 작곡가가 되었고 막냇동생 요한 에반겔리스타는 가수로 활동했다.

하이든의 어머니는 하라흐 궁의 요리사였고, 아버지는 원래 하인부르크 출신으로 마차바퀴 제작 수리업자였다. 때로는 하라흐 백작의 위임으로 마을 도로 관리자 및 재판·관직을 맡기도 했다. 하이든의 부모는 악보를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아버지는 민속음악을 좋아하여 하프를 독습할 정도로 음악에 열성적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하이든은 어릴 때부터 음악에 깊은 관심과 재능을 보였다. 그는 로라우 주변의 갈대숲에서 들리던 새 울음소리에 매혹되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아버지의 대장간 안에서 일정한 리듬으로 들려오던 망치 소리도 그에겐 음악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런데 로라우는 워낙 작은 마을이었기 때문에 어린 하이든이 제대로 된 음악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기회가 왔다. 하인부르크의 학교장이자 성당의 음악감독이던 친척 아저씨 요한 프랑크의 제의로 그의 집에서 머무르며 음악교육을 받기로 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하이든은 6세 때 고향 로라우를 떠나 하인부르크로 향했다. 이로써 하이든은 부모의 품을 영원히 떠나게 되었다.

어린 하이든의 하인부르크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친척 아저씨는 학교에서 아이들이 말을 듣지 않으면 당장 소리를 지르며 회초리를 휘두르곤 했다. 하이든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훗날 하이든은 하인부르크 시절에 대해 친척 아저씨 집에서 밥 먹은 횟수보다 매 맞은 횟수가 더 많았다고 회고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어쨌든 하이든은 그에게서 성악뿐 아니라 여러 악기도 배우면서 음악적으로 성장해갔다.


▎로라우에 보존된 하이든 생가(오른쪽). / 사진:정태남
그러던 중 그의 일생을 완전히 바꾸어놓는 기회가 찾아왔다. 하이든이 8세가 된 1740년, 수도 빈의 슈테판 대성당 음악감독 게오르크 로이터가 우연히 하인부르크에 들렀다가 성당의 소년 성가대에서 어린 하이든이 부르는 노래에 감명을 받고는 당장 그를 수도 빈으로 데려갔다. 이후 하이든은 슈테판 대성당 소년 성가대에서 활동하면서 하인부르크와는 차원이 다른, 무한히 넓은 세계를 접하게 되었다. 물론 이곳의 엄격한 규율 때문에 생활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하이든의 인생 역전 드라마


▎요제프와 그의 동생 미하엘 하이든이 태어난 방. / 사진:정태남
하이든은 9년 후 변성기기 되자 소년 성가대를 그만두고 한동안 고달픈 떠돌이 음악가 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1761년에 유력 귀족 가문 에스테르하지 소유 오케스트라의 부악장으로 초빙을 받고 빈에서 남쪽으로 약 50㎞ 떨어진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영지 아이젠슈타트로 이주했다. 그는 그곳에서 약 30년 동안 에스테르하지 가문을 위해 일하면서 수많은 곡을 썼다. 물론 개인적인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는 없었다. 그의 신분은 어디까지나 특권과 지위가 주어진 ‘존경받는 충실한 하인’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영향력 있는 귀족 가문 덕택에 그의 작품은 가장 권위 있게 외부에 알려질 수 있었다. 사실 그가 쓴 불멸의 작품 대부분은 그곳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작곡했다.

아이젠슈타트에서 활동을 마친 그는 수도 빈으로 가서 여생을 보냈다. 이 시기에 영국을 두 차례 방문했고 그곳에서 대규모 걸작을 발표하여 영국 청중을 사로잡았으며 옥스퍼드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도 받았다. 얼마 전까지 하인 신분이었던 그는 최고의 명사가 되어 귀족들과 어울릴 수 있었다.


▎민속음악을 연주하는 하인부르크의 향토음악가 엠베르거. / 사진:정태남
그가 마지막으로 공식 행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808년 3월 27일. 그날 그의 76세 생일을 축하하며 빈대학이 마련한 그의 기념비적인 오라토리오 [천지창조] 공연에 앞서 그는 팡파르가 울리는 가운데 청중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입장했다.

그런데 곧 국제 정세가 급변하여 이듬해인 1809년 프랑스 군대가 빈을 점령했다. 나폴레옹은 육체적으로 쇠약해진 노장 하이든을 특별히 보호하도록 했으나 그해 5월 31일 하이든은 영원히 눈을 감고 말았다. 그의 장례식에는 빈 시민들뿐 아니라 프랑스 점령군 장교와 근위병들도 참석해 깊은 애도를 표했다. 하이든은 일생을 살아가면서 청년기에 어려움과 시련을 적지 않게 겪었지만 자기에게 주어진 상황에 순응하면서 생의 후반에는 유럽 최고의 음악가로 크게 존경받았던 것이다.

음악사에서 볼 때 하이든은 100개가 넘는 교향곡을 썼고, 또 현악4중주를 확립했기 때문에 ‘교향곡의 아버지’, ‘ 현악4중주의 아버지’로도 불린다. 사실 그는 교향곡뿐만 아니라 협주곡, 현악4중주와 소나타 등 고전주의 형식의 기틀을 확립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또 낭만주의 음악의 싹을 트게 했으니 모차르트, 베토벤에 이어 슈베르트도 그에게 음악적으로 많은 빚을 졌음은 두 말할 나위 없다. 한편 베토벤은 보잘것없는 촌구석 로라우의 오두막집에서 하이든과 같은 대가가 태어났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 정태남은… 이탈리아 공인건축사, 작가 정태남은 서울대 졸업 후 이탈리아 정부장학생으로 유학, 로마대학교에서 건축부문 학위를 받았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건축분야 외에도 미술, 음악, 역사, 언어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로마를 중심으로 30년 이상 유럽에서 활동했다. 저서로는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동유럽 문화도시기행』,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외에 여러 권이 있다.(culturebox@naver.com)

202304호 (2023.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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