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PJ살롱 박병진의 위스키 기행(04) 

로열살루트 이야기 

기울어져가는 대제국의 영광을 지켜내며 영국인의 가슴 속에서 오랜 시간 빛날 한 사람을 기리며, 한 땀 한 땀 장인의 숨결을 담아 만든 위스키를 찾아 떠나는 네 번째 위스키 여행.

▎스코트랜드에서 가장 아름다운 위스키 증류소로 꼽히는 스트라스아일라의 전경.
5월 6일 대관식을 거행한 신임 영국 국왕 찰스 3세의 모후인 고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은 최장수 여왕이자 최장 기간 재임한 영국 국왕이다. 지난 2022년에는 엘리자베스 2세의 즉위 70주년 기념식인 플래티넘 주빌리가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이날 여왕의 공식 생일을 함께 치러, 예포의 수는 두 배가 되었다. 런던탑(Tower of London)에서는 62발의 두배인 124발의 예포가 발사되었다. 통상적으로 왕이나 대통령 같은 국가원수에 대한 의전 예포가 21발인 것을 감안하면, 아마도 예포의 역사에서 가장 많은 발사 횟수일 것이다. 때에 따라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예포는 국가원수의 경우는 21발, 그 아래 총리나 부통령, 대법원장, 국회의장은 19발, 장관급이나 4성 장군은 17발, 3성 장군 15발, 소장은 13발, 준장은 11발을 쏘는 것이 일반적이다. 반면 영국에서는 대관식 등 중요한 왕실 의전이 있을 때 런던탑에서 총 62발을 쏘는 것이 관례이고 이를 ‘62 Gun Salute’라고 한다. 여왕의 경우 국가원수를 기념하는 21발에 왕실을 상징하는 20발을 더하고, 런던 시티를 의미하는 21발을 합하여 예포의 수는 총 62발이 된 것이다.

이 예포의 유래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해전에서 항복한 적군에게 무장해제의 의미로 군함에 실린 탄환을 모두 소진하게 한 17세기의 영국 해상 관습에서 유래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과거 영국 군함에 적재하는 대포가 7문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항구에 입항할 때 7발을 모두 발사해 포탄이 장전되지 않았음을 알려 적의가 없음을 보여주었다. 당시 화약은 질산나트륨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해상보다는 육상에서 보관하기도 쉽고, 신속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따라서 해상에서 7발을 발사할 때 육상에서는 그 세 배인 21발을 쏘아서 입항하는 군함을 환영하는 영국 해군의 관습에서 유래한 것이다. 과거에는 함포의 재장전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이렇게 빈 대포를 통해 온전히 비무장으로 상대국에 인사한다는 뜻을 밝혔다. 예포는 영어로 캐논 설루트(Cannon Salute) 라고 부르고 특히 왕이나 대통령에게는 로열 설루트, 프레지던셜 설루트라 부른다.

현대 외교의 상당수 격식이나 의전이 메테르니히 이후 유럽의 외교관계에서 비롯되었고, 특히 해군이 주력인 영국에서 유래해 해상 의전이 많아졌다. 대육군, 즉 그랑 아미를 주창한 나폴레옹 시절부터는 육군이 강한 프랑스나 프로이센 육군에서 비롯된 의전 역시 많아지게 되었다. 예를 들면 상대국 수장이 자국을 방문했을 때 위압적으로 보이도록 자국 의장대를 사열하게 만든다든지, 러시아나 중국, 북한군의 열병식에서 볼 수 있는 특유의 거위걸음(Goose Step)은 프로이센 육군에서 유래했다. 그들은 이런 걸음걸이가 매우 멋있다고 생각하고 자부심에 넘치니, 역시 생각하기 나름인 것 같다.

시간이 빚어낸 여왕을 위한 특별한 술


▎숙성 연수가 표기된 가장 오래된 로열살루트 52년. 국내에서는 조선팰리스 호텔에 단 한 병이 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부왕인 조지 6세가 갑자기 서거하는 바람에 위기를 맞이한 대영제국의 마지막 여왕으로서 막중한 책무를 지고 1952년 25세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조지 6세도 형 에드워드 8세가 미국인 심슨 부인과 결혼하기 위해 윈저공으로 퇴위하는 바람에 갑자기 즉위하게 되었다. 영화 [킹스 스피치]에 나오는 말더듬이 주인공이 바로 조지 6세이다. 영국 역사에 좀 더 관심 있는 분들에게는 내가 무척 즐겨 본 넷플릭스 드라마 [더 크라운]을 적극 추천한다. 영국 역사와 전후 유럽 현대사를 영국인답게 냉정하게 분석하고, 그 역사의 이면을 민낯으로 보여주는 드라마라 그동안 몰랐던 그 시대의 많은 이야기를 알 수 있다.

다시 위스키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바로 1953년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에 헌정하기 위해서 시바스 브라더스(Chivas Brothers)사에서는 보유한 위스키 원액 가운데서 21년 이상 된 최상의 원액을 엄선하여 그들만의 환상적인 블렌딩 기법으로 ‘로얄살루트 21년’이라는 훌륭한 위스키를 만들어냈다. 사실 위스키의 고숙성이란 개념도 최근에 나온 것으로, 그 시절에는 고숙성 원액 자체가 귀했다. 최근에는 여러 위스키 브랜드에서 25년, 30년 위스키들을 어느 정도는 안정적으로 공급하고 있지만, 사실 위스키는 공급 탄력도가 매우 낮은 제품이라 당장 올해 많이 팔린다고 생산량을 급격히 늘릴 수는 없다. 각 위스키 제조사들은 허용되는 법적 테두리 내에서 최대한 고숙성 위스키를 많이 만들어내고자 최선을 다하겠지만, 이는 아마도 일반인이 생각하는 30년 숙성 위스키라는 사전적 의미와는 조금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로얄살루트 21년의 병 모양도 그 시대의 함포 모양을 본떴다. 특이하게도 자주, 녹색, 파랑의 세 가지 색깔 도자기 병에 각 세 가지 색깔의 천 주머니에 담아서 전 세계의 면세점이나 기내에서 주로 판매되었다. 항간에는 어떤 색깔이 더 좋은 것이다, 맛이 다르다 등 여러 말이 있었지만, 사실 이 세 가지 색깔은 영국 여왕이 대관식 때 쓴 성 에드워드 왕관에 박혀 있는 루비, 에메랄드, 사파이어를 의미하며, 각 병은 색깔만 다를 뿐 맛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이제 곧 이 왕관을 찰스 3세가 쓰게 되겠지만 누가 쓰든 이것을 쓴 사람은 영국 국왕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최근에는 비용 절감 때문인지 도자기 병이 한 가지 색으로 심플하게 나오고 삼색 주머니도 더는 없다. 경영 효율화, 합리화라는 주제가 그 시대의 멋을 사라지게 한 것일까? 그보다는 시바스사에서 폴로 에디션, 몰트 에디션 등 좀 더 다양한 수요에 부응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라인업을 갖추고자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로열살루트 21년을 무척 아꼈던 한 사람으로서 조금 아쉬운 마음을 감출 수는 없다.

God, save the KING!


▎스트라스아일라 증류소에서 프로페셔널한 개인 가이드가 되어준 데렉과 함께.
로얄살루트의 하위 호환 제품이라고 하면 많이 억울해 할 시바스사의 대표 위스키인 시바스리갈도 시바스사에서 영국 왕실에 납품했던 제품이라 왕실을 의미하는 리갈(Regal)이 붙었다. 이러한 연유로 시바스사에서 왕실에 대한 그들의 애정을 보여주고자 여왕 대관식을 기념하여 특별히 로얄살루트 21년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 이후 엘리자베스 여왕이 유례없이 장수하는 바람에 로열살루트는 계속해서 25년, 32년, 38년, 52년까지 만들어냈다. 즉위 60주년인 다이아몬드 주빌리 때는 앞서 설명한 예포 62발을 상징하는 ‘62건 살루트’라는 이름으로 출시됐지만 고숙성 원액이 부족해 60년 숙성의 원액이 사용된 것이 아니라 40년 이상 고숙성된 희귀한 원액을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즉, 52년 숙성 로얄살루트까지가 52년 이상 된 원액을 사용한 마지막 로열살루트이고, 60주년 62건 살루트 이후, 작년의 70주 년 플래티넘 주빌리에도 새로운 로열살루트가 나오기는 했으나 사용된 원액의 정확한 숙성 연수가 알려지지 않은 것을 보면 시바스사의 깊은 고민이 충분히 전해진다.

최근 62건 살루트를 뜻밖의 장소에서 만나 더욱 반가웠다. 최근 종영한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주인공 연진이가 학교폭력 공범인 손명오를 죽일 때 이 병을 흉기로 사용했는데, 왜 마시기에도 아까운 위스키 병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일까 하고 잠깐 생각해보았다. 찰스 3세의 대관식을 기념하여 시바스사에서는 새로이 찰스 3세판 로열살루트를 내놓았다고 한다. 찰스 3세가 고령이라 100세까지 살아도 이 새로운 로열살루트는 30년까지는 안 나올 것 같고, 이제 시바스사도 한숨 돌릴 수 있게 된 듯해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시바스 브라더스 여러분!”

참고로 내가 꼽아본 전 세계에서 70년 이상 재임한 3대 플래티넘 주빌리는 엘리자베스 2세, 프랑스의 루이14세, 태국의 푸미폰 전 국왕이다. 세 분 다 여러 가지 면에서 그 나라에 크게 기여한 군주라 역시 장수하는 것도 능력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흔히 ‘그때 그 사람’으로 표현되는 궁정동 10.26사건에서 드러난 대로, 시바스리갈(사실은 로열살루트)은 박정희 대통령이 좋아했던 술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딱히 기호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 시절 구할 수 있는 양주가 매우 한정적이어서 그렇게 되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위에서 언급한 시바스리갈과 로열살루트는 모두 블렌디드 위스키로서, 그레인 위스키라는 캔버스에 몇 가지 싱글몰트를 물감으로 하여 그려낸 멋진 작품으로 이해할 수 있다. 최근 싱글몰트 위스키 붐이 일어 근거 없이 폄하된 블렌디드 위스키의 의미를 좀 더 높이 평가하고 이를 만든 이들의 노고를 좀 더 새겨볼 수 있을 것이다. 싱글몰트 위스키는 개성 있는 재료의 맛으로 승부하는 맛집이라면, 블렌디드 위스키는 다양한 재료의 특성을 반영해 근사한 레시피로 만들어낸 일류 레스토랑 음식이라고 볼 수 있다. 두 카테고리는 경쟁 포인트가 다르기에, 개인의 취향에 따라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위스키는 우열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의 기호에 따라 가치가 정해지므로, 많이 경험해보고 알면 알수록 내게 맞는 것을 잘 찾을 수 있게 된다.

부드럽지만 힘 있는 스트라스아일라 위스키의 매력


▎스코트랜드 스페이사이드 지역의 마을 더프타운의 다운타운에 자리한 위스키 뮤지엄.
시바스리갈과 로열살루트에 들어가는 가장 중요한 기주가 바로 스트라스아일라 위스키이고,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아름다운 위스키 증류소로 꼽히는 곳이다. 예전에 즐겨 마신 패스포트에도 기주로 쓰여 우리에게는 매우 친숙한 맛이다. 가볍고 플로럴하면서도 살짝 쿰쿰한 셰리 향이 느껴지는 복잡 미묘한 맛이라 한마디로 표현할 수는 없다. 스페이사이드에는 글렌그란트, 맥켈란, 발베니 등 특히 아름다운 풍광을 가진 증류소가 많지만, 가장 오래된 이곳은 전통적인 스코틀랜드 증류소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살린 곳이다. 첫눈에 보고 완전히 반한 고전적인 증류소 건물과 아기자기하고 복잡한 조경, 그 일대의 근사한 풍광은 지금도 내 머릿속에 그대로 각인되어 있고, 부드럽지만 스타카토로 힘 있는 스트라스아일라 위스키의 기억 또한 무척 오래갈 것 같다.

스페이사이드의 수많은 위스키 증류소 중에서 일반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이곳을 굳이 택한 이유는 바로 위의 로열살루트 이야기와 계속 이어지는 그들의 혁신에 관한 스토리가 내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다. 자칫 올드한 이미지로 쉽사리 묻혀버릴 수 있었고, 최근의 싱글몰트 위스키 붐 때문에 과거의 높은 위상이 바닥으로 떨어질 수도 있었지만 꿋꿋이 그 위상을 지켜내는 시바스리갈과 로열살루트가 매우 흥미로웠다. 다른 싱글몰트 위스키와 달리 블렌디드 위스키만으로 새로운 시장에 대응하는 그들만의 쿨한 전략에 감탄하며, 조금씩 나이를 먹어가는 나와 내 또래들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그날 스트라스아일라의 문을 열게 되었다.

스페이사이드를 처음 방문했을 때 스트라스아일라에 가보았는데, 좀 더 심도 있게 그 역사와 그들의 노력을 들어보기 위해 프로페셔널한 개인 가이드를 고용했다. 사실 이 지역의 교통편이 마땅치 않아 택시비가 엄청나게 나올 것 같아 택시비에 약간의 수고료를 더해 가성비 있게 사치를 누려본 것이다. 한국에서 미리 연락해서 엘긴역에서 만난 데렉은 초면에도 전혀 낯설지 않았다. 전형적인 스코틀랜드인과는 좀 다른 진중한 성격의 데렉 덕분에 짧은 시간에 효율적으로 움직이며 많은 것을 보고 배울 수 있다. 이 경험은 후에 혼자서 스페이사이드에서 버스를 타고 다니며 증류소 투어를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데렉은 ‘고든앤맥페일’이라는 유명한 위스키 회사의 임원 출신으로, 영국 정부로부터 ‘키퍼스 오브 더 퀘익(Keepers of Quaich: 위스키 산업 발전에 기여한 업적이 큰 인사에게 수여하는 명예로운 직위)이라는 칭호를 받을 정도로 평생을 위스키 산업에 헌신해왔으며, 한국에도 한 번 온 적이 있다고 한다. 은퇴 후에 본인의 경험을 살려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고, 평생을 공부해온 위스키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친절한 가이드로 많은 것을 전해주었다. 중간중간 뜬금없는 ‘아재 농담’을 던져 뜻밖의 웃음도 선사해주었다. 그의 아재 개그를 듣고 있자니 문득 유쾌하고 사람 좋은 아일라섬의 짐 맥켈만이 계속 생각다.

“짐, 보고 있나? 내년엔 꼭 다시 한번 아일라에서 만나보자고!”

※ 박병진 - 1991년 IBM 신입사원으로 경력을 시작해 IBM, SAP, SK 등 글로벌기업의 임원으로서 지난 30여 년 동안 대한민국 기업들의 경쟁력 향상에 기여해왔다. 2022년부터 딥러닝 기반의 무인 교통단속장비를 생산하는 (주)토페스의 CEO로 부임해 더욱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다. 그의 위스키 사랑은 10여 년 전부터 시작됐다. 각종 증류주의 매력에 빠져 세계 각국의 증류소를 다니고 있으며, 2016년부터는 ‘Salon de PJ’라는 위스키 클래스로 기업체, 대학교, 단체 등에서 많은 사람에게 증류주의 매력을 전하고 있다.

202306호 (2023.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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