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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슨의 피를 상징하는 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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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영국에서는 럼을 ‘넬슨의 피(Nelson’s Blood)’라고 불렀고, 1970년대까지만 해도 영국 해군은 이 럼주를 매일 한 컵씩 수병들에게 배급하는 전통이 있었다. 괴혈병을 예방하기 위하여 럼주에 라임즙을 넣어 배급했고, 매일같이 이를 마신 선원들은 술에 취해 비틀거렸다. 그 모습을 당시의 해군 제독인 그로그(Grog)의 이름을 따서 그로기(Groggy)라고 부르게 되었다. 정량을 배급하는 것은 군대에서 생명 같은 일이기에 럼을 다른 말로는 Pusser’s Rum, 즉 ‘경리 장교의럼’이라고도 불렀다. 배급은 정확히 되었겠지만 바다에서 일어나는 일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니 그다음은 상상에 맡길 뿐이다.
장거리 항해에서 럼은 쉽게 썩는 식수를 대신하는 해군의 보급품이자 해적의 필수품이었다. 위스키 등이 정식으로 국내에 수입되기 전인 1980년, 독특한 광고로 우리에게 친숙한 ‘캡틴큐’를 기억하는가. 드넓은 바다에 애꾸눈 해적이 등장하며 마치 카리브해를 주름 잡는 해적의 술, 럼을 떠올리게 하는 데다 저렴한 가격이 어우러져 출시되자마자 높은 판매고를 올리며 인기를 얻었다. 당시 럼의 중요한 소비자였던 해적을 앞세워 유명해졌지만, 사실 럼 원액은 20% 미만이 들어 있었고 심지어 최근에 나온 것은 아예 럼 원액이 한 방울도 들어 있지 않은 일반 증류주였다.
아프리카의 노예와 카리브해의 사탕수수로 만든 설탕과 럼, 유럽의 공산품을 교환하는 삼각무역으로 인해 해적의 술 럼은 잔혹한 흑역사의 당사자가 되기도 했다. 노예제의 종말과 함께 럼의 ‘어두운 전성기’는 막을 내렸지만 이제 여름이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청량한 칵테일의 기주로 부활해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대영제국을 지탱해준 원동력, 진토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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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퀴닌은 진과 큰 관련이 있다. 대영제국의 최전성기에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리며 전 세계 육지의 4분의 1을 점유했고, 그중 많은 곳이 열대기후라 말라리아의 위험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었다. 엄청나게 쓴맛이 나지만 제국의 존망을 위협하는 말라리아 예방과 치료에 효과가 있어 대영제국은 이를 제국 전체에 토닉워터라는 이름으로 보급했고, 식민지의 영국인들이 이를 진과 섞어서 진토닉으로 만들어 마시게 되었다. 즉, 진토닉은 대영제국을 지탱해준 중요한 원동력 중 하나였다. 한국에도 토닉워터가 있지만 퀴닌이 일종의 마약 성분으로 분류되어 퀴닌 향만 내는 것으로 출시되고 있으니 섭섭할 따름이다.
런던 버로우 마켓에서 만난 이스트런던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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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 끝에 찾아간 이스트런던 진은 생각보다 평범했다. 요즘 런던에서 가장 힙한 곳으로 손꼽히는 이스트런던의 쇼디치 근처로 생각했으나 런던의 동쪽 끝에서 완전히 벗어난 빅토리아 공원 근처의 교외에 위치했다. 이곳에서 각종 열매를 활용한 크래프트 진을 만들고 있었다. 진 자체의 완성도가 뛰어나 맛과 향이 모두 좋았고, 여기서 진 한 잔과 함께 먹은 왕갈비는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사이드 디시도 없이 직설적으로 구워져 나온 그 왕갈비 바비큐는 그야말로 진과 환상의 마리아주를 자랑했다.
우리가 흔히 진으로 생각하는 것은 대부분 런던 드라이 진이다. 요즘은 런던이 아니더라도 이 방식으로 만든 것은 모두 런던 드라이 진으로 분류하는데, 간단히 말하면 주정에 각종 재료를 넣고 한 번에 증류하는 방식이다. 즉, 후 첨가나 담금주 방식으로 만드는 것은 드라이 진이 아니다. 가장 기본이 되는 주니퍼베리 열매 이외에 그 지역의 특산물이나 독특한 식물을 추가하여 각자의 개성을 지닌 크래프트 진이 세계 여러 곳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진은 원래 네덜란드 게네베르(genever)에서 유래했고 오렌지 공 윌리엄이 명예혁명으로 네덜란드 총독에서 영국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확산되었다. 대량생산되어 싸게 풀린 진 때문에 여러 가지 사회문제가 발생하자 진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도 확산되었다. 네덜란드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영국에서는 진을 마시고 객기를 부리는 것을 ‘Dutch’s Courage(네덜란드의 용기)’라고 한다. 지금은 비용을 각자 부담한다는 의미로 통용되긴 하지만 원래 네덜란드인을 비하하는 의미로 시작된 Dutch Pay보다도 심한 말이 무척 많다. 예를 들어 “I am a Dutchman”이란 말도 있다. 대략 ‘만약 내가 틀리면 성을 간다, 내 손에 장을 지진다’ 같은 뜻으로 쓰이니 두 나라 사이의 감정의 골이 꽤 깊은 듯하다.
일부 위스키 증류소에서는 초기 운영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진을 만들기도 한다. 전통적인 스카치위스키 증류소는 자존심을 내세워 만들지 않는 곳이 많지만, 신생 증류소는 다양한 방식으로 시장에 접근한다. 이스트런던도 그렇지만 남양주에 있는 한국 최초의 위스키 증류소인 쓰리소사이어티에서도 몇 가지 실험적인 진을 만들어내고 있다. 솔직히 현재 그들이 만든 위스키의 완성도보다는 나는 그 진의 완성도를 더 높이 평가한다. 대체적으로 비슷비슷한 맛을 내는 진은 작은 변화와 아이디어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완성품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한국적인 재료인 깻잎을 추가하기도 한다.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확실히 갈리는 시도긴 하나 크래프트의 의미가 그런 것 아닐까?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해서 세상을 바꾸는 것, 어디나 정답은 없으니까! 아무튼 이스트런던 진에서도 다양한 런던의 맛을 추가했고 맛에 대한 평가는 전문가들과 시장에 맡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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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에 대한항공 비즈니스 클래스를 탑승하면 유럽의 어떤 명품을 모방한 듯한 넥타이와 스카프를 기념품으로 받았는데, 우리 국적 항공사들도 큰돈 들이지 않고 고객의 충성도를 확보할 수 있도록 색다른 고민을 해보면 어떨까? 1970년대에 투박해 보이는 한국 전통 탈 모양의 미니어처 병에 전통주를 담아 기내에서 제공했던 것이 기억난다. 이런 시도가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지만, 새로운 시대에 맞춘 발상이 점점 더 필요하다.
럼과 진, 두 가지 증류주 모두 영국이 만들어낸 것은 아니었으나, 이를 세계적으로 퍼트리고 발전시킨 것은 영국이니 나를 포함한 기업인들도 같은 고민을 해나가야 한다. 수많은 원천기술이 도처에 널려 있지만 이 가운데서 보석을 찾아내어 자신만의 비즈니스 시나리오로 잘 엮어내고 이를 상품화하는 것이 AI의 세상에서 기업과 국가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니, 진을 둘러싼 영국과 네덜란드의 교훈에서 좀 배워보자. 그래도 이 여름, 시원한 진토닉을 참을 수는 없으니 한잔 홀짝이며 그 고민을 나눠봐도 좋겠다.
※ 박병진 - 1991년 IBM 신입사원으로 경력을 시작해 IBM, SAP, SK 등 글로벌기업의 임원으로서 지난 30여 년 동안 대한민국 기업들의 경쟁력 향상에 기여해왔다. 2022년부터 딥러닝 기반의 무인 교통단속장비를 생산하는 (주)토페스의 CEO로 부임해 더욱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다. 그의 위스키 사랑은 10여 년 전부터 시작됐다. 각종 증류주의 매력에 빠져 세계 각국의 증류소를 다니고 있으며, 2016년부터는 ‘Salon de PJ’라는 위스키 클래스로 기업체, 대학교, 단체 등에서 많은 사람에게 증류주의 매력을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