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PJ살롱 박병진의 위스키 기행(05) 

럼과 진 이야기 

럼과 진을 기주 삼은 청량한 칵테일이 유난히 생각나는 여름. 영국이 세계에 선물한 두 가지의 보석 같은 증류주, 럼과 진을 찾아 시간 여행을 떠났다.

▎2차 대전과 한국전에도 참전해 대영제국의 위상을 높인 HMS 벨파스트 순양함.
런던에는 명소가 많지만 그중 나폴레옹과 관련한 특별한 장소 두 군데가 있다. 첫 번째는 트라팔가르해전에서 승리하여 나폴레옹을 몰락의 길로 이끌어낸 넬슨의 기념비가 있는 트라팔가르 광장이다. 또 하나는 엘바섬에서 탈출한 나폴레옹을 워털루전투에서 끝장낸 웰링턴 장군을 기념하는 워털루 기차역이 있다. 나폴레옹 때문에 지독하게 고생하던 영국이 마침내 해전과 육전에서 승리하며 나폴레옹 콤플렉스를 극복해낸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증거라고 생각하니 그들의 치기에 슬며시 웃음이 난다.

넬슨의 피를 상징하는 럼


▎여름이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청량한 칵테일의 기주로 각광받는 럼과 진.
트라팔가르해전의 승장인 넬슨은 전투 중 적의 저격병에게 자주 노출되는 모험적인 전술을 감행하며 마치 본인이 원했던 것처럼 트라팔가르해전에서 전사했다. 내게는 임진왜란을 마무리하는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순신 장군의 데자뷔처럼 생각된다. 그래도 영국 해군은 역사에 남을 이 승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그의 시신을 온전히 럼주에 담가 런던까지 운반했다. 아무리 높은 장군이라도 수장하는 것이 관례인 영국 해군일지라도 허레이쇼 넬슨을 그냥 보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시신의 부패를 막기 위해 고도주인 럼을 사용했는데, 런던에 도착해 관 뚜껑을 열어보니 럼이 보이지 않았다. 그를 존경하는 부하들이 그 럼을 마셨다는 속설이 전해지기도 하지만 사실은 럼이 모두 시신에 흡수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국에서는 럼을 ‘넬슨의 피(Nelson’s Blood)’라고 불렀고, 1970년대까지만 해도 영국 해군은 이 럼주를 매일 한 컵씩 수병들에게 배급하는 전통이 있었다. 괴혈병을 예방하기 위하여 럼주에 라임즙을 넣어 배급했고, 매일같이 이를 마신 선원들은 술에 취해 비틀거렸다. 그 모습을 당시의 해군 제독인 그로그(Grog)의 이름을 따서 그로기(Groggy)라고 부르게 되었다. 정량을 배급하는 것은 군대에서 생명 같은 일이기에 럼을 다른 말로는 Pusser’s Rum, 즉 ‘경리 장교의럼’이라고도 불렀다. 배급은 정확히 되었겠지만 바다에서 일어나는 일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니 그다음은 상상에 맡길 뿐이다.

장거리 항해에서 럼은 쉽게 썩는 식수를 대신하는 해군의 보급품이자 해적의 필수품이었다. 위스키 등이 정식으로 국내에 수입되기 전인 1980년, 독특한 광고로 우리에게 친숙한 ‘캡틴큐’를 기억하는가. 드넓은 바다에 애꾸눈 해적이 등장하며 마치 카리브해를 주름 잡는 해적의 술, 럼을 떠올리게 하는 데다 저렴한 가격이 어우러져 출시되자마자 높은 판매고를 올리며 인기를 얻었다. 당시 럼의 중요한 소비자였던 해적을 앞세워 유명해졌지만, 사실 럼 원액은 20% 미만이 들어 있었고 심지어 최근에 나온 것은 아예 럼 원액이 한 방울도 들어 있지 않은 일반 증류주였다.

아프리카의 노예와 카리브해의 사탕수수로 만든 설탕과 럼, 유럽의 공산품을 교환하는 삼각무역으로 인해 해적의 술 럼은 잔혹한 흑역사의 당사자가 되기도 했다. 노예제의 종말과 함께 럼의 ‘어두운 전성기’는 막을 내렸지만 이제 여름이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청량한 칵테일의 기주로 부활해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대영제국을 지탱해준 원동력, 진토닉


▎이스트런던 진을 비롯해 다양한 먹거리와 전통 상품을 파는 런던의 버로우 마켓.
최근에 코로나 예방약으로 논의된 적이 있는 클로로퀸(Chloroquine)은 기나나무 껍질에서 얻는 알칼로이드인 퀴닌(Quinine) 또는 키니네(kinine)가 원형이다. 우리나라에는 개화기 때 학질(말라리아) 치료약으로 들어와 한자로 음역하여 금계랍으로 불렀는데 아주 쓴 약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다. 작년 초에 돌아가신 이어령 교수의 산문집에 보면, 유난히 어머니에게 집착하는 막내 이 교수의 젖을 떼기 위하여 어머니의 젖꼭지에 키니네를 발라 젖을 떼게 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꽤 광범위하게 쓰였다. 이어령 교수는 이 글에서 우리가 성장한다는 것은 어머니로부터 조금씩 떨어져 나가는 의식(儀式)이라고 표현하면서, 지금 어떤 달콤한 과자보다도, 어릴 때 맛본 쓰디쓴 금계랍이 어머니의 추억으로 온전히 기억에 남아 있다고 했다. 이제는 고인이 된 이어령 교수님의 평온한 안식을 기원한다.

바로 이 퀴닌은 진과 큰 관련이 있다. 대영제국의 최전성기에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리며 전 세계 육지의 4분의 1을 점유했고, 그중 많은 곳이 열대기후라 말라리아의 위험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었다. 엄청나게 쓴맛이 나지만 제국의 존망을 위협하는 말라리아 예방과 치료에 효과가 있어 대영제국은 이를 제국 전체에 토닉워터라는 이름으로 보급했고, 식민지의 영국인들이 이를 진과 섞어서 진토닉으로 만들어 마시게 되었다. 즉, 진토닉은 대영제국을 지탱해준 중요한 원동력 중 하나였다. 한국에도 토닉워터가 있지만 퀴닌이 일종의 마약 성분으로 분류되어 퀴닌 향만 내는 것으로 출시되고 있으니 섭섭할 따름이다.

런던 버로우 마켓에서 만난 이스트런던 진


▎우여곡절 끝에 찾아간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이스트런던 진 증류소.
런던에는 우리나라의 광장시장처럼 각종 먹거리와 여러 가지 전통 상품을 파는 곳으로 유명한 버로우 마켓이 있다. 맛있는 드립커피와 싱싱한 오이스터, 오목조목해 보는 재미가 있는 각종 과일과 채소, 치즈 덩어리들, 화려한 색감을 뽐내는 여러 가지 먹거리를 볼 때면 누가 영국 음식이 맛없다고 하는지 되묻고 싶을 정도로 감동적이다. 작은 바에 들어가 의자에 앉아서 와인 한 잔과 핑거푸드를 곁들일 때면 역시 이 맛에 여행을 오는구나 싶을 정도다. 이 시장의 한구석에 ‘이스트런던 진’이라는 작은 증류소의 직영숍이 있었고, 그날 이곳에서 증류소 방문을 예약했다. 며칠 후 달력을 잘못 봐서 하마터면 못 갈 뻔했지만, 친절한 증류소 직원 덕분에 페널티를 물지 않고 예약일을 바꿀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찾아간 이스트런던 진은 생각보다 평범했다. 요즘 런던에서 가장 힙한 곳으로 손꼽히는 이스트런던의 쇼디치 근처로 생각했으나 런던의 동쪽 끝에서 완전히 벗어난 빅토리아 공원 근처의 교외에 위치했다. 이곳에서 각종 열매를 활용한 크래프트 진을 만들고 있었다. 진 자체의 완성도가 뛰어나 맛과 향이 모두 좋았고, 여기서 진 한 잔과 함께 먹은 왕갈비는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사이드 디시도 없이 직설적으로 구워져 나온 그 왕갈비 바비큐는 그야말로 진과 환상의 마리아주를 자랑했다.

우리가 흔히 진으로 생각하는 것은 대부분 런던 드라이 진이다. 요즘은 런던이 아니더라도 이 방식으로 만든 것은 모두 런던 드라이 진으로 분류하는데, 간단히 말하면 주정에 각종 재료를 넣고 한 번에 증류하는 방식이다. 즉, 후 첨가나 담금주 방식으로 만드는 것은 드라이 진이 아니다. 가장 기본이 되는 주니퍼베리 열매 이외에 그 지역의 특산물이나 독특한 식물을 추가하여 각자의 개성을 지닌 크래프트 진이 세계 여러 곳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진은 원래 네덜란드 게네베르(genever)에서 유래했고 오렌지 공 윌리엄이 명예혁명으로 네덜란드 총독에서 영국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확산되었다. 대량생산되어 싸게 풀린 진 때문에 여러 가지 사회문제가 발생하자 진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도 확산되었다. 네덜란드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영국에서는 진을 마시고 객기를 부리는 것을 ‘Dutch’s Courage(네덜란드의 용기)’라고 한다. 지금은 비용을 각자 부담한다는 의미로 통용되긴 하지만 원래 네덜란드인을 비하하는 의미로 시작된 Dutch Pay보다도 심한 말이 무척 많다. 예를 들어 “I am a Dutchman”이란 말도 있다. 대략 ‘만약 내가 틀리면 성을 간다, 내 손에 장을 지진다’ 같은 뜻으로 쓰이니 두 나라 사이의 감정의 골이 꽤 깊은 듯하다.

일부 위스키 증류소에서는 초기 운영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진을 만들기도 한다. 전통적인 스카치위스키 증류소는 자존심을 내세워 만들지 않는 곳이 많지만, 신생 증류소는 다양한 방식으로 시장에 접근한다. 이스트런던도 그렇지만 남양주에 있는 한국 최초의 위스키 증류소인 쓰리소사이어티에서도 몇 가지 실험적인 진을 만들어내고 있다. 솔직히 현재 그들이 만든 위스키의 완성도보다는 나는 그 진의 완성도를 더 높이 평가한다. 대체적으로 비슷비슷한 맛을 내는 진은 작은 변화와 아이디어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완성품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한국적인 재료인 깻잎을 추가하기도 한다.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확실히 갈리는 시도긴 하나 크래프트의 의미가 그런 것 아닐까?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해서 세상을 바꾸는 것, 어디나 정답은 없으니까! 아무튼 이스트런던 진에서도 다양한 런던의 맛을 추가했고 맛에 대한 평가는 전문가들과 시장에 맡길 뿐이다.


▎딱 한번 KLM에 탑승해서 받은 45번과 54번 델프트 도자기 미니어처.
진의 원조인 게네베르는 지금도 여전히 네덜란드에서는 사랑받고 있다. 세계 최초로 이코노미클래스를 만들어 항공여행의 대중화에 기여한 네덜란드의 KLM항공사는 대륙 간 노선의 비즈니스 클래스에 탑승하면 특별한 선물을 준다. 네덜란드의 특산품 델프트 도자기로 만든 미니어처 병에 게네베르를 담아서 기념품으로 제공하는 것이다. 도자기 하나하나는 실제 암스테르담에 있는 건물을 본떠 만들었고, 100여 개 도자기에 번호를 매겨서 고객에게 선물하는데, 나도 한 번 탑승하여 45번과 54번을 받았다. 이 100여 가지 모두를 비행기에 실을 수는 없기에 탑승 전에 예약해서 원하는 번호의 미니어처를 받을 수 있는 대단히 효율적인 시스템이다. 물론 사전 예약을 못했다면 그 비행기에 실려 있는 도자기 중에 골라서 받을 수 있다. 많은 돈을 들여서 CRM 시스템을 구축하고 고객의 마음을 읽는다고 강조하는 기업도 많지만, 이렇게 쿨하게 고객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끌어당길 수 있는 KLM에 경의를 표한다. 심지어 자신이 수집한 게네베르 미니어처를 한눈에 알 수 있도록 KLM Houses란 모바일앱을 제공하여 고객이 기념품 관리까지 직접 하게 만드니 이들은 정말 장사의 신이 아닐까 싶다.

1990년대에 대한항공 비즈니스 클래스를 탑승하면 유럽의 어떤 명품을 모방한 듯한 넥타이와 스카프를 기념품으로 받았는데, 우리 국적 항공사들도 큰돈 들이지 않고 고객의 충성도를 확보할 수 있도록 색다른 고민을 해보면 어떨까? 1970년대에 투박해 보이는 한국 전통 탈 모양의 미니어처 병에 전통주를 담아 기내에서 제공했던 것이 기억난다. 이런 시도가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지만, 새로운 시대에 맞춘 발상이 점점 더 필요하다.

럼과 진, 두 가지 증류주 모두 영국이 만들어낸 것은 아니었으나, 이를 세계적으로 퍼트리고 발전시킨 것은 영국이니 나를 포함한 기업인들도 같은 고민을 해나가야 한다. 수많은 원천기술이 도처에 널려 있지만 이 가운데서 보석을 찾아내어 자신만의 비즈니스 시나리오로 잘 엮어내고 이를 상품화하는 것이 AI의 세상에서 기업과 국가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니, 진을 둘러싼 영국과 네덜란드의 교훈에서 좀 배워보자. 그래도 이 여름, 시원한 진토닉을 참을 수는 없으니 한잔 홀짝이며 그 고민을 나눠봐도 좋겠다.

※ 박병진 - 1991년 IBM 신입사원으로 경력을 시작해 IBM, SAP, SK 등 글로벌기업의 임원으로서 지난 30여 년 동안 대한민국 기업들의 경쟁력 향상에 기여해왔다. 2022년부터 딥러닝 기반의 무인 교통단속장비를 생산하는 (주)토페스의 CEO로 부임해 더욱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다. 그의 위스키 사랑은 10여 년 전부터 시작됐다. 각종 증류주의 매력에 빠져 세계 각국의 증류소를 다니고 있으며, 2016년부터는 ‘Salon de PJ’라는 위스키 클래스로 기업체, 대학교, 단체 등에서 많은 사람에게 증류주의 매력을 전하고 있다.

202307호 (2023.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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