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김소울의 삶과 미술심리(41) 

현재성 | 다시 돌아오지 않는 찰나의 순간들 

스페인의 대표적 화가 호아킨 소로야(Joaquin Sorolla)는 다시는 오지 않을 찰나의 순간을 포착해 캔버스에 담았다. 현재성의 가치에 충실했던 그의 작품은 오늘날 대중에게 ‘힐링’의 시간을 선사한다. 그가 그려낸 소중한 순간들을 음미하며 고개를 끄덕여보자.

▎호아킨 소로야 [바닷가 산책] 1909
회상(回想)은 어떤 사건이 지나가고 나서 다시 떠올리는 행위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다시 그 시간을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되돌아보면서 그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기억 속에서 추억을 찾아내기도 하고, 새로운 통찰을 얻는 경우도 있다. 추억은 일반적으로는 부정적인 기억보다는 행복했던 시간의 기억들을 일컫는 단어로 사용된다. 자신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의미 있었던 사건들은 주로 성취라는 단어로 남겨지고, 추억이라는 단어에는 그보다 더 감성적이고 관계에 관련된 기억이 많다.

시간이 지나 자신의 흔적들을 돌아봤을 때 그때는 알지 못했지만 지금은 알게 되는 것도 많다. 특히 30~40대가 되었을 때 당시에는 나이가 너무 많다고 생각했었는데 더 나이를 먹고 나니 그때가 정말 젊고 할 수 있는 일이 많던 시기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지금 이 자리에 실재하는 성질은 현재성(現在性)이라는 단어로 설명된다. 현재성의 대상들은 흘러가 버리면 잡을 수 없는 것들이고 그 소중함을 뒤늦게 깨달았을 때는 너무 늦어버릴 수도 있다. 그것은 시간이 될 수도, 기회가 될 수도, 때로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흘러가 버리기 전에


▎호아킨 소로야 [회색 드레스를 입은 클로틸테] 1900
호아킨 소로야는 벨라스케스, 피카소와 더불어 스페인을 대표하는 화가이다. 10대 때부터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젊은 시절에도 당대 최고의 화가로 불리던 삶을 살았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추상회화가 구상회화를 추월하며 소로야의 작업이 잠시 잊히는 듯했지만, 2000년대부터 재조명을 받으며 그가 남긴 찰나의 순간들이 ‘힐링’이라는 키워드와 함께 대중적으로 다시 사랑받기 시작했다.

소로야는 “나는 그림을 빠르게 그린다. 빨리 그리지 않으면 다시 만나지 못할 풍경들이 사라질 테니까”라는 말을 남겼다. 그는 고향 발렌시아 해변의 빛나는 순간들을 담기 위해 일 년에 한 달 정도는 늘 바닷가에 머물렀다. 큰딸과 아내를 모델로 담은 [바닷가 산책]에는 그가 사랑했던 가족과 윤슬이 반짝이는 바닷가의 촉감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발렌시아 해변에 한 번도 간 적 없는 사람일지라도 그림 속의 온도, 바람의 속도와 소리를 상상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그림은 현재성을 사실적으로 담아냈다.

아름다운 노을을 보았을 때, 예쁘게 플레이팅된 음식을 받았을 때, 또는 어떤 장소에 방문했을 때, 사람들은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는다. 사진을 SNS에 업로드하는 사람도 있고, 다시 꺼내 보며 추억에 잠길 때도 있지만, 찍기만 하고 다시 보지 않는 사진도 꽤 많다. 그럼에도 사진을 찍는 이유는, 흘러가 버리면 다시 오지 않을 지금의 시간을 붙잡아 담고 싶다는 욕구 때문일 것이다. 지금이 만족스럽기에, 지금의 풍경이 황홀하기에 붙잡고 싶은 것이다. 평생 찰나의 순간을 캔버스에 담아온 그는 현재성의 가치를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소로야는 활동하는 동안 충분히 인정받은 작가였고, 그 때문에 가족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 많았다. 21살에 스페인 미술전에서 2위로 입상했고, 29살에는 스페인 미술전에서 1위, 31살에 빌바오 예술전에서 1위, 34살에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베네치아상 수상, 37살에 파리만국박람회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하는 등 전시와 작품활동으로 바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사랑하는 아내 클로틸테를 만나 슬하에 세 딸을 두었지만 함께 있는 시간이 부족했던 그는 아내에게 계속 편지를 썼다. 떨어져 있기에 각자의 현재 삶에 충실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초월한 현재성의 가치를 인식한 것이다.

“나의 모든 사랑은 당신을 향해 있어. 나는 우리 아이들도 정말 사랑하지만 여러 면에서 당신을 더 사랑해. 당신은 나의 몸이고, 인생이고, 정신이고, 내 평생의 이상이야.”-소로야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 중 그가 아내에게 남긴 편지 중 800여 통이 남아 있어 그가 가족과 육체적으로 떨어져 지내는 시간에도 정신적으로는 완전히 연결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여기


▎호아킨 소로야 [아직도 생선이 비싸다고 말하는가!] 1894
심리치료에서 만난 내담자들에게 현재 자신과 자신의 주변에 있는 가치의 소중함을 찾고 지금의 행복감에 더 집중하라는 이야기를 하면 자신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들을 나열하는 경우가 많다. 시간이 없어서,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상황이 여의치 않아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방법은 찾으면 있고, 실행할 가능성도 있지만, 현실을 마주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로, 그렇게까지 해서 굳이 작은 행복을 찾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이유로 시간을 그저 흘려보내기도 한다.

심리치료에서 상담을 받으러 온 내담자의 문제를 다루는 방식 중 ‘지금-여기(here and now)’라는 개념이 있다. 과거의 문제라 하더라도 현재 시점으로 가져와 여기에서 다루도록 하며, 미래에 일어 날 일들도 현재 시점으로 가져오도록 하는 것이다. 과거는 지나간 일이고, 미래는 오지 않았으며, 현재를 제외하고는 어떤 힘도 가지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아이들을 칭찬하거나 훈육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시간이 지난 칭찬과 훈육은 그 힘이 현저히 떨어진다. 소로야의 그림은 야외에서 빛을 담은 인상주의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의 그림은 ‘지금-여기’의 순간을 담은, 철저히 사실주의적인 모습을 하고 있기도 하다.

경험적인 현실 이외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주의와 ‘지금-여기’의 찰나를 포착한 호아킨 소로야가 만나 작품 [아직도 생선이 비싸다고 말하는가!]가 탄생했다. 작품 속에서 고기잡이 배에 타고 있던 한 소년은 고기를 잡다 크게 다쳐 쓰러져 있다. 왼쪽 귀퉁이에는 얼마 되지 않는, 오늘 잡은 생선이 쌓여 있다. 소년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로 보이는 남성들이 다친 아이를 돌보고 있지만, 아이의 상처는 깊어 보이고, 배가 바다위에 있어 제대로 된 치료를 받기도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험난한 파도와 싸우며 목숨 걸고 잡은 생선을 시장에 내놓으면 사람들은 어김없이 비싸다고 투덜댈 것이다. 소로야의 현재성은 이렇게 냉혹한 현실의 찰나를 캔버스에 담기도 했다.

다시 꺼내어 쓸 수 있는 마음의 에너지

현재를 놓친 후의 회상은 아쉬움으로 남지만, 현재를 충분히 경험한 후의 회상은 자신이 다시 꺼내 쓸 수 있는 힘이 된다. 셋째 딸이자 막내 엘레나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소중한 순간을 담은 작품 <엄마>에는 잠들어 있는 아내와 딸의 모습이 고요하고 따듯하게 담겨 있다. 소로야는 세상에 막 태어난 딸이 곤히 잠들어 있는 순간을 화폭에 담았다. 배경을 아름답게 그리는 것이 특징인 작가이지만 지금만큼은 새하얀 벽과 이불 안에서 잠든 아내와 아이만 중요해 보인다. 그는 잊고 싶지 않은 소중한 순간을 기억하며 자신의 삶 속에서 의미 있는 순간들을 또 한 번 마음에 새긴 작가였다.

다시 이 그림을 꺼내 보면서 작가는 행복했던 시간을 떠올렸고, 바쁜 스케줄로 지치고 힘들 때 자신을 늘 응원해주는 가족이라는 존재를 통해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지금-여기’에 일어나는 사건들은 아이의 출산만큼 거창한 일은 아니겠지만, 반복되지 않는 유일한 시간들이 오늘 이 시간에도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더 선명하게 기억하고 경험해야 할 시간의 조각들이 보일 것이다. 그리고 모두에게는 이 조각들을 가져가 중요한 자신의 인생 보관함에 간직할 수 있는 선택권이 있다.

삶의 질이 높은 사람들은 계절의 변화를 잘 알고 있다. 반면, 일상이 버거운 사람들은 하늘보다 땅을 보며, 눈부신 태양과 흘러가는 구름, 봄의 싱그러움과 가을의 운치를 감상할 여유가 없다. 지나고 나면 잎은 떨어져 있고, 어쩌다 보니 벌써 한 해가 지났다고 생각한다. 즉, 삶의 질이라는 것은 마음의 여유이고, 주변을 둘러보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현재성의 변화를 볼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퇴근하며 본 아름다운 노을을 다음 날 퇴근할 때도 다시 볼 것이라 기대하는 사람과, 똑같은 쳇바퀴 속에서 반복된 삶을 사는 사람은 스케줄이 동일하다 해도 삶을 바라보는 태도가 완전히 다르다. 오늘의 현재성을 바라보라고 해도 어제와 똑같은 하루가 그저 흘러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단언컨대 반복되는 양상은 있더라도 동일한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는 자기 스스로가 오늘 하루가 특별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무수한 이유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이미 지쳤고, 굳이 할 필요가 없고, 귀찮다는 이유가 대부분일 것이다. 퇴근 후 날씨가 괜찮다면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산책할 수도 있고, 한두 시간 정도 여유가 있다면 서점에 들러 신간 도서를 구매할 수도 있으며, 주말에는 한두 시간 걸리는 근교로 드라이브를 가서 자연을 만나고 올 수도 있다. 오랜만에 영화나 공연을 보며 문화생활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오랜 시간 연락이 닿지 않았던 소중한 사람에게 안부전화를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다시는 오지 않을 오늘의 다양한 모습을 발견하고, 또 오늘을 특별하게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 시도를 한다면, 매일이 새롭고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소중해진다. 그리고 어떤 지금을 만드는가는 온전히 나의 선택에 달려 있다.

※ 김소울 -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플로리다주립대학교에서 미술치료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국제임상미술치료학회 회장이며 국민대학교 디자인대학원 미술치료전공 겸임교수이자 가천대학교 조형예술대학 객원교수이다. 플로리다마음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치유미술관』 외 12권의 저역서가 있다.

202307호 (2023.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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