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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남의 TRAVEL & CULTURE | 이탈리아 로마(ROMA) 

로마제국의 위대함을 증언하는 콜로세움 

일곱 개 언덕을 중심으로 발전한 로마는 자그마치 2800년이라는 장구한 역사가 층층이 겹쳐 있는 도시이다. 이러한 로마를 대표하는 건축물은 단연 콜로세움이다. 2000년 전 로마제국의 위용을 생생하게 증언해주는 이 거대한 원형극장은 지금도 로마에서 가장 강력한 랜드마크로 남아 있다.

▎로마 역사상 최대의 원형극장인 콜로세움. / 사진:정태남
콜로세움 앞 광장은 전 세계에서 몰려든 관광객들로 항상 붐빈다. 콜로세움 안으로 줄을 서서 들어가는 사람들을 보면, 2000년 전 검투사 시합을 보려고 콜로세움 안으로 들어가려는 관중들의 모습이 상상된다. 콜로세움 1층에 있는 80개 아치 중 주출입구 4개를 제외한 76개는 당시 일반인들을 위한 출입구였다. 각 아치 상부에는 번호가 새겨져 있어 당시 관중들은 자기 입장권 번호와 맞는 출입구로 들어갔을 테니 지금처럼 길게 줄을 서지 않았을 것이다.

네로 황제가 콜로세움에서 기독교 신자들이 맹수의 밥이 되는 광경을 지켜보며 즐거워했다는 일화를 믿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네로 황제는 평생 콜로세움을 본 적이 없다. 왜냐면 콜로세움은 그가 죽은 다음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확히 언제 세워졌을까?

암피테아트룸 플라비움


네로 황제가 재위하던 서기 64년 7월 18일과 19일 사이의 밤에, 로마에 전대미문의 대화재가 발생했다. 6일 동안 타오른 불길은 시가지의 상당 부분을 파괴했다. 네로 황제는 화재를 수습하고 난 후 로마를 재건하면서 도무스 아우레아(황금 궁전)라는 방대한 궁전을 세웠다. 서기 66년, 로마제국의 속주 유데아(유대)에서 걷잡을 수 없는 반란이 일어나자 네로 황제는 휘하의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Flavius Vespasianus) 장군에게 유대 반란 진압을 맡겼다. 그런데 네로 황제는 서기 68년에 원로원과 결탁한 반대파 세력의 음모를 막지 못하고 원로원으로부터 ‘조국의 적’으로 몰려 자살하고 말았다. 그 후 로마제국은 계속 이어지는 쿠데타로 내란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고 이 혼란기를 평정하고 최강자로 등장한 인물은 유대 반란 진압 중 로마로 진군해온 60세 노장 베스파시아누스였다. 이리하여 서기 69년에 로마제국 역사상 처음으로 황족이나 원로원급 귀족계급이 아닌 그 아래의 기사계급 출신이 황제가 되었다.

플라비우스 왕조를 연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새로운 왕조의 영광과 로마제국의 굳건함을 만방에 보여주려는 듯, 네로 황제의 황금 궁전 도무스 아우레아를 헐어내고 황제 개인이 아닌 시민들을 위한 대규모 공공건축물 건립을 계획했다. 건립 비용은 예루살렘에서 노획한 엄청난 양의 값진 보물과 수많은 유대 전쟁포로를 팔아서 충당했다.


▎콜로세움 내부. 초창기에는 모의 해전도 할 정도로 완벽한 배수시설을 갖추었다. / 사진:정태남
이리하여 그는 서기 72년에 도무스 아우레아에 딸린 인공호수가 있던 자리에 로마 역사상 최대 규모의 원형극장을 착공했다. 하지만 그는 완공을 보지 못하고 79년에 타계했고 황제 자리를 물려받은 장남 티투스가 이듬해인 80년에 성대한 개막 기념행사를 열었다. 당시 이 원형극장을 ‘플라비우스 가문의 원형극장’이란 뜻에서 암피테아트룸 플라비움(Amphitheatrum Flavium)이라고 불렀다. 중세에는 ‘콜로세움’으로 불렸고 현재 이탈리아에서는 콜로세오(Colosseo)라고 한다.

흔히 콜로세움을 원형극장이라고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타원형 극장이다. 이 타원형 건축물은 장축과 단축이 각각 188m, 156m이고, 둘레는 527m이다. 바깥벽 높이는 약 50m라서 로마의 웬만한 언덕 높이와 맞먹는다. 콜로세움은 관중 5만 명을 수용할 수 있었고 입석까지 포함하면 7만~8만 명까지 수용 가능했다. 네 개 층으로 구분된 관중석은 신분에 따라 자리가 달랐고, 시야를 좋게 하기 위해 2, 3층 관중석 경사도를 37도로 설정했으며, 4층 관중석은 이보다 더 가파르게 설계되었다. 또 비가 오거나 햇빛이 강할 때는 돛과 같은 천막 벨라리움(Velarium)을 쳤다.


▎콜로세움에 세운 십자가. 콜로세움에서 기독교 신자들을 박해했다는 기록은 없다. / 사진:정태남
놀라운 것은 초창기에는 ‘나우마키아’라고 하는 모의 해전도 할 정도로 완벽한 배수시설을 갖추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물을 넣고 빼는 번거로움 때문에 나중에는 이를 없애고 경기장 아래에 미로와 같은 지하시설을 만들어 검투사 대기실, 맹수 우리, 무대장치 보관실 등으로 사용했다.

콜로세움을 세우는 데 사용된 엄청난 양의 석재는 로마 근교 티볼리의 채석장에서 매일 수레 200대로 운반해 왔다고 한다. 그런데 학자들은 콜로세움의 실제 공사기간이 5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당시에 이렇게 단기간에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인력의 조직화와 시공 기술이 매우 뛰어났을 뿐 아니라 놀라울 정도로 공사 현장이 시스템화되었고 건축자재들이 표준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콜로세움의 외관도 똑같은 크기의 아치로 표준화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아치와 아치 사이의 기둥 양식을 층마다 달리 사용하여 외관에 약간의 변화를 주었다. 고대 로마의 건축가들은 건물을 미적(美的)으로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양식이 다른 기둥을 사용했다. 기둥을 세우는 본래의 목적은 위에서 내리는 무게를 지탱하기 위한 것이지만 콜로세움 외관의 기둥들은 장식적으로 사용되었다. 즉, 1층은 두꺼운 느낌을 주는 토스카나 양식의 기둥, 2층은 다소 여성적인 느낌을 주는 이오니아 양식의 기둥, 3층은 마치 소녀를 연상하듯 가볍고 날렵한 느낌을 주는 코린토스 양식의 기둥을 세운 반면, 4층은 코린토스 양식을 변형한 벽기둥으로 처리해 원기둥에 비하면 훨씬 가볍게 느껴진다. 위로 갈수록 건물의 하중이 줄어들기 때문에, 서로 다른 느낌을 주는 양식의 기둥들을 이와 같은 순서로 수직으로 배치한 것은 매우 논리적이다. 한편 직사각형 창문이 있는 벽체로 된 4층은 아치로 뚫려 있는 1, 2, 3층과 강한 음영 대비를 이루면서 콜로세움의 외관을 전체적으로 마무리하는 듯하며, 콜로세움 외관에 중후함을 더해준다.


▎콜로세움을 세운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 사진:정태남


콜로세움의 십자가


▎콜로세움 앞 광장에서 열리는 성금요일 미사. 사람 키와 비교해보면 콜로세움의 거대한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 사진:정태남
콜로세움에서 국가가 제공한 여러 볼거리 중, 시민들이 열광했던 것은 맹수 사냥과 검투사 시합이었다. 특히 검투사 시합은 최고의 볼거리였기 때문에 이에 대한 시민들의 열광은 황제도 말릴 수 없었다. 경기장 바닥에 깔아놓은 모래는 애꿎은 맹수들과 검투사들이 흘린 피로 붉게 물들곤 했다. 아레나(arena)는 바로 ‘모래’를 뜻하는데 오늘날에는 ‘원형경기장’이란 뜻으로 사용된다.

콜로세움에서 벌어진 마지막 시합은 서기 523년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콜로세움은 거의 450년 동안 사용되었던 셈이다. 그런데 굳건하게 서 있던 콜로세움은 중세에 발생한 여러 차례의 지진으로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 후 16세기에 들어 로마에 건축 붐이 대대적으로 일었을 때 새로운 성당과 건물을 짓는 데 필요한 석재는 아예 이곳에서 직접 공급했다. 로마제국의 영광을 증언하는 콜로세움이 그야말로 채석장으로 전락한 셈이다.

그 후에는 오랫동안 방치된 채 잡초만 무성한 폐허가 되어 소와 양을 먹이는 방목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18세기 중엽에 교황청은 이곳을 기독교 순교지로 인정하고 그 안에 십자가 하나를 세웠다. 이리하여 콜로세움은 사라질 위기에서 겨우 벗어났다.

그런데 과연 콜로세움이 기독교 성지일까? 문제는 콜로세움에서 기독교 신자들을 박해했다는 역사적 기록이 전혀 없으니 십자가의 의미가 무색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옛날 관중들이 쏟아내는 광란의 함성 속에서 검투사 시합이나 공개 처형 등으로 사라져간 생명들을 생각해본다면 이 십자가에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겠다. 사실 로마제국에서 단위면적당 가장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은 곳이 바로 콜로세움이다.

※ 정태남 - 이탈리아 공인건축사, 작가 정태남은 서울대 졸업 후 이탈리아 정부장학생으로 유학, 로마대학교에서 건축부문 학위를 받았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건축분야 외에도 미술, 음악, 역사, 언어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로마를 중심으로 30년 이상 유럽에서 활동했다. 저서로는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동유럽 문화도시기행』,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외에 여러 권이 있다.(culturebox@naver.com)

202307호 (2023.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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