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PJ살롱 박병진의 위스키 기행(06) 

글렌파클라스 이야기 

화성의 한 부분처럼 황량한 구릉과 하일랜드의 강렬한 푸른 하늘 아래, 가족들과 함께 고집스레 위스키 장인의 신념을 지켜나가는 셰리 위스키의 명가를 찾아 떠난 여섯 번째 여행.

▎초현실적인 푸른 하늘과 커다란 뭉게구름, 폐기된 거대한 증류기와의 부조화가 생경한 느낌을 주는 글렌파클라스의 외관.
정로환과 크레오소트

오래전부터 물을 갈아 먹어 배탈이 났을 때 먹던 약으로 유명한 것은 몇 가지가 있지만 가장 대표적인 게 지독한 환약 냄새로 유명한 정로환(正露丸)이다. 정로환 특유의 소독약 냄새는 강력한 살균효과를 내는 주성분인 크레오소트에서 기인한다. 러일전쟁 때 일본 관동군이 먹던 지사제를 당시 메이지 텐노가 러시아를 정벌하라는 의미로 ‘원정할 정(征)’을 붙여 정로환(征露丸)으로 명명했는데, 2차 대전 종전 후 승전국인 러시아의 눈치가 보여서 정로환의 여러 제조사 중 가장 큰 타이코제약에서 이를 ‘바를 정(正)’을 사용한 정로환(正露丸)으로 바꾸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그래서 전쟁 전 정로환 상자 포장에는 일본 육군 초대 의무 총감이 있었는데 지금은 묘하게도 진군나팔 그림으로 바뀌었다.

목탄을 증류한 액체인 크레오소트는 발암물질로 알려진 크레졸과 페놀, 과이어콜 성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최근에 크레졸 성분을 뺀 정로환F를 생산하고 있으나, 사실 크레졸의 유해성이 학술적으로 완전히 입증되지는 않아 일본에서는 지금도 오리지널 정로환이 나오고 있다. 19세기에는 모든 병을 세균에서 기인한다고 보았기에 이만한 살균제가 없어 크레오소트가 만병 통치약으로 쓰였다. 바로 이 크레오소트 성분이 오늘날 위스키를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인 피트 위스키인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물질이다.

석탄보다 발화점이 낮은 연료인 이탄, 즉 피트에서 크레오소트 성분이 나오는데 이것으로 몰트를 훈연해서 향을 덧입히면 바로 정로환 냄새가 나는 피트 위스키를 만들 수 있다. 장황하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몇 년 전 내가 스페이사이드의 글렌파클라스 증류소를 방문했을 때, 안내를 맡은 최고참 할아버지 직원에게서 피트에 대한 잘못된 전설을 들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글렌파클라스


정상적인 직장인이라면 완전히 위스키에 미치지 않고서야 3년 연속으로 스코틀랜드에 갈 사람이 별로 없을 텐데, 내가 바로 그 미친 사람이 되었다. 나는 전년도에 짧은 일정 탓에 가보지 못한 스페이사이드 지역의 다른 위스키 증류소들을 마저 둘러보기 위해 여행길에 올랐고, 그중 처음으로 글렌파클라스를 방문하기 위하여 또다시 런던행 영국항공에 몸을 실었다.

이번 여행은 나 홀로 떠났다. 시작은 에든버러행 항공기를 타고 도착한 후 또다시 엘긴행 버진 애틀란틱 열차로 해안 철로를 달렸고, 엘긴에 도착하고부터는 계속 버스를 타고 다녔다. 하루에 한두 번 혹은 몇 번만 다니는 버스를 이용해 스페이사이드 전역을 다니는 게 어려울 것 같았지만, 내 마음속 시계를 조금 느긋하게 하일랜드 시간에 맞추고 나니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이따금 버스 시간을 도저히 맞출 수 없을 때는 택시로 이동하기도 하고, 때때로 화상회의를 하며 일상으로 순간 이동을 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최대한 의도적으로 이곳, 이 시간에 머물기로 했다.

엘긴역에서 크레이겔라키까지 가는 버스는 한 시간에 한 대가 오지만 도착해보니 엘긴역 앞에서는 도무지 ‘엘긴역’ 버스 정류장을 찾을 수 없었다. 역을 찾아 헤매기를 20여 분. 무거운 트렁크를 끌고 언덕을 넘어서니 그제야 언덕 아래 버스 정류장이 보였다. 도대체 수백 미터 언덕 너머 엘긴역과는 무관한 곳에 왜 ‘엘긴역’ 버스 정류장을 만들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참을 기다려 도착한 버스에 오르니 깡마른 버스 기사는 그저 시속 30㎞로 느긋하게 시골길을 달리기만 했다. 불평도 잠시, 다음 정거장에서 탄 분홍빛 뺨의 하일랜드 시골 아가씨와 즐겁게 대화를 나누다 보니 다시금 나는 하일랜드의 일부가 되었다. 그렇게 즐거운 며칠을 보내고서, 나도 이제 그 스코틀랜드의 시간에 완벽히 몰입되었다고 생각한 순간, 나는 다시 인천행 영국항공을 타고 현실로 돌아오게 되었다. 돌아오는 순간은 무척 아쉬웠지만, 그래도 몰입했던 하일랜드의 시간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다. 내 마음속 하일랜드의 시계는 영원히 그 시간에 멈춰 있을 것임을 잘 알고 있기에.

5 Decades Whiskies


▎마음속 시계를 느긋하게 하일랜드 시간에 맞추고 버스를 타고 달리다 마주한 스페이사이드의 그림 같은 풍광.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중간에 한 번 택시를 타고 찾아간 글렌파클라스의 외관은 생각 이상이었다. 스페이사이드의 다른 증류소들과 마찬가지로 수려하고 아름다운 풍광을 기대했는데, 이내 맞닥뜨린 글렌파클라스 증류소의 풍광은 이 세상의 것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생경했다. 물론 하일랜드 스타일의 구릉이 증류소 뒤로 완만히 펼쳐졌지만, 그 구릉들은 아일라섬에서 바라본 건너편 주라섬의 황량함보다 더한 ‘민둥산’에 가까웠고, 마치 살바도르 달리의 녹아내리는 시계가 연상되는 초현실적인 푸른 하늘과 그 위의 더욱 비현실적인 커다란 뭉게구름, 전혀 비례가 맞지 않는 폐기된 거대한 증류기와의 부조화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고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거대한 증류소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한국에서 출발하기 전 글렌파클라스 증류소의 홈페이지를 뒤져 관광객용 10파운드짜리 증류소 투어프로그램을 신청해두었으나, 어렵게 간 이 여행에서 좀 더 스페이사이드를 깊이 담아가고 싶었기에, 일면식도 없는 증류소 관계자에게 이런 내 소망을 담은 이메일을 보냈었다. 역시 무엇이든 두드리면 열리는 법. 이렇게 물어보니 방법이 생겼다. 일본 산토리위스키의 창업자 토리이 신지로 회장이 늘 하던 말인 “얏테 미나하레?(이거 해봤어?)”처럼, 현대그룹 창업자인 정주영 회장이나 지금 내가 몸담고 있는 회사의 창업주 회장님도 늘 “임자, 해봤어?”, “일단 시도는 해봤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것처럼, 역시 모든 창업자는 통하는 게 있는 것 같다.

나도 그분들처럼 한번 시도해보니 운 좋게도 긍정적인 회신이 왔고, 덕분에 일반인들에게 거의 오픈하지 않는 글렌파클라스 증류소의 ‘5 Decades Tour’라는 특별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다. 한 달에 한 번, 두 명 이상의 신청자가 있을 경우에만 열리는 매우 제한적인 프로그램이며, 어떤 프랑스인 커플이 예약했는데 나도 한 자리 추가하게 된 것이다. 1인당 120파운드를 지불한 그 투어의 참가자는 이렇게 단 세 명뿐이었고, 70세는 족히 되어 보이는 증류소의 최고참 할아버지가 우리의 가이드가 되어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크다는 증류기를 포함하여 글렌파클라스의 모든 제조 공정을 샅샅이 보여주었다. 글렌파클라스만의 향기 좋고 부드러운 위스키의 생산 비결에 대해 열변을 토하셨지만, 솔직히 지금은 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증류소 투어의 하이라이트인 5 decades 위스키 시음이 글렌파클라스 증류소의 가장 크고 멋진 방에서 우리 세 사람을 위한 이벤트로 펼쳐진 것만 생생하게 기억 날 뿐이다.

증류소의 역사에서 큰 의미가 있다는 배 모양의 건물 가운데 선장실(Captain’s cabin)이란 가장 좋은 방에서 글렌파클라스가 자랑하는 패밀리캐스크 위스키를 1960년대부터 시작하여 2000년대까지 10년 단위로 5잔을 시음했다. 위스키 한 잔 한 잔이 모두 하나의 오크통에서 병입한 싱글캐스크 위스키였고 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캐스크 스트렝스 위스키라 위스키 애호가인 프랑스 커플과 나,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 잔 가격이 아마도 수백 파운드는 족히 될 듯한 귀한 위스키인데, 프랑스인 부부도 나와 비슷한 연배인지라 할아버지 가이드가 우리에게 나이를 물어보더니 1960년대의 위스키는 내 생년 빈티지인 1966년산을 골라주었다. 각각 1964년, 1965년생인 프랑스인 커플은 내게 자신의 생년 빈티지를 마시게 된 것을 축하해주었다. 위스키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Birth Vintage’에 대한 로망이 있다. 하지만 내 나이가 있는지라 이런 걸 내 소유로 한다면 내 인생에서 소중한 많은 것을 희생해야 한다는 당연한 이치 때문에 거의 포기하고 살았는데, 뜻밖의 감사한 선물이었다. 위스키는 지금 사면 총알이고 나중에 사면 대포알, 시간이 더 지나면 미사일이란 말이 있으니 만약 자신의 생년 빈티지 위스키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미사일이 되기 전에 미리 사두는 것을 추천한다. 지금 젊은 분들은 조금만 무리한다면 자신의 생년 빈티지를 한 병 구할 수 있고, 언젠가 세월이 흐른 후 사랑하는 사람과 마셔볼 기회도 있을 것이다. 아예 시도조차 하기 어려운 내 세대에 비하면 꽤 행운이다.


▎글렌파클라스 증류소의 ‘5 Decades Tour’라는 특별한 프로그램에 참여해 196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의 패밀리캐스크 위스키를 10년 단위로 5잔을 시음했다.
글렌파클라스는 셰리 위스키로 유명한 곳이기에 진간장보다 더 진한 갈색으로 엄청난 향내가 진동할 줄 알았는데, 50년 이상 오랜 시간 숙성을 거쳤기 때문인지 향은 생각보다 부드럽고 목 넘김은 따뜻했다. 50은 지천명이라 위스키 또한 천명을 아는 것인지, 아직 천명 근처에도 가지 못한 나로서는 그저 눈으로 코로 입으로 천명을 더듬는 수밖에 없었다. 마침 그 프랑스인 커플은 내 숙소인 하일랜더인의 바로 옆인 크레이겔라키 호텔에 묵고 있어, 내가 한국에서 준비해 간 문배주 한 병으로 미안함과 우정을 표시했다.

피트 위스키의 모순


▎함께 증류소 투어에 참여한 프랑스인 커플. 나에게 생년 빈티지 위스키를 마시게 된 것을 축하해주었다.
우리를 안내해준 할아버지는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스페이사이드 역시 주요한 피트 산지 중 하나라며, 예전에는 이런 피트 위스키를 스페이사이드에서도 많이 만들었다고 한다. 피트 위스키는 아일라를 비롯한 섬 지역에서 주로 나고, 스페이사이드에서는 향긋한 셰리 위스키라는 일반적인 상식과는 좀 다른 이야기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이야기로 돼지의 감자뼈로 끓인 감자탕이 있지 않은가? 사람들이 자꾸 감자가 들어간 것으로 오해해서 왜 감자가 없냐고 항의해 감자를 넣게 되었다는 감자탕 이야기를 아마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이곳 스페이사이드에서는 반대로 피트는 많이 생산된다. 하지만 셰리 캐스크 숙성의 위스키가 주력인 그들의 특성상 이곳에서 채취된 많은 피트는 아일라를 비롯한 유명한 피트 위스키 산지로 역수출되어 그곳에서 피트 위스키를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다고 한다.

또 다른 사례는 스페이사이드의 다른 유명한 위스키인 발베니에서도 찾을 수 있다. 피트 위스키는 만들지 않지만 1년 중 일주일만 피트 위스키를 만들어서 ‘Peated Week’ 혹은 ‘Week of Peat’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소량 생산한다. 이를 위해서는 몰트를 훈연하는 훈연탑의 연료를 석탄에서 피트로 바꾸어야 하는데 한 번 바꾸고 나면 지독한 피트 냄새가 배어서 다시 셋업을 하려면 고생이 많았다고 한다. 요즘도 띄엄띄엄 피트 위스키가 몇몇 스페이사이드 지역에서도 나오고 있으니 전통적인 스페이사이드의 맛을 벗어난 이단아의 맛을 한 번쯤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이렇듯 감자탕의 감자나 스페이사이드의 피트와 같이 세상의 모든 일은 수요와 공급의 차이에서 기인하고 그 불균형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 바로 인생의 일부이지 않을까 한다. 뜬금없지만 내 인생의 책을 한 권 꼽으라면 나는 망설임 없이 『더 골(The Goal)』이란 책을 추천하고 싶다. 제약조건이론 (Constraint Theory)을 소설로 쉽게 풀어 쓴 책인데, 워낙 세계적으로 인기가 좋아 총 4권에 이르는 후속편이 계속 나왔다. 읽기에 어렵지 않고 무척 재미있어 주위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에게 권하곤 한다.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각 주체들의 수많은 진지한 노력들이 나오고 이러한 것들이 오늘날 ERP니 SCM, CRM이니 하는 것들로 구현되고 계속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책인데, 위스키 또한 예외가 아니다. 지난 글렌피딕 편에서 위스키의 물류 효율화 때문에 우리가 마시는 위스키의 3할 정도는 글래스고나 에든버러의 수돗물이라고 했는데, 곳곳에서 유사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버번위스키의 병이 대개 각져 있거나 평평한 것도 효율적으로 적재하기 위해서니 이 또한 효율성이라는 주제로 귀결된다. 이렇듯 세상의 모든 일은 나 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영향을 준다.

그래도 지금 이 글을 쓰는 느긋한 토요일 오후만큼은 지나간 글렌파클라스 여행 순간으로 타임슬립하여 다시 한번 1966년산 글렌파클라스 한잔을 음미하고 싶다. 마치 내 생일처럼!

※ 박병진 - 1991년 IBM 신입사원으로 경력을 시작해 IBM, SAP, SK 등 글로벌기업의 임원으로서 지난 30여 년 동안 대한민국 기업들의 경쟁력 향상에 기여해왔다. 2022년부터 딥러닝 기반의 무인 교통단속장비를 생산하는 (주)토페스의 CEO로 부임해 더욱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다. 그의 위스키 사랑은 10여 년 전부터 시작됐다. 각종 증류주의 매력에 빠져 세계 각국의 증류소를 다니고 있으며, 2016년부터는 ‘Salon de PJ’라는 위스키 클래스로 기업체, 대학교, 단체 등에서 많은 사람에게 증류주의 매력을 전하고 있다.

202308호 (2023.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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