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고 풍요로워 일본에서도 살기 좋은 곳으로 손꼽히는 호쿠리쿠 지방의 위스키와 진을 찾아 떠난 일곱 번째 여행.
▎고풍스러움과 현대적 시설의 부자연스러움이 공존하는 사부로마루 증류소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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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카미네와 코지 위스키미국의 수도 워싱턴DC는 도시를 휘감아 흐르는 포토맥강을 따라 조성된 공원에 해마다 넘칠 듯 만개하는 화사한 벚꽃(Cherry Blossom)으로 유명하다. 세계적으로도 이 정도 규모로 아름다운 왕벚나무 군락을 도시 한가운데서 보기는 쉽지 않다. 도쿄 우에노 공원이나 여의도 윤중로를 따라 펼쳐지는 왕벚나무 군락이 그나마 비교할 수 있을 정도이지만 그 규모는 훨씬 작다. 이 유명한 포토맥 공원 벚꽃의 배경에는 일미친선협회를 만든 한 일본인 학자의 노력이 있다.화학자 타카미네 조키치 박사는 생체의 긴장 상태를 유지해주는 아드레날린을 부신수질에서 최초로 분리해냈고, 소화효소인 타카디아스타아제를 발견했으며, 최초로 인산비료의 인공 합성에 성공하여 기업인으로도 크게 성공했다. 19세기를 배경으로 하는 로빈슨 크루소류의 어드벤처 소설에서 흔히 나오는 갈매기의 배설물(구아노)이 쌓인 무인도를 발견해서 큰 부자가 되는 이야기를 기억한다면, 그 구아노 비료를 인공으로 만든 것이 무척 대단한 일임을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그 덕분에 큰돈을 번 타카미네는 공식적으로는 일본 정부가 선물했던 벚나무에 더하여, 사재를 털어서 포토맥강 인근에 더 많은 벚나무를 심었다. 말년에는 미국으로 귀화하고도 양국의 친선에 앞장섰다. 한편으로는 사재를 쏟아부어 일본 이화학연구소, 약칭 리켄(理硏)을 설립하여 후학 양성에 힘써 오늘날까지 일본 노벨상 수상자의 절반가량이 리켄 출신이라고 한다. 역시 돈을 벌어서는 이렇게 써야 하는게 아닌가 싶다.타카미네가 발견한 타카디아스타아제는 술과 관련 있는 효소인데, 그는 이를 이용하여 타카코지라는 일종의 누룩을 만들었다. 동양에서는 술을 만들 때 누룩을 사용하여 전분의 당화를 촉진하고 이어서 발효까지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서양에서는 전통적으로 두 공정은 언제나 분리되어 있었다. 만약 이를 이용해서 당화와 발효를 제조공정에서 동시에 이루어낼 수 있다면 이는 엄청난 프로세스 혁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스카치위스키나 아이리시위스키에 비해서 출발점이 늦은 미국 위스키 업계에서는 경쟁자를 단박에 뛰어넘을 수 있는 묘안을 고심하다가 타카코지를 알게 되었고 이 ‘타카미네 프로세스’를 통하여 그들만의 혁신을 추구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미국 위스키의 80%를 생산했던 위스키트러스트의 CEO가 이런 결정을 내렸고, 수많은 반대에도 이를 생산공정에 적용했다. 하지만 이러한 혁신이 현실화되면 일자리를 잃을 것이라고 두려워한 미국 위스키 노동자들의 방화로 공장이 두 번이나 불타버려 결국 이 도전을 포기하고 말았다.
▎첫 느낌은 가볍지만 바닐라가 느껴지는 녹진한 맛이 특징인 옅은 밀짚 색의 사부로마루 위스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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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반을 배경으로 하는 많은 마피아 영화에서 볼 수 있듯, 이 시대의 미국은 한창 노동자의 권리가 신장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만약 이 시도가 성공했더라면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위스키를 즐길 수도 있었겠지만, 무엇이 우리 삶을 더 풍성하게 할지는 사실 생각하기 나름이다. 전통이든 혁신이든 모두 의미가 있겠지만 나는 혁신적인 공정이 아닌, 지금과 같은 아날로그로도 충분히 만족한다.최근 일본에서는 일부 지방 증류소에서 이런 식의 코지 위스키를 시도하고 있으나, 일본 법률상 코지(누룩)를 사용하면 위스키로 부를 수 없어 일정 부분 한계가 있다. 어느 나라나 법과 제도는 혁신에 후행하기 마련이지만, 이를 넘어서는 것도 혁신가의 몫이다. 오히려 미국에서는 이를 위스키로 인정하여 코지 위스키라는 카테고리가 새로이 생겨났다. 우리나라도 최근 주세법의 지나친 규제로 인하여 한국 최초의 위스키를 시도하는 분들이 혁신적이거나 완성도 높은 위스키를 만드는 데 애로 사항이 많다. 결국 이것도 우리 시대가 해결해야 하는 과제이지 않을까? 한국 주세법의 근본적인 문제는 간단히 말하자면 소주 가격에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매우 큰 위험을 자초하는 것이라는 데 기인한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미국인들이 자주하는 농담 아닌 농담이 있다. ‘어떤 정권이 만약 맥주와 가솔린 가격을 건드린다면 반드시 정권을 잃는다’고 할 정도로 미국인들에겐 맥주와 자동차는 삶 자체이다. 여하튼 이 시점에서 현행 국내 주세를 둘러싼 각종 불합리한 관행을 깨고 다양하고 맛있는 여러 가지 술을 한국인들이 즐기고 또 K-Drink로 세계에 수출할 수 있도록, 용감하게 소주 가격을 건드릴 참신한 정치인과 정권을 기대해본다.
반가운 얼굴과 함께 시작된 호쿠리쿠 기행
▎임팩트 있는 빨간 대문이 돋보이는 작지만 매력적인 알렘빅 증류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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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가가 있는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에는 유명한 전통 먹거리로 유명한 오미초시장이 있다. 몇 년 전 오미초시장 앞에 있는 홀리데이인 호텔에 투숙한 적이 있었는데, 혼자서 아침 산책을 하러 호텔을 한 바퀴 돌다가 갑자기 이 호텔의 외벽에서 타카마네 박사의 흔적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알고 보니 이분이 가나자와에서 나고 자랐고, 바로 이 호텔 자리가 그의 생가였던 것이다. 위스키 업계의 판도를 바꿀 뻔했던 선인에게 이제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지만, 나 같은 이방인이 우연히 그 흔적을 발견하고 반가워한 것을 하늘에 있는 타카미네 박사가 알았다면 무척 기뻐했을 것 같다.이시카와현과 도야마현, 후쿠이현, 니가타현을 포함한 지역을 당시 수도인 교토의 북쪽 땅이라고 해서, 호쿠리쿠(北陸)라고 하는데 아름다운 자연이 있고 풍요로워 일본에서도 살기 좋은 곳으로 손꼽힌다. 도쿄나 오사카에서 출발하는 신칸센 열차도 있으니 기회가 된다면 한번 방문해보는 것을 추천한다. 코로나 이전에는 한국에서 이곳으로 출발하는 항공편이 많았는데, 나처럼 이곳을 사랑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져서 조만간 복항될 것으로 기대한다.이곳은 맛있는 쌀과 맑은 물이 있어 예로부터 유명한 일본주(사케)를 많이 만들었고, 오늘날에도 새로운 술을 만들기 위한 시도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2차대전 종전 후 쌀이 부족하여 일본에서도 쌀로 술을 빚는 것이 금기시되어 도야마현에 있는 와카츠루 양조장에서 쌀 대신 보리로 위스키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 현재 호쿠리쿠 지방의 유일한 위스키 증류소 사부로마루가 되었다. 가나자와에 도착한 첫날, 처남의 소개로 예전에 사부로마루에 근무했던 바텐더 타지마 상의 바에 갔다. 타지마 상은 사부로마루 증류소에 간다면, 다카오카역에 도착해 꼭 그곳에서 왕복표를 사라고 귀띔해주었다. 가나자와역에서 이시카와 철도의 세 칸짜리 디젤 기차로 출발하여 다카오카에서 내린 다음, 역 밖으로 나가서 표를 다시 끊고 두 칸짜리 도야마 조하나선 철도에 탑승하여 아부라덴역에서 내려야 하는 여정이이기에 나같이 일본어도 못 하는 외국인이 외국어 안내나 환승 따위 없는 지방선 두 가지를 타고 역무원도 없는 역에 내린다는 것은 매우 곤란할 것이라는 이유에서다.정말 영어로 된 노선도 하나 없는 완벽한 일본 시골의 지방 철도였다. 이시카와 철도 안내 데스크에서 프린트된 일본어 노선도를 한 장 받았지만 지명에도 사투리를 썼는지, 표준 일본어 한자 독음과는 역명이 달라 더욱 혼란스러웠다. 게다가 타지마 상이 이야기해주지 않은 것이 한 가지 더 있었는데, 아부라덴역에 정차해서는 열차 두 칸 중 앞 칸만 문이 열리고 거기서만 차장이 내리고 타는 사람의 표를 검사한다는 것이다. 뒤 칸에 있던 나는 그것도 모르고 열리지 않는 문을 수동으로 열어보려 혼자 애를 쓰고 있자니 옆자리 초등학생이 손짓으로 앞 칸으로 가라고 해서 아슬아슬하게 마지막으로 아부라덴역에 내릴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내리고 보니 고풍스러움과 현대적 시설의 부자연스러움이 공존하는 사부로마루 증류소가 바로 역 앞에 있었다. 투어에 참가한 외국인은 나 혼자였고 당연히 일본어로 증류소 투어가 이루어졌다. 야마자키나 요이치 증류소에서도 경험한 적이 있어 당연히 외국어 가이드의 호사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위스키 제조 과정은 잘 알고 있기에 일본어로 진행되는 투어도 그럭저럭 잘 따라갔지만, 안내하는 직원이 자꾸 내게 질문을 하는 통에 미소와 함께 진땀을 조금 흘렸다.
▎토야마 특유의 종 모양을 형상화한 사부로마루 증류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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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는 과거 ‘선샤인’이라는 저렴한 하이볼용 위스키를 만들어왔는데, 최근에는 부가가치를 높이고자 주넨묘(十年明) 위스키를 비롯한 다양한 제품군으로 확대하고 있다. 투어 이후에는 일본 각지에서 온 사람들과 즐겁게 다양한 위스키를 시음했다. 흔히 일본 위스키는 야마자키나 요이치 같은 것만 떠올리는데, 질감과 향, 피니시까지 꽤 완성도가 높은 옅은 밀짚 색의 사부로마루 위스키도 그에 못지않게 부드럽고 가벼운 맛과 향을 잘 전해주었다. 내가 무척 좋아하는 버번캐스크 숙성 위스키로, 첫 느낌은 가볍지만 바닐라가 느껴지는 녹진한 맛이었다. 어차피 열차 시간도 넉넉해서 이곳에서 점심을 먹기로 하고 내게 질문을 많이 던진 그 직원에게 짧은 일본어로 점심 예약이 가능한지를 물었더니 흔쾌히 예약을 해주었다. 깜짝 놀랄 정도로 담백하지만 진한 맛의 도야마 쇠고기로 만든 로스트 비프 덮밥과 700엔짜리 위스키 한 잔을 곁들이니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재미있는 것은 일본 사케 잔으로 쓰이는 됫박처럼 생긴 마스(升)를 디저트 그릇으로 썼다는 점이다. 고정관념을 깨고 과감하게 티라미수 그릇으로 사용했는데 보기에도 좋고 실용적인 데다 맛도 좋아 이날 점심 식사는 그동안 내가 들른 증류소 안의 식사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들 만했다. 시음주 몇 잔과 반주 한 잔으로 조금은 알딸딸해진 발걸음으로 이제는 익숙해진 아부라덴역으로 걸어갔고, 다카오카로 돌아가는 두 칸짜리 로컬선에서는 흐뭇한 기분으로 그날 밤 갈 바를 찾고 있었다. 물론 불심검문에 대비한 아부라덴 왕복표는 손에 꼭 쥐고 있었다.
여행의 대미를 장식한 알렘빅 증류소
▎아침 산책 중 가나자와에서 나고 자란 타카마네 박사의 생가를 만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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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쿠리쿠 여행은 다시 이시카와현에서 마무리하기로 했다. 이시카와는 호쿠리쿠 지방에서도 가장 풍요로운 지방으로, 과거 카가(加賀)로 불린 주요 번국 중 하나이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침몰한 항공모함 카가도 이 지명에서 비롯되었다. 과거 일본은 메이지유신으로 번을 폐하고 프랑스식 현을 설치한 폐번치현(廢藩置縣) 정책을 실시했는데, 실제로도 일본은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전까지는 적극적으로 프랑스를 배우려고 애썼다. 하지만 이 전쟁 후 프로이센이 승리하는 것을 보고 군제를 프로이센 식으로 바꾸게 되었다. 이렇게 당시 일본 지도자들이 상황에 따라 기민하게 의사결정을 하고 국제 정세의 시류를 잘 탄 것을 보니, 그 당시 조선의 위정자들이 만약 이랬더라면 하는 아쉬움과 씁쓸함도 같이 느껴졌다.마지막으로 가나자와에서 유일한 진 증류소를 방문했다. 가나자와 특유의 허브인 쿠로모지(조장나무)를 넣고 증류하여 강하지만 거북하지 않은 독특한 풍미의 향기로운 크래프트 진을 만들어낸 알렘빅 증류소(Alembig Gin Distillery)였다. 런던의 이스트런던 진과는 조금 다른 동양적 냄새가 나는 임팩트 있는 빨간 대문이 돋보이는, 아주 작지만 매력적인 진 디스틸러리였다. 여러 번의 시도를 거쳐 여덟 번째 레시피로 드디어 완성하게 된 진에 하치방(八番), 즉 ‘8번’이라는 이름을 붙여 출시했다. 제조부터 판매까지 혼자서 운영하는 작은 증류소라 적극적으로 마케팅을 하지 못했지만, 특유의 강렬한 풍미와 균형 잡힌 맛으로 올해 런던 IWSC 진 부문 대상을 수상하며 짧은 역사에도 벌써 가나자와현을 대표하는 특산물이 되었다. 아쉽게도 한국에서는 높은 주세 때문에 수입이 불가능해 가나자와에 가서 맛볼 수밖에 없다. 사심 없이 이야기하자면 그냥 마셔도 좋고, 다양한 부재료와 잘 어우러져 칵테일로도 정말 맛있는 진이다. 맛있는 진의 비결을 물어보니 바로 옆집인 유서 깊은 야마토 간장과 우물을 공유하여 맛있는 물을 같이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증류소의 대표인 나의 처남 나카가와 토시히코가 말해주었다.하루빨리 인천-고마츠 직항편이 복항되기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오늘 처남에게서 내년부터는 인천-고마츠 항공편이 다시 열린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이 하치방 진 한 잔으로 희미한 가나자와의 간장 냄새를 더듬어 찾아보는 것도 오늘 오후 재미있는 도전이 될 것 같다.
※ 박병진 - 1991년 IBM 신입사원으로 경력을 시작해 IBM, SAP, SK 등 글로벌기업의 임원으로서 지난 30여 년 동안 대한민국 기업들의 경쟁력 향상에 기여해왔다. 2022년부터 딥러닝 기반의 무인 교통단속장비를 생산하는 (주)토페스의 CEO로 부임해 더욱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다. 그의 위스키 사랑은 10여 년 전부터 시작됐다. 각종 증류주의 매력에 빠져 세계 각국의 증류소를 다니고 있으며, 2016년부터는 ‘Salon de PJ’라는 위스키 클래스로 기업체, 대학교, 단체 등에서 많은 사람에게 증류주의 매력을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