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스키와 관련된 미국 역사를 공부하며 역사적인 도시들을 도장 깨기 하듯 떠난 미국 여행. 첫 번째 여행지는 위스키 세계의 또 다른 혁신가 조지 워싱턴의 고향, 마운트버넌이다.
▎마운트버넌 저택 본관의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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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역사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대부분 마운트버넌에 대해 들어봤을 것이다. 조지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의 임기를 무사히 마치고 왕이 되어주기를 간청하는 많은 사람의 열망을 뒤로하고, 고향인 마운트버넌으로 돌아가 생을 마무리했다는 그곳이다.북한 평양에 가면 모든 외국인이 반드시 참배를 해야 하는 곳이 몇 군데 있다. 북한 혁명사적지도국에서 직접 관장하여 성역화한, 북한 김일성의 출생지 만경대가 그중 하나이다. 한국인이라면 혹여 평양에 가게 되더라도 이곳이나 혁명렬사릉은 피하기 바란다. 아마도 실정법에 저촉되어 귀국 후에 당국의 조사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런데 만경대만큼은 아니더라도 왕이 없는 미국에서 왕을 대신할 초대 대통령을 기리는 마운트버넌도 충분히 아름답게 잘 꾸며져 있다. 하지만 그 행간에서 느낄 수 있는 차이는 양쪽의 체제 차이만큼이나 크고 재미있다. 나도 마운트버넌에서는 포토맥강을 따라 이어지는 광대한 구릉을 올라 그 강 아래를 내려다보며 아무 설명 없이도 이곳에서 느꼈을 조지 워싱턴의 고민과 자부심을 흠뻑 느낄 수 있었다. 만경대는 안 가봤지만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든다는 윤색된 영웅 스토리에 그다지 감동하지는 않을 듯하다.
마운트버넌을 향한 여정
▎마운트버넌에서는 여전히 호밀을 주원료로 만든 조지 워싱턴 위스키를 판매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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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혼자서 미국 여행을 꽤 길게 다녀왔다. 겸사겸사 위스키에 관련된 자료 조사도 했다. 위스키와 관련된 미국 역사를 공부하다 보니 여행 경로와 목적지를 정할 때 몇 가지 안을 두고 고민이 깊어졌다. 아무래도 미국독립혁명과 남북전쟁의 역사를 떼 놓고선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독립혁명과 남북전쟁을 테마로 정했고, 이와 관련된 루트를 따라 뉴욕에서 출발하여 미국 동남부의 역사적인 도시들을 도장 깨기 하듯 하나하나 거쳐 내려오기로 했다. 그중 첫걸음이 닿은 곳이 바로 마운트버넌이었다. 나는 당시 조지 워싱턴이 이곳에서 미국 최대의 위스키 증류소를 운영했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다른 곳은 몰라도 마운틴버넌은 꼭 가보고 싶어서 렌터카를 빌려 이곳에 왔다. 그냥 소규모 증류소가 아니라 스코틀랜드에서 공부한 전문 마스터 디스틸러까지 두고 본격적으로 위스키를 생산해낸 조지 워싱턴은 위스키 세계의 또 다른 혁신가이다. 당시의 기술 수준으로는 어려웠을 텐데, 대량의 곡물을 효율적으로 빠르게 분쇄하도록 설계된 전용 제분소를 증류소 경내에 같이 세워, 일관된 공급망과 규모의 경제를 만들어낸 조지 워싱턴은 훌륭한 기업가이기도 했다. 사실 많은 미국인이 이곳을 찾지만 마운트버넌은 국가의 공식적인 기념관이나 박물관이 아니고, 민간 재단이 세운 상업 시설이다. 마치 놀이공원이나 민속촌처럼 잘 꾸며져 있고 볼거리가 많긴 하지만, 국가와는 무관하게 운영되기 때문에 입장료도 매우 비싸다. 기본 입장권이 28달러이고, 이 외에도 10~60달러에 이르는 각종 스페셜티 투어를 제공하는 것을 보면 역시 자본주의의 대국답다. 다만 기본 입장권에 포함된 프로그램의 내용이 매우 충실한 것을 보니 스페셜티 투어도 아마 제값을 하겠지만 나는 기본 프로그램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을씨년스럽고 추운 날씨에 마운트버넌 언덕에서 내려다본 포토맥강의 풍광은 조금 쓸쓸했지만, 재선 후 마운트버넌으로 돌아온 조지 워싱턴의 자부심만큼은 오롯이 느낄 수 있었다. 한 나라를 만들었지만 왕이 되지 않고 물러날 때를 알고 행동한 멋진 남자, 지금도 마운트버넌 한쪽 언덕에 자리한 그의 자그마한 묘는 그보다 수십, 수백 배 거대한 이집트 피라미드나 중국 왕릉보다 더 빛나고 있다. 그의 사후에 미영전쟁으로 불타버린 국회의사당인 캐피톨힐을 새로 건축하면서 의사당 지하에 조지 워싱턴의 묘를 만들었지만, 그의 유해를 옮기는 데 이견이 있는 사람도 많아 결국 마운트버넌에 그대로 남게 되었다.
시대의 페미니스트, 조지 워싱턴
▎증류소 바로 옆에 자리한 제분소. 대량의 곡물을 효율적으로 빠르게 분쇄하도록 설계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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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워싱턴은 시대를 앞서간 페미니스트였다. 미국의 1달러 지폐에 등장한 첫 번째 여성은 조지 워싱턴의 부인 마사 워싱턴이다. 그 후로도 현재까지 여성으로서 미국 지폐에 나온 사람은 없다. 재력가인 미망인과 결혼한 덕에 조지 워싱턴은 여러모로 부인 덕을 많이 보았고, 조지 워싱턴은 이 결혼으로 인해 트럼프 취임 이전까지는 미국 역대 대통령 중 가장 큰 갑부였다. 하지만 조지 워싱턴도 나름대로 부자였으니 단순히 재산 증식이나 사교계 인맥을 위한 결혼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식이 없었던 조지 워싱턴은 의붓 자녀들을 사랑하여 결혼으로 취득한 마사의 재산은 온전히 의붓 손자들에게 증여하도록 배려해주었다. 이렇게 보면 미국 최초의 진정한 페미니스트는 조지 워싱턴이 아닐까? 물론 마사 또한 늘 조지 워싱턴의 전장에서 아낌없는 헌신과 지원을 해주었고, 동시에 미국 사교계에서도 조지 워싱턴을 위해 많은 일을 했으니 그야말로 환상의 커플이라 할 수 있다.
클린턴과 힐러리처럼 쇼윈도부부가 아니라, 이들은 서로 깊이 사랑하며 함께 많은 일을 해냈으니 정말 대단한 커플이다. 흔히 미국에서 팁으로 사용되는 1달러 지폐는 조지 워싱턴의 얼굴이 있기에 발매 당시엔 비교적 고액권이었다. 지금은 화폐가치가 하락해 그 위상이 예전만 못해서 이걸로는 팁을 주기조차 쉽지 않다. 한 나라의 지폐가 사실 이 정도 가치밖에 안 되는 나라는 거의 없어서, 미국에서도 이를 대체하고자 꽤 오래전부터 1달러 동전을 발매했다. 보통 화폐가치가 하락해 지폐가 동전으로 대체되면, 그 지폐를 사용하지 않도록 결정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상징적인 조지 워싱턴의 1달러 지폐를 없앨 수 없어 동전과 병용하다 보니 1달러 동전의 유통은 아직도 지지부진하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기차표를 자판기에서 현금으로 구입한 적이 있는데, 거스름돈으로 1달러 동전이 몇 개 나와 기념으로 잘 간직하고 있다. 하긴 요즘에는 자판기에도 대부분 신용카드를 사용하니, 현금을 쓸 수 있는 자판기는 시골에서나 어쩌다 볼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마운트버넌 저택에서 4마일쯤 떨어진 곳에 자리한 위스키 증류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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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키 제조업자가 된 조지 워싱턴
▎마운트버넌 한쪽 언덕에 자리한 조지 워싱턴의 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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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워싱턴의 위스키를 이야기하자면 당시의 위스키 반란(Whiskey Rebellion)을 빼놓을 수 없다. 연방과 각 주정부가 독립전쟁으로 진 빚을 갚기 위해 채권을 발행했지만, 결국에는 증세를 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정부나 마찬가지겠지만, 손쉽게 세금을 걷을 수 있는 술은 항상 과세 대상에서 우선순위에 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각 주정부의 부채를 갚아주면서 연방정부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한, 대표적인 연방주의자 알렉산더 해밀턴 재무장관의 의도가 숨어 있었다. 대통령도 아니면서 10달러 지폐에 나오는 사람이 바로 해밀턴이다. 그래서 조지 워싱턴의 오른팔인 CFO로서도,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주인공으로도 유명한 재무장관 해밀턴은 중도파인 존 애덤스 부통령, 공화주의자인 제퍼슨 국무장관과 대립하여 위스키 과세를 이끌어냈다. 이를 통해 미국 초기의 연방정부와 국가 통합이라는 어젠다를 성취하고 국가의 과세 능력을 강화했지만, 이후 연방정부의 역할과 자유, 권위의 균형에 대한 정치적 담론은 양 진영 모두에게 큰 숙제가 되어버렸다. 또 위스키 반란의 여파로 소규모 증류업자들이 도태되고 기계화·대형화의 길로 가는 와중에 그 반란을 진압하고 대통령에서 물러난 조지 워싱턴이 당대의 가장 큰 미국 위스키 제조업자가 된 것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지금도 마운트버넌에서는 조지 워싱턴 위스키를 판매한다.
비싼 입장권을 사 들고 마운트버넌을 돌아보았는데, 아무리 찾아도 위스키 증류소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안내소에 물어보니 겨울 시즌에는 증류소를 개방하지 않으며, 위치도 이곳 마운트버넌 저택에 있는 것이 아니라 4마일쯤 떨어진 인근에 있다고 했다. 이걸 보러왔는데 볼 수 없게 되어 실망이라고 하니, 사람 좋게 생긴 안내 직원은 일단 거기 가보면 다른 직원이 있을 테니 가서 부탁해보라고 일러주었다. 그래서 바로 버지니아 235번 도로를 타고 증류소로 가보니 과연 당시의 최첨단이라는 거대한 제분소가 증류소 바로 옆에 있었고 그 사이엔 개울물이 흐르고 있었다. 당시에 최첨단 제분소란 것은 사실 초미세 밀가루를 만들 수 있는 정교한 프랑스산 맷돌과 계곡의 물레방아가 전부였다. 현대적인 동력원이 없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정교한 프랑스산 맷돌은 레버를 사용해 맷돌의 간격을 반자동으로 조절하고 이를 통해 입체적으로 곡물을 미세하게 갈아낼 수 있는 혁신적인 도구였다. 조지 워싱턴이 이를 활용해 물레방아를 사용한 제분 자동화 시스템을 갖춘 것은 1791년인데, 자석과 전기장의 관계를 알아낸 패러데이가 태어난 해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때는 전기를 사용하는 것은 언감생심이었고, 동력원으로는 물레방아 정도밖에 사용할 수 없었다. 벤저민 프랭클린이 연을 날려 번개가 전기인지를 확인하던 때가 바로 이 무렵이었다. 아무튼 물레방아도 계절마다 강수량의 변화가 컸기에, 결국 조지 워싱턴은 이를 극복하고자 개울 상류에 연못을 크게 파고 배관을 갖추어 안정적인 동력원을 확보했다. 언제나 당대의 기술 수준에 맞추어 최대한 합리적인 프로세스를 만들고 정확한 실행을 담보하는 것은 시대와 무관하게 성공하는 기업가들의 몫이다. 이렇게 자동화 시스템으로 생산한 조지 워싱턴의 밀가루는 최하급품보다 4~5배 비싼 가격으로 팔렸다. 지금도 마운트버넌 기념품숍에서는 이 밀가루를 판매하고 있으니 관심 있다면 한 봉지 사서 맛을 보아도 좋겠다. 조지 워싱턴의 밀가루로 만든 빵은 분명히 미국인의 호감을 살 것이라 판단한 현대의 마운트버넌도 조지 워싱턴의 기업가정신을 이어받은 듯하다. 이렇게 밀가루를 만들던 물레방앗간은 단시간에 기업화되었고, 곧이어 조지 워싱턴의 퇴임 후 호밀을 빻고 라이 위스키 생산으로까지 확장되어 수직 계열화를 완성했다. 이것이 지금 부활한 조지 워싱턴 위스키이다. 제분소와 증류소 주위를 한참을 돌아보다, 우연히 직원을 만나 증류소 안으로 들어가보고 싶다고 부탁했으나 밖에서 보는 것만 허락해 한참이나 이곳저곳 자그마한 틈새로 내부를 들여다보다가 아쉬움을 안고 물러났다.
▎마운트버넌 본관에 있는 다이닝 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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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아직 조지 워싱턴 위스키를 마셔보지 못했다. 증류소 투어를 하며 시음해보려고 했는데 4월부터 증류소를 개방하니 그때 다시 오라고 한다. 어쩔 수 없이 마운트버넌의 기념품숍에 들렀다. 그곳에서는 드디어 조지 워싱턴 위스키를 파는데 가격이 매우 후덜덜하다. 5년 숙성한 라이 위스키 하프 보틀이 225달러라서 오리지널 병 사이즈라면 450달러인 셈이다. 그 가격의 상당 부분은 아마도 애국심으로 채웠을 텐데, 아쉽게도 나는 미국에 대한 애국심은 아주 많이 부족하다. 오크통 숙성을 거치지 않은 뉴 스피릿 원액도 하프 보틀에 98달러이니, 미국인도 대부분 여기에서 애국심이 다 무너진다. 그래서 거의 팔리지 않는데도 가격은 내리지 않는다. 그들의 마지막 자존심이고, 어차피 사야 할 사람은 살 것이기에 가격으로는 승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래도 기회가 된다면 조지 워싱턴 라이 위스키 5년 한 잔쯤은 마셔보고 싶다. 그 비싼 라이 위스키 한 잔에 조지 워싱턴의 고뇌를 한 방울 떨어트려서 원 샷!
▎조지 워싱턴이 라이 위스키를 생산했던 증류기가 전시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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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병진 - 30여 년간 IBM, SAP, SK 등 국내 및 외국계 기업, 대기업과 중견기업을 망라하여 임원 및 CEO로서 대한민국 기업들의 경쟁력 향상에 기여해왔다. 최근에는 포브스를 포함한 각종 매체에 칼럼을 연재하는 위스키 칼럼니스트이자 동아일보사의 최고위과정인 ‘광화문살롱’의 주임 교수로서 위스키를 주제로 MZ세대를 포함한 다양한 이해관계자와의 소통의 지혜를 나누고 있다. 더불어, 요리서적 전문 출판사인 ‘북스 레브쿠헨’의 대표로서 이 시대의 대표적인 N잡러이다.